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찾아 떠나고(답사)

청계천과 수표교, 오간수문다리

Gijuzzang Dream 2011. 5. 27. 23:15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청계천

조선시대 생활하수 처리 위해 인공하천으로 정비

성동구 마장동 청계천문화관에서 바라본 청계천 전경(두물다리 부근)

 

 

청계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가도로이다.

1970년대 교과서에 조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서울의 31층 삼일빌딩과 그 앞을 지나는 고가도로 사진이 실린 적이 있을 정도이다.

오히려 하천으로서의 청계천과 복개도로의 모습은 별로 인상에 남지 않는 정도다.

다만 청계천 끝부분 안암천에 여름철 홍수로 범람이 되어 수재민이 발생하였다는 신문기사 정도로

청계천이 하천이었다는 느낌이었고, 늘 아스팔트길이어서

누구도 도로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다 오늘날 이렇게 맑고 시원한 물길이 도심 한가운데를 지나게 되니

그제서야 “아하 청계천이 하천이었지”라고 잠시 잊었던 기억을 되찾게 된다.

 

사실 서울에 살면서도 청계천이 어떤 곳이었는지 그 유래와 역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도무지 관심들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잠잠히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턱하고 나왔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무관심하였다.

 

청계천의 물줄기를 보면 한강과 비교가 된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데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흘러간다.

계천은 한양 도성 내의 작은 물줄기가 모여 동쪽의 중랑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소규모의 내(川)였다.

한양이 조선왕조의 도읍지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자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배수시설과 생활하수를 처리하는 하수도시설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러한 용도로 적합한 시설이 바로 청계천이었다.

자연하천을 사람들이 관리하는 인공하천으로 정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복원된 청계천 판잣집(매주 월요일 휴관, 청계천문화관 맞은편)

 

 

청계천은 조선시대 초기 도성을 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비되었다.

태종대에는 개천의 양안을 정비하였고,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개천 정비를 넘어 과학기구인 수표(水標)를 설치하여 미리 홍수를 대비하였다.

영조대에는 청계천의 준설공사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준천의 시말과 공사과정이 기록된 『준천사실(濬川事實)』등의 문헌을 편찬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에 들어가면서 청계천의 맑은 물과 다리 등 많은 유적들이

경성부의 대도시 교통과 위생문제를 해결한다는 미명하에 복개가 되면서 지상에서 지하로 매몰되었다.

해방 전까지 태평로에서 광교까지 복개가 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로 잠시 청계천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가

1958년부터 복개를 시작하여 1977년 현 마장동까지 전체 복개가 완료되었다.

복개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상가가 들어차기 시작하고 교통량이 폭주하면서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새로운 도로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7년부터 4년간의 공사 끝에 1971년 청계천고가도로가 완성된다.

 

그러나 건설한지 50여 년이 경과되면서 청계천을 덮고 또 그 위에 설치되어 있는 구조물이 노후하면서

안전을 위협받게 되었고, 도심 재개발 일변도로 숨 가쁘게 진행되었던 개발지상주의에서

이제 청계천이라는 문화유적에 대한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2003년 발굴조사 등 문화재조사를 거치고

7월 청계천 복원사업 공사 시행에 들어가서 27개월 만인 2005년 10월에 준공하여

오늘날 청계천이 다시 시민의 품에 돌아오게 되었다.

 

청계천문화관 전경(성동구 마장동)(좌), 옛 청계천고가도로를 받치고 있던 교각 일부(우)

 

 

청계천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

 

선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청계천'이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시대는 단순히 개천(開川)으로 불렸으며, 모든 공문서 상에도 이를 준용하였다.

현재의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1916년 ‘조선하천령’이 제정되면서 일제에 의해 명명되었다.

상류의 청풍계천(淸風溪川)을 줄여서 불렀던 것이다.

 

두 번째로 매번 청계천을 말할 때 ‘더럽다, 시궁창이다’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가?

