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섬(島). 그 역사를 되짚어 오늘을 본다

Gijuzzang Dream 2011. 6. 27. 17:06

 

 

 

 

 

 

 

 

섬의 이중성


섬을 지칭하는 영어 ‘island’는 물을 뜻하는 ‘is’와 육지를 뜻하는 ‘land’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물로 둘러싸인 육지’라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듯이,

섬은 해양성(물)과 육지성을 포괄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섬은 때론 ‘소통의 징검다리’로, 때론 ‘고립의 표상’으로 인식되기도 하여, 인식에서도 이중성을 내포한다.

 

섬에 대한 인식의 이중성은 곧 바다에 대한 인식과 연동되어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해양활동이 왕성했던 고려 이전의 ‘해양의 시대’에는

섬이 소통의 징검다리로 기능하고 인식되었던 반면,

해양활동이 금지되었던 조선의 ‘해금(海禁)의 시대’에는

저 피안의 세계에 동떨어져 있는 고립의 표상으로 인식되곤 했다.

결국 섬 인식의 이중성에는 그 자체에 시대성과 역사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통의 징검다리로서의 섬


근래에 신안군 압해도에서 구석기유물이 발견되었으니,

섬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시대의 지형이 오늘날과 달라서 연안도서인 압해도가 당시에도 섬이었는지

아니면 육지였는지 확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석기유물이 흑산도와 같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인들이 섬에서 시원적인 어로문화를 영위하면서 살았음은 확실하다.

 

사천시 늑도 유적에서 반량전과 오수전 등의 중국 고대 화폐와 한·중·일 고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서남해의 여러 섬들에서는 백제의 고분과 성곽들이 발견되었다.

그 각각은 B.C. 3세기~B.C. 1세기에 늑도가 동아시아 해상교역의 중요 거점포구로 기능했던 것을,

그리고 서남해역 여러 섬들이 백제 해양소통의 징검다리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섬이 동아시아 해양소통의 징검다리로 본격적으로 기능하고 인식된 것은 통일신라~고려시대였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먼저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해 동아시아 해상교역을 주도했던 것이나

흑산도 읍동마을에 절터, 관사터, 제사터 등 당시 국제해양도시의 위상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풍성하게 남아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흑산도의 유적들은 당시에 연안항로뿐 아니라

황해를 횡단(橫斷) 혹은 사단(斜斷)하는 항로가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긍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12세기 송나라 사신이 황해를 사단하여 흑산도와 서해의 여러 섬을 거쳐 고려에 내왕했고,

고려는 군산도, 마도, 자연도(영종도) 등의 섬에 군산정, 안흥정, 경원정 등의 객관을 설치해

그들에게 항해의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나온다.

고려가 섬을 동아시아 해양소통의 징검다리로 적극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231년에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고려는 백성들에게 즉각 섬에 들어가 지키도록 하명하고

그 이듬해에 왕도마저 강화도로 옮겼다. 그리고 서남해의 섬들을 근거 삼아 국내 바닷길을 소통시키면서

유라시아대륙을 석권한 막강군단 몽골군을 상대로 항전을 벌여 40년의 긴 세월을 버텨냈다.

1270년에 이르러 고려의 왕이 몽골 침략군과 타협해 강화도를 버리고 개경으로 환도해 버리자,

삼별초가 그에 반하여 강화도에서 진도로, 그리고 제주도로 중심지를 옮겨 가면서

서남해의 섬들을 근거삼아 3년 여의 해상왕국을 이어갔으니,

고려시대의 섬은 소통의 징검다리를 넘어서서 국가 해양력의 근간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립의 표상으로서의 섬


1273년 제주도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당한 후에 삼별초의 일부 세력이

남쪽 바닷길로 760여km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로 옮겨갔으리라는 견해와

삼별초에 동조했던 서남해역의 도서해양세력이 몽골과 고려에 계속 저항했다는 견해가

근래 제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와 몽골이 저항하는 도서해양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섬에서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공도(空島)의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다.

 

고려 말에 이러한 공도의 조치가 취해졌다고 한다면,

이는 그간 해양소통의 징검다리로서, 그리고 국가 해양력의 근간으로서 기능하던 섬이

무력화되기 시작하는 일대 전환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마침 그와 동시에 왜구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 역시, 공도로 인해 섬의 자위력이 상실되고

해양력이 붕괴된 결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고려왕조의 몰락은 해양력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셈이다.

