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위화도회군에서 배우는 역사 전환의 리더십

Gijuzzang Dream 2011. 8. 22. 23:05

 

 

 

 

 

위화도회군에서 배우는 역사전환의 리더십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대해서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린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때가 중원대륙으 구세력, 즉 원나라가 쇠퇴하고 신흥세력인 명나라가 부상하기 전의 공백기로 잃어버린 고구려의 고토, 즉 만주지역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말한다.

한반도를 넘어서 북방으로까지 국세(國勢)를 떨쳐나가려는 최영장군의 꿈이 사대주의자 이성계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위화도회군이 불가피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고려군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역으로 진군했더라면 강대국 명나라와의 대규모 전쟁은 불가피했으며,

만일 패전했을 경우 한반도에 ‘제2의 한사군’ 설치와 같은 치욕적인 일이 발생했을 거라고 말한다.

 

두 가지 의견이 다 나름대로의 판단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회군으로 인해 ‘요동공벌’을 주장한 최영이 정권에서 밀려났고,

이성계가 대신 집권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 역사의 물줄기도 그 방향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성계의 두 가지 신중한 선택

 

이번에 <고려사>를 잃으면서 발견한 것은 위화도회군 직후 이성계가 내린 중요한 결정들이다.

1388년 5월 24일 스스로 ‘반란군’의 죄를 뒤집어 쓸 각오를 하고 회군을 결정한 뒤,

최영이 이끄는 정부군과 개경에서 격돌하는 6월3일까지의 열흘 동안

이성계는 두 차례의 신중한 선택을 내렸다.

우선 그는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우려했던 길, 즉 친위병을 거느리고 동북 방면으로 진군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랬을 경우 고려는 아마 남북으로 갈라져 장기간의 대치 국면으로 가거나 아예 분단국가가 될 수도 있었다. 이성계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곧장 개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다음으로 이성계는 개경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천천히 진군할 것’을 명했다.

“너희들이 만약 주상 일행에게 해를 끼친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하여 급히 진격해 우왕을 사로잡거나 참살하자는 대다수 장수들의 의견을 거절했다.

그는 “오이 하나라도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다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 민심이 회군파 진영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만약 그때 급속 진군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는 어쩌면 ‘제2의 최충헌’ 즉 또 다른 무신정권의 일인자에 그치고 말았을 수도 있다. 다수 신민들의 지지를 얻어 새로운 나라를 창업하는 국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이성계는 공간적으로 우회하지 않고 수도 개경으로 곧바로 나아가면서도 시간적으로는 급히 서두르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의 신뢰와 지지를 동시에 획득했던 것이다.

 

나는 <고려사>의 그 대목을 읽으면서 이성계가 일종의 ‘마키아벨리안 모멘트’를 경험하고 있다고 느꼈다. 구질서가 무너졌지만 신질서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마키아벨리안 모멘트에서 지도자의 판단과 결정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다.

그는 위화도에서 일단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는 방향전환의 리더십, 즉 터닝포인트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사이에, 즉 1388년에서 1392년까지 기간 동안 중요한 고비마다 포기하지 않고 과감히 돌파해 가는 이른바 ‘고 포인트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회군 직후 자신의 세력기반인 동북면으로 가지 않고 곧장 개경으로 향한 것이 첫 번째 고 포인트였다면,

조정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제개혁을 추진한 것은 두 번째 고 포인트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정도전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돌파(go)’ 또는 ‘전환(turning)’을 결정했다.

 

 

객관적 정세, 시기, 사람 … 역사전환기에 지도자의 냉철한 판단 중요

 

그러면 그는 어떤 기준으로 결정을 내렸나?

압록강의 한 가운데서 회군을 결정할 때 그는 세 가지 근거를 들었다.

먼저 그는 지금이 비록 원명 교체기라고는 하나 명나라의 세력이 워낙에 강해서 “승리하지 못할 게 뻔하고, 군량의 보급도 어려운 형편에 자칫 요동 한 가운데서 고립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다음으로, 한 여름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어리석은 국왕과 노쇠한 최영”이 이끄는 고려조정 사람들을 믿고 무모한 일을 추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객관적 정세(勢)와 시기(時)와 사람(人) 모두가 부적절한 가운데 큰일을 벌이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이성계의 ‘회군의 변(辯)’에 나타난 결정의 세 가지 기준이

오늘날의 국가나 기업을 경영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녹색성장정책을 예로 들어보자.

지금 발생하고 있는 전지구적인 환경재앙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연임 지지에서 보듯 환경에 대한 각국의 높은 관심을 객관적 정세라고 할 수 있다. 객관 정세가 이처럼 녹색산업 정책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말해준다면 나머지는 결국 사람과 시기의 문제이다. 이 중에서 사람의 역할, 즉 녹색경영으로 전환하는 시기를 정하고 그 추진 속도를 조절하는 일, 그리고 국내외의 여론을 주도적으로 조성해가는 리더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녹색경영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비용 때문에, 또는 결단력의 부족으로 과거의 산업정책을 계속해나갈 경우 고려 말에 우왕이 당했던 비극을 우리라고 겪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위화도회군에서 조선 건국까지의 4년간의 역사전환기를 잘 살펴보면,

시대의 대세를 따라가지 못해서 제거되는 인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일차 대상은 최영이다.

우왕의 장인이기도 했던 그는 개경전투 직후 경기도 고봉현에서 유배되었다가 숙청당했다.

그 다음은 조민수와 이색이다.

한때 이성계오ㅘ 함께 회군파를 이끌기도 했던 조민수는 이색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개선을 통해 고려체제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이성계를 견제하려다가 오히려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마지막으로 제거된 사람은 정몽주다.

그는 정도전과 함께 ‘신유학의 나라’를 꿈꾼 사람이다.

하지만 이성계 일파에게 그는 개혁 이상의 변환, 즉 혁명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거나,

혁명 주체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비전은 같았으되 목표가 달랐다고나 할까.

여하튼 그들의 관계는 선죽교의 비극(1392)으로 끝났다.

 

이 대목에서 나는 생각해본다. 앞으로 녹색경영으로의 역사전환기에서 최후 승리자는 누구이고, 중간에 제거되거나 탈락될 자는 또 누구인가? 역사는 때로 지도자에게 냉철한 판단과 선택을 요구한다.

- 박현모, 한국형리더십개발원 대표, 한중연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 한국형리더십개발원, 리더십에세이, 2011. 8월 제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