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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Gijuzzang Dream 2011. 8. 22. 22:15

 

 

 

 

 

 

 

 


 

 

 

 

조선왕실 문화의 보고, 외규장각

 

조선의 22대 왕 정조(正祖)는 1776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해에 규장각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하였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의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출판과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한 기구이다.

이후 1782년에 강화도 행궁(行宮)에 외규장각을 완공하여 왕실의 중요한 자료들을 옮겨서 보다 체계적이며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규장각에 보관하던 임금이 보던 어람용 의궤가 강화도로 옮겨진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띄게 되어 이곳을 ‘규장외각(奎章外閣)’, 또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의 동쪽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외규장각도 <국립중앙도서관소장>

 

외규장각에는 어보(御寶), 교명(敎命), 어책(御冊), 어필(御筆), 의궤, 지도 등 왕실 관련 자료들이 집중적으로 보관되게 되었으며, 철종 연간에 파악된 외규장각 소장 도서는 약 6천권 정도에 이르렀다.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莊烈王后尊崇都監儀軌),

1686(숙종 12), 1책, 46.1×34.9cm, 어람용.

이 의궤는 원 표지를 유지하고 있어서 어람본 표지의 재료와 장정 방법을 알 수 있다. 초록색 구름무늬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邊鐵)을 대고 5개의 박을못[朴乙釘]으로 고정시키고, 박을 못 밑에 둥근 국화무늬판[菊花瓣]을 대어 제본을 했다. 변철의 중앙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의궤,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

 

의궤란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란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그림이 실리기도 하였다. 의궤의 제작 배경에는 의식이나 행사의 모범적인 전례(典例)를 만들어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있는 한편 사업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후에 참고하여 시행착오 없이 원활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뜻이 있었다.

이처럼 의궤는 철저한 기록정신의 산물로서 예(禮)를 숭상하는 유교문화권의 핵심 요소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국가의 통치 철학 및 운영체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의궤는 조선의 건국 초기인 15세기부터 만들어졌으나 현재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만 남아 있다.

17세기 이후 의궤는 꾸준히 제작되었고, 18세기에 들어오면 그 종류와 숫자가 더욱 늘어난다.

의궤는 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御覽用)과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으로 구분되어 5~9부 내외가 제작되었다.

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 1부외에 나머지 분상용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관련 부서와 봉화 태백산(奉化 太白山), 무주 적상산(茂朱 赤裳山), 평창 오대산(平昌 五臺山), 강화도 정족산(江華島 鼎足山) 등의 사고에 보내졌다.

 

- 어람용.

현빈묘소도감의궤 하(賢嬪墓所都監儀軌 下), 1751(영조 27), 1책, 필사본, 49.0×35.7cm,

국왕이 열람하는 어람용은

재료, 필사, 장정의 수준이 월등하다.

 - 분상용.

현빈묘소도감의궤 하 (賢嬪墓所都監儀軌 下),    1751(영조 27), 1책, 필사본, 46.1×34.3cm,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

어람용 의궤에 비해 필사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왕이 보던 책, 외규장각 의궤

 

통상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御覽用)은 1부를 제작하는데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는 어람용이라는데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 어람용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1725(영조 즉위), 2책 중 1책, 필사본, 48.2×34.9cm

 

 

- 분상용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1725(영조 즉위), 1책, 필사본, 46.3×33.6cm

이 의궤는 예조, 춘추관, 강화부, 의정부 분상용으로 총 5건을 제작하였다. 동일한 내용의 반차도 장면을 비교하면 어람용과 분상용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어람용은 붉은 인찰선(印札線)을 긋고 붓으로 일일이 형태를 그려서 다양한 안료로 표현하였으나, 분상용은 도장을 찍어 반복되는 인물을 배치하고 큰 색상의 변화 없이 인물과 사물을 칠하여 어람용에 비해서 그 완성도가 현격히 떨어진다.

