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무사 백동수에게 배우는 문무겸전 리더십

Gijuzzang Dream 2011. 8. 17. 22:25

 

 

 

 

 

 

 

 

무사 백동수에게 배우는 문무겸전 리더십

 

 

 

 

정조 대에 활약했던 백동수(1743-1816)를 주인공으로 한 TV드라마 ‘무사 백동수’가 인기리에 방송 중이다.

드라마의 주인공 백동수는 천방지축의 꽃미남 무예 고수로 그려지고 있는데,

실제 백동수의 풍모와는 차이가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백동수가 북한산에서 무뢰배들과 충돌했을 때 수염이 쫙 펼쳐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상대 두목이 슬그머니 줄행랑을 놓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설마 그의 얼굴이 무서워서 도망을 쳤겠는가.

몸이 날렵하고 힘이 장사였던 백동수는 이미 이십대에 주먹세계를 평정한 인물이었다.

 

 

북학파의 숨은 별

 

흥미로운 것은 그런 백동수가 상하빈천을 아우르는 폭넓은 사귐을 통해

우정의 넓이와 깊이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와 절친했던 박제가의 말을 들어보자.

 

영숙(백동수의 字)과 우정을 맺은 사람은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위로는 정승과 판서와 목사와 관찰사가 그 분의 벗이고,

다음으로 현인 명사 또한 그 분을 인정하고 추켜세웠습니다.

게다가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검을 쓰고 주먹을 뽐내는 부류와

서화, 인장, 바둑, 거문고와 가야금, 의술, 자리, 방기의 무리로부터

시정의 교두군, 농부, 어부, 백정, 장사치 같은 천인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서 만나서 누구하고나 날마다 도타운 정을 나눕니다.

또 줄을 이어 문을 디밀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했는데

영숙은 누구냐에 따라 낯빛을 바꾸어 대우하여 그들의 환심을 얻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백동수에게 “어떻게 그처럼 많은 사람들과 친밀하게 사귈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을 만나면 또한 예법에 맞게 그를 상대하고,

글을 짓거나 서화를 그리는 선비를 만나면 나 또한 글을 쓰고 서화를 하는 법으로 그를 상대하였지요.

또 복서ㆍ의약ㆍ방기ㆍ술수에 밝은 선비를 만나면 나 역시 거기에 합당한 법도로 그들을 상대하였지요.

그들이 예법을 좋아하면 나 또한 겸손으로 상대하는 것이외다.”라고 대답했다.

 

또 그는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를 북학파의 리더로 널리 알려진 박지원에게 소개한 사람도 그였다.

한마디로 백동수는 백탑을 중심으로 결성된 북학파의 숨은 별이었다.

백동수가 무과에 급제했던 1771년 봄에 박지원과 함께 명산대천을 유람했는데,

이때 백동수는 연암골을 찾아내 박지원의 집터를 잡아 주었다.

박지원의 호 ‘연암’ 속에는 백동수와의 아름다운 우정이 담겨 있다.

 

 

학문과 무예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명문 무가에서 태어난 백동수는 소년시절부터 장안의 협객들과 두루 사귀었다.

또 조선 최고의 검객 김체건의 아들이자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광택의 문하에서 검술을 익혔다.

어린 시절에는 공부를 소홀히 했으나 중년부터 학문에 매진하여 경세지학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최고의 고증학자로 손꼽히는 이덕무는 자신의 글에 대한 비평을 부탁할 정도였고,

고문의 대가 성대중은 “武로써 文을 이룬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려 단원 김홍도와 밤새 화법(畵法)을 토론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옛사람들은 “文과 武는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했는데,

이것을 온전히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 백동수였다.

 

그러나 이런 백동수도 오랫동안 선달로 지내야 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서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얼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다.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백동수는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기린에 들어가 가축을 기르고 무예를 연마하며 때를 기다렸다.

산골에 묻혀 지내도 세상은 그를 잊지 않았다. 1785년 정조 임금은 백동수를 선전관에 임명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으나 이때부터 백동수는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맘껏 펼쳐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장용영 장관으로 일하던 1789년 가을,

백동수는 규장각 검서관인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는 어명을 받게 된다.

그의 임무는 군영마다 조금씩 다른 무예의 자세를 통일하여 표준을 세우는 일과 출판을 감독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때 역사상 최초로 마상기예를 도보(圖譜)로 정리한다.

이듬해 4월29일 완성되어 전 군영에 보급된 <무예도보통지>는

조ㆍ중ㆍ일 삼국의 무예를 집대성한 동양무예의 고전으로 현재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은 무예를 세밀한 그림(圖)과 상세한 설명(譜)으로 종합 정리한 것으로,

오늘(今) 쓰이는 것(用)이라는 실학정신을 투철하게 반영하고 있다.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을 붙여 한자를 모르는 무사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이후 그는 <발해고>의 저자인 유득공과 함께 <무경칠서주해>의 편찬 감독을 맡는다.

문무를 두루 갖춘 백동수는 정조의 친위군영 장용영과 군사교육기관인 훈련원에서

병법과 무예를 가르치는 일을 통해 충직한 조선 무사들을 길러냈다.

정조가 서거한 뒤 장용영이 혁파되고 개혁 인사들이 탄압을 받으면서

그도 벼슬에서 쫓겨나 유배를 가지만 그는 젊은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 움직이는 지도자들의 본보기

 

한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죽어 관 속에 들어간 다음에야 내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백동수가 포천 집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을 때

벗이었던 성대중의 아들이며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성해응은 이렇게 그를 추모했다.

 

“백영숙(백동수의 字)의 집안은 본디 넉넉하였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업은 흩어지고 기울어졌지만 베풀어주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

애석하도다! 다시는 기남자를 볼 수 없음이여!”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백동수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거론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평탄하거나 험악하거나 마른 곳이거나 진 곳이거나 조금도 수고를 꺼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은 문약한 나라요, 무사가 천시받던 나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선 무사 백동수의 생애와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지금까지의 인식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전문성만을 강조하여 육체적으로 점점 왜소해지는 현대인들에게

백동수의 거침없는 삶과 그가 보여준 문무겸전의 리더십은

오늘날 크고 작은 조직에서 사람을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지도자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무사 백동수의 리더십은 한국형 리더십의 또 다른 얼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영호, 가야산 무예학교 운영, 무예24기 전수회 대표, 현재 한국병학연구소 소장

<민족무예> <수원화성과 24반무예> <역주 장용영고사> <조선의 협객 백동수> 외 저서 다수.

- 한국형리더십개발원, 리더십에세이 2011.8월호(제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