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서울 4대문과 4소문

Gijuzzang Dream 2011. 5. 27. 23:11

 

 

 

 

 

 

숙청문, 숙정문 - 북대문

 

항상 닫아두었던 숙정문, 음기가 강해서?

 

 

숙정문((肅靖門)은 서울성곽의 4대문 중 북대문으로 북악산 줄기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태조 5년(1396) 서울성곽을 축조할 당시

4대문은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의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성문의 명칭을 정하였다.

동대문은 인(仁)이 들어간 흥인지문으로,

서대문은 의(義)를 상징하는 돈의문으로,

남대문은 예(禮)로 표현되는 숭례문이므로

북대문은 당연히 지(智)가 수반이 되어 숙지문으로 하여야 할 테인데 숙정문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있으나

동대문을 위시하여 남대문, 서대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유교의 덕목에 대해

북대문에서 이를 엄숙히 다스려야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면

사실상 북대문인 숙정문은 4대문의 종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숙정문은 다른 대문보다 그 명성과 품격에 있어서는 조선시대 내내 홀대를 받아 왔다.

고려시대 이래로 조선시대 내내 국가의 안위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숙정문도 풍수지리설의 큰 피해자이다.

숙정문은 4대문의 하나이지만 문도 못 열고 항상 닫아두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것이다.

 

숙정문은 태조 5년(1396)에 축조되었으며,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경기도 양주와 고양으로 왕래하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지금보다 다소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연산군 10년(1504)에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성문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는데, 축조할 당시에는 숙청문(肅淸門)과 북문(北門)으로 불렸으며,

중종 때에는 북정문(北靖門)으로, 선조 때에는 숙정문(肅靜門)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중종 이후의 실록에는 숙정문(肅靖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성을 그린 고지도에는 대부분 18세기 중반까지 숙청문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숙정문의 안내판에 보면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성곽 동서남북에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 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이고

이미 태종 때부터 북은 음(陰), 남은 양(陽)이라는 음양설이 지배적이었고

이에 따라 북문인 숙정문은 풍수지리적으로 음기가 강한 곳이어서 항상 문을 닫아 두었던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액운이 없어진다”라는

풍속이 있다고 전하고 있고,

순조 때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 보면

숙정문을 일러 “양주 북한산으로 통하는 숙정문 역시 지금 폐문하고 쓰지 않으니 언제부터 막았는지

알 수가 없다. 속전된 바로는 이 성문을 열어 두면 성 안에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 불어댄다 하여

이를 폐했다 한다”라고 되어 있다. 상중하간지풍이란 부녀자의 음풍, 곧 풍기문란을 뜻한다.

 

이에 대해 『이규태의 600년 서울』을 보면

“이 풍속은 비단 정월 보름에만 국한되지 않고

연중 내내 언제라도 세 번 왕래하면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성안 여인들이 모여들면 북문은 꽃밭이 되고 꽃보고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자연히 건달이 모여든다는 뜻으로 숙정문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이 문이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 종묘의 주산인 응봉을 잇는 산마루의 중간에 위치하므로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사람들이 두 산을 밟고 다니게 되어 있어 이를 피하고자 문을 닫았고,

또 부근의 지형상 이 숙정문보다 창의문이나 혜화문을 통하여

서북쪽과 동북쪽 큰 길을 이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도심 한가운데 있어서 접근하기도 쉽고 일반인에게 친근한 곳이다.

숙정문은 오히려 그런 문이 있었나 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조차도 숙정문 하면 거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도대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숙정문의 위치가 북악산 줄기에 있는데다가

최근까지 군사보호지역에 있다가 최근에야 개방되었기 때문이며

우선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곳에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서울명수학교행 버스를 타고 명수학교에 하차하면,

두 가지 길을 이용해 숙정문을 찾아갈 수 있다.

약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차량을 이용하는 코스와 도보를 통해 접근하는 방법이다.

차량을 이용하면 반드시 삼청각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삼청터널 들어가기 전 서울성곽 숙정문 안내소를 통해 숙정문에 올라야 한다.

