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소설 속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에도 깊이 간여
강북구 우이동에서 방학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길가에 정의공주묘 팻말이 나온다.
정의공주묘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오른쪽에 연산군묘가 있고, 맞은편에 정의공주(貞懿公主)묘가 있다.
묘소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입구 정문 양 벽에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 묘와 정의공주 묘가 새겨져 있고, 한 울타리에 있다.
두 묘가 언덕에 나란히 같이 있으니 부부로 짐작이 되어 문화재 안내판을 보니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공주라고 하니 왕족의 무덤은 확실한데 정의공주는 누구일까?
다시 안내판을 보니 정의공주는 세종의 둘째 딸로 기록되어 있고,
안맹담은 정의공주의 남편, 즉 세종의 사위였다.
자연스럽게 안맹담과 정의공주에 대해 문헌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문헌 검색 결과 안맹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으나
정의공주의 경우는 매우 단편적인 기록뿐이었다.
정의공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딸로 출생하였고
(일부 자료에 의하면 공주의 출생 년도가 1415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기이고
출생년도는 미상이다),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세조의 누나이며, 아명(兒名)은 알려진 바 없다.
왕녀(王女)로 책봉될 당시에 정의공주로 명명되었다.
세종 10년(1428) 2월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인 안맹담과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맹담이 14세였으니 아마 공주도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추측된다.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역산(曆算)을 해득하여서 세종이 사랑하였다고 한다.
묘소에 있는 양효안공 신도비(神道碑)의 비문을 보면
특히 남편에 대해서는 부도(婦道)를 다하였다고 하고,
남편이 별세하고 난 뒤 묘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내내 슬퍼서 호곡을 그치지 아니하고
슬픔이 지나쳐 수척함을 스스로 견디지 못할 정도였으며,
장례 예법을 철저히 준수함에 그 누구도 이를 어기지 못하였다고 표기가 되어 있다.
공주는 성종 8년(1477) 2월에 사망하였고,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안맹담은 본관이 죽산(竹山)이며 관찰사 안망지의 아들로 태종 15년(1415)에 출생하였고,
세종 10년(1428)에 정의공주와 혼인을 맺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세종 14년(1432)에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고,
문종 즉위년(1405) 부마(駙馬, 왕의 사위)를 위(尉)라 개칭할 때 연창위가 되었다.
안맹담은 부귀롭게 성장하여 학술은 없으며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초서와 활쏘기,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음악과 약물(藥物)에 능하였다.
불법을 몹시 좋아하여 밥 먹이는 중이 항상 10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중의 옷을 입고 중의 아랫자리에 앉아서 불경을 읽고는 밥을 먹으며,
살생을 싫어하고 양잠(養蠶)도 하지 않았다. 특히 술을 좋아하여 병이 날 정도였고,
이를 안 세종이 술꾼들을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며, 세조 8년(1462) 4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부음을 들은 세조는 조회(朝會)를 이틀 동안 폐지하였고,
“어릴 적부터 함께 교유하여 애통함이 마음에 간절히 사무친다”라는 제문(祭文)을 내릴 정도로 애도하였다.
시호는 '양효(良孝)'라 하였으니 마음이 따뜻하고 즐기기를 좋아하여 '양'이라 하고,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겼다 하여 '효'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정의공주를 모델로 하는 소설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에 공주가 깊이 간여하여 훈민정음을 최종적으로 완성시켰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죽산안씨대동보』의 다음과 같은 기사에 따른다.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變音)과 토착(土着)을 다 끝내지 못해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그동안 우리가 알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상식에서 좀 벗어나는 내용으로
어찌 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 앞서 공주의 성품을 언급할 때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역산(曆算)을 해득하여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역산이라 함은 역학과 산학인데 지금의 천문학과 수학을 말하는 것으로
공주가 상당히 논리적인 사고를 가졌을 것으로 보여 세종이 요구한 문제를 능히 풀었을 것으로 판단 된다.
다만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은 좀더 검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도봉구 방학동 산 63번지 1호에 있는 묘소는 죽산 안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 안의 신도비는 정인지가 글을 짓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가 비문과 전액(篆額)의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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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 서울역사기행, 하이서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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