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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The Secret of the Joseon Portraits)

Gijuzzang Dream 2011. 10. 1. 17:52

 

 

 

 

 

 

 

 

 <초상화의 비밀(The Secret of the Joseon Portraits)>

 

 

 

   ◦ 전시명 :  “초상화의 비밀 The Secret of the Joseon Portraits”
   ◦ 기간 및 장소 : 2011.9.27~2011.11.6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 <태조어진> 등 조선을 중심으로 아시아 · 유럽의 초상화 200여 점

 

‘초상화의 비밀’특별전의 전시품 중 일부를 새로운 작품으로 교체하여 선보인다.

10월 11일에는 태조어진을 2011년 본으로 교체하고, 이천우 초상과 최익현 초상화 등 8건을 교체 전시한다. 10월 18일에는 권섭초상 등 13점을 , 11월 1일에는 이성원, 이현보 초상 등 8건을 교체 전시한다.

 

 

 

 

 

전시구성

 

제1부 ‘절대적 권위, 하늘과 땅’

제2부 ‘인의예지의 실현’

제3부 ‘초상의 변주’

제4부 ‘새로운 눈, 사진’

 

 

1, 2부

조선시대 초상화 발전의 중심 공간이었던 왕실 내 통치자의 면모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삼강오륜에 기반을 둔 군신 관계와

사대부 가문의 초상 - 군신, 붕우, 부자, 부부 등의 초상화

 

3, 4부

공식적인 초상에서 벗어나 자아의식과 정체성이 부각되고

동시에 자유로운 개성과 존재감을 반영하는 일상생활 속 초상화,

사진 도입으로 초상화가 전통으로부터 쇠락해가는 양상을 각각 소개한다.

 

 

 

조선시대 초상화 명작이 한 자리에

 

기획특별전 ‘초상화의 비밀’을 통해

 

‘태조어진’, ‘윤두서자화상’, ‘이재초상’과 같이 이미 잘 알려진 초상화는 물론,

평소 만나기 어려웠던 이명기, 김홍도, 박동보, 김희겸, 조중묵, 이한철, 채용신 등

당대 최고라 불려진 대가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국보급 초상화들을 대거 출품하여 주목을 끈다.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2년 만에 열리는 블록버스터급 초상화 관련 전시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한국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 유럽의 초상화까지 망라하는 국제적 시야에서

조선시대 초상화를 조망하는 최초의 전시로서 총 200여 점에 달하는

전시규모는 국내 초상화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태조, 영조, 철종,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이명기, 김홍도, 이한철, 채용신 등이 그린 초상화,

윤두서의 자화상, 루벤스의 '한복 입은 사람' 등 초상화 200여 점을 선보인다.

 

정몽주, 이성계, 황희, 박문수, 채제공, 김정희, 최익현, 황현 등 역사적 인물들의 얼굴과 내면을

그림으로 만나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1748년작 '석천공한유도(石泉公閑遊圖)'는 야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무인의 초상화로 눈길을 끈다.

고희동의 유화 자화상(1915년)에서는 한국 최초 서양화가로서의 자의식을,

이쾌대의 자화상(1948∼49년)에서는 1940년대 좌우 이데올로기와 예술의 현실참여 속에서 고뇌했던

예술가의 내면을 만날 수 있다.

외국인이 그린 자화상도 출품됐다.

17세기 중국인이 그린 남이웅과 김육의 초상화, 18세기 일본인이 그린 조태억의 초상화 등

이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얼굴이 흥미롭다

19세기 말 보급된 사진술은 초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진용 포즈나 소품이 초상화에 등장했으며 아예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채용신이 그린 황현 초상(1911년)이 대표적이다. 모본이 됐던 인물 사진도 함께 전시했다.

 

고종의 사진이 유포되면서 사진을 보고 그린 고종 초상화도 많았다.

현재 거의 똑같은 포즈의 고종 초상화가 많이 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시는 조선의 역사를 빛낸 위인을 소재로 한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관람객을 조선의 역사와 문화 그 생생한 현장으로 초대하며,

관람객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정몽주, 이순신, 논개의 충절,

청백리의 영원한 사표 황희정승과 어사 박문수, 오성과 한음의 우정 등의 이야기를

역사 주인공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이야기를 전해듣는 듯한 체험을 갖게 된다.