도보로 갈 경우 버스 정류장에서 만국기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 앞으로 해서

주암아파트 사이 오솔길을 오르면 숙정문 안내소에 갈 수 있다.

숙정문 안내소에서 입산 신청서를 작성하여 신분증을 보여주면 출입증을 준다.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하며 신분증이 없으면 출입이 금지된다)

대략 명수학교 앞에서 숙정문까지 도보는 20분 정도 소요된다.

문의 : 북악산 서울성곽 홈페이지 http://www.bukak.or.kr/

 

 

■ 숙정문 찾아가기

 

 

 

 

 

 

 

 

 

 

 

 

 

 

 

 

 

 

 

 

 

 

 

 

 

 

 

 

 

 

 

 

 

 

 

 

 


 

 

 

 

 

 흥인문, 흥인지문 - 동대문

 

전차 궤도 놓이면서 성곽 훼손 시작돼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세운 당시 서울 도성의 동쪽 문이다.

지금의 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 서울 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의 4대문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그 중 동쪽의 대문을 흥인문(興仁門)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동(正東)은 흥인문이니 속칭 동대문이라 하고’(태조실록 권10 5년 9월 24일)

라고 되어 있어 흥인문, 동대문이라고 불렸는데

현재 동대문의 현판에는 흥인지문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현판은 동대문에서 종로6가 방향이 아닌 반대편에 걸려 있다)

 

현판에 특별히 지(之)자를 넣은 것은 동대문 일대가 도성 내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남쪽에 청계천이 흘러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고종 때 다시 지으면서 ‘之’자를 보강하여 ‘흥인지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동대문은 국가적 의장 행렬이 통과하는 곳이기에

서울의 숭례문(남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로 문루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동대문과 남대문밖에 없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데 유리하게 하였다.

동대문의 문루는 구조의 맞춤은 간단하고 장식이 많은 19세기의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한다.

 

 

 

또 동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甕城)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 성문 가운데 유일하다. 옹성은 북쪽 한 쪽을 개방하여 출입하도록 하고,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여 취약한 성문의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그러나 이 문은 옹성시설을 갖고 있으면서도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옹성의 문은 정조 때 만들어진 수원 화성의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중앙에 설치되었는데,

동대문의 경우 측면으로 들어가도록 개구부를 설정한 것은 성문을 더욱 잘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대문은 국보 1호이고 동대문은 보물 1호이다.

(물론 남대문이 소실되기 이전에 문화재로 분류된 것을 기준으로 한다)

 

같은 4대문인데 왜 국보와 보물로 분류가 될까?

백과사전에 보면 보물은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국가가 지정한 유형문화재이고,

국보는 보물급의 문화재 중 국가가 법적으로 지정한 유형문화재라고 나와 있다.

특히 국보는 보물로 지정될 만한 것 중에서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그 시대를 대표하며

제작의 의장이나 기술이 가장 뛰어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선행된다.

 

같은 4대문이라 하더라도 남대문은 1396년에, 동대문은 최초 건축이 1398년이지만

지금의 문은 1869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제작연대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며,

조선 후기의 형식인 동대문과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서

세련미가 앞선 남대문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국보와 보물로 분류가 된 것이다.

 

이미 누구나 알듯이 동대문은 서울 성곽에 속한다.

그러나 현재 동대문과 서울 성곽은 분리가 되어 있다.

성곽과 분리된 연유 중의 하나가 바로 성곽 철거와 관련이 있다.

이는 서울 도심에 전차를 부설하게 된 것에서도 그 이유를 들 수 있다.

 

전차 궤도가 처음 놓이게 된 것이 광무 2년(1898)이다.

서대문에서 종로와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까지 전차가 다니게 되는데 이런 연고로 성곽이 철거된 것이다.

흔히 서울 성곽의 훼손 주범은 일본이고 그 시기는 일제강점기부터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곤 한다.

그러나 성곽 훼손은 대한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전차 건설로 말미암아 동대문 주변의 성곽이 철거가 된 것이기에

훼손은 바로 우리 손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다.