 

 

 

어람용을 분상용과 비교해 보면 필사, 재료, 장정 등에서 그 수준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이는 어람본의 경우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분상용은 초주지보다 질이 낮은 저주지(楮注紙)를 사용하였다. 이렇듯 고급 종이에 해서체로 정성껏 글을 쓰고 천연 안료로 곱게 그림을 그린 후 고급 비단과 놋쇠물림으로 장정한 외규장각 의궤는 당대 최고의 도서 수준과 예술적 품격을 보여 준다.

특히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국내외에는 없는 유일본이 상당수 포함되어 그 중요성이 더욱 크다.

 

   

의식의 진행과 의궤의 제작

 

조선시대에는 거행했던 국가 의식과 행사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의궤를 제작하였다.

의궤의 종류는 왕의 일생과 관련된 것, 각종 제례와 의식과 관련된 것, 편찬 사업이나 건축과 관련된 것 등이 있다.

 

왕실의 각종 의식 및 행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우선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다.

도감에는 일을 총괄하는 도청(都廳)이 있고, 도청 아래에는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별공작(別工作), 수리소(修理所) 등 업무를 분담하는 작은 조직들로 구성되었다. 도감은 여러 관청들의 관리들을 망라하여 조직하는데 임시로 설치하므로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하였으며, 부책임자급인 제조(提調) 3~4명은 판서급에서 맡았다.

 

의식이 완료되면 도감은 바로 해체되어 의궤청(儀軌廳)이라는 기구로 바뀌었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주관한 행사 전반을 정리하여 의궤를 작성하는 기구로, 행사 전반을 총괄한 도청 담당자들이 의궤청에 그대로 임명되는 것이 상례였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행사 중에 작성한 등록(謄錄), 행사 관련 문서들 및 반차도(班次圖)를 수집하여 의궤를 작성하였다.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이수미

 

 

 

 

 

 


 

 

 

조선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중앙집권체제로 운영된 왕조국가였다.

국왕의 공식적인 활동은 곧 통치로 연결되었다. 특히 국왕은 종묘제례와 같은 국가의 주요 제사, 종묘, 궁궐 등의 건축과 수리, 공신의 녹훈 등을 주도하며 왕권의 정통성과 위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외규장각 의궤 중 [종묘수리도감의궤], [친경의궤], [창덕궁수리도감의궤], [보사녹훈도감의궤] 등은 이러한 의식이나 행사가 추진된 배경과 시행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이다.

 

종묘수리도감의궤(宗廟修理都監儀軌),

1637(인조 15), 1책, 50.0×36.6㎝, 유일본

병자호란으로 훼손된 종묘를 보수하고 종묘의 신주(神主)를 수리하고 새로 만든 과정에 대한 의궤로, 1636년(인조 14) 12월 청나라 군대를 피해 신주를 강화도로 옮겨 묻었다가 훼손된 경위에서 이듬해 7월 6일 종묘와 신주의 보수를 마치기까지가 기록되었다. 목록 없이 바로 문서가 시작되어, 체재가 정형화되기 전인 17세기 초 의궤의 양식을 보여준다.

 

 

 

왕실과 국가의 상징, 종묘사직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지내는 제사였다.

종묘는 유교 사회에서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상징하였다.

사직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민본주의,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종묘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를 비롯한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나라의 사당으로, 본묘(本廟)인 정전(正殿)과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으로 구분된다. 종묘는 국왕의 신주(神主)가 계속해서 추가되었으므로 몇 차례 증축이 이루어졌고, 종묘에 모신 신주나 책보(冊寶)가 바뀌기도 했다. 양란 이후에는 전란으로 불탄 건물과 신주를 수리하거나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처럼 종묘의 건물이나 제도에 변화가 있을 때에는 종묘 관련 의궤를 제작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일년에 두 차례 올리는 종묘제례와 사직제례는 왕이 직접 참여하는 최고의 국가제사였다.

종묘제례를 올릴 때, 왕은 제사를 올리기 일주일 전부터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제사를 준비하였으며, 제사 당일에는 최고의 예복을 입고 왕을 상징하는 의장기와 의장물을 내세우고 조정의 문무백관과 함께 종묘로 행차하여 몸소 제사를 주관하였다.