 


아울러 초상화의 초본과 정본을 통해 그 제작과정에 대한 전모를 이해하고,

X-선과 적외선 촬영을 통해 초상화의 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 그림의 실체를 파악하는 등

평소에 볼 수 없던 초상화의 감춰진 모습을 다각도로 접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와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의 대결도 볼만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시대 최고 초상화가로 손꼽히는 이명기와

바로크의 거장 페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의 초상화 대결.

 

임진왜란 때 왜군에 포로로 끌려간 안토니오 꼬레아로 널리 알려진 초상 속 인물이

네덜란드 스펙스 무역관장에게 발탁된 조선의 전직관리였음을 밝힌 이번 전시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초상화에서 입었던 철릭과 함께,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로 불리우는 이명기의 ‘서직수초상’을 처음으로 비교 전시하였다. 

 

 

담당 큐레이터는

"대륙적 스케일의 중국 초상화보다 겸손하고,

섬세한 분위기의 일본 초상화보다 절제된 조선의 초상화는

‘터럭 한올’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형상의 진실성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내면의 혼과 인격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점에서

시각적 사실주의를 추구한 서구의 초상화 일반을 뛰어넘는 한국 미술의 위대한 성취"라고 평가한다.

 

향후 초상화 연구의 새로운 초석을 제공하고,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시각을 확대하는 기회가 될 이번 전시는 11월 6일(일)까지 개최된다.

 

 

 

 

 

 

 

- 이명기 '서직수 초상'

 

페터르 파울 루벤스 '한복 입은 남자',

1617~1618년경, 38.4×23.5, 미국 폴게티박물관 소장

 

 

그림 속의 주인공 안토니오 꼬레아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임진왜란 중에 왜병에게 끌려간 조선 평민 또는 포로 병사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번 전시에서 그가 조선의 전직 관리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림의 화풍, 주인공의 의복, 선박의 표현 등으로 볼 때

일본에 와 있던 네덜란드 스펙스 무역관장에게 발탁된 조선의 전직 관리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내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

 

인간은 자기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거울이나 창, 물 위에 비쳐진 얼굴은 수면과 거울에 대한 인간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생겨난 그림이 초상화였다.

자기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와 숙명으로 인해 탄생한 초상화는

산수화나 화조화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갖고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을 추모하거나 후세에 전하기 위해

초상조각과 함께 아주 오래 전부터 발달해 온 회화 장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초상화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 삼국시대부터,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초상화가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고 발달하여

비교적 많은 작품을 남긴 때는 역시 조선시대로 초상화는

진경산수화, 풍속화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회화장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사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문벌을 숭상하고 충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사상이

팽배해 있어 학덕이 뛰어난 인물이나 조상들을 공경하고 제사지내기 위한 서원, 사당 등이 많이 세워지면서 봉안을 목적으로 한 사대부나 명현들의 초상화 제작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 이채 초상, 1802년 보물 제 1483호

 

 

- 대원군 이하응 초상, 1869년, 이한철, 유숙 작, 보물 제 1499호

 

 

사람의 참된 모습을 담아내야

 

고대 중국에서는 초상화를 전신(傳神)이라는 말로 불렀다.

그런 만큼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초상화의 최고 규범으로 ‘전신사조’와 정신세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초상을 제작함에 있어 만에 하나 털 오라기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초상화로서의 가치와 자격을 가질 수 없기에 동양의 초상화는 매우 사실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양의 초상화는

인물묘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정신세계와 마음까지도 담아내야 하는 그릇과도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려진 인물의 ‘참된 그림자’ ‘참된 모습’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그려진 인물의 살아있는 용모와 다를 바 없는 신성한 가치의 영물(靈物)로 소중히 다뤄지기까지도 했다.

그래서 초상화는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으며,

그 어떤 그림보다도 온갖 정성을 기울여 기운생동의 경지로 끌어올려 그려야 하는 그림이었다.

이런 동양의 초상화에 적용되는 전통과 규범에 따라 제작되어진 그림이 바로 우리의 옛 초상화였다.