 

년 전만 하더라도 동대문 좌우로 길이 나 있어서 동대문은 고립된 섬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종로방향에서 볼 때 동대문 왼쪽은 길이 나있고, 오른쪽은 잔디공원으로 되어 있다.

과거에는 동대문에 다가가서 보려면 위험한 길을 건넜어야 했는데

이제는 한결 가까이서 편안하게 볼 수 있다. 2009년에 녹지로 조성을 하였는데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동대문의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보존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함이라 판단된다.

언젠가 택시를 타고 동대문 앞을 지나갈 때 보니 한참 잔디광장 조성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택시기사분이 그 공사현장을 보면서

“저러면 교통 체증이 심각할텐데 왜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는지 모르겠네”라고 하는 푸념을 들었다.

사실 동대문 주위는 교통량이 월등히 많은 곳 중의 하나이다.

주변이 온통 상가라서 더더욱 그런데 물론 체증이 심할 수는 있다고 보지만

오히려 먼 앞날을 생각해 볼 때는 잔디광장 조성이 더 나을 성싶다.

 

동대문의 수리 기록을 보면 수시로 개선공사를 벌였는데 조선시대와 지금은 사정이 무척 다르다.

조선의 수도로서 6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역사문화도시 서울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조선의 문화유적을

구 보존하여 계승할 책무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다.

 

 

 

  

 


 

 

 

 

 

  돈의문 터, 새문 - 서대

 

 

4대문 가운데 그 터만 남아 있어

 

 

 

조선시대 수도 서울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전체 18km의 서울 성곽에는 동서남북으로 4대문과 4소문이 있다.

여기서 퀴즈를 내 보기로 한다. 4대문 가운데 그 터만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① 남대문 ② 동대문 ③ 서대문 ④ 북대문


정답은 ③ 서대문이다. 흔히 북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대문은 서대문구를 알기 때문에 당연히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고,

북대문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정답을 ④번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으로 종로구 삼청동 삼청터널 위에 있으며 사적 제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대문은 원래 명칭이 돈의문(敦義門)으로서 1915년 도로 확장공사로 완전 철거가 된 상태로서

현재는 그 터를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다.

 

돈의문 터, 즉 서대문터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네거리로 가는 길 중간에

강북삼성병원 입구 네거리에 있으며,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과 서대문역 중간 위치에 있다.

서대문역 4번 출구로 나와서 강북삼성병원 쪽으로 올라가면

병원 방향 언덕에 터를 설명하는 글과 사진이 부착된 벽면 전시판이 있다.

 

돈의문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서울 성곽 건축과 더불어 만들어졌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사직동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 하였지만 태종 13년(1413) 풍수지리설에 따라 폐쇄하고

경희궁 서쪽에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칭하였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 서전문을 헐어내고

그 남쪽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문을 세워 이름을 옛날의 돈의문으로 복귀하였으며,

여기에 연유하여 세종 이후 서대문이 새문이 된 것이다.

 

현재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네거리까지의 거리를 새문안길이라고 하는데

옛 신문로(新門路)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서대문 안쪽의 길, 신문의 안이 곧 새문안이 된 것이다.

 

돈의문이 새문으로 통했음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수광(李粹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그 내용이 전하고 있다. 기왕 새문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여기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새 궁궐을 새문동에 건립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다.

술인 김일용(金馹龍)이 또 이궁(離宮)을 새문동에 건립하기를 청하였는데

바로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부친)의 옛 집이다.

임금이 그 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들였는데...”(9년 6월 11일 갑진).

 

경희궁의 창건을 시사하는 대목으로서 경희궁은 새문길에 있다.

그런데 위의 새문동에서 새문은 신문(新門)이 아니라 새문(塞門)인 것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가로망은 대, 중, 소로로 구성되어 있다.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로의 폭은 56척,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

그리고 길 양쪽에는 2척의 도랑을 두어 배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대로의 폭은 약 17.5m, 중로는 5m, 소로는 3.5m, 그리고 도랑은 60cm 정도이다.