 

 

백성을 위한 권농, 친경과 친잠

 

조선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나라였다. 따라서 왕실에서도 농사를 장려하기 위하여 국왕이 직접 밭을 갈고 왕비가 누에를 치는 친경(親耕), 친잠(親蠶)의식을 거행하였다.

친경이란 국왕이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백성들에게 농업을 권장하기 위해 선농단(先農壇)에 행차하여 제사를 지내고 직접 밭을 가는 의식이다.

친경과 친잠은 국왕과 왕비가 솔선하여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고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농업과 곡식의 신을 모신 선농단(先農壇)과 누에의 신을 모신 선잠단(先蠶壇)에 지내는 제사 역시 국가 제사로서 중요시되었다. 왕이 친경의식을 행할 때에는 궁궐 밖으로 행차하여 전농동에 있는 선농단에 제사를 지낸 후 적전(籍田)에 나아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았다.

 

왕이 친경할 때에는 왕세자는 물론 관료와 백성들 중에서도 일정한 수를 선발하여 함께 밭을 갈았다. 이러한 의식은 왕이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며 권농(勸農)함을 상징하였다.


친경의궤(親耕儀軌),

1739(영조 15), 1책, 47.3×34.5㎝
1739년(영조 15) 1월 28일, 영조가 거행한 친경 의식에 대한 의궤이다. 친경 의식에는 왕과 신하들은 물론 인근 고을에서 선발된 100명의 농민, 근교의 75세 이상 노인 40명 등 백성들이 함께 참여했다. 친경 행사장의 배치도인 관경대도(觀耕臺圖)에는 국왕을 비롯해 친경에 참가한 인원의 위치와 수, 각각 쟁기를 미는 횟수 등이 표시되어 있다.

친경이 끝난 후에는 축하 교서를 반포하고 참가자들에게 술을 내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국왕 통치의 중심 공간, 궁궐

궁궐은 왕을 정점으로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진 통치의 중심 공간이자 국가 최고의 관부(官府)였다.

궁궐은 국왕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 경영되었다. 왕이 임어(臨御)하는 공식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법궁(法宮)이라고 하고, 이어할 목적으로 지은 궁궐을 이궁(離宮)이라 하는데, 조선의 왕들은 목적에 따라 두 궁궐을 오가며 운영하였다.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창덕궁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東闕), 경희궁은 서궐(西闕)로 불리기도 했다.

 

전란이나 화재로 궁궐이 불탔을 때에는 수리도감이나 영건도감을 설치하여 궁궐을 수리하거나 새로 지었다. 이 때 공사 자재는 주로 사용하지 않는 궁궐의 전각을 헐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궁궐 영건은 재정적 부담이 큰 공역이었으므로 궁궐 전체를 완전히 새로 짓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

1647(인조 25), 1책, 45.6×34.4㎝

인조반정(1623년)으로 불타버린 창덕궁의 대조전 · 선정전 · 희정당 등 주요 전각을 다시 세운 과정에 대한 의궤이다. 궁궐 영건은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 사업이었으나, 인조는 광해군이 조성한 인경궁을 해체하여 그 건축 자재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창덕궁의 보수를 완료하였다.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1831(순조 31), 1책, 45.2×33.5㎝

화재로 절반가량 소실되었던 경희궁을 중건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서궐(西闕)은 경희궁의 별칭이다.

융복전도(隆福殿圖), 회상전도(會祥殿圖) 등 건물 도형(圖形)이 수록되어 있어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경희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회상전은 정면 7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에 용마루를 두지 않은 건물이었고, 융복전은 정면 6칸으로 왼쪽에 건물이 이어져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다.

  

 

유공자에 대한 치하, 공신녹훈

 

국왕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의 칭호와 함께 여러 특전을 내렸다. 이를 '공신녹훈(功臣錄勳)'이라 하는데, 개국이나 반정에 참여하거나 전란 시 전공(戰功)을 세운 경우, 반란이나 역모를 적발하거나 진압한 경우 등에 내려졌다. 조선시대에 내려진 공신호는 모두 28종류였다.