 

 

- 화실, 1943년 장우성 작, 리움미술관 소장

 

- 고종황제가족사진, 20세기 초,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조선에서 근, 현대까지 총망라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중심이 되어 총 200여 점이 출품된 이번 전시에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백미로 손꼽히는 필자미상의 <송시열 초상>과

강세황, 윤두서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고희동, 이쾌대, 배운성, 장우성 등 우리나라의 근대회화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초상화들과 함께 전시된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을 거쳐 이태리로 건너 간 조선의 후예를

17세기 유럽 바로크회화의 거장, 루벤스가 그린 작품 <한복 입은 사람> 등 해외 소장 작품들도 출품되어,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우리나라 초상화의 특성과 전모를

다른 나라의 초상화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비교, 가늠해가며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또한 초상화의 제작과 이모과정을 초본과 정본의 전시로 이해를 돕고,

현미경과 적외선 촬영을 통해 감추어진 초상화 밑그림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코너도 선보인다.

 

- 윤증 초상화 초본

 

 

특히 인물묘사의 범주를 뛰어넘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존재감을

일상세계와 사물을 통해 은유적으로 변주, 표현한 옛 초상화들이 출품되고 있어

관람객들에게 전통 초상화의 또 다른 재미와 볼거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 <조씨 삼형제 초상>, 42×66.5,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보물 제1478호

   : 조계(趙啓, 1740-1813), 조두(趙蚪, 1753-1810), 조강(趙岡, 1755-1811)

 

맏형을 중심으로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어,

조선조 초상화 대부분이 화폭 안에 대상인물 1人만을 그려 넣는데 반해 특이한 화면구성을 보인다.

세 형제 모두 오사모에 담홍색 시복(時服)을 입고 있는데,

맏형은 학정금대(鶴頂金帶)를, 두 아우는 각대(角帶)를 두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형식의 집단화상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여러 사람들을 한 화면에 담은 유일한 초상화로 인정받고 있다.


 

 

 

- 배운성 <가족>, 1930-35년, 캔버스에 유채, 140x200cm, 전창곤 소장

 

일본 식민지시대 집안이 가난하여 15살 때 서울 명륜동에서 한 갑부 집안의 집사로 일했던 배운성은,

19살 때 그 집안 아들의 유학길을 동반하는 몸종으로

1919년 일본, 1922년 독일 베를린에서 유화와 판화를 공부하였는데,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미술유학생이 되었다.1937년 독일 여인과 결혼한 이후 파리에서 활동했다.

살롱 도톤느에 목판화 <자화상> 입선을 시작으로

유럽 각국의 미술전에서 1등상, 특등상 등 많은 상을 받았는데

우리나라 근현대 화가들 중, 유럽 공모전에서 배운성보다 많은 상을 받은 화가는 아직 없다고 한다.

그는, 유럽에서 상당히 성공적인 작가가 되어 활동하던 중,

1940년 파리 함락이 임박하자 작품 167점을 그냥 놔둔채 혼자서 귀국했다.

해방 후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사회주의자 이정수와 결혼한 배운성은 

홍익대 미술과 초대 학과장에 임명됐고, 1949년에 창설된 국전에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로 추대,

1950년 2월에는 경주예술학교 명예학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인 이정수를 따라 북한으로 월북하였다.

 

독일 체류 중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작가가 한국에서 주인으로 모셨던 집안의 대가족을 소상하게 묘사한 것이며, 

집사 출신인 작가 자신의 모습도 화면 제일 왼쪽에서 작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마치 사진을 보고 그린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사진의 기능을 대체할 목적으로 회화가 그려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철저하게 기록적인 성격이 작품의 사실주의적 태도를 반영하는 한편,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채색하는 기법은 전통 회화의 백묘법을 연상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 <순종황제 초상 초본>, 이당 김은호,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경성 원동에 거하는 김은호 씨는 천성의 필법이 특이한 바,

서화미술회의 졸업생으로 산수, 인물, 기타 각종 화법이 우미운아(優美韻雅)한 일취(逸趣)가 유하여,

다수 명사의 초상을 모사하여 찬상(讚賞)을 득하였는데,

지반에 창덕궁 이왕 전하 어진을 봉사함에 정력을 필주하여 차차 공을 준하였으므로, 일작에 봉정하였더니,

이왕 전하께서 십분 득진(得眞)함을 가장(嘉奬)하옵심으로, 김씨는 분외의 영광을 황공감득한다더라.”

