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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 서문 - 단군에서 고려시대까지 역사를 체계화하다.

Gijuzzang Dream 2011. 8. 1. 18:37

 

 

 

 

 

 

 

 <동국통감> 서문

 - 단군에서 고려시대까지 역사를 체계화하다.

 

 

 

 

 

조선은 건국 후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고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선 역사서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태조대에 정도전이 『고려국사』(37권)를 편찬하였고, 태종대에 권근이 『동국사략』(6권)을 편찬한 데 이어, 세종대에는 본격적으로 전대의 역사인 고려사의 편찬 사업을 국가사업으로 기획하였다.

세종의 명을 받은 정인지 등에 의해 작업에 들어간 고려사 편찬 사업은 결국 문종대인 1451년 기전체 형식의 『고려사』 139권의 완성으로 결실을 보았다.

김종서 등은 『고려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편년체로 된 『고려사절요』(35권)를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고려사』가 왕의 역할을 중심에 놓고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였다면, 『고려사절요』는 재상을 비롯한 관료의 비중을 높여 기록한 것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정도전이나 김종서처럼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입장을 보였던 인물들은 역사서의 편찬에서도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고, 이들이 태종ㆍ세조와 같이 강한 왕권을 추구했던 왕들에 의해 제거된 점을 고려한다면 조선전기 역사서의 편찬에서도 신권과 왕권의 갈등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세조는 즉위 후 전제왕권의 강화와 부국강병책의 필요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웅장하게 쓰고 이것을 이전에 편찬한 『고려사』와 연결지어 『동국통감』이라는 통사를 편찬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세조대에 비록 완성을 보지 못했지만 신숙주, 노사신 등이 그 작업을 계승하면서 성종대인 1485년(성종 16)에 마침내 『동국통감』으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고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를 총정리하는 역사서가 완성된 것이다.

『동국통감』의 편찬 취지를 밝힌 이극돈의 서문은 중국의 역사서 편찬사를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리나라 조선 성종대까지 역사서를 편찬한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경서에는 도를 기재하고 역사서에는 일을 기록하니, 경서는 공자가 깎아서 정하고 지어서 만들어 이미 만세에 가르침을 드러냈습니다.

역사서는 사마천과 반고 이하 작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대대로 각각 책이 있어 넓고 넉넉하며 어지럽게 기록되었습니다. 학자들이 비록 10년 동안 공력을 다하여도 오히려 두루 읽지 못하는데, 하물며 人主는 날마다 만 가지 일이 있으니, 다시 어느 겨를에 두루 볼 수 있겠습니까?

선정 사마광이 역대의 역사서를 모으고 두루 여러 책에서 채택하여 그 요긴한 것을 모아서, 위로는 쇠한 주나라에서 시작해서 아래로는 오계(五季) 1) 에 이르기까지 장편을 지어 『자치통감』이라고 부르니, 진실로 사가의 나침반입니다.

자양의 주부자가 그것을 이용하여 『강목』을 지었는데, 문장이 간략하면서도 기사가 더욱 갖추어져서 경계함이 밝아지고 기미가 드러났으니 『춘추』의 근엄한 뜻을 깊이 얻었습니다. 후에 작자가 있었지만 모두 두 사람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經以載道 史以記事 經則孔子 刪定述作 已垂敎於萬世 史則馬班以下 作者非一代各有書 浩穰難記 學者雖窮十年之力 尙不讀遍 况人主日有萬機 復何暇於周覽哉 先正司馬公 裒集歷代史 旁採羣書 撮其機要上起衰周 下迄五季 作長編 曰資治通鑑 誠史家之指南也 紫陽朱夫子 因之作綱目 文約而事愈備 監戒昭而幾微著深得春秋謹嚴之旨 後有作者 擧不外於二家範圍之中矣]

 

  

이어서 우리나라 역사서 편찬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려시대까지의 역사가 소략한데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진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기자를 지나 삼한에 이르기까지 고증할 만한 문적이 없었으며, 아래로 삼국에 이르러 겨우 역사책이 있었지만 대강 간략함이 매우 심하였고, 게다가 근거도 없고 경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들을 더하였습니다.

