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근대의 새로운 교통수단, 전차

Gijuzzang Dream 2011. 5. 6. 13:31

 

 

 

 

 

 

 근대의 거리를 달리는 새로운 교통수단, 전

 

 

 

 

 

근대문물의 상징, 전차와 전기

 

1899 4 초파일(양력 5 17), 동대문 청량리에서 종로를 거쳐 돈의문 경교까지 길게 이어지는 전차선로의 개통식이 있었다. 동쪽으로는 명성황후가 모셔진 청량리 홍릉에 닿아있고 서쪽 끝에는 경인철도의 종착역인 서대문역과 곧장 연결되는 노선이었다.

시절에 ‘전기철도’, ‘전기거’, ‘전거’라고도 표현했던 전차의 등장은 그렇게 다가왔다.

 

 

 

 

하지만 전차는 개통 10 일만에 운행이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 못할 초고속 교통수단이었던 전차가 도심을 질주하는 통에 다섯 꼬마아이가 치어죽었고, 뺑소니치듯 달아나는 전차를 뒤쫓아 군중들이 이를 파괴하여 불태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소동은 사고를 전차운전수들이 모두 물러나고 자리를 미국인 운전수들로 대체하여 차운행을 재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대한제국 시절의 전차개통이 동양 최초였다는 주장이 간혹 있는 모양이다. 가령 주한 이탈리아 영사였던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라는 책에는 “전차로 말미암아 서울은 그와 같은 근대적 교통시설을 확보한 극동 최초의 도시라는 명예를 얻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점에 있어서 로제티는 틀렸다. 서울의 전차개통은 일본 도쿄보다 4년이나 빨랐지만, 당시 태국 방콕과 일본 교토와 같은 아시아의 도시에서 이미 전차가 운행되고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차부설 당시 교토전철을 설계했던 이들이 주요 기술자로 참여했고, 특히 전차 운전수도 전부 교토전차에서 초빙해온 일본인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물론 그럼에도 전차운행의 도입은 전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빠른 편에 속했다. 그만큼 대한제국과 고종황제가 지녔던 근대화의 의지가 강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운반을 편리하고 빠르게 하여 백성과 나라에 이익을 주자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전차철로의 추가 건설이 지체 없이 이뤄졌다.종로 본선에 이어 남대문을 거쳐 용산으로 가는 노선과 돈의문을 거쳐 마포로 가는 노선이 속속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전차, 일상생활의 풍경을 바꾸다

 

놀라운 근대문물의 상징 전차의 등장은 이내 우리 일상생활의 풍경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무엇보다도 전차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전기의 보급이 필수조건이었고, 전기의 대량생산과 대중화는 여러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종로를 비롯한 대로변에는 전에 보지 못한 전기가로등이 등장했다. 또한 전자회사 덕분에 전화, 전등, 선풍기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접하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전차종점인 청량리 홍릉 앞에 새로운 서양요리점이 세워진 것도 이러한 변화의 갈래였다. 전차개통 직후인 1899 8 <독립신문> 등에 수록된 광고 문안에 따르면, 윤용주라는 사람이 개설한 집에는 서양요리와 더불어 커피와 코코아 등의 음료가 제공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외식문화의 원조격이었던 이러한 음식점은 전차의 등장이 가져다준 부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전차는 한편으로 예술과 여가문화를 창출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전차수입의 증대를 위해 1903 6월부터 동대문 기계창에 영화상영관을 설치하고 매일 저녁 활동사진을 상영한 것이 한성전기회사이며, 나중에는 담배의 판매를 촉진하려던 담배회사와 결탁하여 극장나들이를 일상화하는 데도 크게 일조하였던 것이다. 이곳에는 회전목마와 같은 위락시설을 갖추어 서울 장안의 무수한 구경꾼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일면은 <매일신보> 1913 3 6일자에 수록된 ‘소화笑話(웃음거리) 토막에서도 찾을 있다. 이는 요즘으로 말하면, 신문의 ‘유머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교사 : , 나이 살이냐?