대원수군복의 정면반신상으로 그려진 이왕 전하의 초상은

왕비 윤씨의 정전이던 창덕궁 대조전에 걸렸다가 1년 후 1917년에 발생한 화재 때 전소했으며

유지초본만 현존한다.
당시 정부는 신식군대 편성 후 고종 32년(1895) 4월에 육군복장규칙을 정하고

복장을 신식군복으로 개혁했으며, 그 해 11월 15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단발령과 복식개편에 따라 고종과 순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자르고

육군 복식을 착용한 초상을 그리게 했고 또한 사진을 촬영하게 했다.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 G. Underwood)에 의해 창간된 『그리스도 신문』은

고종의 사진을 석판으로 인쇄 · 발행하여 고종의 모습을 신문 구독의 매수 증가에 이용했다.
<순종황제 초상>은 20대 전반기 김은호의 데생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계월향 초상, 작자 미상

 

 

 

 

 

 


 

 

 

 

 

 

 

 

 

한민족의 영원한 얼굴, 천년의 미소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들 살았을까요?

요즘의 우리들처럼 오똑한 코에 쌍꺼풀을 하고들 살았을까요.

생활환경과 먹는 습관이 바뀌면 얼굴 생김새도 바뀐다고들 합니다만,

럼에도 영원히 우리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을 생김새와 DNA가 있다면 그건 뭘까요?

 

 

한복 입은 유럽피언 코리언

 

 

모두 다 기억하고 있듯이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주인공 네로가 성당 안에서

애견 파트라슈를 끌어안고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바라보며 얼어 죽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피터 폴 루벤스. 네로가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성당 그림을 그린 화가다.

유럽의 17세기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루벤스가 그린 그림 중에는

<한복 입은 사람>이라는 걸작이 있다.

 

 

- <한복 입은 사람>, 1617년, 벨기에,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작, 폴게티박물관 소장

 

 

1983년 크리스티 경매장에 드로잉 경매사상 최고가인 32만 4천 파운드에 팔려

미국의 폴 게티 박물관이 소장하게 됐다는 소식이 외신으로 전해지면서

우리나라를 한때 들끓게 했던 그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후, 루벤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한복 입은 남자는

어느 한 소설가의 상상력을 통해 일본과 중국을 거쳐 베니스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마치고

유럽에 뿌리를 새롭게 내리는 개성상인의 후예, 안토니오 꼬레아로 되살아나

고국 땅 한국에 귀향하게 된다.

 

 

한민족의 변하지 않는 DNA

 

이태리 남부에는 ‘꼬레아’ 성을 쓰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다.

루벤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한복 입은 사람>의 후예들이 아닌가 하고 추측들 한다.

그리고 일본에는 백제를 뜻하는 ‘구다라’를 성으로 쓰는 사람들이 살고들 있다.

 

모두 다 한반도를 떠나 타국에 뿌리를 내린 한민족의 또 다른 후예들이다.

이처럼 한민족의 후예들이 다른 나라에 뿌리를 내리며 새로운 혈족을 만들어가고 있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들은 수많은 이동과 이주를 거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럼 언제부터 한민족은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걸까?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떤 생김새들을 하고 있었을까?

 

한민족은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들 추측하는데,

경남 울주군 반구동에서 발견된 바위그림 속에

바로 역삼각형의 달걀형 얼굴에 커다란 눈과 코를 하고 있는 청동기시대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한민족의 장구한 DNA 역사를 새삼 느끼게 하는 얼굴이 아닐 수 없다. 

 

 

 

얼굴은 마음의 창

 

청동기시대 바위그림에도 그려져 있고,

이태리로 건너간 한복 입은 남자의 얼굴에서도 또렷하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의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야말로 한국 사람들의 전형적인 이목구비가 아닌가 싶다.

그 눈매는 가야시대의 말방울에도 새겨져 있고,

신라시대의 토기와 기둥모양의 나무를 사람모양으로 깎아

마을 어귀에 세워놓은 장승들에게서도 쉽게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부리부리한 눈매의 통일신라 지국천왕한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눈매들은 하나같이 무섭지가 않다.

무섭기는커녕 그 눈매에서 도리어 느긋하고 부드러운 부처님의 미소와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접하게 되니 정말로 신기하고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기교와 무작위적인 삶에서 나오는 해맑은 미소와 웃음이

그 날카로운 눈매를 감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소와 웃음으로 가득 찬 얼굴, 이게 바로 오늘날까지도 우리 한민족이 수천년간 간직해 온

진짜 얼굴이고 마음임을 되짚어 보게 하는 작품들이라 하겠다.

 

- 논개영정(이당 김은호 작)

 

 

 

내 마음의 뷰파인더, 자화상

 

남의 얼굴을 그려주던 옛 화가들은 어떤 마음으로 자신들의 자화상을 그렸을까?