그런데 그 결과로 탄생한 조선은 의외로 해양력의 재건에 나서지 않고

해양활동을 금지하는 해금정책을 채택하고 공도의 조치를 더욱 강화한다.

중국 대륙의 신생왕조 明이 내건 해금정책을 조선이 추수한 것이다.

 

명이 해금정책을 취하고 조선이 이를 추수하게 된 사정과 내막은 복잡한 설명을 요하므로

여기에서 상론하긴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되었다.

조선의 해금정책은 강력하게 실행에 옮겨졌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장기 지속되었다.

더욱 강화된 조선의 공도 조치는 왜구의 침탈로부터 섬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표방되긴 하였지만,

실제로는 해금정책을 철저하게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국가의 문호인 해양을 폐쇄한 조선의 해금은 곧 문호를 굳건히 걸어 잠근 쇄국(鎖國)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섬은 더이상 바닷길을 이어주는 소통의 징검다리가 아니었고,

점차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고립의 공간으로 전락했다.

 


 

 

왜구는 조선의 섬을 근거 삼아 연안과 내륙에 대한 약탈을 일삼았다.

조선은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정벌에 나서기도 했지만,

쓰시마를 점령해 지배하는 대신 훈계하는 것에 만족하고 철수했다.

조선은 바다 저 밖에서 꿈틀거리던 외세의 동태에 어두웠다.

그리하여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했다.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이순신과 그를 추종하던 해양세력의 후예들이 섬을 근거로 일본 수군을 저지했던 일이다.

거제도(옥포해전), 한산도(한산도해전), 진도(명량해전), 남해도(노량해전)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 돌산도, 고하도, 고금도 등이 이순신 수군의 근거지였다.

 

조선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을 가까스로 수습한 이후에도 해금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도도 아직 유효했다.

그러다 1세기가 지난 숙종 연간에 이르러서야 섬을 지키자는 의견을 일부 받아들여

주요 섬들에 수군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섬에 파견되어 들어가는 수군진 관원들과 함께 민간인들도 섬에 따라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비로소 공도의 굴레가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섬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고립된 공간이라는 인식은 강하게 잔존해 있었다.

섬 주민에 대한 천시의 풍조가 만연했고, ‘섬놈’, ‘뱃놈’, ‘갯것’이라는 비어들이 난무했다.


어쨌든 공도는 풀렸지만 해금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중국 배를 ‘황당선’이라 부르며 내항을 금지했고, 서양 배를 ‘이양선’이라 부르며 역시 배척했다.

‘이양선’은 영종도나 강화도와 같은 섬에 접근해 위협했다.

그러다 결국 서양화의 길로 접어든 일본의 배 운요호가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굳건한 해금=쇄국의 정책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은 이듬해에 강화도조약으로 부산, 인천, 원산에서 바다 문호를 강제 개방해야 했다.

임진왜란 때 살려냈던 그 나라가 망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해양의 시대’와 섬


그런데 오늘날 섬과 바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소극적이다.

섬과 바다에 대한 천시 풍조는 점차 개선되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 아직도 강하게 잔존해 있다.

‘물가에 가지 말라’는 경구가 아직도 우리의 뇌리를 울린다.

우리의 해양도시는 대부분의 바다를 위험시하여 난간으로 봉쇄해 바다에 접근 금지시키고 있다.

조선 500년 도서해양을 천시하고 위험시한 풍조가 역사의 관성이 되어 쉽게 멈추어 서지 않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조선업 세계 1위, 해운업 5위, 수산업 10위의 지표가 말해주듯,

오늘날 우리의 해양활동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섬과 바다에 대한 인식을 일대 전환시킬 당위성에 공감할 필요가 있다.

제도적으로는 상당한 진척도 있었다. 문화재청 산하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설립되어

육지문화재와 ‘차원이 다른’ 해양문화재를 연구하는 기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바다는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고, 섬은 그 바닷길의 징검다리이므로,

앞으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관심사는 바닷속 뿐 아니라

섬과 바다를 포괄하는 도서해양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도의 진척은 고무적인 일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와 함께 도서해양에 관한 연구 성과의 축적과 교육을 통한 사회적 확산을 병행 추진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고 시급하다. ‘신해양의 시대’를 맞아 이에 대한 국가·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자 한다. 

 

- 강봉룡 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 도서문화연구원장   사진ㆍ문화재청

- 2011-06-14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