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우리나라 전통 한선(韓船)

Gijuzzang Dream 2011. 1. 17. 17:58

 

 

 

 

 

 



 
발달과정으로 보는 한선의 탄생

 

우리나라 땅에 자리를 잡은 구석기시대 원시인들이 강가나 바닷가로 이동하면서 살기 시작한 때부터 원시적인 배인 통나무 토막의 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후에 패총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신석기시대 전 기간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부산의 영도(影島) 동삼동 패총과 지금의 한국해양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차치섬(朝島)의 패총이 유명하다. 그 외로 범방, 수가리, 연대도, 상노대도, 오이도, 궁산, 서포항 등의 패총이 남서 해안에 분포되어 있다.

그 후로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뗏목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서 섬과 육지를 왕래하였다.

인간이 불을 이용하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자 통나무의 속을 불로 태운 후에 돌연장(석기도구)으로 속을 파내어 쪽배를 만들었다. 이 무렵 뗏목(토막배)과 통나무쪽배(퉁궁이)가 병행하여 발달하게 되었다.


고조선시대에 뗏목배를 배밑으로 하는 준구조선(準構造船)이 발명되고 차츰 발달을 거듭하여 구조선(構造船)이 만들어진 다음, 지금의 한선(韓船)과 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진 선박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시시대의 뗏목배는 통나무 여러 개를 칡넝쿨로 엮어서 만들었는데 앞쪽은 통나무 끝이 약간 구부러져 올라간 모양을 하고 있는 나무를 사용하였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게 된 후로는 통나무 몸통 옆구리에 네모 모양 구멍을 뚫고 긴 나무 창을 꿰어 박아 연결하여 뗏목배를 만들었다.

뗏목배를 타고 가까운 해안으로 나가서 그물로 고기도 잡고 바다 속의 해조도 따고 조개나 해삼, 전복 등도 잡았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제주도에서 ‘티우’라고 하는 뗏목배로 자리돔 잡이를 하고 있고, 강원도 강릉시 명주의 정동진과 안인에는 ‘토막배’라고 하는 뗏목배로 미역 등의 해조류를 채취하고 있다. 일본의 서해안(한국의 동해 남쪽 해안)과 쓰시마(對馬島), 규-슈(九州), 오끼나와(沖繩)에는 우리의 뗏목배와 똑같이 생긴 ‘제-모꾸부네=ゼ-モクブネ’라는 것이 있다.

1986년에 일본의 대학교수 야마구찌(山口晶子) 씨가 「韓國 東海岸의 뗏목배」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동해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토목배’라고 하는 뗏목배와 일본의 서해안, 쓰시마, 큐-슈 등에 잔존해 있는 뗏목배의 조선(造船) 방법이 같고 부르는 이름도 ‘뗏목배’-한어(韓語)’와 ‘제-모꾸부네’-일본어(日本語)’로서 서로 같다.” 라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한어가 일어로 다음과 같이 음운변화를 한 것이다. ‘떼→ 제’, ‘ㅅ→ -’, ‘목→ 모꾸’, ‘배→ 부네’.

상고시대 이래로 한반도의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 등지에서 이러한 뗏목과 토막배 또는 통나무 쪽배(퉁궁이)를 타고 해류 및 계절풍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도래(渡來)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형적 조건에 맞춰 발달한 한선의 기본 구조

 

한국은 반도의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은 리아스식 침강(沈降) 해안으로서, 해안의 드나듦이 복잡하며 편평하고 길고 넓은 갯벌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고 작은 섬이 많이 있다. 하루에 두 번, 즉 6시간 10분에 한 번씩 드나드는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있고 그때의 조수 높이 차이는 인천지역에서 평균 8미터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지형적 조건에 가장 적합하고 이에 잘 적응하는 배는 배밑, 즉 선저(船底)가 편평해야 하고 안정성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뗏목과 같은 편평한 선저를 가진 평저선(平底船)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되었다.

편평하고 긴 갯벌이 펼쳐져 있어 만조 때 해안이나 부두로 들어온 배는 그대로 갯벌 바닥에 편하게 앉을 수 있으며 옆으로 넘어지는 일이 없다. 그러나 서양의 ‘V’형 첨저선(尖底船)은 갯벌에 앉으면 곧 옆으로 넘어지게 된다.

 


뗏목배나 쪽배는 돛대를 세워 돛을 달고 먼 곳 또는 먼 나라 (일본의 서해안, 대마도, 구주) 까지 행선(行船)을 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의 발전은 기도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인간은 불을 발견하여 활용하게 되고 또 쇠붙이(동, 청동, 철)를 발명하여 도구를 만들게 되었다. 불, 청동, 철 등을 활용하여 도구 즉 칼, 끌, 도끼, 자귀, 쇠못, 쇠띠 등을 만들고 이러한 것을 활용하여 나무를 자유자재로 제재(製材)하여 얇은 판자와 각목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러한 목재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쓰던 뗏목배나 쪽배 위에 각목과 판자를 더 붙여서 조립하여 배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배를 준구조선(準構造船)이라고 하고 더 발달된 배, 즉 완전한 선박의 구조를 갖춘 배를 구조선이라고 한다.

