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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 옻칠 된 가죽 갑옷에 이어 ‘옻칠 된 마갑(馬甲)’출토

Gijuzzang Dream 2011. 11. 1. 22:30

 

 

 

 

 

 

 

 공주 공산

 옻칠 된 가죽 갑옷에 이어

 ‘옻칠 된 마갑(馬甲)’출토 

 

 

 

 

 

                                                  

<발굴 현장 전경>                

 

공주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 중인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성안마을 유적

공산성 내 가장 넓은 평탄대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마을이 조성되면서

아직까지 이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성안마을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8년부터 연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2011년은 제4차 발굴조사에 해당된다.

 

공주대학교박물관은 발굴조사 결과

진 천도 직후에 축조한 백제 특유의 굴립주(벽주식) 건물지를 비롯한 웅진~사비기 건물지,

저수지, 성토대지와 축대 등 백제 왕궁 관련 부속시설과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등을 확인했다.

백제시대에 계획적으로 대지를 조성하고 축조한 각종의 건물지와 주변의 부속시설,

그리고 함께 출토된 다량의 무기 및 중국제 자기 등이 이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출토 유물>

 

굴립주(벽주식) 건물지는 공산성 추정 왕궁지 및 정지산 유적 등에서 확인된 바 있으며,

웅진~사비기 건물지는 동-서방향의 축대를 기준으로 남북방향의 배수로가 시설되는 등

계획적인 대지조성 작업을 한 후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적이 계곡부를 포함한 저지대에 조성된 점을 감안할 때,

유적 조성 당시부터 지반침하 방지를 위한 대규모 정지작업 및 성토작업이

대규모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웅진~사비기 건물지 상층에서는 대단위의 화재층이 확인되었으며,

그 위층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특히 화재층에서는 상당수의 화살촉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백제 멸망기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

웅진 천도 직후부터 백제 멸망기까지 건물지가 동일 유적 내에서 확인됨에 따라

백제 문화발전의 면모를 자세히 살필 수 있는 학술적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대단위 화재층 및 화살촉 등을 통해 멸망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성안마을에 대한 발굴조사는 전체 범위의 약 1/4 가량만 진행된 상태이지만

다량의 유구가 매우 밀집된 형태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추후 나머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될 경우

대단위 왕궁 관련 시설이 확인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이 허가하고, 공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고 있는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성안 마을 유적(4차) 내에서 백제 시대 명문(銘文)이 있는 옷칠 된 가죽 갑옷이 출토됐다.

 

공주 공산성 제4차 발굴조사 지역 전경


 

성안 마을 유적에 대한 4차 발굴조사에서는

웅진 천도 직후에 계획적으로 대지를 조성하고 축조한 여러 종류의 건물지와 주변의 부속시설,

그리고 함께 출토된 다량의 무기와 중국제 자기 등이 확인된 바 있다.

 

공주대학교 박물관은 최근 유적 내에 있는 저수시설의 마무리 조사과정에서

645년을 가리키는 명문 「貞觀 十九年銘」이 있는 옷칠 된 가죽 갑옷(찰갑: 비늘 모양) 1령을 확인했다.

 

옷칠 된 가죽 갑옷은 저수시설 바닥에 인접한 곳에서 출토된 갑옷의 일정 부위에는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大口典’ ‘○○緖’ ‘李○銀○’ 등 붉은색의 글씨가 쓰여 있으며,

특히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이라는 기록을 통하여

645년(당 태종 정관 19)이라는 정확한 연대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이밖에 ‘王武監’ ‘大口典’ ‘〇〇緖’ ‘李〇銀〇’ 등의 명문이 확인되었다.

 

 

< 공주 공산성 갑옷 (명문) >

 

 

 < 공주 공산성 갑옷 출토 모습 >

 

< 공주 공산성 갑옷 (찰갑) >

 

 

그동안 고대사회의 갑옷은

쇠로 만든 판갑(板甲)이 종종 출토되어 원형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찰갑(札甲)은 부속 형태로만 나와 구체적인 원형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백제시대 찰갑은 골제(骨製)와 철제(鐵製)로 된 편(片)만 일부 확인되었을 뿐

전체적인 정황은 파악할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에 공산성 백제 왕궁 부속시설 내 저수시설에서 발굴조사된 백제시대 옷칠된 가죽갑옷은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확인된 가죽갑옷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형태를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이다.

특히 갑옷의 제작 및 사용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645년(정관 19년)이라는 기록은

함께 출토된 화살촉과 더불어 백제멸망기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한국고대사 인식에 매우 중요한 지표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백제의 공예기술은 이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를 통하여 입증된 바 있다.

이번에 조사된 옷칠 가죽갑옷은 백제금동대향로에 비견될 수 있는 것으로,

백제 칠기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자료로 판단된다.

즉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백제의 공예수준이 최고에 달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성안 마을 유적(4차)의 저수시설 내에서

백제 시대 명문(銘文)이 있는 옻칠 된 가죽 갑옷의 출토에 이어 ‘옻칠 된 마갑(馬甲)’이 또다시 출토됐다.