 

서울 도성 안에는 3개의 대로가 있는데

오늘의 광화문 네거리인 황토마루에서 경복궁 광화문에 이르는 세종로,

황토마루를 중심으로 동쪽의 흥인문에서 서쪽의 돈의문에 이르는 종로,

신문로길을 잇는 길, 그리고 오늘의 종로 네거리인 대광통교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남대문로가 그것이다.

그만큼 돈의문이 갖는 위치는 남다른,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서울시에서는 돈의문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그 위치는 원래대로 강북삼성병원 네거리 가운데에 세워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로의 교통 흐름과 상황을 감안한다면 복원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글쎄, 아예 없는 것보다야 복원이라도 해놓으면 낫겠지. 그렇지만 복원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본다.

잘 만들어도 관리가 소홀해진다면 또 다시 훼손은 불 보듯 뻔할 테니까.

위풍당당한 오리지널 돈의문의 모습은 이제 빛바랜 사진 속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소덕문, 소의문 - 서소문터

 

대원군 집권기 천주교인 집단 순교가 바로 이곳에서

 

서소문 터(현 중앙일보사와 순화빌딩 사이 서소문 고가도로 입구로 추정이 된다)

 

 

서울성곽 중 4대문과 4소문에는 각각 제 명칭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히 동서남북의 방향대로 문의 명칭을 알고 있었다.

 

숭례문인데도 남대문으로, 흥인지문인데 동대문으로, 혜화문이었지만 동소문으로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불러온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숭례문, 흥인지문, 창의문이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 각종 지도나 기록에 나오는 대문과 소문은 모두 정식 명칭으로 되어 있고,

동대문, 남대문, 동소문 등은 ‘일명’ 또는 ‘속칭’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는 서소문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조선시대 고지도에 보면 거의 대부분 서소문이 아닌 원래 명칭인 소의문(昭義門)으로 표기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1822년에 발간된 <한양도>에는 서소문과 소의문이 같이 표기되어 있는 사례도 있다)

서소문으로 명칭이 바뀐 시기는 대략 경술국치(1910) 이후로 추정이 된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까지 서소문은 한결같이 소의문으로 표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중구 서소문로는 실상은 조선시대 서소문이 있던 길로,

서소문의 정식 명칭은 소의문이지만 이도 중간에 바꾸었고, 처음 건립 당시에는 소덕문(昭德門)이었다.

도성의 서남쪽에 위치하였기에 서울성곽의 4소문 중 서소문으로 남대문과 서대문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조선왕조 5백년간 파주 · 고양 · 김포 등 경기도 서부방면으로 왕래하는 인마가 출입하는 작은 성문으로

태조 5년(1396) 서울성곽을 쌓을 때 세워졌다.

소덕문에서 ‘소덕’이라 함은 ‘덕을 밝힌다’ 또는 ‘덕을 환히 나타나게 한다’라는 뜻으로

유교의 덕목을 원용하고 있다. 그런데 소덕문은 다시 소의문으로 바뀌게 된다.

 

성종 3년(1472)에 전임 왕인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의 시호를 휘인소덕이라고 추존하면서

소덕이란 명칭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정작 성종 대에 소의문이라고 바로 개칭한 것은 아니고

영조 20년(1744)에 바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조 20년 당시 소덕문을 속칭 서소문으로 불렀으며 누각이 없으므로 이를 금위영에 명하여

다시 세우게 하면서 현판도 소의문으로 고쳐 달았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다)

소의문의 ‘소의’도 소덕과 마찬가지로

의를 밝힌다 또는 의를 환히 나타나게 한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임진왜란의 전란 기간 서울성곽은 훼손이 심하였는데 서소문의 경우에도 문루가 파괴되었지만

당시 재정 여건상 중건되지 못하고 있다가 영조 20년(1744)에 개보수하게 된다.