 

한선은 배의 앞쪽을 이물, 뒤쪽을 고물, 가운데를 한판, 바른쪽을 미 뒤, 왼쪽을 미 앞 이라고 한다.

한선의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배밑은 통나무 여러 개를 옆으로 연결하여 편평하고, 뱃전은 두꺼운 널판을 물고기비늘처럼 겹쳐서 나무못(목정, 木釘)으로 봉합한다.

돛대에는 한국 특유의 사각 돛을 매어 달았고, 옛날에는 짚으로 짠 거적자리(席) 또는 부들풀(돗풀)로 짠 부들자리(香蒲席, 돗자리)를 달았다. 돗자리를 돛대에 메어 달았으므로 범(帆)을 ‘돗→돛’이라고 했다. 대나무자리 또는 삿자리(葦席)를 매어 달기도 했다. 이러한 돛들을 풍석(風席)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대나무로 엮어서 만든 돛을 리봉(利)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대나무로 엮어서 만든 돛을 아지로(千代網) 돛이라고 한다.

선미에는 한국 특유의 기다란 노, 즉 큰 노를 걸고 8자 모양으로 젓는다.

배의 진행방향을 조종하는 치 또는 타(舵)는 선미 축판(板)의 바깥쪽 위에서 배밑 아래쪽으로 향하여 꽂게 되어 있다. 이러한 타를 전향타(前向舵)라고 하는데 민간의 상선이나 어선 등에 쓰인다. 고대에는 모든 배에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관선이나 전함에서는 현대선의 타와 같은 후향타(後向舵)를 사용하였다. 도해선(渡海船 - 원양항해선,遠洋航海船)에서는 쟁밑이라고 하는 삼부타(三副舵)를 추가하여 사용하였다.

 


한선의 종류와 특징

 

첫 번째, 강이나 바다에서 사용하는 거룻배다.

삼판(杉板) 두 장 또는 석 장을 물고기 비늘처럼 겹쳐서 나무못으로 봉합한다. 강이나 바다에서 운반선으로 사용한다. 포구나 만내(灣內)에서 소하물을 운반하거나 해안에서 해조류 등을 채취한다. 낚싯배로도 사용한다. 원근해(遠近海)를 항해하는 대형선에서 자선(子船)으로도 사용한다.

뗀마 또는 전마선은 일본식의 거룻배이다.

 

두 번째, 강과 호수에서 사용하는 강선(江船)이다.

강선은 강이나 호수에 관계없이 삼판은 하판(下板)과 상판(上板) 두 장을 봉합하고 이물과 고물은 횡판으로 대어 막는다. 배 한가운데에 멍에를 걸고 돛대를 세우고 사각 돛을 매어 달았다.

옛날의 강선은 떡 목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목판배라고 하였다.

강이나 호수의 나루턱에서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르는 배는 나룻배라고 한다.

한강의 상류인 충주나 인제에서 농산물이나 임산물을 싣고 하류인 서울로 내려왔다가, 마포에서 어염(魚鹽)이나 생필품을 구입하여 돛을 달고 올리는 배가 있었는데 이러한 배를 늘배(廣船 - 평저선,平底船)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후 내륙지방의 세곡(稅穀)을 이러한 늘배를 이용하여 개경이나 서울로 운송하였다.

 


세 번째는 바다에서 사용했던 작은 배 야거리(海船)다.

가까운 바다를 왕래하며 하물이나 어장의 고기를 실어 나르는 운반선으로 돛대 하나를 세우고 한선식 사각 돛을 매어 단다. 연해안에서 어망으로 고기잡이 즉, 어로활동도 한다.

 

네 번째 배는 당두리(唐道里)이다.

당두리는 돛대 두 대를 세우고 한선식 사각형의 돛을 매어 단다. 배 한판의 한판돛(허리돛 또는 고물돛)은 뒤에서 부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서 돛을 90도에서 180도로 돌려 조종을 한다.

당두리형의 상선(商船)은 연안을 따라 운항하며 많은 하물을 싣고 장사(貿易)를 하러 다닌다.

어선은 연근해로 나아가 어망이나 낚시로 직업적인 고기잡이, 즉 어로활동을 한다. 어로 활동을 하거나 연근해를 운항하는 배를 연안선(沿岸船)이라고 한다.