이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조선시대는 국왕이 관심을 갖고 정비하고 준설하여 어느 정도 맑은 물을 유지하였고

실제로 구한말 사진을 보면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염병의 창궐을 미연에 방지하고 홍수로 인한 범람을 대비하기 위한 방편으로

형식적인 준설을 하였을 뿐 거의 방치되면서 맑은 물 청계천은 이제 더러운 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민과 도심 빈민이 청계천변에 정착하면서

늘어나는 판잣집에서 나오는 배설물과 각종 생활폐수가 그대로 유입되면서

오염은 갈수록 심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청계천 발굴 조사를 2003년에 실시하였는데 과연 무엇이 나왔는가?

조선시대부터니까 아마 상당한 명품이 더러 있지 않았을까? 결과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이다.

청계천은 조선시대부터 최근까지 생활하천이다. 일상용품이 모인 집하장이자 만물상으로

각종 그릇류에서 신분증, 생활용구, 신발 등으로 기대했던 명품은 없었다.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저거 옛날에 우리 집에 있었는데…….”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것들 천지이다.

 

청계천에는 지금 현재 조선의 옛 다리와 현대의 다리가 병존하고 있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 2011.04.28  하이서울뉴스

 

 

 

 

 

 


 

 

 

 

 수표교와 수표교터

강제로 이전당한 비운의 교량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

 

 

서울의 동(洞) 이름 대부분이 문화재와 연관되어 붙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네의 역사를 잘 몰라도 동 이름만 가지고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중구 수표동도 예외가 아니다.

청계천의 깊이를 재는 수표(水標)와 수표교 다리가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으며,

수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수표교는 장충동으로 이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수표동이라는 법정동을 사용하고 있고,

각종 안내판에도 버젓이 표기가 되어 있다.

 

수표와 수표교로 대별되는 지금의 수표동은

청계천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작 서울 토박이라고 하더라도 수표동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수표교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힌다.

수표교는 청계천과 고락을 같이 해온 몇 안 되는 시설물이다.

어찌보면 가장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청계천의 복개로 인해 결정타를 맞아

원래의 위치에서 생면부지의 장소로 강제로 이전당한 비운의 교량인 것이다.

 

수표교는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 사이에 놓였던 다리로

현재, 청계2가 수표다리길 사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종 2년(1420)에 석조 다리로 축조되었으며,

당시 주변에 소와 말을 거래하는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리웠으나,

세종 23년(1441) 상류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를 세움으로써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다.

다리 길이는 27.5m, 폭은 7.5m, 높이 4m에 재료는 모두 화강석이다.

교각 하부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만들었다.

 

수표는 세종 23년 처음 세울 때는 재질이 목재였다가 성종 대에 가서 석재로 바뀌는데

이는 잦은 비와 홍수를 견디게 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수표석(세종대왕기념관 경내)(좌), 수표석 뒷면(우)

 

 

높이는 3m로 수표 지붕과 받침석이 한 세트로 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수표는

조선 후기에 청계천 바닥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는 준설 공사를 벌인 뒤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돌기둥은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길게 육각(六角) 모양으로 만들고

그 표면에 1자에서 10자까지 눈금을 새겼다.

한 눈금은 조선시대 길이를 표준하는 주척(周尺)1자로 평균 21.5cm 간격이다.

그 중 3자, 6자, 9자를 각각 갈수(渴水), 평수(平水), 대수(大水)로 삼았는데

평수까지는 보통 수위이고, 대수인 9자, 즉 사람 키를 넘는 수위가 되면

홍수가 날 수 있음을 미리 사전에 예고하는 조기경보시설이었다.

 

수표교와 수표는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시작하면서 철거하여 1959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고,

수표는 다시 1973년에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이전되었다.

