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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가마

Gijuzzang Dream 2007. 11. 30. 04:09

 

 

 


◆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    "조선왕실의 가마"

 

기       간 : 2005. 12. 30 - 2006. 3. 31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
개관 시간 :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토ㆍ일요일 : 오전 9시-오후 7시)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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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가마는

단순한 이동 수단에 그치지 않고

신분에 따라 크기와 장식, 부르는 이름도 달랐다.
특히 왕과 왕비가 타는 가마는 치장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가마는 또한 위엄의 상징으로

어가행렬 중에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왕이 탄 가마가 움직이는 것은 국가가 이동하는 일이었으며,

어가가 머무르는 곳이 곧 왕궁이었다.

 
임금의 행차를 그린 《노부반차도》에는

왕을 비롯한 왕실에서 사용하던 가마들의 행렬이 길게 보인다.

그러나 그 많던 가마들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는 가마는 고작 20여 개에 불과하다.
이중 왕실에서 사용하는 가마는 손에 꼽을 정도.

그나마 대한제국기에 사용하던 것들이다.

 

사라져간 왕실의 유물인 가마를 살필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왕· 왕비· 왕세자가 사용한
연(輦),
공주· 옹주가 탔던
덩(德應),
대한제국기에 새로 등장한
봉교(鳳轎),
어가 행렬에 위용을 더하기 위해 가마 주변에 배열하던 의장기 7점도 함께 선보인다.

 

이번 전관개관 상설전시실에 새롭게 자리하게 된 어연 등

조선왕실에서 사용되었던 가마와 관련 의장기들은

2005년 12월 개최된 “조선왕실의 가마”특별전을 위해

보존처리를 했던 것들이다.

일부 금장식 및 상감장식 등이

페인트, 부식물 등으로 덮여 있고 균열, 박락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페인트, 부식물 등을 물리화학적인 방법으로 제거하여

가마 장식을 원 상태로 되돌려 주었으며,

탈락, 균열, 박락 등 파손되거나 파손 우려가 있는 부분은

접합 및 보강을 통해 더 이상의 손상을 방지하여 주었다.

 

또한 깃발류는 금니, 안료 등이 박락되어

이에 대해 아교를 사용하여 보강처리를 함으로써 박락을 막아주었으며,

주름진 상태를 펴주어 향후 물리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어연의 상감 노출 광경>

<어연의 상감 노출 광경>

<덩의 경첩 페인트 제거>

<덩의 상감 노출 광경>

 <사인교의 탈락된 직물 접합>

<팔필기의 금니 박락상태>

 

 

 

(1)교룡(蛟龍旗· 294×235㎝)

 

교룡기

 

국내에 단 1점만이 현존하는 의장기인데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교룡기는
둑(纛 : 쇠꼬리나 꿩 꼬리로 만든 의장물)과 함께 왕권을 상징하는 의장기로

용기(龍旗), 용대기(龍大旗), 황룡대기(黃龍大旗)라고도 한다.

주로 왕이 탄 가마 앞에 위치시켜 전체 행렬을 왕이 총지휘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군영에서는 왕이 군대를 살필 때, 그 명령을 각 영(營)에 알리기 위해 사용하였다.

사각의 옥색 바탕에 두 마리의 용과 구름문양을 그리고

불꽃모양을 나타내는 테두리(화염각, 火焰脚)을 잇대어 만들었다.

어가행렬에서 말 탄 장교가 깃대를 받들고 그 주위에 네 명의 군사가

깃대에 연결된 끈을 잡고 나아갈 정도로 크고 중요한 의장기이다.

  

(2) 청룡기(靑龍旗) - 대가노부, 법가노부에 쓰이는 의장기로 군기로는 대오방기의 하나이다.

좌영(左營)이나 좌위(左衛)를 지휘한다. 푸른 바탕에 청룡과 오색 구름문양을 그렸다.

가장자리에는 불꽃을 상징하는 붉은 테두리를 붙였다.

 

(3) 흑고초기(黑高招旗) /  백고초기(白高招旗) -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위로 나누어

푸른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으로 만들고, 팔괘를 그려넣었다.

군영에서 방위에 따라 다섯 곳에 하나씩 세워 길을 가르거나 합치는 신호로 사용하였다.