 

공신은 보통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3~4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이들에게는 등급에 따라 관작, 토지, 노비 등을 지급하고 자손들이 음직(蔭職)으로 등용될 기회를 주었으며, 초상화를 제작하여 명예가 길이 전해지도록 하였다. 공신에게는 공적과 상전의 내용을 증명하는 문서인 공신녹권과 교서가 발급되었다. 이들 정공신(正功臣) 외에 작은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가 내려졌다. 공신 관련 업무는 공신도감 혹은 녹훈도감이 담당하였다.

 

국왕은 공신녹훈 후 공신들과 함께 회맹단에 나아가 회맹제(會盟祭)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공신들은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과 자손 대대로 서로 친목할 것을 맹세하였다.

회맹제는 왕과 공신 간의 결속과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는 상징적 의식이었다.

 

보사녹훈도감의궤(保社錄勳都監儀軌),

1682(숙종 8), 1책, 51.2×32.0㎝, 유일본.

1680년(숙종 6) 역모 사건을 저지한 공신에 대한 녹훈(錄勳)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숙종은 총 6명의 공신을 3등급으로 나누어 녹훈하였다. 이 중 3등 공신이었던 정원로(鄭元老)는 이원성(李元成)이 올린 고변서 때문에 역모의 공모자로 몰려 죽고 공훈도 삭제되었다. 이원성의 올린 글에는 역모의 정황으로 제시한 조빈(趙彬)의 시조가 한글 세주(細註)로 적혀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유새롬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로서,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冊封), 존호(尊號), 각종 진연(進宴), 진찬(進饌) 등의 의식 예법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가례도감의궤]로 제목이 붙여진 책 모두가 왕이나 왕세자의 결혼식을 정리한 기록임을 볼 때,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가례는 곧 왕실의 혼인 의식, 그 중에서도 특히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을 뜻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1759년(영조 35)
정비인 정성왕후와 사별한 영조가 3년 상을 마친 1759년에 15세 된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을 기록한 의궤이다.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50면에 달하는 <친영반차도>가 실려 있는데 379필의 말과 1,29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왕실의 혼례식, 가례

 

 

왕실의 혼인 과정 중에서 첫 번째로 시행해야 하는 것이 규수를 선택하는 간택(揀擇)이었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결혼에 앞서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결혼의 적령기에 있는 전국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 단자’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실제 처녀 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경제적, 정치적 부담 등이 따랐기 때문에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왕실에서는 왕비를 간택할 때 세 차례의 심사 과정을 거치는데 대개 1차는 6~10명, 2차에 3명, 3차에서 최종 1명을 선택하였다. 삼간택에 뽑힌 규수는 비빈(妃嬪)의 대례복(大禮服)으로 왕비의 위용을 갖추고 별궁에 모셔졌다. 별궁은 예비 왕비가 미리 왕실의 법도를 배우는 공간이었으며 국왕이 친히 사가(私家)에 가는 부담을 덜어 주었다. 간택을 받아 별궁에서 왕실의 법도를 배운 규수는 왕실 혼인 의식의 기본이 되는 육례(六禮)에 따라 국왕과 혼례식을 치렀다.

 

 

혼례식의 절차

 

 

납채례(納采禮): 신부의 집에 청혼서 보내기.

                             간택된 규수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敎命文)과 기러기를 보내고

                             신부가 이를 받아 들이는 의식

②납징례(納徵禮): 혼인 성립의 징표로 예물(폐물)을 보내는 의식
③고기례(告期禮):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식
④책비례(冊妃禮): 왕비 또는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으로 별궁에서 행해졌다.
⑤친영례(親迎禮): 신부를 맞이해 오는 의식.

                             조선 후기에는 왕이 직접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하러 갔다.
⑥동뢰연(同牢宴): 혼인 후의 궁중 잔치. 신부를 대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을 주고 받는 의식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憲宗孝顯王后嘉禮都監儀軌), 1837년(헌종 3) 헌종(憲宗)이 효현왕후를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동뢰연도(同牢宴圖)에는 왕과 대궐로 들어온 왕비가 서로 절한 뒤 술과 음식을 나누는 동뢰연의 기물 배치도가 그려져 있다.