영조 년간에 개축된 소의문은 1914년 경 도로 확장으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1913년에 발행된 영문판 경성지도인 에는 소의문이 표기되어 있지만

1914년에 편찬된 <경성부시가강계도(京城府市街疆界圖)>부터는 소의문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표기도 안 되어 있다. 더욱이 1924년의 <경성도>에는 아예 서소문터로 표기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서소문공원 내에 있는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서소문은 한양 도성 내에서 광희문과 더불어 시신이 나가는 시구문 역할을 하였다.

서울 장안의 백성들이 죽으면 시신을 상여에 싣고 운구하는 저승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상여는 4대문은 물론 창의문이나 혜화문 등의 소문도 통과할 수 없다는 금령(禁令) 때문에

마포나 용산, 양화진 방면에 묘지를 잡게 되면 반드시 소의문을 거쳐서 운구하였다.

그런 연고로 소의문 밖 지금의 서소문공원 자리에는

조선시대 내내 중죄인을 공개로 처형하는 사형장이 있어서 '참터'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의 통치자들은 죄인의 잘못을 널리 알려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할 때에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을 처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장터가 처형 장소로 자주 활용하였는데

칠패(七牌)시장이 있던 남대문 밖 염천교 인근 지금의 서소문공원 자리가 대표적인 사형장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시신이 나가는 서소문 밖으로 그만한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 집권기 천주교인들의 집단 순교는 바로 이곳에서 행해졌다.

지금 서소문공원에는 1999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세운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이 있다.

 

서소문이 있던 자리는 대략 지금의 중앙일보사 건물과 순화빌딩 사이 서소문 고가도로 입구로 추정된다. 1914년 이래 남대문에서 서소문까지의 성벽은 도로확장 때문에 철거되었고

지금은 간혹 사진 속에서 옛 성곽의 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빛바랜 옛 사진 속의 서소문은 시장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다른 대문이나 소문과 달리 바로 옆집 대문처럼 친근하게 보이고 있다.

서소문 안, 즉 지금의 지하철2호선 시청역 부근은 조선시대 중부 황화방이었다.

황화방의 서소문은 푸근해 보이는데 서소문 밖은 풍경이 확 바뀌어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서소문공원에서 바라다본 서소문 터 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색이다.

 

서소문 터

 

 

 

 

 


 

 

 

 

 

 광희문, 수구문, 시구문 - 남소문

 

동쪽으로 지나는 장례행렬은 이 문을 지나야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로 나와 신당동 방향으로 가는 야트막한 고개에서

오른쪽 퇴계로로 몸을 돌려 길을 건너면 조선시대 대문이 서있음을 볼 수 있다.

가까이 가서 대문의 현판을 보니 광희문(光熙門)으로 되어 있다.

중구 광희동2가 106번지. 사적 제 10호.

 

광희문은 서소문인 소의문, 동소문인 혜화문, 창의문과 함께 서울 4소문 중의 하나이다.

그 중 소의문과 혜화문은 일제 때 헐려 없어졌으나

최근에 혜화문은 서울시에서 복원하여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광희문은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小門)인데

각종 기록에 보면 광희문과 남소문이 번갈아 나오고 있다.

 

남소문은 원래 지금의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지어졌다.

처음에 광희문을 남소문으로 삼았으나 도성에서 한강을 건너가기에 불편함이 초래되어

남산 동쪽에 새 문을 내어 왕래를 편하게 하자는 건의에 따라

광희문을 그냥 둔 채 세조 때 남소문을 새로 만들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예종 원년(1469)에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남소문을 다시 폐쇄하고

광희문을 남소문으로 하였기에 실질적으로는 광희문이 남소문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으로도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 '수구문'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상으로는 청계천 수구가 가까이에 있지만

남산의 동북쪽 기슭 일대의 물이 이 부근을 통과한다고 해서 수구문으로 불렀다고 한다.

 

광희문은 수구문 외에도 시구문(屍口門)으로 이용되었으니,

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성 밖으로 상여가 나갈 수 있는 문은 두 개가 있었는데,

그 문이 바로 서소문인 소의문과 광희문이다.