고조기(高照旗)라고도 부른다.

 

(4) 가구선인기(駕龜仙人旗) - 거북을 타고 물결을 가르며 가는 신선을 그린 의장기이다.

의장기에 신선을 그린 것은 왕의 신성성, 초월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5) 백택기(白澤旗) - 대가노부, 법가노부에 사용하는 의장기이다.

백택은 유덕한 군왕의 치세기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로,

말을 할 줄 알고 만물을 통달하여 덕이 깊다고 여겼다.

백택은 용머리에 푸른 머리털을 지녔고 네 발로 달린다고 하였다.

 

북두칠성기(6) 북두칠성기 - 대장이 장수를 부르거나 호령할 때 사용한 군기로

북두칠성과 구름문양을 그렸다.

임진왜란 후 5군영에서 방위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사용하였다.

 

(7) 정축기(丁丑旗) - 대가노부에 쓰던 의장기로

부적 문양을 그린 육정기(六丁旗=정해기, 정사기, 정축기, 정미기,

정유기, 정묘기) 중 하나이다.

기의 중앙에 붉은색으로 부적문을 그리고,

위아래로 사람의 얼굴(신형, 神形)과 소 머리 부분(丑紋)을 그려 넣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속오례의(續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등

조선시대 의례서에 따르면,
어가행렬은 왕· 왕비· 왕세자 등 행사의 주인공을 태운 가마를 중심으로
군대· 친위대· 문무백관  종친 등 많은 인원을 비롯,

가마· 의물· 의장기· 의장물· 악대 등 물자를 동원했다.

이를 통해 국왕 중심의 지배 체제를 과시하려 한 것.

 

고궁박물관의 관계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가마 그림이 등장하지만

국가 의례에 따라 정비되고 체제가 잡힌 것은 조선 초기”라며
"조선시대에는 일반인도 가마를 탔지만 혼례 등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 그쳤다” 고 말했다.

 

 

 

<참고> ===========================================================================

 

◆ 1.  노부(鹵簿)류  

 

노부(鹵簿)는 "의장(儀仗)을 갖춘 국왕의 거둥 때의 행렬(行列)" 을 말하며,


조선은

세종대부터 예제(禮制)를 정하기 시작해 성종 대까지 4대 60년 만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 완성하여

우리나라 처음으로 국가의 기본예식을 정하였다.

의장(儀仗)을 갖춘 국왕 거둥 때의 행렬인 노부에 관한 것도

이미 세종대에 이루어져 조선왕조를 통하여 모든 노부의위(鹵簿儀衛)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 세부내용이 《세종실록》 및 《국조오례의》에 잘 나타나 있고,
노부식(鹵簿式), 의장반차도(儀仗班次圖) 등에는

출가(出駕)의 대소의장의 수효와 종관(從官)의 차례 및 위치를 도식화하여 의식의 규범으로 삼았다.

 


조선왕조의 노부에는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노부로 나뉘어진다.

대가노부(大駕鹵簿)는 조칙(詔勅)을 맞이할 때와 사직과 종묘에 친히 제향할 때,

법가노부(法駕鹵簿)도 문소전(文昭殿), 선농에 친히 제향하고,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석존례(釋尊禮)를 행하고, 사단(射壇)에서 활쏘기를 할 때나

무과(武科)의 전시(殿試)에 사단(射壇)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할 때,

소가노부(小駕鹵簿)는 능에 참배하고 활 쏘는 것을 관람할 때나

평상시의 대궐 문밖에 거둥할 때 이를 사용하였다.


1762년(영조 38)의 「노부식(鹵簿式)」은

초기에 정해진 노부의장내용이 집대성되고 완전히 정립된 것으로

내용도 《세종실록》이나 《국조오례의》보다 자세하다.

「노부식」에는

대가· 법가· 소가· 도가(大駕, 法駕, 小駕, 道駕)의 사용법과

기우제의장(祈雨祭儀仗),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등의 의장식이 적혀 있고,

부록에 「인정전정지탄일조하(仁政殿正至誕日朝賀)」,「인정전진연(仁政殿進宴)」,

「인정문조참(仁政門朝參)」,「황의장(黃儀仗)」,「영정세의장(影幀細)」,「행용세의장(行用細)」,

「악기공생총수(樂器工生總數)」등이 수록되어 있다.