 

 

왕실의 즉위식, 책봉(冊封)

 

 

책봉은 왕세자, 왕세손, 왕세제 및 왕비와 세자빈을 임명하는 의식으로 책례(冊禮)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의 즉위는 대부분 선왕이 사망하여 장례가 진행되는 도중에 행해졌기 때문에 별도의 즉위식이나 책봉 의식이 없었다. 왕이 승하하면, 그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므로 대개 닷새 후에 빈전(殯殿)이 있는 궁궐의 정전(正殿) 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세자가 왕의 지위에 오른다.

그러나 세자빈을 왕비로 책봉하는 것은 보통 선왕의 3년상을 마친 후에 행하였다.

달리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왕세손비를 정하는 일은 경사스러운 분위기로 치르는 국가의 중대사였다.

 

왕세자 책봉식은 장차 왕위를 계승하게 될 후계자를 결정하는 행사로서 궁궐의 정전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조선시대 왕위 계승에 있어서 부자 상속이 아닐 경우도 꽤 있었는데 형제 간일 때에는 후계자를 왕세제(王世弟)라고 하였다.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례를 행할 때 왕실에서 제작한 어보(御寶), 어책(御冊), 교명(敎命) 등은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드러내는 상징물이었으며 이것은 나중에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셔 보관되었다.

 

조선시대 국왕은 왕비를 책봉할 때에는 교명과 책보(冊寶)를 내리고 세자 이하를 책봉할 때는 교명과 책인(冊印)을 내렸다.

교명은 임명하는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할 것을 훈유하는 글이다. 책보, 책인은 책문(冊文)과 인장인 보(寶)와 인(印)을 의미한다. 책문(冊文)은 일종의 임명장으로서 책봉받는 이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책문과 보인은 그 지위에 따라 사용한 재료가 다르다.


정조왕세손책례도감의궤(正祖王世孫冊禮都監儀軌), 1759년(영조 35)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후의 정조)을 왕세손으로 책봉한 과정을 담은 의궤로 흑칠궤(黑柒樻), 죽책(竹冊)의 그림과 재료 등이 기록되었다.

 

왕과 왕비는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죽책(竹冊)과 금이나 은, 옥으로 만든 인(印)을 사용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부터 황제와 황후는 금책과 금보를 사용하였다.

 

 

공덕을 기리며 올리는 존호(尊號)

 

 

존호는 대개 왕과 왕비를 각각 상왕(上王)이나 대비(大妃)로 존숭하거나, 기념이 될만한 날에 경사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렸다. 여러 차례에 걸쳐 올리는 경우도 많으며, 대개 생전에 올리지만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사후에도 많이 올렸다.

이와 달리 시호(諡號)는 죽은 이에게만 올리는 호칭으로 시호를 생전에 올리는 경우는 없다.

 

존호를 올릴 때 왕과 왕비가 살아 있을 때에는 옥보(玉寶)와 옥책(玉冊)을 함께 올리고,

승하 후에는 금보와 옥책을 올렸다. 그러나 이 원칙이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순원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純元王后加上尊號都監儀軌), 1841년(헌종 7)
헌종(憲宗)이 대왕대비인 순조비(純祖妃) 순원왕후(純元王后)에게 존호를 가상(加上)할 때의 의식 절차를 기록한 의궤로 이때 올린 옥보(玉寶)의 도설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이수미

 

 

 

 

 

 

 


 

 

 

조선시대 왕실 의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죽음과 관련된 의식이었다.

특히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서, 임종과 장례 준비, 무덤의 조성, 장례 행렬, 삼년상 동안의 제사, 삼년상 후의 부묘(祔廟) 등이 모두 엄숙하고 성대하면서도 절제된 예에 따라 치러졌다.

