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무계정사 터 - 안평대군 이용

Gijuzzang Dream 2011. 8. 17. 21:36

 

 

 

 

 

 안평대군 이용의 무계정사터

 

'몽유도원도' 탄생시킨 안평대군의 꿈

안평대군의 필적인 무계동 바위글씨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꿈을 꾼다.

길몽이 있는가 하면 흉몽도 꾸지만 일반적으로 아무 뜻도 없는 꿈이 다반사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S.Freud)는 『꿈의 해석』에서 ‘의미 없는 꿈은 없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꾸는 꿈은 각각 그 속에 모종의 의미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꿈의 일반적인 성격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억압된 욕망이나 생각들이 무의식적으로 충족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난데없이 꿈 이야기를 할까? 의아해 하는 분도 있으시리라.

안평대군의 무계정사터를 소개하다보니 꿈과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초기 대표적 화가였던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꿈에서 본 선경(仙境)을 재현한 그림이다.

이 그림의 동기를 준 사람이 안평대군이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세종 29년(1447)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에게 그 모습을 들려주어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더불어 꿈속의 경치를 못 잊어 현실에서 과연 그런 자리가 있나 하고 도성의 안과 밖을 답사한 결과

찾아낸 곳이 바로 오늘날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무계정사터이다.

 

문종 1년(1451) 꿈속에서 보았던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이곳에 터를 닦고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무계정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무계동은 안은 넓고 밖은 은밀하여 계곡물이 흐르고

골짜기 입구에는 폭포가 떨어지고 수백 그루의 복숭아나무와 대나무가 주위를 둘러싸는 듯 하여

가히 전설 속의 신선이 산다는 곳과 닮았다고 하였다. 요새 말로 하면 꿈은 이루어진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이 결코 헛되지 않음이 사례로 증명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정작 안평대군이 꾼 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호는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이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 중의 한사람이다.

세종과 단종시기 수양대군(후에 세조)과는 뜻이 달라 일정거리를 두었는데

권신 · 황보인 · 김종서 등 문신들과 결탁하여 매양 수양대군 측의 무신세력에 맞서고 있었다.

특히 인사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하는 등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황표정사를 폐지하였고,

안평대군은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힘썼으나

단종 1년(1453)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황보인 · 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강화도로 귀양보내졌다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무계정사터에 있는 한옥(후대에 건축)

 

 

생전에 안평대군은 1452년 단종 즉위 후 이징옥(李澄玉) 등을 시켜 함경도 경성의 무기를 서울로 옮기고

이곳 무계정사에서 장사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하며 무력 양성에 힘썼다.

한편으로 무계정사에 1만 권의 책을 갖추고

용산 강가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선비들과 함께 시를 즐겼다고 한다.

 

앞서 수양대군과 거리를 두었다고 하였고, 무력 양성에 뜻을 두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국정이 농단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정쟁이 없고 국태민안(國泰民安)한 이상향을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고,

이것이 무의식중에 작용하여 꿈으로 연결되지 않았겠는가 싶다.

바라던 것이 꿈에 나타나 이를 그림 그리게 하고 다시 그 이상향을 현실세계에서 찾음으로써

안평대군의 꿈은 더 큰 포부를 작정하게 하는 분수령이 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무력을 양성하였다고 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였겠는가 하는 것은 실로 의문이다.

왕조실록을 위시해서 각종 사료에 나타나는 안평대군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영조 23년(1747) 복권되기 이전까지 다소 악의적인 표현이 더러 나온다.

 

세종실록에도 여러 번 안평의 역모를 수양대군에게 알리는 내용이 있는데

특히 수양의 최측근인 한명회(韓明澮)는 아예 대놓고

‘안평이 임금의 자리를 엿보고 있으니 화란(禍亂)이 일어남이 조석에 있다’라고 하고 있고,

『연려실기술』에 ‘이때에 의논하는 자가, 안평이 다른 뜻이 있어 무이정사(무계정사의 별칭)를 지었고,

또 담담정에서 종서(김종서) 등과의 상종이 많았다 하여 이것으로써 죄목을 삼았다고 한다’라고

안평대군을 귀양 보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당시 왕권을 수양대군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말이고,

김종서를 비롯한 세종 때의 권신에 대한 모종의 반감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공터로 남아 있는 현진건 집터(좌), 현진건 집터 표석(우)

 

 

무계정사터는 부암동 주민센터를 바라보고 오른쪽 길로 올라가다 약 50m 지점의 갈래 길에서

다시 오른쪽 길로 오르다보면 길가변으로 공터가 나오는데

이 공터는 『빈처』, 『운수 좋은 날』 등의 작가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집터이다.

공터 뒤 언덕의 집 안에 위치하고 있다.

대문을 열고 돌계단을 오르면 오른편에 바위가 있는데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큰 현판 모양으로 가로로 새겨져 있어

이곳이 무계정사가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무계동 바위글씨의 크기는 세로 58cm, 가로 170cm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1974년에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이 되었다.

돌계단 위로 정자가 있는데 무계정사와는 관계가 없는 후대에 지어진 한옥 건물이다.

현재 무계정사터는 사유지로 출입을 하기 위해서는 소유주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 무계정사 찾아가기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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