「노부식」에 열기 되어 있는 대소의장들은 실제 사용된 것으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 유물들이라 하겠다.

 

어가행렬에서 가마 주변에는 다양한 의장들을 배치하여

주인공의 존재를 다른 이들과 차별화시켜 드러낼 수 있었다.

특히 이러한 의장들은 행렬의 규모나 왕, 왕비 등 모시는 주인공에 따라 수량을 달리하였다.

이렇게 가마를 중심으로 다양한 의장을 구비한 어가행렬은

거둥의 목적과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행렬, 법가(法駕)행렬, 소가(小駕)행렬로 나뉜다.

가장 규모가 큰 대가행렬은 종묘 · 사직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거둥할 때나 중국으로부터 조칙을 받을 때, 법가행렬은 문소전(文昭殿)·선농단(先農壇)·문선왕묘(文宣王廟)에 제향할 때 사용했던 어가 행렬이다.

또한 소가행렬은 능 참배 등 교외로 나갈 때 사용하는 가장 간단한 규모의 행렬이다.


어가행렬에 사용되는 의장은 크게 의장기와 의장물로 나눌 수 있다.

의장기에는 군대에서 쓰는 군기와 순수한 왕실 의장기들이 있다.

그 종류로는 교룡기(蛟龍旗)와 같이 왕권의 상징인 용을 그린 기,

방위신인 사신(四神)을 그린 기, 백택 · 기린 등 상상의 동물을 그린 기,

팔괘기(八卦旗)와 같이 우주의 생성 원리를 표현한 기,

해 · 달 · 별 · 봉우리 등 영원한 자연물을 그린 기,

청도기(淸道旗) · 영기(令旗) 등 문자로 내용을 표현한 기가 있다.

 

의장물은 권력을 상징하면서 군사적 성격도 동시에 갖는 도끼 · 칼 · 창의 모습을 의장화한 것들과

그늘을 만들어 주는 덮개의 용도에서 시작된 실용적 성격의 당(幢) · 개(蓋) · 산(傘) · 부채(扇)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어가행렬을 청각적으로 알려주는 나팔 · 북 · 각(角) 등 고취악기들이 있었다.

또한 어가행렬에는 의자 · 먼지털이 · 침그릇 · 세숫대야 · 향합 · 향로 등 일상용품에 속하는 것들도

포함되었다.

 

 

의장으로 사용된 구체적인 품목은

각종의 깃발, 산(傘), 선(扇), 부(斧), 창(槍) 등 매우 다양하며

이들을 장엄하게 위엄을 갖추어 정렬하였다.

그 중에서 의장기는

기 자체가 상징적인 표지(標指)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장의 핵심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다.
자연물인 천, 일, 월, 산 및 동물, 선인 등을 모상하였는데

사회와 시대의 변천에 따라 형태, 색, 내용의 변화를 보이면서

점차 양식화, 도식화되어 갔던 것이다.

   

의장물(儀仗物) 역시

직접적인 권력의 표지(標指)가 될 수 있는 도끼,

창, 칼 등의 군사적인 요소의 의물(儀物)들과

상서로운 의미를 내포하는 산(傘), 선(扇) 등

통치자의 절대적인 위치를 부각시키려 하였다.

의장(儀仗)으로 사용된 구체적인 품목은

각종의 깃발, 산, 선, 부, 창(傘, 扇, 斧, 槍)등 매우 다양한데

중국에서는 호, 표, 마, 상(虎, 豹, 馬, 象) 등 살아있는 짐승을 동원하기도 하였으며

이들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정제하였다.

 

□ 금월부(金鉞斧)
금월부는 용이 도끼를 물고 있는 나무 조각을 금칠하여 봉에 꿰어 만든 의장물로,

용이 박쥐문양으로 장식된 여러 개의 날을 세운 원통을 물고 있는 형태도 있다.

같은 형태에 은색을 칠한 은월부와 함께 사용된다.

월(鉞)은 날이 한 쪽에만 있는 큰 도끼이고 부(斧)는 작은 도끼이다.