후에 작자들이 서로 이어서 모으고 지으니 全史가 있고, 史略이 있고, 節要가 있었지만, 그러나 本史의 소략하고 빠진 부분을 또 다시 답습하였습니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시켜 33세대를 전하면서 거의 5백 년을 지났는데, 비록 國史가 있었지만 중간에 기재한 것이 너무 번잡하거나 간략하여 자못 사실과 같지 않은 것이 있었고, 또한 빠뜨리고 누락시키는 실수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태조강헌대왕은 運에 응하여 나라를 연 뒤 옛날의 圖籍을 거두어 들여 秘府에 간직하도록 하였습니다. 三宗이 서로 이어서 문치가 더욱 높아지자 官을 설치하고 局을 열어 『고려사』를 편찬하니, 이른바 ‘전사’라는 것이 있고, 이른바 ‘절요’란 것이 있어서 사가의 제작이 이에 점차 갖추어졌습니다.

세조 혜장대왕은 하늘이 내리신 성학으로 경사(經史)에 마음을 집중하여 일찍이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비록 여러 역사책이 있지만 가히 『자치』에 비길 만한 장편 통감은 없다고 하면서, 사신에게 명하여 장차 교정하고 바로잡으려 했으나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吾東方 自檀君歷箕子 以至三韓 載籍無徵 下逮三國 僅有國乘 粗略太甚加以無稽不經之說 後之作者 相繼纂述 有全史焉 有史略焉 有節要焉 然復襲本史之踈漏 高麗氏 統三爲一 傳世三十三歷年幾五百 雖有國史 中間記載繁簡 頗有不同 且未免闕遺之失 恭惟 太祖康獻大王 應運開國 收舊圖籍 以爲秘府之藏 三宗相承文治益隆 設官開局 撰麗史 有所謂全史者 有所謂節要者 史家制作於斯漸備 世祖惠莊大王 聖學天縱 留神經史 嘗謂左右曰吾東方雖有諸史 無長編通鑑可擬資治 命詞臣 將欲校讐 而事竟未施]


   동국통감
    ▶ 동국통감 권1 삼국기. 신라부터 기록되어 있다.

단군조선, 삼한 등에 대한 기록은 이 앞에 붙인 외기(外紀)에 들어 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대통을 이어받고 선왕의 계책을 뒤따라서 달성군 신 서거정ㆍ행호군 신 정효항ㆍ참의 신 손비장ㆍ행호군 신 이숙감ㆍ전 도사 신 김화ㆍ교리 신 이승녕ㆍ사의 신 표연말ㆍ전적 신 최부ㆍ박사 신 유인홍 및 신 이극돈 등에게 『동국통감』을 찬수해 올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신 등은 모두 용졸하여 재주가 삼장에 모자라는데, 삼가 綸命을 받들게 되니 떨려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삼국 이하 여러 사책에서 뽑아내고 겸하여 중국 역사에서 가려내서 편년체를 취하여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범례는 한결같이 『자치통감』에 의거하였고 『강목』의 필삭한 취지에 붙여, 번다하고 쓸모없는 것은 삭제해서 요령만 남겨두려고 힘썼습니다.

삼국이 함께 대치하였을 때는 '삼국기'라 칭하였고, 신라가 통합하였을 때는 '신라기'라 칭하였으며, 고려 시대는 '고려기'라 칭하였고, 삼한 이상은 '외기(外紀)'라 칭하였습니다.

상하 1천4백 년 동안 국세의 나누어지고 합친 것과 국운의 길고 짧은 것과 임금이 거행한 일의 잘잘못과 정치의 쇠퇴ㆍ융성하였던 것을 솔직하게 쓰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명교를 소중히 하고, 절의를 높이며, 난적(亂賊)을 토벌하고, 간신과 아첨하는 이를 주살(誅殺)한 것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근엄함을 더하여 거의 권장과 경계를 드리워서 후세에 교훈이 되게 하였습니다.

