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展
- 千鏡子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
고흐와 함께, 1996, 종이에 채색, 41x 32
갤러리 현대, 두가헌 갤러리
2006.3.8(수) ▶ 2006.4. 2(일)
110-190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80 | 02-734-6111 관람시간 : 오전 10시~ 오후 6시 (월요일 휴관)
그라나다 시장, 1993, 종이에 채색. 37.5 X 45
■ 전시 의의 갤러리현대는 2006년 올해의 첫 전시로 <千鏡子 -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展을 마련하였습니다.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난 천경자화백은 강렬한 색채와 상징적인 소재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확립하였고, 전세계를 여행하며 이국의 낭만과 풍물을 밀도있게 화폭에 담았습니다. 현재 뉴욕에 계신 천경자 화백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3점과 전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기증하였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는 50~60년대 미공개 작품 6점과 70~90년대 대표적인 작품 30여점, 천화백이 평생 작업하신 미공개 수채화, 펜화, 연필화 180점, 싸인만 안 했을 뿐 완성작에 가까운 미공개 미완성작품 40여점으로 엮어져 올해로 82세를 맞은 천경자 의 작품 전반을 되돌아보는 뜻깊은 전시입니다. 2005년 네덜라드의 반 고흐 뮤지엄(Van Gogh Museum 2005. 7. 2~2005. 9. 18)과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뮤지엄(The Metorpolitan Museum 2005. 10 .18 ~2005. 12 .31)에서 개최된 <빈센트 반 고흐-더 드로잉 Vincent Van Gogh-the drawings>전시는 드로잉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드로잉에 대한 재평가까지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렇듯 드로잉에 대한 중요성과 관심이 전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이때 놀라울 정도의 탄탄하고 속도감있는 천경자의 드로잉은 미술학도들에게 크게 귀감이 되고, 우리미술계와 미술애호가에는 천화백의 작품세계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저희 갤러리현대는 1973년, 1974년, 1980년에 개인전을 개최한 깊은 인연으로,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갤러리 현대 전관과 두가헌 갤러리에서 동시에 개최되는 이번전시에 천경자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기타치는 시인, 1960년대, 148 x 89
‘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 슬픔처럼 화사한 千鏡子의 환상여행 -
어느 날 꿈에서 천경자 선생을 만났다. 뉴욕의 한 아파트 창가에서 맨해턴 거리를 내려다 보는 긴 머리의 뒷모습을…. 황혼빛에 휩싸인 노화가의 실루엣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나비가 되었다. 한 마리 호랑나비가 되어 슬픔처럼 피어오르는 추억 속으로 환상여행을 떠났다. 극장의 빅쇼처럼 꾸미는 어머니의 그림축제 그로부터 얼마 후 뉴욕에서 전화가 왔다. 천 선생의 큰딸 이혜선씨의 목소리였다. 병상의 어머니를 위해 서울에서 축제를 꾸미고 싶다는 얘기였다. 전시장(갤러리 현대)을 극장처럼 꾸며 어머니 사진을 간판처럼 걸고 미공개작과 미완성 작품, 대표작과 드로잉을 한자리에 모으고 어머니가 입던 한복과 옛 사진도 함께 선보이는 빅쇼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볼거리가 많은 화려한 그림축제를 열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효심이 전해졌다. 천 선생의 근황을 물었다. 1998년 어머니의 건강이 탈진상태여서 뉴욕으로 모셨고 그 해 11월 서울시에 작품과 저작권을 기증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뉴욕에 눌러 앉으셨다고 했다. 피붙이 같은 작품들을 내놓은 후 한동안 몹시 허탈해 하셨으나 차츰 안정을 찾아 백화점에도 가고 허드슨 강변으로 스케치도 다니셨다는 것이다. 한동안은 집에서 미완성 작품에 채색을 하거나 마늘, 고추, 토마토, 가지 등의 채소를 색연필이나 크레용으로 작은 종이에 그리며 소일하시는 등 기력이 쇠하기 전까지 붓을 놓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2003년 봄에 뇌일혈을 일으켜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고 말하기도 힘든 상태라고 했다. 그래도 정신만은 놓지 않으셔 가족들도 알아보고 표정이나 손짓으로 의사표현을 하신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혜선씨는 “어머니 전시회를 서울에서 한다고 말씀 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시며 손까지 흔드셨다”고 전했다. 천 선생의 열정이라면 몸은 비록 이역에 있어도 마음만은 너울너울 날아와 생애의 가장 멋진 축제를 볼 것이다.
