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효창원, 효창공원

Gijuzzang Dream 2011. 8. 17. 21:22

 

 

 

 

 

 

효창원, 효창공원

효창공원에 가면 애국선열 묘소에 참배부터...

 

 

공원 입구 창렬문(좌), 공원 내부 전경(우)

 

 

효창공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공원 옆에 있는 효창운동장이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옛 동대문운동장과 더불어 크고 작은 축구경기가 치러진 곳이고

지금도 많은 축구 동호인들과 선수들이 애용하는 경기장이다.

 

그 다음으로는 애국선열 묘역이고, 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공원이라고 알고 있지

그 누구도 이곳이 조선시대 왕실 무덤인 효창원(孝昌園)이 있었던 곳이라고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공원 경내에 어디를 둘러봐도 효창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모를 수밖에 없다.

 

효창공원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들의 묘역이 있는 곳이지만

원래는 조선 후기 정조(正祖)의 장남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이 있었던 곳으로,

세자는 정조 6년(1782)에 태어나 세자 책봉까지 받았으나

정조 10년(1786) 5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왕실에서는 현재의 공원 자리에 묘를 썼는데 처음에는 효창묘(孝昌墓)라 하였다.

 

그 후 경내에 세자의 생모인 의빈(儀賓) 성씨(成氏), 순조의 후궁 숙의(淑儀) 박씨(朴氏),

박씨의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 등 왕가의 묘를 몇 기 더 두었고,

고종 7년(1870)에는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본래 효창원은 용산구 청파동과 효창동 일대의 수림이 울창한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 군대가 불법으로 주둔하면서부터 이곳을 훼손하기 시작하였는데,

일제는 조선 왕실을 격하하는 차원에서 1924년 효창원의 일부를 효창공원으로 개발하였고,

1940년에 삼청공원 · 장충단공원과 함께 도시계획상의 공원이 되었다.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무덤을 서삼릉(西三陵,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으로

강제로 이장시키면서 효창원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던 것이다.

 

 

김구 묘소(좌), 삼의사 묘소, 맨 왼쪽은 안중근의사 가묘(우)

7위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의열사(좌), 임정요인 묘역(우)

 

 

1945년 8월 광복과 더불어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는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1946년 7월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이어서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한 임시정부 의장과 주석을 지낸 이동녕과

국무원 비서장을 지낸 차이석,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귀국 후 타계한 조성환의 묘를 공원 동남쪽 언덕에,

1949년 6월 동포의 흉탄에 별세한 김구의 묘가 공원 서북쪽 언덕에 들어섬으로써

공원 경내 일대가 애국선열묘역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제2회 아시아 축구대회 유치를 구실로 1960년에 효창운동장이 묘소 바로 앞에 개설되면서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 연못 등이 헐리고 부지 일부가 운동장에 편입되었다.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년 4월 13일 효창공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 주관으로

7위 선열 합동추모제가 거행된 이후 매년 계속 되고 있다.

 

1988년 12월부터는 공원 정비공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의열사(義烈祠)와 창렬문(彰烈門)이 건립되고

묘역 확장과 정비가 마무리되었다. 1989년에 사적 제330호로 지정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원 내부로 들어가 보자.

공원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창렬문은 조선시대 양식을 따른 전통 문 형태이지만

최근에 만들어져서 이 문만 가지고도 효창원을 연상하기는 어렵다.

 

공원의 중심부에 삼의사(三義士) 묘역이 있다. 1946년 7월에 국민장으로 안장된 삼의사는,

1932년 일본 도쿄에서 일왕 암살 폭탄 의거를 일으킨 이봉창,

이봉창 의거와 같은 해 4월 중국 상해 홍구공원 폭탄 의거를 한 윤봉길,

1933년 역시 상해 육삼정 폭탄 의거의 백정기이다.