특히 월은 천자가 장군을 임명할 때 수여하는 의물로서 전권을 넘겨준다는 상징적 의미로 쓰였다.

□ 쌍룡부채(雙龍團扇)
원형 부채 모양의 의장물로 종이로 초배접한 후 붉은색 명주로 다시 배접하였다.

그 위에 양쪽으로 청룡과 황룡 두 마리를 내려오는 모습과 오르는 모습으로 그렸다.

다양한 색상의 안료로 앞뒷면에 똑같이 그렸고 금분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흔적이 남아 있다.

□ 꿩 깃 부채(雉尾扇)
윗부분을 둥글린 아치형의 부채모양 의장물이다.

종이로 초배접한 후 붉은 색 명주로 다시 배접하고 가장자리에 꿩의 꼬리를 그린 다음

그 안에 두 마리의 꿩과 꽃을 그렸다.

뒷면은 본래 파란색 명주 바탕에 모란을 그렸으나 모두 바래서 바탕색과 안료색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와 같이 노부에 등장하는 온갖 기치(旗幟)와 의장물들은

그 사회의 사상의 전통이 종합적으로 투영된 상징의 집합체로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의장기는
육정기· 가귀선인기· 백택기· 유린대기· 유린기· 삼각기· 호기· 청룡기· 황룡기· 황룡대기·

천마기· 천록기· 홍문대기· 현무기· 주작기· 공작기· 오색금륭기· 감우기· 벽봉기· 적봉기·

의봉기· 백학기· 운학기· 사득기· 오성기· 귀성기· 북두칠성기· 좌독기· 고초기· 표이기·

팔괘기· 팔봉기· 금자기· 고자기· 금고기· 청도기· 출경기· 팔필기· 문기순시기· 령자기

등이 있고

 

의장물에는

작선· 봉선· 치미선· 용선· 파초선· 소선· 황선· 흑선· 봉단선· 용봉단선· 쌍룡단선· 청단선·

홍단선· 홍양선· 황양선· 자방잔· 황산· 칠봉개· 홍개· 청개· 흑개· 백초당· 청룡당· 주작당·

금립과· 금횡과· 은횡과· 금등자· 은등자· 금월부· 은월부· 금장도· 은장도· 삼지창· 장창·

당파 등이 있다.


국가적인 의례행렬인 노부에는 가능한 최대 최상의 의장이 선택되는데

통치자의 위의(威儀)를 최대한으로 나타내주는 상징성을 내포하며

일반대중에게 의미와 의지를 이해하여 공통의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 대상물의 선택은 전통적, 사회적 배경과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결과로

이들은 그 사회와 시대의 사상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상대사회의 노부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그 형식을 알 수 있어

안악 3호분, 안악 1호분, 약수리고분, 덕흥리고분, 수산리고분 등으로

제일 규모가 큰 것은 안악 3호분이다.

고구려벽화의 의장기의 종류는

장폭기(長幅旗), 거치형기(鋸齒形旗), 장방형기(長方形旗), 홍색기(紅色旗),

영기형소기(令旗型小旗),

그리고 의장물로는

곡병산(曲柄傘), 저절(旌節), 부흠(斧欽), 궁전(弓箭), 등롱(燈籠), 불자(佛子), 창(槍),

궁(弓), 환도(環刀), 장창(長槍) 등이 보인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우리나라 의장제는 삼한의 의장과 풍토를 그대로 쫓았고

신라 태종왕에 이르러 당의 제도를 점차 따르기 시작하였으며

고려개국초에는 신라의 구제를 따르다가

의종(1146-1170)대에 최윤의(崔允儀)가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를 만들어

제도가 완비되었다.

 

고려의 모든 대례, 대조회 때의 내외의장이 의종에 이르러 상정(詳定)된 것이다.

인종(1122-1145)대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송(宋)과 비교하여 고려의 의장이 송의 전례에는 맞지 않으나

다른 오랑캐에 비하면 찬연히 빛나 볼만하다 하여

인종 대 까지 고풍(古風)을 따른 것으로 중국제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고려의 의장기류와 의장물들은 《고려사》와 《고려도경》에서 자세히 전한다.


