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일제 수탈의 상흔 - 군산

Gijuzzang Dream 2011. 6. 3. 17:44

 

 

 

 

 

 

 군산, 일제 수탈의 상흔을 따라

 

 

 

익산을 거쳐 군산으로 가는 길, 전주에 사는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다.

저녁 식사 예약까지 해두었는데 지나쳤다고 정을 듬뿍 실은 타박이다.

그 순간에도 서해안으로 펼쳐진 붉게 타는 저녁놀의 풍경을 간간이 카메라에 담는다.

그렇게 한눈을 팔다 중심 도로를 벗어나 길을 잃어 버렸다.
군산은 태어나 초행길, 어쩌다보니 인근을 지나쳐도 늘 들르지 못하였던 이유는

이 도시가 서해안으로 비껴나 있어서 일부러 의식하고 찾아가지 않으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들린 전주에서 생각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도 굳이 군산으로 발을 돌리게 된 것은 우발적이었다.

익산 미륵사지를 나서며 산 위로 걸린 붉은 노을을 보면서

서해안으로 가는 들판의 석양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편도 일차선 지방도로 위에서 만난 석양은 고왔다.

철저히 붉어지고 난 다음에야 산등성이 아래로 사라지는 모습을 넋 놓고 보았다.

어둠과 노을빛이 혼재한 들판에는 마을들이 낮게 엎드려 있고 드문드문 키 큰 전봇대가

가는 길을 밝히는 이정표가 될 뿐 고즈넉한 분위기는 다소 이색적이기까지 하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군산에 대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채만식이 태어나고 자란 정체성을 바탕으로 ´탁류´를 쓴 곳,

일제 수탈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은 땅, 그래서 아직도 일본식 가옥이 많이 남은 곳,

금강하구 둑과 철새들, 새만금 방조제…….


군산시내의 밤은 낯설었다.

초행길이 주는 부담감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내가 사는 동해 인근과는 다른 도시의 냄새, 갯냄새가

도시 한가운데의 길에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숙소 근처에서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간장게장의 맛을 본다.

그 지역의 특별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은 여행하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따뜻한 식사는 안정감을 주어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그 힘으로 인근 은파유원지를 산책한다.

은파유원지는 미제저수지를 중심으로 조성된 유원지로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저수지 중심을 가로지르는 물빛다리와 저수지 주위 약 6km에 이르는 순환산책로가 조성중이다.

내 사는 곳에도 이같은 선암수변공원이 있는데 형형색색 빛을 발하는 물빛다리를 제외한다면 너무 닮았다.

일제 수탈의 관문으로 개항한 지 100년을 맞는 도시 군산에

일제의 흔적이 없는 싱싱한 유원지의 밤길을 걷는 것은 편안한 마음이 든다.

무려 6km 전 구간을 산책하는 것으로 군산 입성의 신고식을 대신한 밤이었다.

군산이라는 도시가 항구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배후의 넓은 곡창지대 때문이다.

김제, 만경평야 등 호남 곡창의 쌀과 자원을 실어 나르기 위한 목적으로 발달한 군산항은

개항이후 한해 200만석 이상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날라 부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번성하였던 곳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인 1912년 호남선의 지선으로 완공된 군산선이 수탈의 동맥이 되었고

그런 흔적은 지금도 군산 시내를 관통하는 여러 갈래의 철도길이 남아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런 역사의 현장의 중심은 군산 내항 주변이다. 이른 주말 아침의 내항 주변에는

대로변으로 분주히 차만 제 갈 길을 가고 있을 뿐 사람그림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내항 부둣가의 새로 조성 된 작은 조형물들이 있는 백년광장 주위는

당시의 역사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 나가사키 18은행 ⓒ 들찔레

 

백년광장에 서서 볼 때 바로 좌측에 군산 최초의 은행 건물로 1907년 축조된 나가사키18은행이 있다.