길례언니, 1973, 종이에 채색, 33[1].4 x 29 cm
한복 입은 새색시 시절의 자화상 공개 갤러리 현대가 꾸미는 ‘천경자 축제’의 타이틀은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다. 살아있는 전설의 화가에게 어울리는 최상의 화제(畵題)가 아닐 수 없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로 시작되는 천경자의 화력(畵歷)은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거쳐 이제 노년의 82페이지에 이르렀다. 그 사이 슬픈 전설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생애의 아름다운 페이지로 채운 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이번 천경자 선생의 전시회는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던 대규모 개인전이나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 신축개관 기념으로 열린 ‘천경자의 혼’과는 성격이 다르다. 전 작업을 결산하는 회고전도 아니고 기증작품전도 아니지만 이제껏 열린 어느 전시회보다 의미가 큰 종합전이다. 어쩌면 생전의 마지막 전시회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천경자라는 한 작가의 전모를 조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결코 다시 보기 힘든 기회가 될 것이다.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종이에 채색, 130 x 162 cm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작품은 세월을 5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 1950년 초반의 작가일기 같은 미공개작들이다. 한복을 입은 새색시 시절의 고운 모습이 담긴 자화상 ‘단장’과 막내 쫑쫑이를 안고 아이 아빠와 단란한 나들이를 그린 ‘목화밭에서’ 등은 작가의 젊은 시절 화풍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처음 선보이는 미완성 작품들과 드로잉들은 천경자라는 화가가 작품 한 점에 얼마나 공력을 쏟았으며 얼마나 꼼꼼하게 기초작업을 했는지를 읽게 해준다. 캐털로그 작업을 위해 펼쳐놓은 이런 작품들을 처음 대하던 날의 전율과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벅찼다. 여기에 ‘길례언니’,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황금의 비’ 등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대표적인 채색화들이 시대별로 전시된다니 수년 전 뉴욕에서 경험했던 반 고흐 작품전의 감흥 못지않은 환상의 축제가 될 것이다. 긴장감 늦추지 않으려고 한과 고독까지 사랑해 그 동안 천 선생의 화업은 정한(情恨)· 고독· 슬픔 같은 감성적인 접근, 상징적인 주제와 환상적인 색채 같은 수사적(修辭的)인 접근, 또는 동양화니 채색화니 하는 장르나 재료적인 접근으로 경도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 천 선생의 작업이 90년대 중반에 이미 끝난 만큼 이제는 그간의 틀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통시적이고 종합적인 평가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누가 울어
슬프다, 화려하다, 섬뜩하다, 환상적이다 하는 감성적 시각 못지 않게 왜 그가 뱀을 그렸고, 꽃은 그에게 무엇이고, 어째서 그는 마녀 같은 눈동자의 여인을 형상화했으며, 무엇을 찾아 지구를 몇 바퀴 도는 스케치 기행을 했는지 그 실체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그는 평생 한(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독을 멍에처럼 달고 살았지만 그 한과 고독은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탄식이 아니라 아름답고 화려한 감정이기도 했다. 작가는 인생이라는 굴곡 많은 삶 속에서 작가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기 위해 한과 고독을 죽도록 사랑하고 매달렸으며 결국은 순수로 걸러진 엣센스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런 한이나 고독 또한 일상 속에 녹아들기 마련이고 느슨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식어가는 감성의 용광로에 다시 창작의 불을 붙이기 위해 그는 아프리카로 남태평양으로 기행을 계속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충전시킨 것이다. 그 여행을 통해 남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색깔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고 그러다 보니 원근을 무시한 평면 조형이나 석채(石彩) 등을 섞어 쓴 색채로 자신만의 화풍(畵風)을 일궈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마디로 화가 천경자는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신들린 듯이 세상을 살았고 일신의 행복과 평안보다는 자학을 하면서까지 상상력의 샘을 판 작가였다. 그 결과 그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색채 속에 그 특유의 정한과 괴기스러움과 4차원의 세계를 녹여낼 수 있었다. 현대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천경자 화풍 천경자 선생은 자신만의 독창성을 살리기 위해 평생 고민했고 마침내 문학적 상상력과 해외 스케치 여행을 통해 방법론을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고독했고 가난뱅이 화가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동양화단에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고, 사실적인 이쁜 그림으로 인기에 영합하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은 벽에 걸기조차 섬짓한 인물화지만 시간이 흐르면 감성을 자극하는 미래지향적인 소재와 화풍을 찾아 세계를 방랑하며 구도자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 긴 여정 끝에 그는 마침내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천경자 풍(風)’을 이룬 것이다.