 

===☞ 어가행렬 노부(鹵簿)류는,

<조선시대의 어가행렬>(백영자/ 한국방송통신대교수/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1994)

기타 의궤영인본, 의궤관련 도서 등.... 궁중기록화 등... 참고하시면...^^


 

 


◆ 2.  가마의 종류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조선시대에는

말이나 사람이 이끄는 가마를 이용하였는데

가마는 조그만 집 모양으로 생긴 탈것의 하나로 안에 사람이 들어앉고,

앞뒤에서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밑에 붙은 가마채를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매어 운반하는 도구를 말한다.

 

가마는 타는 사람의 신분과 용도에 따라서 구분되었다.

또한, 가마는 벽체와 뚜껑이 있는가,

청익장과 같은 화려한 휘장이 있는가,

아니면 주렴이 늘어져 있는가 등등 치장의 화려함으로도 격을 따지지만,

그보다는 몇 사람이 메는가가 더 중요했다.

 

가마꾼이 많을수록 행렬이 화려해짐은 물론이고

가마의 요동이 덜하여 오래 타도 피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주가 타고 다닌 덩은 8명,

세자가 타고 다니던 연은 14명,

왕이 타는 연은 20명 가까운 인원이 메었다고 한다.


 

 

 

(1) 왕실용 가마  

여러 가지 연(輦), 여(輿), 교(轎), 거(車) 등이 있어 상황에 따라 알맞은 것을 택하였다.

 

연(輦)은 조선시대에 왕과 왕비 및 왕세자가 탔는데,

난가(鸞駕), 난여(鸞輿), 옥연(玉輦)이라고도 한다.

좌우와 앞에 발이 있고 두 개의 채가 길게 붙어있다.

원래 연과 여(輿)는 구별이 있어,

연은 임금이 타는 것으로 밑에 수레를 달아 말이 끌었고,

여는 사람의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이었다.

 

지붕, 몸체, 가마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가옥의 모양을 따랐다.

몸체 네 모서리에 용을 그린 둥근 기둥을 세우고 다시 둥근 기둥 사이에 각기둥을 세운 후

윗부분은 비워 두고 아랫부분에만 난간을 돌렸다.

몸체에 주칠을 한 후 난간 부분에 금색으로 백택(白澤), 기린(麒麟) 등 다양한 상상의 동물들을 그려 넣고,

쇠에 입사(入絲)한 거멀장식으로 필요한 부분을 보강하였다.

네 면에 주렴을 드리우고 다시 휘장을 내려,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연

조선시대의 연은 지붕에 붉은 칠을 하고 주홍과 황금으로 장식하였으며,

둥근 기둥 4개로 작은 집을 지어 위에 올려놓고,

사방에 붉은 난간을 달아

겉에는 운용(雲龍)을 그렸으며, 안에는 운봉(雲鳳)을 그렸다.

지붕 네 모서리 봉황 장식에 고리를 달아 유소(流蘇)를 고정시켜 내려뜨렸다. 내부에는 주칠(朱漆)한 의자[교의(交椅)]에 발판[각답(脚踏)]을 갖추어 어좌를 만들었을 것이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가마채의 끝부분에는 도금한 용머리 장식을 끼워 마감하였다.

처마에도 여러 가지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소련(小輦)· 대련(大輦)· 평련(平輦) 등이 있다.  
 

140.0×140.0×260.0cm 가마채 600.0cm 유소


 

봉련(鳳輦)은 가마의 꼭대기에 황금 봉황을 장식하였기 때문에 불린 이름으로,

좌우와 앞에 주렴(珠簾)이 있고 헝겊을 비늘모양으로 늘였으며,

매우 긴 채 2개가 있다. 공주 · 옹주가 타던 가마인 덩과 비슷하다.

 

 
가교(駕轎)는 왕이 장거리 행차 때 타던 가마.
앞뒤로 말을 한 필씩 배치하고 안장 양쪽에 채끝을 걸어 메어 채가 흔들리지 않게 하였다.

임금이 어가(御駕)로 거둥할 때에는

'가교봉도(駕轎奉導)’라 하여 별감(別監)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가교에는 왕이 직접 타는 정가교(正駕轎)와

 정가교의 앞에서 가는 빈 가교인 공가교(空駕轎)가 있는데,

공가교는 불안을 느끼거나 소란한 곳에 거둥할 때 사용하였다. 
 