수표는 보물 제 838호로, 장충단 공원에 있는 수표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청계천에 세워져 있는 수표교는 장충동에 있는 원형에 비슷하게 복제된 다리로서,

수표가 있었던 원래 자리는 현재 사적 제461호 수표교터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현재 청계천 수표교터에 복원된 모형(위), 수표와 수표교(일제강점기)(좌), 이전에 앞서 철거되는 수표교(우)

 

 

광통교와 수표교 등 청계천의 옛 다리를 볼 때마다 요새 다리와 비교하곤 하는데

종종 옛 다리는 아마 적당히 만들었을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공학적으로 계산을 하고 설계를 해서 만들지 않고 대충 세웠을 것으로 믿기 쉽지만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된 발굴조사에서

수표교의 하부구조는 진보된 조선시대 토목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청계천은 바닥이 두꺼운 모래층으로 되어 있어 이를 고려치 않고 세웠다가는

석재 아니라 강철로 세워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즉 사상누각인 셈이다.

조선의 기술자들은 이러한 모래층을 다지기 위해 목재로 된 말목을 박았다. 즉 파일(file)을 박은 것이다.

말목으로는 소나무와 참나무를 사용하였는데 단면이 사각형인 각목과 둥근 환목을 썼으며,

길이는 최대 150cm에, 지름 5~10cm의 나무기둥을 깊이 1.5m 이상 땅속 깊이 박아 땅을 다졌음이

조사 과정에서 증명이 되고 있다.

이렇게 단단한 하부 기초가 있었기에 수백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청계천 복원과정에서 장충단에 있는 수표교를 다시 원 위치로 옮기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청계천 복원공사 자료에서 확인하였다.

이를 위해 문화재 전문가 자문을 받고 문화재 위원회를 개최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에 존치하고, 원 위치에 유사형태로 복원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사업비 과다, 기술적인 문제점과 더불어

해체 · 이전 시 기존 다리 재질의 추가 훼손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광통교는 원래 위치인 광교 네거리에서 동북쪽으로 100m 이전해서 원형 그대로 해체해서 이전하였으나

수표교만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는 원래의 위치에서 최대한 보호 · 보존이 되어야지 한번 옮기게 되면 가치도 떨어지지만

훼손도 병행됨을 수표교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계천의 광통교와 장충단공원의 수표교는 비교가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있다는 점은 공통이지만

광통교 교각 밑으로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데 비해 수표교 교각으로는 왕래가 거의 없어서

오히려 수표교가 이제 모든 시름을 벗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장소로 왔다는 생각이 든다.

 

 

■수표교 찾아가기

 

수표교 약도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 2011.05.12  하이서울뉴스

  

 

 

 

 


 

 

 

 

 

 오간수문, 오간수교

 

도성 내사산(內四山) 물길이 이곳으로 흘러내려

 

오간수교 전경(좌), 재현된 오간수문(우)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는 동대문을 제외하고 변변한 문화유적이 없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옛 동대문운동장은 서울 시민의 운동시설이었고,

해마다 각종 경기가 끊이지 않는 스포츠 메카였다.

누구도 운동장 부지가 서울성곽이 지나가고 조선시대 관청 터였으며

도성 내 방어시설이었을 줄은 상상을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더불어 항상 복개도로로 덮여 있던 동대문 주변의 청계천이 실은 오간수문터였음은 더더욱 알 길이 없었다.

 

청계천복원사업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조성을 위한 각각의 발굴조사로 인해

동대문 주변 일대의 문화유적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제 몇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세월 관리가 소홀하고 보호를 받지 못해서 그런지 온전한 형태는 간 데 없고

겨우 그 형태와 모습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부재 일부만 남아 있는 것을 얼기설기 이어서

현대의 기술로 재건축된 좀 어설픈 문화재가 되었지만 옛 조선시대의 자취를 확인할 수는 있게 되었다.

 

청계천은 도성 내의 크고 작은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에 지어진 개천으로 온갖 생활하수가 흐르는데

특히 오간수문(五間水門)은 도성의 동쪽 끝인 흥인지문(동대문) 성곽에 위치하고 있는 수문(水門)으로,

현재 청계 6가 사거리의 동편, 흥인지문에서 남쪽으로 약 120m거리의 청계천 하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도성의 성벽이 청계천과 맞닿은 곳에 설치된

다섯 칸의 수문이자 성곽의 하부 구조이다.