선유가 논단한 것이 있으면 모두 취하여 써 넣었고, 간혹 또한 신등이 억측으로 논변한 것을 첨부하였으나 극히 경망하고 참람하여 작자의 반열에 나란히 놓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我主上殿下紹膺大統 遹追先猷 命達成君臣徐居正 行護軍臣鄭孝恒 參議臣孫比長 行護軍臣李淑瑊 前都事臣金澕 校理臣李承寧 司儀臣表沿沫 典籍臣崔溥 博士臣柳仁洪 曁臣克墩等 撰修東國通鑑以進 臣等俱以庸拙 才乏三長 恭承綸命 凌兢罔措 謹摭三國以下諸史 兼採中國史 用編年記事 凡例一依資治 而寓以綱目筆削之旨 删繁削冗 務存要領 三國並峙 則稱三國紀 新羅統合 則稱新羅紀 高麗 則稱高麗紀 三韓以上 則稱外起 上下千四百年 國勢之離合 運祚之脩短 君擧之得失 政治之汚隆 靡不直書 至如重名敎崇節義討亂賊誅奸諛 尤加謹嚴 庶幾垂勸戒 而訓後世也 先儒之有論斷者 皆取而書之 閒亦竊附臣等之臆論 極知狂僣 不足齒作者之列]

  

신은 또 가만히 생각하건대, 기자가 구주의 학문으로 八條의 가르침을 폈으니, 당시에 반드시 행동과 말한 것을 기록하는 관원을 두어서 가언과 선행을 갖추어 기록하였을 것인데, 지금은 모두 없어져서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삼국의 것은 저속하고 허황되며, 고려의 것은 간략하고 난잡하게 되어 있으니, 비록 반고나 사마천에게 손을 빌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글을 꾸미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물며 신 등처럼 명망이 없는 비루한 지식으로 어찌 능히 융성한 위임을 우러러 본받아 한마디 말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우선 좁은 소견으로 여러 자료를 모아 순서를 매겨 57권으로 편성하고2) 책으로 꾸며 올리오니, 혹시 소간(宵旰)3)의 여가에 때로 살펴보시어, 지난 세대의 치란흥망의 자취를 거울삼아서 오늘날 좌우의 경계로 삼도록 하시고, 더욱 옛일을 상고하시는 성덕에 힘쓰신다면 그 지극한 다스림에 반드시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成化(명나라 헌종의 연호) 을사년 7월 26일 순성 좌리공신 가선대부 광원군 겸 동지의금부사 세자우부빈객 신 이극돈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서문을 올립니다.


[臣又竊念 箕子以九疇之學 敷八條之敎 當時必有記動記言之官 備載嘉言善行而今皆泯滅無傳 三國則鄙野荒繆 高麗則脫略舛錯 雖使借手於班馬 尙難爲之詞 况如臣等之諛聞陋識 安能仰體隆委 而贊一辭乎姑以管見彙稡纂次 編成五十七卷 粧潢投進 倘於宵旰之暇 時賜觀覽 鑑前世治亂興亡之跡 爲今日左右之箴警 益懋稽古之盛德則其於至治 未必無小補云成化乙巳七月二十六日 純誠佐理功臣 嘉善大夫 廣原君 兼同知義禁府事 世子右副賓客 臣李克墩拜手稽首 謹序]

1) 오계 :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사이의 시기인 오대(五代). 당나라 말기의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가 있었던 시대이다.
2) 서문에는 57권으로 편성한다고 했으나, 현재 전하는 『동국통감』은 56권 28책이다.
3) 소의간식(宵衣旰食)의 줄임말.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해가 진 후에 늦게 저녁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천자가 정사에 부지런함을 뜻한다.

 

 

『동국통감』은 서거정, 이극돈 등이 왕명을 받고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책이다.

1458년(세조 4)에 편찬 사업이 시작되어 고대사 부분이 1476년(성종 7)에 『삼국사절요』로 간행되었으며, 1484년(성종 15)에 고려시대의 역사를 합하여 『(구편)동국통감』이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인 1485년(성종 16)에는 전년에 완성된 책에 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신편)동국통감』이 56권 28책으로 편찬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해지는 『동국통감』이다.

『동국통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外紀,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년)까지를 三國紀,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新羅紀, 935년부터 고려 말까지를 高麗紀로 편찬하였다.

『동국통감』은 삼국을 대등한 국가로 해석하여 고려시대의 고구려 계승주의와 신라 계승주의의 갈등을 해소하였으며, 단군조선을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으로 확립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연대표기 역시 당시의 사실대로 卽位年 稱元法을 채택하여 사실을 온전히 보전하자는 입장에 있었다.

또한 조선이 건국된 후 권력 갈등을 일으켜 온 국왕, 훈구파, 사림파가 서로 합심하여 통사 체계를 구성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의 향기 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