 

 


덩(德應)은 공주와 옹주가 타던 가마로 연과 비슷하다.

가마 전체에 주칠(朱漆)을 하고 앞부분과 출입문, 양측면 창문 그리고 아래 난간 부분 등에

꽃, 넝쿨, 박쥐, 칠보문, 수(壽)자문 등을 부조로 장식하였다.

창은 겹창으로 만들었는데, 미닫이형 내창은 덩굴문양을 투각하여 장식하였고,

지붕에서부터 검정색 비단으로 휘장을 내려 창문을 막았다.

지붕은 각진 궁륭형을 이루면서 꼭대기를 납작한 보주로 마무리하였다.

가마채는 별도의 고리를 만들어 고정하였고, 끝부분은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8명의 교군(轎軍)이 어깨에 메고 가는 가마이므로 '필인교(八人轎)' 라고도 한다.

특별히 지위가 놓은 고관 대작의 가문에서 혼례를 치를 때에 신부가 탈 수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궁중의 여인들이 타는 가마와 말을 관장하던 덕응방(德應房)은

사복시(司僕寺)의 분장(分掌)으로

덩(德應)을 관리하고 덩꾼(德應軍)을 두어

내전(內殿)의 동가(動駕)가 있을 때 가마를 메게 하였다.

 

 


 

 


 

2. 관리들이 타던 가마  

 

평교자(平交子), 사인교, 쌍가마, 초헌, 남여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 품계에 따라 수레나 가마를 타던 제도를 "轎輿之制(교여지제)" 라 한다.
평교자(平轎子)는 1품과 기로(耆老),
사인교(四人轎)는 판서 또는 그에 해당한 벼슬아치,
초헌(車+召 軒)에는 1품이나 2품의 벼슬아치,
사인남여(四人籃與)에는 종2품의 참판 이상,
남여(籃與)는 3품의 승지와 각 조의 참의(參議) 이상,
장보교(帳步轎)는 하급 관원이 탈 수 있었다.

 

한편, 관리들이 가마를 타고 대궐 안까지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3정승과 조선 말기 청나라 공사(公使) 뿐이었다.

 

평교자(平轎子)는 교헌(轎軒), 교자(轎子)라고도 하는데

종1품 이상 정승 및 기로소(耆老所)의 당상관이 탔던 것이다.

포장이나 덮개가 없는 가마로,

앞뒤로 2명씩 네 명이 끌채에 끈을 걸어 어깨에 메고 천천히 가도록 되어 있다.

의정 대신 이상이면 평교자에 파초선(芭蕉扇)을 등뒤에서 머리 위까지 가리우도록 하고

햇빛이 뜨거울 때는 일산(日傘)을 받쳐들었다.

 

 

사인교(四人轎)는 앞뒤에 각각 두 사람씩 모두 4사람이 메는 가마로

판서 등의 관리가 호피를 깔아 사용하였으나,

민간에서는 혼례 때에 이용하였다. 신랑 것은 보통 장식이 없지만

신부의 가마는 꽃가마라고 하여,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하거나 술을 다는 등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가마 몸체에는 부부 금실이 좋고 자손이 많기를 비는 무늬를 새겨 넣었고

가마 덮개의 4면 가장자리에는 5가지 색술을 둘렀다.

옆 미닫이 창문에는 꽃을 그려 넣은 유리창을 끼우고

들창문과 양쪽 문 밖에는 바탕에 거북등무늬가 그려진 구슬발을 달았는데,

발에는 부채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가마 안에는 바닥에 숯과 목화씨를 놓고 그 위에 방석을 깔았다.
신부가 신랑집으로 갈 때에는 신부의 가마에 흰 천으로 휘장을 두르고,

가마 지붕에는 호랑이 가죽이나 쓸개를 얹어서 잡귀와 액을 물리친다.