이 건물은 2008년 2월 28일에 국가등록문화재 제372호로 지정되었는데

본관과 창고, 사무실 등 3개 건물(500여㎡)로 구성돼 있다.

18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일제 강점기 총독부가 전국에서 18번째로 허가해준 은행이라는 뜻으로

일제 당시 농민들에 대한 수탈의 최전선을 자임하여 일본 사업가들에 의한 미곡 반출, 토지 강매 등이

자행되었던 곳이다.

조선 민중들에게 있어 은행은 정치적 수단을 제외한 가장 강력한 통제 창구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개가 소작농이었던 호남지방 민중들로부터 싼값에 곡식을 수탈하고

노동력 또한 헐값에 사는 방식으로 챙긴 잉여금이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에 선 사람들의 수중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 (구) 군산세관 ⓒ 들찔레


나가사키18은행에서 곧장 걸어가면 1908년 대한제국 예산으로 건립된 (구)군산세관 본관이 있다.

1899년 군산항을 개항한 조선은 광무 3년(1899) 인천세관 관할로 군산세관을 설치했으며,

1906년에는 인천세관 군산지사를 설립하고

1908년에 8만 6천 원의 대한제국 자금으로 이 청사를 준공했다.

독일인이 설계한 이 건물은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을 수입하여 유럽양식으로 건축했는데,

한국은행 본점 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바깥벽은 붉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목조로 건축했으며,

슬레이트와 동판으로 지붕을 올리고 그 위에 세 개의 뾰족한 탑을 세웠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 의미 외에,

곡창 지대인 호남지방에서 쌀 등을 빼앗아가던 일본 제국주의의 체취가 묻어나는 또 다른 현장이다.

◇ (구) 조선은행 ⓒ 들찔레


다시 백년광장으로 와서 보면 왼편 큰길에 1923년 축조된

(구)조선은행(국가등록문화재 제374호, 2008년 7월 3일자) 건물이 폐허처럼 버티고 서있다.

뒤에서 보면 무너져 내리고 있는 함석지붕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데

최근까지 유흥주점으로 사용된 이유로 뒤뜰에 여기저기 나뒹구는 술병이나 빛바랜 네온사인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건물은 일제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축물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등장하기도 했으며

광복 후 한국은행, 한일은행 군산지점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군산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으며

현재 군산에 남아있는 일제 강점기 유물 중 가장 상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 군산 내항, 뜬다리 ⓒ 들찔레


바닷가로 눈을 돌리면 뜬다리라 불리는 두개의 부잔교가 눈에 들어온다.

밀물 때면 다리가 물위로 떠오르고 썰물 때는 낮아진 수면만큼 내려가는 구조의 다리로

육지의 곡물을 배 위에 쉽게 실을 수 있기 위한 장치이다.

당시 일본인들이 수집한 농산물을 실어내기 위해 항만은 일본 배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일본통감부는 한국정부에 항구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항만건설비를 구한말 조선 정부에 떠넘겼다.

이 시기의 수출 물목은 일본인들이 수집한 농산물이었고 수입품은 대개가 이들이 만들어온 공산품이었다.

그래서 무역량이 크게 늘자 항만은 일본 배들로 가득 차 있었고 기다리기 일쑤였다.

이런 이유로 일본통감부는 한국정부에 항구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항만건설비를 달라고 했다.

이에 1905년 군산항을 늘리는데 필요한 공사비 8만6천 원을 들여 근대항으로 만드는 첫 공사가 시작되었다.