외규장각 의궤 총 297책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상장례(喪葬禮) 관련 의궤로 203책에 이른다.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莊烈王后國葬都監儀軌),

1688(숙종 14), 2책, 48.3×37.9㎝, 유일본(상)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의 장례에 관한 의궤로 상․하 2책 중 도청, 일방, 별공작의 업무가 기록된 상책만 남아 있다.

발인 반차도를 보면, 왕비의 재궁(梓宮)을 실은 대여(大轝)의 좌우에는 보삽(黼翣), 불삽(黻翣), 화삽(畵翣) 각 2명, 집탁호군 16명이 나누어 서고, 그 밖으로 좌우 각 6명이 장막을 쳐서 외인(外人)들이 볼 수 없게 하였다.

 

 

 

장례 준비 위원회, 삼도감(三都監)의 설치

 

 

왕실의 장례는 그 대상에 따라 명칭과 규모가 달랐다.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고 하였다.

왕의 장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왕이 승하한 당일로 장례 절차를 담당할 임시 관서인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등 삼도감(三都監)이 설치되었다.

대개 좌의정이 이를 총괄할 총호사로 임명되고 이하 담당관리가 차출되었다.

장례의 총괄과 국장 행렬은 국장도감이, 시신을 수습하여 빈소를 차리고 상복을 만드는 일은 빈전도감이, 장지에서 묘소를 만드는 일은 산릉도감이 담당하였다.

또 장례를 치른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을 담당하는 혼전도감이 별도로 설치되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빈전도감이 함께 업무를 담당하여 빈전혼전도감으로 불렸다.

 

 

 

효순현빈예장도감의궤(賢嬪禮葬都監儀軌),

1751(영조 27), 2책, 47.6×34.6㎝, 유일본(상)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빈인 현빈(賢嬪, 1715~1751) 조씨의 장례 절차에 관한 의궤이다. 현빈은 1727년 가례를 올렸으나 이듬해 효장세자가 요절하여 홀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재궁(梓宮)을 실은 대여의 뒤로는 배왕대장(陪往大將), 종사관 2명, 예장도감 일방 감조관 2명에 이어 곡(哭)을 담당하는 궁인(宮人) 14명이 너울을 쓰고 말을 타고 따라가는데, 곡궁인의 주위는 흰 베로 만든 장막으로 둘러막았다.

 

 

 

 의궤 속의 그림, 도설과 반차도


의궤 중에는 각종 도설과 반차도가 그려진 것이 있어서 문자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의식과

행사의 여러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도설은 행사에 쓰인 교명, 죽책, 옥책, 인장 등의 각종 의식구 제기, 악기, 석물 등의 기물, 행사 시 착용한 복식 등이 간략하게 그려진 것이다. 때로 이러한 기물 간의 배치 상태를 알 수 있는 도면이 그려진 경우도 있다. 이러한 도설은 기물의 용도, 형태, 제작방식 등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밖에 평면도와 정면도로 그려진 행사 건물의 모습과 행사의 장면을 그린 행사도가 있다.

 

반차도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의장물의 수, 위치 등을 정해 놓은 그림을 말한다.

반차도는 이동하는 행렬도 형식으로 그리거나, 일정 공간 내의 위치를 글자로만 표기한 형식으로도 그렸다. 반차도는 행사  거행 전에 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실제 행사 전에 반차도에 따라 몇 차례 예행연습을 하여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시행 착오를 줄이도록 하였다.

행사 후에는 그 내용이 의궤에 수록되었다.

발인 반차도를 통해 왕비의 국장 때에는 국왕과 달리 혼백함을 모신 혼백거와 재궁을 모신 대여의 좌우에 장막을 쳐서 외인들이 볼 수 없도록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종에서 입관까지, 빈전의 설치

 

 

왕이 임종할 때에는 세자와 대신을 불러 왕위를 넘겨준다는 마지막 유언을 하였는데 이를 고명(誥命)이라 하였다. 고명을 받은 신하는 왕의 유교(遺敎)를 작성하였다.

