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우장춘과 쓰노다 후사코
일본 다키이 종묘회사 초대 농장장으로 근무하던 40대의 우장춘 박사.
유명한 과학자일수록 정작 우리는 그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퀴리 부인이나 아인슈타인은 물론 석주명이나 우장춘 같은 분들도 그런 예일 것이다.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이들의 본격 전기를 읽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기자는 최근 우장춘 박사에 대해 좀 자세히 알아볼 일이 생겨서 인터넷 서점에서 전기를 검색해봤는데 19권 가운데 한 권을 빼고는 모두 어린이용이었다. 물론 어린이 책이라고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우장춘의 위대함 뿐 아니라 안 좋은 면까지, 즉 실체를 파악하기에 ‘위인전’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한 대학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다행히 소장돼 있다. 책을 빌려와 지난 주말 읽었는데 역시 성인용답게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다.
40대 중반부터 집필을 시작, 주로 전기를 썼는데 1980년대 들어 한일 역사로 관심을 돌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다룬 ‘민비암살’을 집필, 1988년 출간해 화제가 됐다.
한국에서 취재 중 명성황후를 암살할 때 가담한 우범선(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이 ‘한국 근대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던 쓰노다 여사는 일본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우장춘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는다. 한국을 수차례 오가며 우장춘 박사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며 치밀한 취재를 수행했다. 그리고 1990년 76세의 나이에 이 책을 출간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50년을 넘게 산 한일혼혈아가 어떻게 가족을 남겨두고 말도 통하지 않는(우장춘은 죽을 때까지 우리말을 못했다고 한다) 한국에 혼자 갈 생각을 했느냐는 점이다. (시해사건 뒤 우범선은 처자식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망명한 뒤 일본인과 재혼해 1898년 우장춘을 낳았다. 1903년 우범선은 조선의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된다) 아니면 일본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서였을까. (우 박사는 1945년 다키이 종묘회사를 그만두고 수년간 쉬고 있었다) 아니면 우리가 위인전에서 읽었듯이 피폐해진 조국(한국)을 도우려는 애국심의 발로였을까. 1990년 76세의 나이에 우장춘 박사의 전기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를 출간한 일본의 작가 쓰노다 후사코 여사.
저자는 책 끝부분에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추측을 하고 취재를 통해 하나하나 확인하는 집념은 정말 대단했다. 자신이 여성이어서인지 쓰노다 여사는 우 박사의 아내인 고하루 여사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신부 부모가 끝까지 반대해(혼혈아와의 결혼이라서) 고하루 여사는 결국 부모와 의절까지 했다고 한다. 결혼을 앞두고 우장춘은 장차 태어날 자녀들의 성 문제에 대한 조언을 받아들여 의절한 고하루 여사가 지인인 스나가 호헤이 씨의 양녀로 입양된 뒤 데릴사위가 되는 형식으로 성을 스나가로 바꾼다. 우장춘의 자녀들의 성이 스나가인 이유다. 그는 논문에 영문으로 자신의 이름을 ‘Nagaharu U’라고 썼는데 나가하루는 長春(장춘)의 일본어 뜻이고 U는 禹(우)의 한국어 음이다. 자신의 정체성과 자녀들의 정체성에 선을 그은 것일까. 한국의 농업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일본에 전량 의존했던 배추와 무의 종자를 대량생산하는데 성공했고 벼와 감자에 대한 연구도 진행시켰다. 제주도에 귤을 대량 재배하자는 것도 우 박사의 아이디어다. 우 박사는 1959년 위와 십이지장 궤양 수술 후유증으로 타계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과로가 주요 원인일 것이다. 자녀들이 장성한 뒤 한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우 박사는 한국에 간 지 수 년 뒤 현지처를 두고 두 집 살림을 했다고 한다. 고하루 여사는 이 사실을 알고도 아픔을 삭이고 자녀들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고 1959년 우 박사가 위독하자 서울에 와서 임종을 지켰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학문과 일의 측면에서는 우장춘 박사는 진정 위대했다는 것이 쓰노다 여사의 책에서도 줄곧 강조되고 있다. 우 박사는 말년에 감자에 관심을 가져 대관령에 씨감자시험지를 두고 막 시험재배를 시작하던 중 사망했다. 훗날 이곳의 책임자가 된 최정일 박사는 1968년 뉴질랜드 링컨대 육종학연구실 팔머 교수를 방문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육종학교실에서 선정한 우수 논문 10편 가운데 가장 관심있게 읽은 게 우 박사의 1935년 ‘종의 합성’ 논문이었다”고 말했다. 최 박사가 자신이 우 박사의 제자라고 밝히자 팔머 교수는 깜짝 놀라며 그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 우장춘 박사는 십자화과 배추속에 속하는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얻은 식물체가 유채와 같음을 증명하고 이 현상을 ‘종의 합성’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뒤 배추속 식물 6종의 연관성이 밝혀졌는데 이를 도식화한 것이 우장춘의 삼각형이다. 원 안은 염색체로 녹색은 배추, 파란색은 양배추, 빨간색은 흑겨자의 염색체다. n은 염색체의 수.
종의 합성이란 십자화과 배추속(Brassica) 식물인 유채가 사실은 배추와 양배추의 잡종임을 밝힌 논문에서 우 박사가 사용한 용어다. 서로 다른 종이 교배해 새로운 종이 나온다는 이 현상의 발견은 육종학분야에서 큰 사건이었다. 그해 9월 일본 동경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팔머 교수는 최 박사에게 연락해 한국에 와서 우 박사의 묘지를 참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우장춘 박사에 대한 자료나 증언이 얼마나 잘 보존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근대농업의 아버지’에 대한 본격 전기가 일본인이 쓴 것 밖에 없다는(도서관엔 그의 제자 김태욱이 쓴 ‘인간 우장춘’(1985년)이 있다) 사실에 씁쓸했다. 우리 저술가 가운데 우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의 삶을 복원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1980년대 후반 수년에 걸친 한 일본 작가의 노력덕분에 그나마 우 박사에 대해 많은 사실이 기록된 것이 다행이다. 쓰노다 여사는 지난해 9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우박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 끝까지 외면해 결국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우 박사는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을 위해서 봉사해 온 나에 대한 대우란 말인가!”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우 박사는 우물을 파고 ‘자유천(慈乳泉)’이라고 명명했다. ‘자애스러운 어머니의 젖’이라는 뜻이다. 그 뒤 그는 아침마다 우물 주변을 청소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농림부장관 이근식이 병원을 찾아 수여식을 거행했다. 우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일 뒤인 8월 10일 오전 3시 10분 아내 고하루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장춘은 숨을 거뒀다. 해방전후 극도의 혼란속에서 굶주리고 있던 한민족에게 작물의 씨앗과 희망의 씨앗을 동시에 안겨준 우장춘 박사는 진정 위대한 한국인이 아닐까. |
- 2011년 08월 08일, 동아사이언스, [강기자의 과학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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