◇ 군산 내항 인근의 수탈의 길, 기차 길 ⓒ 들찔레


이후 1926년∼1933년까지 7년간에 걸쳐 항만을 늘리는 일이 계속 되었고

이때 부잔교 3기를 설치하여 3천 톤급 배 3척이 배를 댈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창고 3동을 만들어 쌀 25만 가마를 한꺼번에 보관할 수 있게 하였으며

항구 뒤로는 철도를 연결하여 하루 1백 50량의 화차가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도 쓰이지 않는 철도선이 역광을 받아 그날을 증명하듯 상흔으로 남아있고

인근에는 오래된 창고들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침나절, 사람의 그림자를 거의 찾을 수 없는 황망한 내항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일이

몹시 쓸쓸하게 느껴졌다. 뜬다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자리를 떠서

동국사 가는 길에 해망굴(海望窟, 국가등록문화재 제184호), 앞에 차를 세운다.

해망굴은 군산항의 제3차 항구 구축 공사 기간이었던 1926년 10월 16일

(구)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고자 만든

반원형 터널(높이 4.5m, 길이 131m)이다.

이 지역은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였던 곳으로 수탈의 편리를 위한 수단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이런 시설을 조선 근대화를 위한 일본의 시혜였다고

주장한다. 현재 군산시 해망동과 금동을 연결하고 있는 이 굴(해망굴)은

한국전쟁 중에는 인민군 부대 지휘소로 사용해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 해망굴 ⓒ 들찔레


요즘 들어 해망굴 인근의 올망졸망한 가게들은 자주 영화촬영지로 각광을 받아

전국각지의 사진매니아들을 불러들이는 코스가 되었다.

지금은 거미줄과 자물쇠로 문이 굳게 닫힌 채 폐가처럼 변해 있는 ´굴다방´,

오랜 세월의 때가 뭍은 간판이 돋보이는 ´영자미장원´등이 대표적이며

지금도 문을 열고 있는 임시공간 ´방편´등도 들러보면 일제 건축물의 내부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다.

더구나 해망굴 위 언덕으로 오르는 ´물고기 길´은

마치 통영의 동피랑 마을이나 부산 영주동 산 위의 마을, 혹은 서울의 낙산과 닮은 곳이다.

좁은 길을 따라 시간을 거스르는 듯 한 분위기와 서민들의 체취를 느끼며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마음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동국사(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를 찾아가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내항에서 구시가를 연결하는 큰길을 따라 가면 곳곳에 동국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기 때문이다.

 

동국사는 1913년 건립된 전국 유일의 일본식 사찰로 크게 대웅전과 요사채 두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있다. 또한 절 마당에는 일본식 동종과 십이지신상이 놓여있는데 매우 이질적이다.

처음 이 절의 이름은 금강선사(錦江禪寺)였다.

금강선사는 1909년 일본인 승려 내전불관(內田佛觀)이 군산에 포교소를 개설하면서 창건한

조동종(曹洞宗) 사찰이었는데 해방 후 김남곡 스님이 인수 동국사로 개칭하였다.

이 절의 역사에 있어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특히 시인 고은 선생을 불제자로 인도한 절로 유명하다.

◇ 동국사 ⓒ 들찔레


동국사는 일본의 압제와 더불어 일본식 불교도 같이 이 땅에 들어온 현장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일본 신사의 냄새가 느껴지는 듯 거부감이 없지 않으나

마당가에서 대중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님 한 분을 발견하고는 비로소 절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옆문을 통해 일본식 마루를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가 보니 불상만은 한국에서 조성된 문화재임을 확인한다.

대웅전에 자리한 석가삼존불은 효종 1년(1650년)에 조성한 것으로

좌로부터 아난존자입상, 석가모니불좌상, 가섭존자입상으로 이루어졌으며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과장되게 위압적인 일본식 절집 지붕이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절을 나서는데

절 입구 기둥에는 시주자 이름이 적혀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흔적이라면 그가 수탈자였던 일본인들의 앞잡이 노릇을 지나치게 한 사람이 아니었기를,

바라건대는 같은 민족의 아픔을 부처님 앞에 빌러 왔던 사람이었기를 상상해본다.

동국사를 내려와 큰 길 하나를 건너면 신흥동이 있고 그 아래쪽이 월명동이다.