 

 

 

 

 

자화상의 또 다른 역사

 

용모가 잘 났건 못 났건 모든 사람들은 자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멋지고 아름답게 비춰졌으면 하는 소망과 바람들을 갖고들 살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바람과 소망을 그림으로 그려주던 화가들.

그 수많은 화가들의 자화상이 남겨져 있는 걸 보면,

화가들에게도 자신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영원히 남겨두고 싶은 마음은 똑같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자기 모습을 그림 속 한 모퉁이 속에 자그마하게 살짝 그려놓던 벨라스케스처럼,

화가들이 자신들의 자화상을 늘 커다란 초상화로만 그려 남겨놓았던 건 아니었다.

 

 

 

화가의 마음은 고금동서 한 마음

 

그런데 화가들의 그런 마음은 서양화가들한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이인문이 그린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깊은 산속에서 사람들이 유유자적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 속에는 이 그림을 그린 이인문이 등장한다.

아마도 누각 속에 작게 그려진 다섯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듯 싶은데,

과연 그들 중 누가 이인문이었을까?

 

 

이인문필 <누각아집도> 일부분

 

 

 

조선시대의 최고화가로 손꼽히는 정선과 김홍도 역시

자기 그림 속 한 모퉁이에 자기 얼굴을 번번히 그려 넣었다.

 

그런가하면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선비였던 조영석 역시

추운 겨울 중무장을 하고 찾아온 벗을 격식 차리지 않고 복건 차림으로

반가이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설중방우도>라는 그림 속에 남겨 두었다.  

 

 

이처럼 그림 속에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 넣고 싶었던 건

우리나라의 옛 화가들에게서도 매 한가지였다.

 

 

 

전신사조, 마음을 기록하다.

 

그러나 자화상 하면 역시 얼굴을 집중적으로 그린 그림이 아닐까 싶다.

다른 이의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화가들은

초상화의 백미로 손꼽히는 자화상을 제작할 때도 터럭 한 올까지도 틀리지 않게 똑같이 그려내는

정교하고 빼어난 묘사력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고,

그려진 이의 마음을 기운생동 넘쳐나게 담아내야 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최고의 규범으로 여겼다.

 

그래서 우리의 옛 화가들이그린 자화상들은

서양의 그림들과는 달리 매우 사실적이었고 무척이나 진솔했다.

 

 

- 강세황 자화상

 

 

그리고 우리 옛 화가들에게서 자화상은 예술이기에 앞서 기록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조선시대 최고의 자화상으로 손꼽히는 윤두서와 강세황의 사색적인 눈매의 자화상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우리 옛 화가들의 자화상은 세월따라 변하는 외모를 잊지 않으려는 맘에

자기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절대 아니었다.

그보다는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영원히 불변하지 않을 나의 혼, 나의 내면을 기록해두고 싶어

그린 그림. 우리의 옛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은 그런 그림이었다.

 

 

 

사진, 여인의 얼굴을 바꿔놓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모든 여성들은 자그마한 얼굴을 갖고들 싶어한다.

작은 얼굴에 대한 여인들의 욕망과 식을 줄 모르는 불멸의 신드롬.

그 이면 속에는 우리의 슬픈 여성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잊고 있는 또 다른 여성사, 과연 우리는 어떤 역사를 잊고 있는 것일까?

 

 

 

사진, 근대의 초상을 담다

 

 

우스갯소리로 맞선이나 미팅에 나가기 전, 사진발에 속지말자, 화장발에 속지말자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간혹 가다 포토샵으로 조금이라도 얼굴 사진을 좀 더 작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이 말은 분명 유효한 듯싶다.

 

1826년 세계 최초의 사진이 발명되어

파리의 광학상 알퐁스 지로에서 현재 사진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로-다게레오타입(Giroux-Daguerreotype) 카메라를 팔기 시작한 게 1839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카메라를 조작해가며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1907년 서화가 김규진이 종로거리에 <천연당사진관>을 시작하면서라는 사람도 있고,

1884년 서울 저동에 사는 김용원이라는 사람이 <촬영국>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당시의 한성순보에 나와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같은해 지운영이라는 사람이 고종임금의 사진을 찍었다는 기사가

한성순보에 있다는 이야기도 항간에 돌고 있는 걸 보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19세기 말부터 그림을 대신해 사진이 조선의 풍경과 사람들을 담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사진, 조선 여인을 담다

 

사진이 19세기 말 개화의 물결을 타고 우리 땅에 재빨리 들어온 서양의 신문물 가운데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은 사진을 쉽사리 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사대부의 전유물로 다뤄졌듯이,

당시에는 신분상승의 징표로 초상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사진은 그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여인네의 모습들을 시각화하고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사진의 등장으로 시작된 조선 여인네들의 세상 나들이는

수 천 년 변함없이 전해져오던 우리의 전통적인 미인의 기준을 한순간 바꿔놓았다.