『이규태의 서울 600년』(조선일보사, 1993)에 보면 1880년대 서울 도심 장안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감염되어 앓거나 죽음에 가까워지면 이 문 밖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이 이 비극적인 현장을 목격하고

그 중 어린 여자 하나를 데려다가 치료하여 이화학당에 다니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 기록을 보면 남소문과 광희문의 자리를 혼동하기도 하고,

성문 터와 군영의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도성을 수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광희문은 도성 수축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숙종 37년(1711)에 중건에 착수하는데,

수구문을 다시 쌓고 아울러 누각도 조성하게 되었다.

숙종 45년(1719)에 수구문은 옛 이름이 광희문이니 현판을 써서 걸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대략적으로 광희문은 숙종 때에 재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 시기 서울 도심에 새로운 교통수단인 전차가 등장하면서

1898년 전차궤도로 인해 동대문 일대의 성벽이 허물어졌고,

이어 국권이 실질적으로 상실된 1905년부터는 대대적으로 훼손되기에 이른다.

특히 1907년 일본 왕자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 경호상의 이유를 들어

4대문과 4소문 주변의 성벽을 차례로 허물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훼손은 도심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1915년까지 계속되었다.

 

광희문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성벽은 훼손되었어도 일제강점기 내내 문과 문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문루가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 후 1975년 도로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15m를 옮기는 이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준공되었다.

 

일제강점기 광희문 앞은 퇴계로를 따라 이어지는 전차궤도가 있었기에

지금처럼 넓은 도로에 인접해 있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엄연히 광희문과 동대문은 성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성벽은 이제 광희문 옆으로 해서 장충동 성곽길로 이어져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광희문을 돌아보면서 조선왕조 내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울의 관문이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우리 민족의 잘못으로 훼손되었다가

최근에 들어 보수, 복원되었다는 대목에서 몇 년 전 사소한 부주의로 소실된 숭례문을 보는 것 같아

유적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금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 광희문 찾아가는 길

 

 

 

 

 


 

 

 

 

 

 홍화문, 혜화문 - 동소문

 

창경궁 홍화문에 밀려 혜화문으로 이름 바뀐 동소문 

혜화문 전경

 

 

서울시내 동명(洞名)을 보다보면 혜화동과 동소문동이 있다.

전자는 종로구 관내고 후자는 성북구 관내다(현재 동소문동은 삼선동, 동선동으로 분리가 되었다).

얼핏 보면 전혀 다른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지역구가 다르니 더더욱 오인할 수 있는데 혜화동과 동소문동은 한 뿌리에서 나온 이름이다.

바로 대학로에서 돈암동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올라가는 고개 마루턱 왼쪽의 높은 기단 위에 서있는

대문에서 유래된다. 대문의 현판에는 혜화문(惠化門)으로 되어 있다.

 

혜화문은 홍화문으로부터 나왔고 일명 동소문이라 불렸던 것이다.

홍화문에서 나왔다니 이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궁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이는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데 혜화문을 이야기하면서 웬 홍화문? 하시는 분이 있을 듯싶다.

 

혜화문에 대해 그 연혁을 알아보기로 한다.

혜화문(惠化門)은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축조된 4소문 중 동소문으로

당시는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으며,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비록 도성의 소문 중 하나지만 도성의 대문에 못지않은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는 도성에서 함경도로 가는 통로가 이 문과 연결되어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원칙으로는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숙정문이 제 구실을 수행해야 함에도

건립 이래 항상 폐쇄되어 있어서 부득이 이 동소문이 북대문의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조성하면서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하였는데

당시 동소문인 홍화문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네 생각으로는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보고 홍화문을 지었으니

나중의 것을 개칭해야 되는 것 아닌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격으로 따진다면

소문보다는 궁궐 정문의 계급이 높으므로 동소문의 명칭을 바꿔야하는 상황이 된 것.

하지만 성종 당대와 후임 연산군 시기의 왕조실록에는

개칭 기록이 없기에 두 개의 홍화문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작 홍화문에서 혜화문으로 명칭이 바뀐 시기는 대략 중종 년간으로 추정이 되고 있다.