이 지역은 군산 구시가 부근으로 당시 일본인 마을로 조성되었던 곳으로

지금도 일제 당시의 건물들이 100여 채 이상 남아있다.

본정통(해망로) 전주통(영화동) 명치정(중앙로1가) 강호정(중앙로2가)이라는 지명들이 이때 등장한다.

사실상 ‘군산 속의 일본’이 만들어져

개항당시 상시거주 일본인이 77명에서 1940년에는 8391명으로 급증했다고 한다.

그 많은 일본식 집들 중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어

지금도 저택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고 한 건물이 여러 채로 나누어졌거나 구조가 바뀐 것들도 뒤섞여 있다.

그러나 한 눈에 보아도 이곳이 상당한 일본식 거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히로쓰 가옥 ⓒ 들찔레


그 중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

일본인 포목상 히로쓰 게이사브로의 저택인 신흥동 (구)히로쓰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곳이다.

히로쓰는 임피 부근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건물의 형태는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다.

목조 2층 주택으로, 지붕과 외벽 마감, 내부, 일본식 정원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고 한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볼 수가 없다.

이렇듯 많은 일제의 탄압과 함께 만들어진 증거들이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와 현재의 대한민국이 그런 과거의 오욕마저도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포용력이 커졌다는 말일 것이다.

천막에 가려 고쳐지고 있는 저 가옥도 원형이 손상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히로쓰가 임피면에서 부를 축적하여 군산에 개인 금고를 운영할 정도였다는 것에서 미루어 보듯이

임피면에는 또 다른 일제 식민지 수탈의 현장이 남아있는데

바로 임피역사(국가등록문화재 제208호)가 그것이다.

임피역사는 1936년경 군산선의 철도역사로 건립된 건물로

전라남북도의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요한 중간기착지로서

수탈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임피역사는 당시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 건축형식과 기법을 잘 보여주며,

원형 또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창고들 ⓒ 들찔레


전라도에서 일제의 수탈은 구한 말 이후 조선 백성의 노동력에 의해 생산된 미곡 위주였지만

궁극적으로는 히로쓰처럼 농장주가 되어 직접 수탈의 최전선에서 부를 축적한 부류들이 많았다.

이는 평야가 있는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전국각지에서 보편화 된 수탈의 양식이었다.

어릴 때 부산 외갓집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면

김해평야 인근에도 이런 일본인 농장주의 집이나 창고들이 즐비했었고

부산 내항 인근에 해당하는 수정동부터 중앙동에 이르기까지는 히로쓰 가옥과 같은 저택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집들은 80년대를 지나면서 거의 다 뜯겨나가

지금은 군산이나 목포지역을 제외하고는 그 흔적들을 찾기 힘들다.

농장주로 전국적인 악명을 떨쳤던 이가 이곳 군산에 있었다. 그는 구마모토라는 인물이다.

그는 군산에서 26번 국도를 타고 가다 이내 닿는 개정면 일대의 평야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땅을 소유한 당시 조선 지역 최대의 지주였다.

개정면의 넓은 들판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그의 별장이었던 가옥 한 채가 남아있다.

이 집은 해방 후 우리나라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 쌍천(雙泉) 이영춘 박사가 이용했다는

의료사적 가치 때문에 이영춘가옥이라고 이름 붙어져 있으며 지금은 군산보건대학 교정 내에 위치해 있다.

◇ 이영춘 가옥, 수탈자 야마모토의 별장 ⓒ 들찔레


이영춘 가옥은 현재 군산시에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건물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건물로

구마모토가 1920년대에 건축하였는데, 당시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한 건축비를 들여 지은 별장이다.

건축학적으로 외부 형태는 유럽 양식을 띄며, 평면 구조는 일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양식의 응접실과 한식의 온돌방이 결합된 한식, 양식, 일식의 복합 건축양식으로,

우리나라 근대 주거문화가 들어오는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건물이라고 한다.