신윤복의 <미인도>와 채용신의 <운낭자>에서 마주하던 꽃봉오리처럼

갸름하면서도 자그마한 얼굴, 앵두 같고 샛별 같은 입술과 눈동자의 단아한 생김새와

총명한 인상의 여인들을 더 이상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사진, 미의 기준을 바꿔 놓다

 

우리의 전통적인 미인 기준에는 얼굴의 생김새와 인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의 등장은 몸매로 그 시선을 옮겨 놓았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여인이 갖춰야 할 요건에 포함되지도 않던 몸매가

미인을 판단하는 최고의 기준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럼에도 작은 얼굴에 대한 동경심은 여전했던 것 같다.

 

1910년대 찍힌 경기도 지방의 여인 사진을 보면 그녀 역시 자그마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작은 얼굴에 목매하는 요즘의 여인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백여 년 전 여인의 얼굴이 작았던 이유는

남자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 먹이고 싶어 하던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못 먹고 자란 탓이라는 설도 있다.

역사는 기억되기도 하지만, 망각되기도 하는 법.

그래서 그런지 먹을거리도 풍성해졌고 남아선호사상도 많이 사라진 요즘도

사람들은 심심찮게 작은 얼굴에 목매하고 욕망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들 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작은 얼굴의 신화 뒷면에는 조선 여인들의 한 맺힌 역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MUZIN 국립중앙박물관 웹진, 36호, 2011년 9/10월호

 

 

 

 

 

 


 

 



 

 

 


 <초상화 속 인물을 밝혀라!>



 



 1. 이 초상화는 조선후기에 활약한 문신인 이분(1745-1820)의 초상입니다.

    이 분은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암 이재의 손자이기도 합니다.

    이분은 동파관을 쓰고 심의를 입은 채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로 그려져 있습니다.

    

 2. 이 작품은 외형 묘사와 내면세계의 표현이 조화를 이룬

    한국 초상화상 획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그의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대의 전통적 관습을 뛰어넘어

    새로운 단계를 제시한 창조적인 화가였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몸체가 생략된 파격적인 모습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3. 채용신이 그린 어진으로 전하는 이 작품은

    정면상에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전신교의좌상입니다.

    채용신의 초상화는 전통 초상화에 바탕을 두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화풍을 보여줍니다.


 4. 이 작품은 1872년에 완성한 어진입니다. <어진이모도감의궤>에도 기록되어 있는 이 어진의 제작에

    참여한 화가로는 조중묵, 박기준, 백은배, 유숙, 이창옥, 박용기, 박용 등 10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어진은 그 규모나 재료, 안료, 표현기법, 장황 상태 등에

    왕명으로 시행된 조직적 회화 제작의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무수하게 전하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몇 점 남아있지 않은 어진의 품격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이 작품은 주인공이 머리에 동파관을 쓰고 풍성한 백색의 포를 입은 채

    서 있는 전신 입상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1796년 당시 최고의 궁중화원이었던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린

    합작품입니다. 정조 어진을 그릴 때 참여했던 두 화가가 함께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이 초상화의 수준을 짐작케 합니다.

    


 6. 이 작품은 임란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꾀어내어

     그를 끌어 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으로 잘 알려진 여인의 초상을 그린 것입니다.

     1955년 김은호가 추모하여 그린 것으로, 실존하는 인물을 그린 초상으로서

     애국충절과 의열을 선양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보기 :  (3개의 초상은 관계없음)

   태조 어진, 서직수 초상, 고희동 자화상, 이채초상,

   논개 영정, 이우 초상, 윤두서 자화상, 고종 어진, 

   최연홍 초상, 이재 초상

 

 

 

 

 

정 답

(1)이채 초상 (2)윤두서 자화상 (3)고종 어진

(4)태조 어진 (5)서직수 초상 (6)논개 영정

 

 

 

 

 

 

 

 

 

 

 

 

 

< 더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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