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찾아 떠나고(답사)

세검정, 세검정 터

Gijuzzang Dream 2011. 8. 17. 21:33

 

 

 

 

 

 

 세검정, 세검정터

광해군 폐위를 논하고 칼을 씻던 곳

 

 

세검정

 

 

칼을 씻은 장소에 세워진 정자, 이름 하여 세검정(洗劍亭).

참 독특한 정자이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단순한 사실만 가지고 세워졌을까?

조선시대 도성 밖 한가한 천변(川邊)의 단조로운 건물 이름치고는 거창하기도 하고 일견 흥미롭기도 하다.

 

 

세검정에 대해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건립 연혁에 대해 몇 가지 설이 나온다.

 

첫 번째는 연산군 6년에서 11년경 유흥을 위한 수각(水閣)으로 세웠다고 하고,

두 번째는 숙종 때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수비하기 위하여 병영을 설치하였는데

이곳 군인들의 쉼터로 세운 것이라고 하며,

마지막으로는 광해군 15년(1623) 이귀(李貴) · 김류(金瑬)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도성과 가까운 이곳 사천(沙川 : 홍제천) 물에 칼을 씻으면서 반정 거사에 대한 결의를 다짐하였음을

기념하여 세검정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검정이라고 현판을 걸기 전부터 정자는 존재하고 있었던 듯하며

다만 그 명칭 연혁에 대해서는 인조반정과 관련된 사유가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이 된다.

 

그런데 현재의 세검정- 최근에 복원된 것이지만 - 어찌 보면 너무 옹색하지 않은가 싶다.

인조 이후 역대 왕실에서 인조반정을 의거로 칭송하였다고 하는데

반정의 연장선상에 있던 창의문(일명 자하문)은-물론 서울의 4대문의 하나이지만-

그 당당한 모습이 세검정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영조 19년(1743) 영조가 세검정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오던 길에 창의문에 들렀는데

옛 인조반정의 일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이를 기리기 위해 시를 짓고

당시 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게 하니 이 현판은 창의문에 걸려 오늘에까지 전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세검정은 오히려 소외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옛 세검정의 모습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 그림 2점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유숙의 <세검정도(洗劍亭圖)>를 보면

정자의 지붕 모습과 구조가 약간 차이 나지만 2점 모두 정자 뒤로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처져 있고,

길 쪽에 문이 있는데 정선의 그림에는 개울 쪽으로 내려가는 별도의 작은 문이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정조실록』 정조 14년 9월 19일에 정조가 연융대(鍊戎臺)에서 활쏘기 시험을 본 다음

세검정에 들렀는데 정자에는 영조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있었으며,

이를 본 정조가 칠언 절구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는 기사와 더불어

정조는 연융대를 들르면 항상 세검정에 행차하는 일이 잦았다는 기록을 볼 때 

예전 세검정은 어느 정도 지위를 갖춘 격식 있는 건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세검정과 너럭바위(좌), 차일을 친 구멍이 있어 차일암이라고 부름(우)

 

 

세검정은 창의문 밖 탕춘대 옆에 있으면서 도성의 서북쪽 밖 북한산과 북악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며,

도성과 북한산성의 중간지대로서 도성의 북방 인후가 되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여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 지은 것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숙종 대에 북한산성과 서울 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설하는 등

이 일대가 서울의 북방 관문으로서 중요성이 커지면서 무신들의 휴식처로 자주 이용되었다.

영조 24년(1748)에 고쳐 지으면서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역대 왕들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이곳 개울에서 글을 씻어내는 세초(洗草)를 하였으며,

바위 위에 정자가 있고 폭포가 앞에 있어 매년 장마철 물이 불어날 때에

도성 안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구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차일암이 있다고 하고 있는데 정자 밑 너럭바위를 말한다.

넓고 반반한 바위에 더운 여름철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일을 친 구멍이 파져 있어

'차일암(遮日巖)'으로 부르고 있다. 차일을 쳤다는 의미는 세초를 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주변이 권문세가의 별장이 밀집된 지역으로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도 필요했던 것이다.

 

세초란 실록의 기초 자료인 사초(史草)를 씻는 작업으로

이는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다시 재활용하기 위해 먹 글씨를 지워내기 위해서 였다.

유독 이곳에서 세초를 하는 이유는

종이를 만드는 관청인 조지서(造紙署)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의 여파로 옛 건물이 소실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주춧돌만 남은 채로 방치되어 오다가

지금의 건물은 1977년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새롭게 복원된 것이다.

1970년대 초 · 중반 현재처럼 개발되기 이전 이곳은 홍제천의 맑은 물이 계곡으로 흘러내리고

널찍한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철마다 꽃과 단풍이 어우러진 명승지였기에

시내 초·중·고 학생들의 단골 소풍지로 애용되었는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고 정자 옆으로 도로가 나 있어 운치있던 옛 분위기는 많이 없어졌다.

 

종로구 신영동 168번지 6호 홍제천 냇가에 있는 세검정은 서울시 기념물 제 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상명대 앞 3거리에서 부암동으로 가는 길가 천변에 위치하고 있다.

 

■ 세검정 찾아가기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