슬슬 집 주위를 돌며 보니 창 안쪽으로는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어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음을 짐작케 하였지만 문이 잠겨 내부가 궁금하다는 생각만 할 뿐 어쩔 도리가 없다.

다만 아래 교정에 서 있는 이영춘 박사의 흉상을 보면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런 현장은 또 있다.

이 길을 계속 따라 익산, 전주 방향으로 가면 차로 5분 거리에 개정면 발산리가 나오고

그곳 초등학교 뒷마당에는 제 자리를 잃어버리고 몇 십 년 째 타지의 바람을 맞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발산리 5층 석탑(보물 제276호)과 발산리 석등(보물 제234호)을 비롯하여

여러 기의 부도와 석등, 묘지를 장식하는 인물상 등이 산재해있다.

석탑은 원래 완주(完州) 봉림사터에 있던 것으로

전체적으로 잘 균형미가 있는 고려탑으로 간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역시 완주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석등도 간주석 돌기둥이 둥글게 깎인 형태의 것으로

표면에 구름 속을 날아가는 용의 모습을 새겼는데,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유산이다.

◇ 발산리 석등과 석탑 그리고 길을 잃은 유물들 ⓒ 들찔레


이런 것들이 왜 이곳에 있는가?

구마모토와 함께 군산지역의 대표적 농장주의 한 사람이었던 시마따니 야소야가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옮겨 놓았다가 미쳐 실어가지 못한 것들이다.

제자리를 잃고 객지로 나온 탑과 석등 등이 일본 땅을 밟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장이다.

이러한 석조유물들이 자리한 바로 곁에 시마타니금고(국가등록문화재 제182호)가 있다.

역시 시마타니 야소야에 의해 1920년대에 만들어진 금고용도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농장의 각종서류 및 현금, 귀중한 골동품을 보관했던 장소로

일제에 의한 우리문화재 약탈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

굳건한 철문의 두께가 웬만한 금고의 그것보다 두텁고 철통같은 창살 사이로

비어있는 금고 내부를 본다는 것이 뭔가 허망하다는 느낌을 준다.

 깊은 금고의 무채색 벽을 타고 음흉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겨울바람이 그 속으로 숨는다.

◇ 시마타니 금고 ⓒ 들찔레


다시 전주 쪽으로 가야한다. 26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임피면이 나오고 전주로 향한다.

가는 길은 봄이면 하동 십리 벚꽃에 못지않은 꽃길이 열린다는 전군간도로(全郡間道路)다.

이 벚꽃 길은 진해의 그것처럼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수탈의 길에 일장기 흔들 듯 벚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자긍심을 느꼈는지 모를 일이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착취와 억압으로 수탈당하던 조선 백성의 눈물처럼 꽃잎 분분하였을 것이다.

우연히 들러보지 않은 도시에 대한 궁금함 때문에 계획에 없던 군산 방문과 답사로

하룻밤과 한나절을 족히 보낸 시간이지만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한다.

군산에서 멀어질수록 어제 밤 지방도로를 거쳐 군산으로 들어오던 길이 이 국도였음을 알아챈다.

멀리 키 큰 전신주는 겨울 햇살 받고 있고 빈 들판에 새떼 오르는 한낮,

이 들판의 오곡이 여물어 갈 가을 무렵 이 동네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원한다.

 


*** 군산에는 이 외에도 많은 근대 유적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들로는 군산지역 식수공급을 위해 연인원 10만 명이 동원돼

1912년 착공하여 1915년에 준공하였다는 (구)수원지제방(국가등록문화재 제207호)과

1912년에 축조되어 현재까지도 초기 등대의 원형을 잘 유지한 채 사용되고 있는

어청도 등대(국가등록문화재 제378호)등을 들 수 있다.

 

- 배강열 칼럼니스트, 2009.02.19. ⓒ (주)이비뉴스 <들찔레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