단장, 1950년대, 43.5 x 36 cm
천경자 선생의 자서전이나 수필집을 보면 그가 화가로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 쳤는가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개인의 삶과 화가로서의 인생을 그만큼 치열하게 중첩시키려고 애쓰고 그 과정을 글로 솔직하게 고백해 놓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녹아있고 생의 희열과 삶의 현장성이 생동한다. 모든 그림이 천경자 자신의 이야기이자 분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주 마녀 금색으로 그리고 싶어한 상상력
천경자 선생의 작가적 상상력은 매우 신비주의적이고 때로는 4차원적이다. 이를테면 ‘내 몸이 비행접시에 담겨 금성이나 화성으로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을 꿈에서 느낀다’, ‘나는 홀로 우주공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고독이 거울을 치면서 나를 울게 했다’는 식이다. 아름다울수록 고독이 맺히고 그 흐믓한 고독이 즐거워서 음미한다는 화가, 어느 때는 전생에 어느 왕조의 황후였다고 엉뚱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여자, 옆에서 대포소리가 나도 무섭기는커녕 속이 후련하고 시원하다는 사람이 천경자다. 늘 가난뱅이 화가임을 자처했지만 여류화가라는 칭호는 그에게 고귀하고 향기로운 단어였고 자존심의 원천이었다.
목화밭에서, 1954, 종이에 채색, 114 x 89 cm
회오리바람에 꽃보라가 날리는 듯한 누군가의 상여가 동네를 떠나가는 광경, 큰 불이나 불덩이가 운석처럼 튀어 오른 공포, 마을을 휩쓴 홍수, 그 잊혀지지 않는 일들과 인생의 의식들, 그리고 꽃, 무지개, 새, 뱀, 나비 등이 이 화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환상은 나비가 되고, 먼 무지개 너머 세계로 사라지곤 했다. 이 같은 태생적 기질과 무녀 같은 상상력에 젖어 살아온 천 선생은 기자들과 인터뷰 때마다 우주의 마녀를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달콤한 맛을 다 빼고 쓴 맛이 풍기는 우주인 같은 마녀를 그리겠다는 것이다. “4차원 세계에 사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려보는 것이 꿈이에요. 눈빛이 강하고 금분을 짙게 입혀 피부가 금빛을 띄게 하고….” 공해와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섬뜩하고 무서운 공포를 지닌 군상을 금속성의 색채로 표현해 보고 싶어한 그의 욕망은 여인들의 초상에서 짙게 베어 나온다. 판소리 가락으로 녹여낸 정(情)과 한(恨)천경자 선생의 모든 작품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작가의 한(恨)과 정(情)이 내면에 흐르고 있다. ‘내 온몸 구석구석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볼티모어에서 온여인, 1993, 종이에 채색, 38 X 46
천경자 선생의 슬픈 전설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아끼던 여동생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김씨 성을 가진 남자와 면사포를 쓰지 못한 채 두 아이를 낳고 살며 가슴 구비구비 쌓인 정한이다. 한(恨)이란… 깊은 우물 속에 깔린 신비한 보라색, 파아란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분위기, 홍두깨에서 돌돌 풀려 나온 빛깔, 다듬이 방망이 소리, 신경질이 섞여 화사하게 울려퍼진 목소리, 흥타령 곡조, 이제는 삭아 가라앉은 소리, 무턱대고 야산을 걸어 헤치느라 풀밟는 소리, 그 빛깔과 소리 위에서 어섬푸레 한을 느끼지만 한이 무엇인지, 좋은 것인지 슬픈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나에게서 사라진 그들의 영혼은 어디로 갔고 내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한평생 살다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지….’ ‘내 그림 속에다 아름답다 못해 슬퍼진 사상, 색채를 집어 넣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바로 한이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어쩌고 저쩌고 식의 그런 범상한 한이 아닌,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이 불쌍하고 아름답고 슬픈 혈육관계의 한 같은 것, 그런 것을 그림으로써 아름다운 자연에 곁들여 승화시키고 싶어서이다.’ 천 선생은 쌓인 한을 자식들과 어머니에게 쏟았다. ‘나는 들판에서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원색적인 사랑을 자식들에게 쏟아왔다’는 그는 가족사랑을 삶의 낙이자 인생의 최대 덕목으로 꼽았다.