 

 


쌍가마(雙駕馬)는 가교(駕轎), 쌍교(雙轎), 쌍마교(雙馬轎), 쌍가교(雙駕轎)라고도 하는데

말 2마리가 각기 앞 뒤채를 메고 가는 가마로 조선 후기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외국에 나가는 사신, 감사(監司) 등 종2품 이상,

관찰사· 의주부윤(義州府尹)· 동래부윤(東萊府尹) 등만이 탈 수 있었으나,

승정원의 승지를 지낸 정3품 수령(寸令)은 예외로 탈 수 있었다.

왕과 그 가족 외에는 도성(都城) 밖에서만 타게 되어 있었다.

특히 정2품 지방관은 지방에서만 타고 서울 안에서는 타지 못하였다.

 

이런 법령이 잘 지켜지지 않아

고을 수령들이 임지에 부임할 때나 도성 문을 나서자마자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고

스스로 쌍가마를 타거나 아니면 어머니나 처자를 태우고 다니는 일이 잦았다.

이런 풍조가 점점 번져서 당시 여인들은 쌍가마타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초헌(車+召軒)은 가마라기보다는 수레의 일종으로 종2품 이상의 관리들이 타고 다녔다.
명거(命車) · 목마(木馬) · 초거(車+召車) · 헌초(軒車+召)라고도 한다.
긴 줏대에 밑에 외바퀴가 달려있고 위에 높다랗게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좌석 앞뒤로 길게 뻗친 끌채 양끝에 가로막대를 꿰어 이것을 밀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초헌은 좌석이 높게 올라 있어 주위를 압도하므로

고위 관원의 위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바퀴가 하나밖에 없으므로 위태롭기도 하고,

또 심하게 덜거덕거려서 턱을 떨다가 혀를 씹는 일이 있었다.

또 자리가 높아서 좁은 골목길에서는 추녀 끝에 이마를 부딪힐까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남여(籃輿)는 정3품의 승지와 각 관청의 참의 이상이 탈 수 있었으며

포장이나 덮개가 없는 작은 가마이다.

보통의 가마가 타고 내리기 불편하고 사방이 막혀 덥기 때문에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몹시 불거나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탁 트인 남여를 타고 다녔다.

특히 위를 덮지 않아 주로 산길 등 좁은 길을 갈 때 이용하였으며,
남여는 의자 비슷한 것의 밑에 2개의 약간 긴 채를 꿰어 붙인 끌채가 앞뒤로 길게 뻗어 있고,

발디딤판과 함께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가마이다.

앞뒤에서 각각 두 사람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나무를 이었다.

 

 



 

독교(獨轎)는 소나 말의 등에 고정하여 휘장을 두른 가마를 얹어

원래 관찰사 등의 2품 이상의 지방관들이 타고 다녔는데

쌍가마에 비해 심하게 흔들려 불편한 점이 많았다.
가마를 메고 갈 교군(轎軍)이 없을 때

보교(步轎)를 소의 등에 싣고 사람을 보교에 태운 후에

보교의 뒤채를 소모는 1사람이 잡고 균형을 잡으면서 길잡이를 하며 가는 가마이다.
포장을 하기 때문에 장독교(帳獨轎)라고도 한다.
뒷면 전체가 벽이고 양옆에는 창을 냈으며, 앞쪽에는 들창처럼 버티게 된 문이 있다.
뚜껑은 지붕처럼 둥그스름하게 마루가 지고 네 귀가 추녀처럼 되었으며,

바탕의 바닥은 살을 대었는데 전체가 붙박이로 되어 있어

다른 가마처럼 떼었다 꾸몄다 할 수 없다.

 


 

 

3. 양반 부녀자가 타고 다녔던 가마  

 

옥교(屋轎)는 덮개가 있어 벽체와 지붕이 가려져 있는 가마로

3품 이상 관리의 어머니, 처, 딸, 며느리 외에는 탈 수 없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장 80대에 처하도록 법전에 규정되어 있었다.

 

한편, 옥교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는데,
숙종 때 훗날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자

이때 장씨의 어머니가 산모를 보살피기 위해 입궐하였는데

여덟 명이 메는 옥교를 타고 들어왔다.

그러자 지금의 검찰 겸 감사원 격인 사헌부의 관리가

관속들을 보내 가마를 압수하고는 종을 잡아다가 죄를 다스렸다.