왕이 승하(昇遐)하면 머리를 동쪽으로 눕히고 왕의 입과 코 사이에 고운 햇솜을 얹어 왕의 죽음을 확인한 후 곡(哭)을 하였다. 죽음이 확인되면 내시가 왕의 평상복을 가지고 궁궐 지붕에 올라가 “상위 복(上位復)”이라고 외치며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오는 초혼의식을 행하였다.

이후 5일 간은 왕의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장례 준비를 진행했다.


국왕이 승하가 선언되면 왕세자 이하 신료들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애도했다. 그 다음으로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 입히는 습(襲), 시신의 입에 쌀과 진주 등을 채우는 반함(飯含) 의식을 치르고, 3일째와 5일째는 옷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는 소렴(小殮)과 대렴(大殮)을 진행하였다. 5일이 지나도 왕의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입관하였다.

염습을 마친 시신은 재궁(梓宮: 관)에 넣고 다시 찬궁(欑宮)이라는 집 모양의 구조물에 안치하여 빈전에 모셨다. 발인하기까지 시신을 모시는 전각을 바로 빈전이라고 하였다.

통상 승하 6일째는 왕세자가 성복(成服)을 한 후 애도 속에서 즉위식이 이루어졌다.

예법에 따라 입관 후 5개월 동안 빈전에 시신을 안치하였다가 국장을 치렀는데, 이 기간 동안 빈전의 제사와 호위는 빈전도감이 담당하였다.

 

효종빈전혼전도감의궤(孝宗殯殿魂殿都監儀軌),

1659(현종 즉위), 1책, 52.1×38.4㎝
효종(孝宗, 1619~1659)의 시신 염습(殮襲)과 안치(安置)를 담당한 빈전도감과 장례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담당하는 혼전도감의 일을 기록한 의궤이다. 책머리에 소선(素扇), 명정(銘旌), 영좌(靈座), 찬궁(欑宮), 영침(靈寢) 등 빈전도감에서 담당한 12종의 기물의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의궤는 빈전도감의궤와 혼전도감의궤가 1책으로 합부되어 있다.

 

 

사후의 궁궐, 산릉의 조성

 

 

살아있는 왕의 공간이 궁궐이라면 죽은 왕의 공간은 왕릉이었다.

왕릉 공사는 수개월 동안 수천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공사로, 산릉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왕릉 조성의 시작은 명당을 찾는 일이었다.

왕은 생전에 남면(南面)하였기 때문에 왕릉 역시 남향으로 축조되었다.

 

왕릉의 입구에 설치된 붉은 색의 신문(神門), 즉 홍살문은 능역의 신성함을 알리는 표지이자 출입문 역할을 하였다. 왕릉은 시신을 모신 현궁(玄宮)이 있는 봉분과 봉분 아래 정자각(丁字閣)을 비롯한 제사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왕의 묘호와 행적을 기록한 비석을 모신 각을 세웠고, 그 외 제사를 준비하는 부속 건물을 주변에 배치하였다.

 

봉분의 지하에는 재궁을 안치하는 현궁을 축조하기 위해서 먼저 사각형으로 광(壙)을 파고 그 안에 두 개의 석실을 만들었다. 왕의 시신은 서쪽, 왕비의 시신은 동쪽에 안치하였다. 석실 외벽과 광 사이의 빈 공간은 석회와 숯으로 채워 넣어 습기와 벌레를 방지하는 동시에 단단하게 만들었다. 석실의 위는 석회, 고운 모래, 황토를 섞은 삼물(三物)로 다지고 주위를 병풍석으로 두른 후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의 주위는 난간석을 두르고 북, 동, 서 3면에 곡장(曲墻)을 세워 능을 보호하였고, 그 앞에는 혼령이 노니는 혼유석(魂遊石)과 함께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문인석, 무인석, 석호(石虎), 석양(石羊), 장명등(長明燈)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특히 왕릉의 석물은 조선시대 석조 공예의 정수라고 할 만큼 그 표현 수준이 뛰어났다.