용광로의 불처럼 타오른 아프리카와 중남미 여정
‘이국(異國)의 정취에 젖어, 50대 나그네의 뼈저린 고통을 삼키며, 공원에서 극장에서 투우장에서 정신없이 사생했어요.’ 천경자 선생은 46세에서 74세까지 28년 동안 열두차례 해외 스케치 기행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여자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실제로 여행 중 봉변도 당하고 짐을 잃어버리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5년 주기로 세계를 일주하며 그림여행을 계속했고, 이 때의 결실들이 그의 후기 작품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사월, 1974, 종이에 채색, 36 x 25 cm
쳔경자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미지의 사물에 대한 신비한 매력에 끌려, 또 아름다운 추억 속을 헤매며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했다. 천씨의 화문(畵文)은 그래서 자유분방하다. 그림이 인간과 자연의 표상이라면 글에는 문학과 미술과 영화와 연극이 살아 숨쉰다. 천경자 스케치 기행은 1969년 남태평양의 타히티에서 시작된다. 프랑스 화가 고갱이 말년을 보낸 섬, 하이비스카스라는 정열의 꽃이 그를 맞았다. 그곳에서 파리로 날아가 마르소의 팬터마임을 스케치하고, 이탈리아로 이동해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의 무대였던 베로나를 찾고, 베니스-플로렌스-폼페이-나폴리를 유람하며 지중해의 풍광에 젖는다. 1974년 3월 천경자 선생은 6개월의 긴 여정으로 아프리카의 검은 대륙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출사표를 던졌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아프리카 여행을 단행하게 된 광기(狂氣)는 오직 더 살고 싶은 집념에서였다. 나로서는 산다는 의미가 예술이라는 용광로에 불이 활활 타올라 새로운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그 생활에 있고, 아프리카의 자극과 풍물은 내 마음의 용광로에 불을 붙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리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해서 화가의 생명이 연장된다면 따라서 나라는 분신도 살수 있는 것이고 그러지 못할 때 나는 산다는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이디오피아에서 시작된 아프리카 여정은 케냐-우간다-콩고-세네갈-모로코와 사하라 사막을 거쳐 이집트에서 끝이 났다. 가는 곳마다 그는 이국의 풍물들과 사람들을 정신없이 스케치했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 위에서는 환각에 취해 모래 위를 한없이 구르기도 했다.
팬지, 1973, 종이에 채색, 62 x 48 cm
아프리카의 여인초상과 원색이 난무하는 군무(群舞), 피라미드, 스핑크스, 사막의 선인장, 꽃, 시장풍경 등의 작품들이 이 때 태어났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단순한 스케치가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야성과 신비가 풍토적 아우라로 녹아들어 ‘천경자 풍물화’라는 독자적 장르를 형성했다. 기행을 마치고 온 그는 ‘이번 아프리카 기행은 초현실적이었으며 순례자처럼 기도하는 자세로 스케치를 했다. 맹수를 만났을 때는 미친 사진사처럼 붓을 움직였다’고 했다. 1974년 천경자 선생은 재를 뿌려도 가슴속 용광로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꺼지지 않아’ 인도와 중남미로 떠났다. 인도에서 그는 사자(死者)와 생자(生者)가 공생하는 갠지스강에서 넋을 놓고 그 충격의 현장을 그렸다. 멕시코에서 시작한 중남미 기행은 페루의 쿠스코, 아마존을 거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로 이어졌다. 아마존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로 오지로 들어가‘금붕어가 산소를 들이키 듯’ 온갖 이름 모를 꽃들과 나비와 날짐승들을 유희하 듯 신들린 듯 스케치했다. 영미여행에서는 주로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불현듯 헤밍웨이의 집을 찾아 나섰고 ‘이구아나의 밤’의 산실인 테네시 윌리엄즈의 생가를 방문했으면 에드가 앨런 포의 집에서는 시상을 더듬기도 했다. 뉴올리언즈로 날아가 연극과 영화로 강한 인상을 받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나오는 전차를 찾아내 스케치하는 집념을 보였다. 애틀랜타 기행은 온통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차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한 에밀리 브론테의 고향을 찾아‘폭풍의 언덕’에 올랐다.
천경자 연구 자료로 보존해야 할 스케치와 드로잉 이번 전시회에는 천경자 화풍의 근간을 이룬 스케치와 드로잉이 대거 선보인다. 대부분 작품을 구상하기 위한 밑그림들이지만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드로잉들도 적지 않다.