 

서울의 4대문과 4소문을 만들면서 문의 명칭을 지을 때에는 유교의 덕목이나 가르침을 원용하였듯이

혜화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혜화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이다.

 

혜화문 옛 사진

 

 

혜화문도 건립된 이래 온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지는 못한 듯하다.

문종 1년(1451)에는 동대문과 함께 동소문을 수리하였으나 공사가 완료되지는 않았다.

백성들이 힘들다는 이유로 급하지 않은 일은 정지하도록 지시하면서

동소문에는 우선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하게 하였다.

녹각성이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마치 사슴뿔과 같은 나무말뚝을 박아 설치하는

임시 방어용 목책을 의미하는데 이는 문 자체가 훼손된 것이 아니라

인접한 성곽이 붕괴되어 녹각성으로 임시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 15년(1739)에는 혜화문의 성문 일부가 부서져 밤에 문을 닫지 못하므로

어영청(御營廳) 군인 10여 명으로 하여금 밤새 경계를 하고 지키도록 하였고,

영조 20년(1744)에는 예전에 문루가 없던 것을 어영청에 명하여 세우게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문루가 파괴된 것을 이때 와서야 중건한 것으로 예전에는 문루가 없었다고 표현된 것이다.

 

혜화문은 원래 조선 초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해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으로,

여진의 지정숙소인 북평관이 동대문 안 동학(東學)이 있던,

지금은 철거되고 동대문성곽공원 입구가 된 옛 이화여대 부속병원 언저리에 있었다.

서울에 출입하는 여진의 사신들은 반드시 이 문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므로

규모가 큰 문루가 있어 위용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이 혜화문이 아닌 서대문으로 통행을 바꾸면서

문의 관리가 소홀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임진왜란 때 문루가 파괴된 채로 남게 되었던 것을

영조 때 중건한 것이다.

 

동소문로 길가에 있는 혜화문

 

 

영조 때 중건된 혜화문은 일제 때 철거되었다.

일제는 1913년 <시가지건축취체규칙>을 공포하고 도성 내 성곽을 철거하여 신작로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새 도로에 각종 공공건축물들이 들어서자 도로 확장이라는 구실 아래 혜화문도 손을 보았다.

1928년에 조선왕조 500년간 의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혜화문 문루를 헐어냈고,

1939년에는 돈암동행 전차 선로를 부설하면서 성문마저 철거한 것으로 보인다.

 

옛 혜화문 사진을 보면

고개 가운데 동대문에서 이어온 성벽과 함께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의 동소문이 있었는데

일제 때 완전히 철거되었다가 지금의 혜화문은 확장된 동소문 8차선 도로 가운데서 서북쪽으로

약 30m 정도 옮긴 자리에 복원됐다. 

1992년 12월 29일에 이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15일에 완공되었다.

 

지하철 3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혜화동 방향 고갯길로 오르면 바로 혜화문이 있다.

혜화문 맞은편으로는 서울성곽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동대문 성곽공원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예전에는 동대문에서 혜화문을 거쳐 숙정문까지 막힘없이 성곽이 이어졌을 텐데

이제는 도로로 분단되고 연이어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복원되어 있는 혜화문을 보고 있노라니

도시화와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우리의 전통 문화재가 고통을 당하고 신음하는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만 하다.

 

찾아가는 길

혜화문 약도

 

 

 

 

 

 

 

 

 

 

 

 

 

 

 

 

 

 

 

 


 

 

 

 

 

 창의문, 자하문 - 북소

인조반정 때 창의문 부수고 들어가 쿠데타 성공

 

 

현재 서울의 조선시대 유적지 중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궁궐과 서울 성곽 일부이다.

도성 내의 허다한 관청 건물은 상당수가 훼손, 멸실되어 이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성곽도 도성 내 산악지역의 일부 구간과 도심의 4대문, 4소문 극히 일부만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4소문의 경우 유일하게 아직도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잇는 것이

바로 종로구 청운동 산 1번지에 있는 창의문(彰義門)이다.