 

물론 이 3인은 일제에 체포되어 무자비한 취조와 고문을 받고 형을 언도받아

이봉창과 윤봉길은 사형 당하고, 백정기는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었지만 옥중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삼의사 묘역에는 1910년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려고 마련한 가묘,

즉 빈 무덤이 있다. 이 삼의사 묘역이 본래 효창원 자리이다.

 

공원 동남쪽 언덕, 관리사무소 뒤편으로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의 임정요인 묘역이 있고,

중심부인 삼의사 묘역좌측, 공원 서북쪽 언덕에 김구 주석의 묘가 있다.

김구 묘소 앞으로 이동녕, 김구, 차이석, 조성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7위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의열사가 자리잡고 있다. 김구 주석 묘역 좌측, 공원 바깥으로는 백범기념관이 있다.

2000년 6월 26일 기공식을 하여 2002년 10월 22일 개관한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전시실과 회의실, 자료실 등을 구비하고 있어

활발한 학술회의 개최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핵심시설로 평가받고 있다.

 

서삼릉에 있는 효창원

 

 

 

옛 효창원의 주인공인 문효세자에게 있어서 서삼릉 이장은

달갑지 않은 선택이고 유택을 빼앗겼다는 억울함도 있겠지만

묘소를 강탈한 일제를 처단하는데 기꺼이 한 목숨을 바친 이들이

당신이 한 때 몸담고 있던 자리에 들어옴으로 인해 오히려 치밀었던 분노를 삭히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즈넉한 서삼릉에서 편안히 쉬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효창공원은 오늘도 수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쉬고 즐기는 곳이지만

정작 애국선열 묘소에 참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아쉬운 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 효창공원 찾아가기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애국성지와 고개를 넘는 도심길

효창공원과 만리동 고개 넘어 염천교 가는 길

 

 

요즘 시민들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걷기운동이다.

걷기는 비만을 막아주거나 치료하고, 건강에도 가장 좋은 운동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래서 공원이나 하천변, 학교 운동장은 말할 것도 없고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열심히 걷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가히 걷기 열풍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렇지만 걷기 열풍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아무데서나 걷는 것은 결코 아니다.

등산도 걷기이고 동네 골목길이나 운동장에서 힘차게 걷는 것도 걷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걷기가 전부라면 굳이 열풍이란 표현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요즘의 걷기열풍은 차원이 다르다. 길을 만들고 골라서 걷기 때문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렇게 어디에나 있는 길을 그냥 두면 도로나 산길, 공원길, 샛길이거나

그저 한번쯤 지나치는 길로 그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굳이 그 길에 이름을 붙여주고,

거리를 늘리고, 의미까지 부여해가면서 스스로 걷는 재미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호젓한 길 또는 재미있고 경치 좋은 길의 대명사가 된 제주올레길이

유럽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 제주도의 올레길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올레길 선풍이 일어났다.

전에부터 있던 길이거나 길을 서로 연결하여 새로운 길로 하나둘씩 이름이 붙여졌다.

그 길에 다시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고, 건강운동을 넘어서 문화로 승화되는 길들이

근래 들어 무슨 올레길이니 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어서 오라고, 한 번 다녀가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울만큼 멋진 길과 거리가 많은 곳이 어디 또 있을까?

이미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길들도 많지만,

지금 한창 개발 중이거나 개발예정인 서울을 감싸고 있는 외사산길과 시내의 내사산길 외에도

‘도보전문가가 추천한 서울 생태문화길 우수코스 30선‘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시내 곳곳마다 조선 500년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길과 공원이 얼마나 많은가.

아름답고 멋진 서울의 길들. 길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녹아 있다.

 

길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했고 길이 필요해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니 산과 강, 바닷가의 길만이 꼭 좋은 길이고 올레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은 도시의 특성이 깊게 배어 있는 도심 올레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겨울 햇살이 고운 오후,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10번 출구를 나섰다.

저만큼 전차와 열차들이 오가는 철길 밑을 통과하는 갈월동 지하차도가 나타난다.

지하차도를 지나자 널찍한 4거리 도로가 앞을 막아선다.