 

공주대학교 박물관은 2011년 3월 말부터 유적내의 저수시설에서 645년을 가리키는

명문(貞觀 十九年銘)이 있는 정교하고 고급스럽게 옻칠된 가죽 갑옷(찰갑: 비늘갑옷) 1령을 조사하여

발표한 바 있다(2011.10.12.). 그 이후 갑옷의 안전한 이전과 보존처리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지난 10월 19일부터 22일까지 4일간 현장수습을 진행했다.

 

이후 조사단은 갑옷 아래의 퇴적층에 대한 조사를 계속 진행한 결과

명문 있는 갑옷과 같은 방법으로 가죽에 옻칠하여 만든 마갑을 비롯하여

대도(大刀), 장식도(裝飾刀), 그리고 철제의 찰갑편 등도 발굴했다.

 

갑옷과 마갑 등의 유물이 발굴된 저수시설은

현재의 지표면보다 10m의 아래의 불안정한 지반 밑에 있어 붕괴 위험이 있는 현장 유지의 어려움,

유물의 훼손 방지 등을 고려하여 수습한 후에 현장조사를 마무리했고,

갑옷과 마갑은 앞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보존·복원처리가 진행될 예정이다.


발굴제도과 김동대 042-481-4957
                배성규 042-481-4958

 

 

 

 

 

 

< 마갑출토 전경 >

 

 

공주대학교 박물관은 2011년 3월말부터 공주시의 의뢰로

공산성(사적 제12호, 1936.1.21.) 내 성안마을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왕궁관련 부속 건물지를 확인하였고, 유적내의 저수시설에서 645년을 가리키는 명문(貞觀 十九年銘)이 있는 정교하게 고급스럽게 옻칠된 가죽 갑옷(찰갑: 비늘모양 갑옷) 1령을 조사하여 발표한 바 있다(2011.10.12.).

그리고 갑옷의 안전한 이전과 보존처리를 위해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2011년 10월 19일부터 22일까지 4일에 걸쳐 현장수습을 진행하였다.

 

이후 조사단은 갑옷 아래의 퇴적층에 대한 조사를 계속 진행한 결과

명문있는 갑옷과 같은 방법으로 가죽에 옻칠하여 만든 마갑을 비롯하여

대도(大刀), 장식도(裝飾刀), 그리고 철제의 찰갑편 등도 발굴되었다.

 

말이 착용하였던 옻칠된 가죽제 마갑은 백제지역에서 처음 출토된 것이다.

길이 12~18㎝ 내외의 옻칠된 찰갑판이 너비 2m내외의 범위에 흩어져 있고,

말 등을 덮었던 것으로 보이는 찰갑판이 2줄로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것은

상하로 4겹이 겹쳐진 상태로 남아 있다.

 

마갑의 상단부는 나중의 퇴적 과정에서 많은 훼손이 있지만

배열된 마갑은 장판과 같이 나란한 모습으로 확인된다.

이 마갑은 먼저 발굴된 두텁게 옻칠한 가죽 찰갑(비늘갑옷)보다 규모가 큰 찰갑 판이지만

옻칠은 훨씬 얇게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마갑 외에 말의 제어구인 재갈이나 등자, 그리고 행엽 등의 장신구는 전혀 없는데,

이 마갑도 갑옷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인 폐기로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장식도 세부>

 

함께 발굴된 대도와 장식도는 갑옷과 마갑의 중간층에 남겨진 것으로,

이 가운데 대도는 장식이 없는 것이고,

장식도는 길이 55㎝의 크기로 은장식과 함께 특히 손잡이 부분에 금장이 이루어져 있다.

 

철제 찰갑은 덩어리로 수습되었으나

철제 갑옷보다는 투구로 판단될 수 있어 백제시대의 갑주의 형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가죽에 옻칠하여 찰갑으로 제작한 갑옷과 마갑은 위·아래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잔존되어 있으면서,

칼을 비롯하여 투구로 판단되는 철제품이 중간층에 남아 있어 일정한 목적에 의해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새로 발굴된 마갑도 백제시대의 것으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삼국시대 고구려 개마총(鎧馬塚)의 벽화에 갑옷을 입힌 말이 있으나

실물의 마갑은 신라나 가야지역에 철제의 실물자료가 있을 뿐이다.

특히 옻칠한 가죽 마갑 자료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갑옷과 마갑 등의 유물이 발굴된 저수시설은

현재의 지표면보다 10m의 아래의 불안정한 지반 밑에 있어 붕괴의 위험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갑옷의 현장공개와 수습이후에 출토된 마갑은 붕괴 위험이 있는 현장 유지의 어려움,

유물의 훼손 방지 등을 고려하여 수습한 후에 현장조사를 마무리하였고,

갑옷과 마갑은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보존 · 복원처리가 진행될 예정이다.

 

공산성 백제 왕궁 부속시설 내 저수시설에서 발굴 조사된 백제시대 옻칠된 가죽갑옷은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확인된 가죽제 갑옷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마갑(馬甲)의 경우 백제지역에서는 처음 출토된 것이다.

따라서 명문이 확인된 갑옷과 마갑, 대도, 장식도, 화살촉 등의 유물은 백제멸망기의 정황 뿐 만 아니라,

한국고대사 인식에 매우 중요한 지표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2011-11-01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