이곳은 도성 내에서 가장 낮은 지대로

북악산, 인왕산, 목멱산, 낙산 등 도성 내의 내사산(內四山)의 물길이 개천으로 모여

이곳을 통해 배수되었다.

 

오간수문과 오간수교(1900년 경)

 

 

간수문은 태조 5년(1396) 한양 도성을 수축할 때 도성 내의 물길을 고려하여 축조하였으며,

최초 수문의 높이는 5척 정도였다. 이후 관리 부실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다가

영조 36년(1760) 경진준천(庚辰濬川)시 수문에 철문을 설치하여

예전의 기능을 회복하면서 제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1907년 하천수가 원활하게 소통되고 토사가 쉽게 흘러 내려가도록 한다는 명분 아래

수문을 뜯어 버리게 되었다.

 

1908년에는 훼손되어 방치된 성벽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내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는 장애물인 동대문 북측 성벽과 함께

동대문 남측 오간수문의 성벽까지 헐어버림으로써 오간수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대신 성벽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다리를 설치하였는데

이 다리를 오간수교라고 부르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1년 동대문~광희문간 전차 노선이 신설되면서 다리 옆으로 전차 선로가 놓이고,

1926년 6월 순종의 장례행렬이 건널 수 있게 하기 위해 다리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 후 청계천 복개공사와 함께 오간수교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동대문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청계천을 건너야 하는데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가 바로 오간수교이다.

동대문에서 오간수교 다리를 건너다보면 다리 상부 우측에 잔디지대가 있다.

한 가운데에 있는 안내판에는 '가산(假山)'터라고 되어 있다.

가산이라 함은 글자 그대로 가짜 산이라는 뜻인데 뭘 말하는 것인가 해서 안내문을 보니

거기에는 ‘청계천을 준설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가산이 있었던 곳’이라고 되어 있다.

이 가산은 바로 영조와 순조 대에 청계천을 대대적으로 준설하게 되는데

이때 나온 대규모의 흙을 청계천 천변에 쌓아 놓다보니 크게 산을 이룬데서 나온 말로

일종의 쓰레기산이었다. 이 산에 도성 내 거지들이 땅굴을 파고 살았다고 한다.

 

오간수교 상부의 가산터(잔디지대)(좌), 이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우)

 

 

오간수교의 전신이 오간수문이었다면 그 모습은 이제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오간수교 좌측 제방에 오간수문을 재현해 놓아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오간수교를 건너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들어가면 한참 공사 중인 디자인플라자 건물 앞쪽에

성벽과 함께 이간수문(二間水門)이 함께 복원되어 있다.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모두 도성 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도성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 성벽 밑으로 물을 통과시키는 수문이다.

청계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오간수문이고,

이간수문은 오간수문과는 별도로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도성 바깥쪽으로 보내기 위해 조성한

두 칸 구조의 수문으로서,

수문 내외측에는 하천을 따라 흐르는 물을 유도하기 위한 날개형태의 석축시설이 있었다.

이 수문도 발굴 당시 크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면서 서울성곽 일부와 함께 복원된 것이다.

 

청계천을 걷다가 오간수교를 보면 다리 상부만 있고 다리 하부구조는 없다.

당연히 오간수문의 상부는 도성 성벽이기에 성벽 위 방어시설인 여장으로 다리를 재현하였고,

다리 하부는 5개의 수문으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간수문의 형태와 모습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오간수교가 지척에 있어도 모를 수밖에 없다.

 

다리 아래 벽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보고 그제서야 '이 다리가 오간수교구나' 하지만

다리 옆쪽으로 재현한 오간수문이 없다면 아무리 안내판을 잘 붙여 놓아도 그 모습을 확인하기 쉽지 않다.

 

청계천에 놓여있었던 옛 다리뿐만 아니라 문화유적을 답사하기 전에

필히 관련 사실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그래서 필요하다.

 

■오간수교 찾아가기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 2011.05.19  하이서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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