황금의 비, 1982, 종이에 채색, 34 x 48 cm
천 선생이 작업하던 압구정 한양아파트 안방에서 간추렸다는 드로잉들은 누렇게 바랜 종이에 손때가 묻어있다. 스케치북에 때로는 찢어진 갱지에 작업한 꽃과 나무와 동물과 인체 데생을 보노라면 작가가 얼마나 기초작업에 충실했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꽃잎 하나하나에, 새들의 날개마다에 작가 나름의 기호로 색깔까지 적어놓은 흔적에는 작가의 섬세함이 묻어난다. 천 선생의 이 같은 데생력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시적에 기초가 닦였다. 실물을 보고 관찰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꽃가지에 난 잔털까지 섬세하게 사생하는 방법을 익힌 것이다. 고바야가와 교수에게 거울 보고 자화상 그리기를 연습한 그는 탄탄한 데생력을 발휘한 ‘조부상’과 ‘노부’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백노지를 잘라 뱀을 그렸던 천 선생은 홍익대 교수시절에도 스케치나 데생 등 기초에 역점을 두어 가르쳤다. 유럽의 여러 미술관을 돌아보며 데생과 드로잉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는 그는 해외 스케치 기행을 통해 그 방면의 달인이 되었다. 천 선생의 스케치실력은 움직이는 대상을 순간적으로 잡아내는 유려한 속필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선 몇 개로 대사의 특징을 예리하게 잡아내는 속필로 스페인의 플라멩고 춤과 투우현장을 그렸고, 아프리카 맹수들을 단번에 포착해냈다. 몰래 스케치하다 봉변을 당한 적도 많았지만 그는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상을 스케치 했고, 그것들을 다시 구성해 원색의 풍물화를 완성시켰다. 이번에 선보인 180점의 드로잉들은 천경자 회화의 근간을 이루는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기초를 무시하는 요즘 미술교육에 귀감이 될 만하다. 따라서 이 드로잉들은 흩어지지 않고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누군가 일관 보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완성작 못지않은 공력을 들인 미완성 작품
‘미완성의 작품, 미완성의 인생이라는 말을 나는 즐겨 쓴다. 완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실상 있다고 치더라도 나는 그 완성에 대해선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꿈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누구나 미완성작이 있게 마련이지만 천 선생에게는 유난히 미완성작품들이 많다. 그것은 천 선생의 작업스타일이 워낙 꼼꼼하고 느린데다가 한 작품과 무던한 대화를 나눠 마음에 들어야 비로소 사인을 하는 완벽성에 기인한다. 천 선생은 구도를 잡기 전에 데생을 하고 색깔까지 정한 후에 밑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채색을 하는데 색을 칠하다가도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뭉개버리고 다시 그려넣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물감은 수성(水性)이나 불투명 과슈를 쓰는데 유화로 그리듯이 붓질을 중첩시켜 밑에서부터 은은하게 비쳐오르는 중간색의 미묘한 색감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미완성 작품들은 서명만 안했을 뿐 완성작이라고 해도 손색없는 구도와 색감을 보이고 있다. 슈베르트 ‘미완성 교양곡’을 듣는 것처럼 미완의 작품들에는 또 다른 매력이 담겨있어 더욱 사랑스럽다.
서울시에 저작권까지 맡기고 미국에서 투병중
천경자 선생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자식들에게 작품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식들에게는 제 작품을 한 점도 전적이 없어요. 연필로 스케치한 것도 주지 않아요, 앞으로도 결코 자식들에게 작품을 넘겨주지 않을 거예요. 뭐라고 할까요. 자식들에게 주면 안될 것 같아요. 그러면 작품이 흩어져 버리니까.” 언젠가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겠다던 그는 1998년 채색화와 스케치 93점을 서울시에 기증했고 일체의 저작권도 일임했다. 현재 천씨의 기증작들은 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실에 전시중인데 대표적인 작품들은 그 곳에 가면 볼 수 있다. 채색화로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환상여행’, ’화병이 된 마돈나’, ’이탈리아 기행’ 그리고 작가가 가장 아끼던 ‘생태’가 포함 돼 있다. 전시장 한쪽에는 천 선생이 작업할 때 쓰던 화구들이 진열돼 있다. 천 선생은 피붙이처럼 아끼던 작품을 기증하고 지금 뉴욕에서 투병중이다.
천 선생님 서울 축제에 꼭 오세요.