 

한양 도성의 북쪽에 있다 하여 속칭 북문, 또는 조선시대 이 일대를 자하동(紫霞洞)이라고 칭하였으므로

일명 자하문이라고도 불렀으며, 4소문으로서는 북소문에 해당된다.

공식명칭은 창의문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이후 장의문(藏義門, 壯義門)으로 표현된 예가 많다.

 

성 안에서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기슭에 장의동이 있어 장의동에 있는 문,

즉 장의문으로 쉽게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 5년(1395)에 축조되었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창의문 문루가 피해를 입어 멸실되지만

원형을 유지하다가 1956년에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최초 건립 이후 항상 폐쇄된 문이었다.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 6월에 풍수학생 최양선이 상소하기를

“장의동 문(장의문, 즉 창의문)과 관광방 동쪽 고갯길(숙정문 지역)은 바로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되므로

길을 열지 말아서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라고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러한 연고로 북소문인 창의문과 북문인 숙정문은 태종 때에 폐쇄되었다.

이후 세종 때에 도성 수축을 위한 작업 편의상 임시로 문을 열기도 하였는데

세종 4년(1422) 정월에 숙청문과 창의문 두 문을 열어 군인들의 출입문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편의에 따라 문을 임시로 열기도 하였지만

세종 28년(1446)에는 왕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문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인조반정 때에는 반정군이 이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가 쿠데타를 성공시켰는데

이때 창의문이 반군에 의해 열린 적이 있지만, 조선시대 내내 창의문은 닫혀 있었다.

 

 

 

창의문에는 두 가지의 일화가 있다.

 

첫 째는 앞서 언급한 인조반정의 현장이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밤 홍제원(弘濟院, 현재 지하철 3호선 홍제역 부근, 서대문구 홍제동 138번지 일대)에 집결한 반정군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통과하여 도성으로 잠입하게 된다.

이어 창덕궁을 장악함으로써 광해군을 축출하는 쿠데타에 성공하여 새로운 인조정권을 창출하게 된다.

 

영조 19년(1743) 영조가 세검정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오던 길에 창의문에 들렀는데

옛 인조반정의 일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이를 기리기 위해 시를 짓고

당시 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게 하니 이 현판은 창의문에 걸려 오늘에까지 전하고 있다.

 

두 번째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당시 그 핵심 통로상에 창의문이 있었다.

서부 휴전선을 넘어온 북한군들은 국군 복장을 하고

주로 산악지역을 행군해 경기도 송추와 일영을 거쳐 세검정에 이른 다음

경찰의 검문이나 제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로를 행군하여 자하문 고개를 올라왔다.

수상한 무리들이 세검정을 통과했다는 보고를 접한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이 급히 현장으로 차를 타고

자하문 고개의 창의문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30여 명의 북한군과 맞닥뜨린 최서장과 정종수 순경은

저들의 총격에 현장에서 순직하게 된다. 물론 곧 출동한 국군에게 청운동 일대에서 일망타진되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자하문 고개 방향(자하문 터널이나 경기상고 방향을 타면 엉뚱한 곳에 내리게 된다) 버스를 타고

창의문 앞에 내렸다. 자가용을 몰고 갈 경우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한다.

버스 하차 지점에 종로경찰서장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이 있고,

동상 옆으로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가 서있다. 순직비를 뒤로 하고 언덕을 오르면 바로 창의문이 나온다.

창의문 옆으로는 서울 성곽길 창의문 안내소가 있다.

 

북악산 서울 성곽길이 최근 개방되고 나서 요즘 창의문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창의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길 옆에 있는 문으로,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알고 있었을 뿐

자하문의 원래 명칭이 창의문인지는 솔직히 알지 못했다.

지금 창의문은 문이 열려 있다. 수시로 사람들이 들락날락한다.

조선시대에는 숙정문과 더불어 항상 닫혀 있는 문으로 존재하였을 터이지만

이제는 대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을 반갑게 맞는 열린 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온 선생님이 창의문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찾아가는 길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 2011.03.17/ 02.24/ 03.03/ 04.07/ 03.10/ 03.31/ 03.24   

-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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