아해 : 무슨 나이 말씀이오니까?

교사 : 나이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느냐?

아해 : , 나이는 가지야요. 학교에서는 여덟 , 집에서는 일곱 살이오, 전차를 타거나 활동사진 구경을 때에는 살이야요.

 

당시 전차를 공짜로 있는 나이는 다섯 이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우스갯소리가 생겨난 것인데, 그만큼 극장나들이와 전차를 타는 일이 그다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 정도로 성행하던 상태였음을 짐작할 있다. 

 

 

전차라는 존재의 양면성

 

이처럼 근대시기의 일상을 그려내는 데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없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전차이다. 하지만 전차는 때로 전통의 파괴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의 번잡하고 좁은 홍예문을 지나다녀야 했던 전차는 통행에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주변의 성벽을 헐어내거나 아예 성문 자체를 철거하는 핑곗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일은 1910 경술국치 이후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며, 특히 경복궁 수난사와 전차는 뗄래야 수가 없다.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궁궐 파괴의 역사는 제법 알려진 편이며, 경복궁에서 벌어진 공진회와 박람회도 그러한 사례의 하나이다. 가운데 1923년에 벌어진 조선부업품공진회 당시에는 관람객의 수송을 위해 영추문 앞까지 전차선로가 개통되었고, 바람에 곡선구간에 포함된 서십자각이 철거되는 한편 육조거리의 해태상도 제자리를 벗어나 경복궁 안쪽으로 옮겨져야 했다.

 

이에 앞서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공사 때는 광화문의 월대를 거쳐 서쪽 홍예를 통해 공사자재를 운반하기 위한 화물용 전차선로가 부설된 적이 있었고, 1926년에는 궁장을 따라 나란히 놓인 선로 위로 전차가 무수히 지나다닌 탓에 느닷없이 영추문이 붕괴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시 1929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개최되면서 수십만 명의 관람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동십자각 앞쪽으로 전찻길이 났는데, 이렇게 본다면 일제가 경복궁을 파괴하는데 전차가 남다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전차선로는 서울의 구석구석까지 빼곡히 연결되었고, 주요노선에는 대부분 복선철로가 놓여졌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도심의 가로는 더욱 번잡해지고,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주요한 교통수단은 그대로 전차의 차지가 되었다. 일상의 통학길과 통근길이 전차노선을 따라 이어지고, 교외로 나가는 나들이길에도 전차가 이용되었다. 대개 낭만과 추억의 대상으로 전차라는 존재가 결부되는 것은 바로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방 이후 혼란기와 전쟁을 겪고도 전차의 역할은 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이에 전차를 대체하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하였으니, 그것은 버스이다. 서울 시내에 처음 버스가 등장한 것은 1928 4월이었다. 이후 1936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차의 운행연장길이는 60킬로미터였고, 버스의 그것은 57킬로미터로 서로 엇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계속 역전되었고, 자가용 승용차의 급속한 보급과도 맞물려 1968 11월에 이르러 전차는 완전히 운행중지와 선로철거 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다. 한때는 최첨단 교통수단이었으나 기껏해야 시속 30킬로미터를 넘지 못했던 전차였기에, 결국에 가서는 그보다 빠른 자동차의 통행을 방해하는 애물단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은방울자매가 부른 대중가요 ‘마포종점’이 크게 히트했던 때가 하필이면 전차가 종말을 맞이했던 바로 그해였다는 사실은 절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없다.

 

이제는 전차 363(국립서울과학관, 등록문화재 426) 전차 381(서울역사박물관, 등록문화재 467) 대가 남겨진 것을 제외하고는, 전차운행의 흔적을 찾기가 아주 어렵게 되었다. 미완성인 채로 끝나긴 했지만, 근대의 꿈을 실고 달린 전차는 확실히 교통수단 이상의 존재였다. 

- 글, 사진,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11-04-15

 

 

 

 

 

 

 

 

 

 

 

 

 

 

 

 

<더보기>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381호 - 원형복원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