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자의 필수품, 휴대용 메모장
‘온고지신’은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배운다는 뜻이다. 배움에 있어서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새 것을 배우기는 쉬워도 옛것을 익히기는 어렵다. 누구든지 옛 것을 익혀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아 두고 싶어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기억은 세월이 지날수록 머릿속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게 마련이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소위 ‘혼백(魂魄)’이라는 두 가지 정신이 들어 있다. ‘혼’은 앞 일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백’은 지나간 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사람이 지난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백’의 기운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성인이 후학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할 때는 항상 “기록해 두어라!”하고 당부하신다. 이 말은 성인이 혹 잊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후학들이 복습을 통해 부족한 백의 기운을 보충하여 깨닫도록 권면한 것이다. 때문에 후학들은 스승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책(策)이나 좌우(座右)에다 기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큰 띠[紳]에 기록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놓고 다니거나 장소를 떠나게 되면 기록한 내용을 볼 수가 없다. 그나마 띠에 기록한 자는 어디를 가든지 볼 수 있기에 다행이다. 이에 선비들에게 ‘홀(笏)’에 준하는 수판을 몸에 지니고 다닐 것을 권한다. 홀은 어떤 일을 홀연히 잊어버릴 것에 대비하는 것이다. 벼슬아치들이 임금을 배알하는 조회(朝會)와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물건이니 매우 좋은 방법이다. 지금 홀 모양의 나무를 깎아 수판을 만들고 거기다 흰색 분을 칠하여 항상 몸에 달고 다니면 학문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성호사설》, <만물문> , 수판(手板)
■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꺼리지 않다.
학문의 도는 깊이 있게 파고들어야 참뜻을 알 수 있다.
한데 요즘 학자들은 학문을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도의 경지에 올가미를 씌워놓고,
오직 주자(朱子)만 외치며 다른 학문은 이단(異端)으로 취급해 버린다.
마치 닭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오리가 날아드는 것을 금기시하는 모양새다.
넓은 울타리는 응당 학자들이 품어야 할 그릇이다.
그 안으로 오리가 들어가든 꿩이 들어가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학자의 직위로서 어떤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어떤 학문이든 가려서는 안 된다.
오리가 있어야 닭이 마른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흔히 군자와 소인배의 차이는 백지장 한 장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한 장의 차이는 의외로 크다.
군자는 세상의 본뜻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다리품을 팔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치에 어긋나는 망언과 농담일지라도 빠짐없이 주워 모았다.
또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것을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군자의 상대방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구하는데 힘썼다.
요즘 학자라고 자처하는 유생들을 보면 걱정스럽다.
경서의 분별력도 갖추지 못한 주제에
오리가 나쁘다며 그 목을 치기 위해 칼을 들고 있는 격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게다가 자기들 스스로는 고상한 학문의 경지에 오른 듯 목에 힘을 주고 다닌다.
닭털만 뽑아놓고 고기 맛을 이야기하고,
수박껍질을 핥고 나서 속맛을 애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보기에는 요즘은 닭털처럼 흔해 빠진 유생을 널려 있는데,
꿩처럼 날 수 있는 특출한 자들은 드물다. 개탄스럽다.
- 《성호사설》, <경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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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번에는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성호선생이 주었던 메시지 2편을 소개합니다.
성호가 제시한 공부법 중 재미있는 내용은 메모장 만들기란 항목입니다.
메모란 슬금슬금 빠져 나가는 기억을 방지하기 위한 요긴한 방법이었습니다.
사람의 정신에는 혼백(魂帛)이란 2가지 정신이 있는데
‘혼’이란 앞 일을 알아차리는 것이요, ‘백’이란 지나간 일을 기억하는 것이라
성호는 이야기 합니다.
때문에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하기 위해 좋은 말과 기억할 만한 정보는
즉시 메모하여 항상 볼 수 있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성호는 임금을 배알할 때 지니는 홀과 같은 모양의 나무판을 깎아
거기다 흰색 분을 칠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기를 권유합니다.
성호의 이러한 태도는 40여 년간에 걸쳐 작성한 메모가 하나 둘씩 쌓여
30책 3,007건에 달하는 방대한 《성호사설》로 집성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성호의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반영하듯 이 책에는
천지문,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 등 하늘, 사람, 자연 생물에 걸친
폭넓은 만물학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성호는 유교의 경전을 읽다가 의문나는 점 등을 책의 여백에다 적어놓고
후일 이것을 정리하여《논어질서》《맹자질서》등의 경전 연구서를 편찬하기도 합니다.
실제 메모를 즐겨 사용했던 실학자들은 많았습니다.
《발해고》에서 발해의 역사를 찾아내어 우리나라 고대사의 영역을 넓혔던 유득공은
좋은 글을 베껴 적은 메모장을 모은 글상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글상자는 유득공에게 집안 그 어느 것보다도 귀중한 보물이었습니다.
청장관 이덕무의 기록벽 역시 유명했습니다.
그의 저서 《청장관전서》는 《성호사설》과 같은 백과전서류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지독한 책벌레였던 이덕무의 다양한 관심하에 기록된 꼼꼼히 메모들은
실학시대의 민생과 과학정신을 담은 저작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또한 성호는 배우는 학자들에게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열린 태도를 주문했습니다. 양반과 상놈이 있는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났지만,
성호는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열린 태도를 살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성호는 세상의 본 뜻, 민생을 위한 실용적인 지식을 파악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고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성호사설》에는 이러한 성호의 진지한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과일나무 잘 기르는 법, 뽕나무 재배법, 음식의 조리법, 토종 바닷게의 생태에 대한 기록 등에는 농부와 어부 등에게서 직접 들어서 얻은 많은 지식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물학이란 세상 사물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담고 있습니다.
“학자는 세상 만물에 대한 넓은 울타리를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하고
어떤 분야이든 가리지 않아야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성호는 이야기 합니다.
오직 주자학만을 진리로 알고 다른 학문을 이단시하던 당시의 주류 학계의 분위기를
맹종하는 태도는 잘못이라고 거듭 설파합니다.
선입견에 빠져 고상한 척 하는 지식인,
허위의식에 빠져 세상의 이치를 바라보지 못하는 지식인의 태도를 질타했던 것입니다.
기록의 홍수인 오늘날, 지식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 흔합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것은 지식이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이를 실천해야만 진정한 자기 것으로 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성호의 공부법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호의 학문은 당시에는 ‘잡학’이라 경시되었습니다.
눈을 반쯤 든 학자들의 경직된 사고가 낳은 인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성호에서 비롯한 만물학은 관념을 깨치고 과학으로 나아갔던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주 · 자연 · 인간에 대한 실용과 과학적인 접근은
혁신적이며 새로운 학문의 지평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도는 가까이 있다’는 말처럼
성호는 생활과 자연에서 새로운 학문의 길을 개척해 나갔던 선구자였습니다.
- 실학박물관 학예사 조준호
- 2011년 8월 실학박물관 뉴스레터, <실학자의 편지>No.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