 

현륭원원소도감의궤(顯隆園園所都監儀軌), 1789(정조 13), 1책, 49.9×36.9㎝

수원부 화산(花山)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새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한 내용을 정리한 의궤이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세자와 세자빈, 왕비가 아닌 왕의 생모 등의 무덤은 원(園)이라 하였다. 원래 상, 하 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본 의궤는 상책만 남아 있다.

책머리에는 원상각(園上閣)을 비롯한 건물, 녹로(轆轤), 각종 석물(石物) 등 29개의 도설과 찬궁의 네 벽에 붙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사수도(四獸圖)가 수록되어 있다.

(좌)사수도 중 백호와 주작, (우)문인석과 무인석 도설

 

 

 

발인에서 반우까지, 국장 행렬

 

 

빈전에 모신 재궁을 장지(葬地)인 산릉까지 모시는 의식은 왕이 임종한 지 5개월이 되는 달에서 길일(吉日)을 골라 치렀다. 국장 하루 전 왕이 빈전을 여는 계빈의(啓殯儀)를 올리고, 상여가 출발하기 전 조전의(祖奠儀), 견전의(遣奠儀)를 차례로 지낸 후 발인(發靷)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의식은 국장도감이 주관하였다.

 

국장 행렬은 재궁을 대여에 옮겨 실은 후 대여 앞 호군이 흔드는 탁(鐸: 방울의 일종) 소리를 신호로 궁궐을 떠나 노제(路祭)를 거쳐 장지로 향했다.

장지가 위치한 지역의 수령이 행렬을 인도하고, 그 뒤로 국장도감의 주요 책임자, 호위군사와 각종 의장기 · 의장물을 든 기수, 악대, 선왕(先王)을 위한 고명(誥命), 책(冊), 보(寶), 인(印), 향로 등을 모신 가마, 신주를 모신 가마, 제기를 비롯한 각종 집기류를 실은 채색 가마, 만장(輓章: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지은 글), 좁은 길을 지날 때 관을 모시는 가마인 견여(肩轝), 왕의 재궁을 실은 대여(大轝), 국장도감과 중앙 관청의 관리들, 곡을 담당하는 궁인(宮人) 등이 행렬을 이루었고, 그 후미에는 호위군사와 기수대가 배치되었다.

국장 행렬이 장지에 도착하면 찬궁에서 재궁을 꺼내어 무덤의 지하석실인 현궁에 들였다.


헌종국장도감의궤(憲宗國葬都監儀軌),

1849(철종 즉위), 3책, 46.4×32.6
헌종(憲宗, 1827~1849)의 국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총 4책으로 구성된 중 1,3,4책에 해당하는 3책만 있으며, 3책 모두 초록색 비단 표지와 변철(邊鐵) 등 제작 당시의 장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 중 삼방의궤에는 시책(諡冊), 시보(諡寶), 애책(哀冊), 증옥(贈玉), 증백(贈帛), 삽선(翣扇), 만장(輓章), 제기(祭器) 등의 채색 도식(圖式)이 있어 재료와 제작 방법을 알 수 있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1752(영조 28), 2책, 48.7×36.0㎝
상책 발인반차도 중 대여 부분.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는 세 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장례에 관한 의궤로, 상, 하 2책이다.

상책에는 반차도가 수록되었는데, 행렬의 전반부에 소(筲), 사기(沙器), 악기(樂器), 복완(服玩) 등을 실은 채색 가마와 그 좌우로 죽산마(竹散馬), 죽안마(竹鞍馬) 등의 의장물이 배치되었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1752(영조 28), 2책, 48.7×36.0㎝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하책의 복완 도설 부분.

하책 이방의궤에는 면류관, 푸른 색 겉옷[衣], 치마[裳] 등 의소세손의 각종 복완이 선명한 색감의 채색 도설로 수록되었다.

 

 

국장 후 다시 돌아온 신주는 혼전에 모시고 3년 동안 제사를 지냈다.

이 의례는 혼전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삼년상이 끝난 후 신주는 종묘에 모시는 부묘의식을 거쳐 종묘에 모셔졌다.

이것으로 3년간에 걸친 국장이 마무리되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유새롬

- 자료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