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북한산성

Gijuzzang Dream 2011. 5. 27. 23:13

 

 

 

 

 

 

 북한산성 - 대동문과 동장대

 

삼각산, 서울을 지키는 수호산

대동문과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서울의 북쪽에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북한산국립공원의 일부인 삼각산에 위치해 있고,

사적 제 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시 은평구 · 종로구 · 성북구 · 강북구 · 도봉구가 성벽을 경계로 하고 있다.

한양 도성 북쪽에 위치한 삼각산은

고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이 영토 확장의 목적으로 서로 힘을 겨루던 곳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진산(鎭山), 즉 서울을 지키는 수호산으로 추앙을 받아 왔다.

지금 남아있는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1711)에 축조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한양도성을 적에게 내어준 것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가 치욕적인 항복을 당한 역사에서 교훈을 삼아

우선 도성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도성 방어용이자 저지선으로 북한산성을 쌓았으며,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의 공백을 막을 탕춘대성을 연이어 건설하기에 이른다.

비록 탕춘대성은 미완성이었지만 삼각산에서 뻗어나간 자연 산세를 이어 3개의 성이 축조되어

한양 도읍지가 천하에서 으뜸가는 관방요새가 되도록 설계되었던 것이다.

북한산성 축조공사는 훈련도감 · 금위영 · 어영청의 3군문이 담당하였고,

축성에 필요한 인력은 군부대뿐만 아니라 서울 주민과 승려들도 동원되었다.

축성이 끝난 숙종 38년(1712) 10월에는 북한산성의 주관부서로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였으며,

그 후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였다.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대한제국 때에는 의병전쟁 등 혼란한 시대상황 속에서 일본군 헌병대가 주둔하는 등

산성 내 사찰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더욱이 1915년 8월의 집중호우로 돌로 된 성벽만 남겨 놓은 채

행궁과 동장대 등 산성 안 시설물 대부분이 무너지고 말았다.

많은 피해를 입고 방치되어 오다가 최근 서울시에서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동장대

 

북한산성 안에는 성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궁(行宮)을 비롯하여

장대 · 군영 · 군창 등 군사시설과 승군(僧軍)의 숙소 및 종교 기능을 수행하던 사찰들이 대거 건립되었다.

특히 행궁은 유사시 임금이 산성 안으로 들어와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이다.

산성 내 상원암 지역을 행궁 자리로 정하였는데

130여 칸 규모였지만 지금은 건물지의 기단과 초석만 확인될 정도로 훼손된 상태다.

장대(將臺)는 장수의 지휘소로서, 동장대·남장대·북장대 등 3개소가 있었다.

이 가운데 동장대는 북한산성의 총 지휘소 역할을 하였으며,

금위영 관할 구역인 지금의 강북구 우이동 지역에 있는 대동문에서 용암문에 이르는 사이에 있었다.

남장대는 어영청 관할 구역으로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북한동 산성 내 행궁터 주봉에 있었으며,

북장대는 훈련도감 관할 구역으로

경기도 고양시 북한동 산성 내 최고의 화강암 봉우리인 노적봉 서쪽의 작은 봉우리에 위치해 있었다.

숙종이 친히 동장대에 올라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동장대 외에 나머지 장대는 터로만 남아 있고,

그나마 동장대도 1996년에 복원되어 당시 조순 서울시장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북한산성의 여러 시설 중 대동문과 동장대를 보기 위해 강북구 우이동으로 향했다.

대동문으로 가는 최단 코스는 바로 아카데미하우스 정문 옆의 등산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소귀천 계곡으로도 대동문에 올라갈 수 있는데 아카데미하우스 등산로보다 시간이 두 배로 걸린다.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서 아카데미하우스 행 버스를 타고 버스 종점에 이르면 바로 등산로 입구가 보인다.

입구에서 대략 1시간 10분 정도 오르면 대동문이 나오고

대동문에서 다시 20분 정도 오르면 동장대가 나온다.

산성(山城)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선조들의 슬기와 지혜인데 이는 다분히 교과서적인 느낌이고

두 번째는 민초들의 고통과 고단함으로 이는 지극히 솔직한 감정이다.

전자는 교육을 처음 받기 시작할 때부터 지속적으로 강요되는 훈련된 느낌이고

후자는 어느 정도 철이 들어 자신을 성찰하면서 스스로 체득하는 솔직한 표현인 것이다.

북한산성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중국의 만리장성과 비교될 수는 없겠지만 깎아지른 벼랑과 온통 바위로 둘러싸인 산 능선에

성채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사업이 아님은 잠깐 등산을 해보면 확연히 체험할 수 있다.

 

도성과 더불어 단기간에 북한산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봉건체제이기에 가능하였다.

또 완공을 위해 군부대 병사와 한양 도성 주민뿐만 아니라

지방민과 승려까지 동원하여 강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기능성 등산복을 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을 해도 얼마 안 가서 땀으로 몸이 젖고 숨이 차서

잠시 쉬었다 가곤 한다. 하물며 겨우 몸을 가리는 의복만 걸친 채 맨손으로 돌을 져 나르면서

그 높고 험한 곳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힘든 노역을 감당한

당시 백성들의 피와 땀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 현재 우리가 보는 북한산성과 같은 역사유적이라고 할 때,

그 분들의 노력이 헛되이지 않도록 영구히 보존해야 함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 도성 ․ 탕춘대성 ․ 북한산성 개념도

도성 ․ 탕춘대성 ․ 북한산성 개념도 


- 사종민(서울 청계천문화원장)

- 2011.04.21 하이서울뉴스

 

 

 

 

 

 

 

 

 

 

 

<더 보기>

 

북한산성

 

북한산성 행궁지(行宮址) 종합정비 기본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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