곧장 길을 건너자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요람 숙명여자대학교 입구다.

고소한 냄새가 '소올~솔' 풍기는 작은 가게는 20년 전통의 ‘그때 그 호떡집’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여대생들이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잠깐 올라가자

역시 숙명여자대학교 제1캠퍼스와 제2캠퍼스 정문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마주보고 서있다.

 

언덕길을 올라서자 도로는 양쪽으로 갈라지고

건널목을 건너자 효창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다.

젊은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는 근처에서는 노인 한 분이 운동기구에 올라 건강 다지기에 여념이 없다.

 

그곳을 지나쳐 밑으로 내려가는 층계를 내려서자 공터가 나타나고 노

인들 몇몇이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있는 근처에 장난감처럼 작은 초가집 한 채가 발길을 붙잡는다.

볏짚으로 엮어 얹은 낮은 담장 안에 있는 두 칸짜리 초가집 마루에는

예쁜 옹기 항아리 네 개가 놓여 있는 모습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방문 위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 붓으로 쓴 글씨가 있고 

양쪽 바깥 기둥에는 국태민안(國泰民安) · 충효전가(忠孝傳家)라 쓰여 있다. 그 글이 예사롭지 않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과 충성과 효도로 가문을 이어간다는 뜻이었다.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가자 오른편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등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 묘역이 나타났다.

묘역 안에는 3명의 의사들 묘 옆에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기 위해 마련된

빈 무덤이 자리 잡고 있어서 더욱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묘역을 둘러보고 오른편으로 조금 올라가자 의열사(義烈祠)가 나타난다,

 

이곳은 역시 일제시절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선열들인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과 백범 김구 주석, 그리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등

일곱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이었다.

 

다시 왼편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백범 김구 기념관과 김구선생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념관 아래쪽은 효창운동장이었지만 겨울철이어서 운동경기가 열리지 않아 조용한 모습이었다.

기념관과 묘역을 둘러보고 위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자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이 서있다.

효창공원은 일제에 항거하여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애국선열들이

잠들어 있는 ’애국성지‘였다.

 

 

 

 

 

공원 위쪽의 산책로를 따라 후문을 나서자 왼편 도로 옆에 구립노인전문요양원이 서있다.

오른편으로 약간 구부러진 길을 따라 걷노라면 ‘부부칼국수’집이 나타나고

‘시골집’ 옆에 있는 아담한 세탁소 옆 골목길로 들어서 500여 미터쯤 걷자

콘크리트 내리막길 아래 만리동 고갯길로 가는 도로가 달리고 있다.

길가에는 예스러운 ‘기사식당’ 등 작고 초라한 건물들과 함께

훤칠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는 현대적인 건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이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우리 서울의 단면을 보여준다.

 

약간 경사진 길을 휘적휘적 걷노라니 만리동 고개 왼편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환일중고등학교 풍경이 늦은 오후의 밝은 햇살에 눈부시다.

이 언덕길이 서울 도심에 있는 대표적인 고갯길 중 하나인 만리동 고개다.

 

고개를 넘으면서부터 완만한 내리막길이 서울 서부역까지 이어진다.

서부역 경의선 전철 출입구와 롯데마트 앞을 지나면 인천공항철도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조금은 어수선해 보이는 서울역 구내를 오른편으로 바라보며 걷게 된다.

이 길에서 오른편으로 꺾이면 염천교로 빠지는 길이다.

 

염천교는 서울역과 만리동 사이에 있는 다리로

1960~70년대 가출청소년들과 빈민들이 거주하던 다리다.

주변은 오래전부터 구두를 짓는 업소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한 때는 ‘구두가 필요하면 염천교에 가보라’고 할 정도로 수제구두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지금도 이 거리는 온통 구둣가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염천교를 지나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꾸면 곧장 서울역으로 가는 길이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거리는 약 6km, 시간은 1시간 30분이 지나 있었다.

 

- 하이서울뉴스,  서울 올레길(22) 이승철,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