소식을 들은 숙종은 노발대발하며 사헌부 관속들을 매로 때려죽이라고 하였다.

신하들의 만류로 관속들이 풀려나기는 했지만

두 명은 매를 너무 맞아 곧 죽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장씨의 어머니가 3품 이상 관리의 부인들만 타는 옥교를 탄데 있었던 것이다.

 

 

평교자(平轎子)는 덮개 없이 사방이 트인 가마로

조선 초기 양반 부녀자들이 대개 이 평교자를 타고 다녔다.

양반들이 타고 다닌 평교자와는 다르다.

그런데 평교자는 가마꾼과 가마를 타는 사람이 격리되지 않아

옷깃이나 어깨가 서로 닿기도 하므로

가마꾼들이 양반 부녀자를 업수이여기고 희롱하기까지 한다는 이유로

조선 태종 때는 옥교를 타고 다니도록 하였다.

 




보교(步轎)는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가마이며,

고려 때의 견여(肩輿)를 장식하여 만든 것으로, 멜빵을 이용해 2명이 앞뒤에서 메었다.
역시 휘장을 쳐서 장보교(帳步轎)라 불리는데,

장독교와 비슷한 것으로 4기둥을 세워 사면으로 휘장을 둘렀고,

뚜껑은 정자(亭子)의 지붕 모양이다.

밑바닥은 쇠가죽을 깔았으며, 2개의 나무막대 위에 얹어 고정하였는데,

바닥과 기둥, 뚜껑을 각각 떼어낼 수 있게 만들었다.
장보교(帳步轎)는 품계에 관계없이 전· 현직 관원들과 그의 자녀들의 행차에도 타도록 하였다.

 

 



 


4.  물건용 가마  

 

교여(轎輿) : 사람이 타지 않고 물건을 운반하는 데 사용한 가마이다.

 

 

채여(彩輿) : 왕실의 의식 때 귀중한 물건을 실어 나른 가마로,

보통 4면이 꽃무늬로 채색되어 있다.

포장이나 덮개가 없이 의자처럼 생긴 남여(籃輿)와 모양이 비슷하며,

앞뒤에는 손잡이 역할을 하는 들채가 두 개씩 달려 있어서

두 사람이 메고 운반하게 되어 있다.

 

가자(架子) : 음식물을 실어 나르는 데에 사용한 들것으로,

앞 뒤 양쪽에 긴 막대기를 두 개씩 달아 손잡이로 삼고 2사람이 가마를 메듯이 들어서 날랐다.

 

신주를 모시는 신여(神輿), 요여(腰輿) : 장례를 끝마치고 묘소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에

신주(神主)와 혼백(魂帛)을 모시고 돌아오는 작은 가마인데

앞뒤에 한사람씩 2사람이 가마채를 손으로 잡고 운반한다. 영여(靈輿)라고도 한다.

 

긴 막대 위에 정자(亭子)와 비슷하게 생긴 가마를 올려 꾸미고

그 속에 금은보화, 옥책(玉冊)· 금보(金寶) 등 옥새를 모시는 용정자(龍亭子)

2사람, 또는 4사람이 들었다.

 

향로를 실어 나르는 향정자(香亭子)도 있다.

 

 

 

5. 기타  

 

뚜껑이 없는 초교(草轎) : 단, 상주가 초교를 탈 때에는 위에 커다란 삿갓가마를 타고 다녔다.

상주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의 몸이라는 뜻에서

걸어 다닐 때는 방갓을 쓰고 다녔듯이 가마에도 삿갓을 씌운 것으로,

삿갓가마는 가장자리에 흰 휘장을 두르고, 위에 큰 삿갓을 덮은 것처럼 지붕을 한 보교이다.

 

 

 

===☞ 더 읽을만한 참고자료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정연식/ 청년사/ 2003)         
『조선조가마특별전-제2회 기획전』(롯데월드민속관/ 1989)       
『매듭장-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43호』(문화재관리국/ 1968)  
『한국민속대사전』(신준호/ 민족문화사/ 1991)  
등등........      

 

 

 

=====> 여러 자료들을 요리조리 기주짱 정리.......

 

 

 

 

■ 이사오 사사키 / "La Vie En R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