필자가 천경자 선생일 만난 것은 1976년부터다.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필자는 천 선생을 서교동 자택으로 찾아가 ‘산실의 대화’라는 기사를 썼다. 천 선생은 필자를 친동생처럼 아껴 주었으며 절필을 선언하고 뉴욕에 가 계실 때는 작가의 심경과 근황을 친필로 쓴 편지를 보내주시기까지 했다. 올들어 부쩍 천 선생 생각이 났다. 그러더니 이런 서문까지 쓰게 된 것이다. 광화문에서의 천 선생 모습이 떠오른다. 가을이던가, 빨강색 투피스를 입고 빨강색 뾰족구두를 신고 잠자리 같은 큰 안경에 커다란 백을 들고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표정의 천 선생은 마치 서양 여배우처럼 화사했다. 그날 우리는 복청이라는 일식 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천 선생은 낮술 한잔에 거나해 시종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던 기억이 떠오른다. 천 선생은 멋을 아는 분이셨다.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의상에 가는 담배를 피우며 눈물을 글썽이던 일도 많았다. 필자에게 화가 천경자 선생은 최상의 취재원이었다. 기사를 써 달라고 부탁하는게 아니라 기자가 찾아가 취재하고 싶게 만드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판소리와 육자배기를 들으며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감성에 구수한 전라도 억양으로 풀어내는 사설은 그냥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아코디언 처음 배울 때의 어색함으로 시작한 글쓰기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의 글은 솔직담백하고 정과 한이 절절히 깔려있어 많은 독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와 수필집들은 다시 읽어도 천 선생의 체취가 손에 잡힐 것 같은 실감을 준다. - 정중헌<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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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자 (Chun Kyung Ja 1924- ) 1924 전남 고흥 출생 / 1944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현 동경여자미술대학) 졸업 / 1946 전남여교 미술교사 역임 1949 광주사범학교로 이직조선대학교 미술학과 재직 / 1954-74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역임 1969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수학 1976 국전 운영위원 역임 1978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1998- 뉴욕에 거주
■ 개인전 및 주요전시 2006 천경자-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갤러리현대, 서울 / 2004 천경자특별전,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서울 / 2002 천경자의 혼,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 1995 개인전, 호암갤러리, 서울 / 1994-90 4인전- 변종하, 윤중식, 권옥연 / 천경자, 이목화랑, 서울 / 1985 현대미술 40년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1980 인도, 중남미 풍물전, 현대화랑, 서울 / 1978 초대개인전, 현대화랑, 서울 / 1978-77 한국현대동양화 유럽순회전, 스코틀랜드, 핀란드, 파리 / 1974 아프리카 풍물전, 현대화랑, 서울 / 1973 초대개인전, 현대화랑, 서울 / 1972 월남기록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1970 남태평양 풍물시리즈 스케치전, 신문회관 화랑, 서울 / 1969 도불기념 개인전, 신문회관 화랑, 서울 / 제10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상파울로 1967 말레이시아 정부 초대전, 말레이시아 / 1965 제8회 개인전, 신문회관 화랑, 서울 개인전, 이토화랑, 동경 / 1963 개인전, 신문회관 화랑, 서울 / 개인전, 니시무라 화랑, 동경1962 필리핀 초대전, 필리핀 / 1959 회화전, 소레유 다방, 부산 / 1957 개인전, 동화백화점 화랑, 서울 / 1952 개인전, 국제구락부, 부산 / 1950 개인전, R다방, 목포 / 1949 개인전, 동화백화점 화랑, 서울 개인전, 광주공보관, 광주 / 1948 제2회 개인전, 광주여중 강당, 광주 / 1946 제1회 개인전, 전남여고 강당, 광주 / 1942,43 제22,23회 조선 미술전람회
■ 수상 1983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 1979 대한민국 예술원상 / 1975 3.1문화상 예술부문 / 1971 서울시 문화상 예술부문 / 1964 오월문예상 1955 대한 미협전 대통령상 / 1942,43 제22,2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 저서 1995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 1989 수필집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1981 수필집 <캔맥주 한 잔의 유희> / 1980 화문집 <꿈과 바람의 세계> / 1978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 1974 화문집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 1973수필 단행본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 1966 수필집 <언덕 위의 양옥집> / 1960 수필집 <유성이 가는 길> / 1955 수필집 <여인소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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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 현대 홈페이지에서......
■ Karunesh / Call Of The Tribes(부족들의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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