당두리형의 싸움배, 즉 평전선은 뱃전에 방패를 둘렀다. 판옥전선은 뱃전에 신방(信防)을 걸고 그 위에 판옥, 즉 판자로 집을 지었다.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은 삼판을 9장~11장을 붙여 올렸다. 우리나라의 한선은 평저선형 구조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만듦새는 서양의 V형의 선형이나 일본의 삼판식(三板式) 반평저형(半平底型)의 선형, 그리고 중국의 V형 및 U평저형의 선형과는 다른 것으로써 우리나라의 지리적 지형적 조건과 형편에 알맞게 만들어진 것으로서 환경에 적응하도록 창안되고 발달하여 온 것이 우리나라의 평저형의 한선이다.

 

한선은 1910년 경술국치로부터 1945년까지 35년간에 걸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의 식민통치와 조선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맥이 끊어져 갔고, 6·25 전쟁으로 국토의 허리가 잘리고, 강에는 ‘댐’이 건설되는 등 선박의 뱃길마저 없어져서 그나마 남아 있던 한선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우리가 해안이나 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는 일본의 화선식(和船式) 개량 목선과, 서양식 목선과 일본의 화선식을 절충한 개량 목선들인데 이것을 우리의 전통 한선으로 잘못 알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전통 선박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선은 우리의 전통과학기술 문화유산이다. 이에 대한 조선기술과 조선공작기법을 더 깊이 연구하여 조상의 전통과학기술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우리 배의 우수한 전통을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 글 · 사진/  이원식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한국의 배> 저자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10년 12월호

 

 

 

 

 

 

 

 

 

 

 

여명기의 바닷길

 

선사시대의 배에 관한 대표적인 유물로 비봉리의 선편과 반구대 암각화를 들 수 있다.

즉, 경남 창령군 비봉리 패총에서 발견된 길이 3.1m 가량의 선편은 탄소동이원소 조사에 의하면 대략 8천 년 전에 사용하던 통나무배로 추정되어 지구상 가장 오래된 선편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한편 경남 울주군 반구대의 암각화에는 고래와 물고기 그리고 배와 사람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엔 십여 명의 선원이 반원형 배에서 거대한 고래를 잡는 모습이 포함되어 그 옛날 이 해역에서 펼쳤던 포경문화를 상상할 수 있다.

 

우리 삶의 터전인 삼한 땅이 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195년으로 고조선의 마지막 왕(準)이 위만에 나라를 뺏기고 ‘좌우에 궁인 10여 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이주해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타고 온 배가 어떤 종류이며, 어느 정도 크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항해하였는지에 대한 일체의 유물도 문헌적 단서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우리 선박 및 항해사에 견주어 볼 때 그 배는 뗏목 형태였을 것이며, 연안을 따라 지문항해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의 흥망 경기만에서 갈리다

 

삼국시대에도 해상활동은 이어져 내려왔는데, 특히 경기만에서 벌어진 삼국 간의 치열한 투쟁은 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처음엔 비류와 온조의 백제가 경기만에 선착하여 이곳을 지배하며 번창하였지만, 4세기가 끝날 무렵엔 고구려 광개토왕이 이끄는 5만의 수군이 교동도와 강화도를 거쳐 경기만에 상륙하자 백제의 아신왕은 이를 막지 못하고 항복하고 만다. 그 후 백제는 경기만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밀려가며 점차 힘을 잃어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신라는 진평왕 5년에 우리의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선박제조 관청인 선부서(船府暑)를 설치하여 해상세력을 육성하고 경기만을 차지함으로써 독자적인 대당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그 후 신라는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바다 그리고 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신라시대의 배가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배가 발견된 곳이 경주 안압지여서 놀이배로 추정되는데, 평편한 밑판 한 개가 양측의 측판과 나무못으로 연결된 구조를 지닌 세 쪽 짜리 통나무배다. 이러한 선박결구법은 오랫동안 전승되면서 발전하여 우리 한선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왕성한 고려시대의 해운

 

지금까지 고려시대의 선박 11척이 남해안과 서해안 그리고 중국 산동성에서 발굴되었다.

산동성에서 발굴된 봉래3호선은 중국식 격벽이 사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지만 선형이나 결구법으로 보아 우리 한선임에 틀림없다. 이들 선박을 발굴된 연도순으로 나열하면 완도선, 달리도선, 나주선, 십이동파도선, 봉래3호선, 안좌도선, 대부도선, 태안선 그리고 마도 1, 2, 3호선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우리 선박인 완도선은 1984년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바다에서 발굴되었다. 선체와 함께 청자 3만여 점, 청동제 국자와 숟가락 그리고 목제 망치와 함지 등이 함께 인양되어 당시의 청자와 선원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신안선에 이은 완도선의 발굴은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그 후 많은 업적을 쌓게 된다. 청자의 제작지가 해남군 진산리로 밝혀졌으며, 연대는 대략 11세기 중·후반 경으로 추정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배는 해남 진산리에서 청자를 싣고 고흥반도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침몰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3은 복원된 완도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박의 앞뒤 쪽인 이물과 고물은 썩어 없어졌고, 배 밑 저판과 대부분의 삼판이 남아 있다. 이 잔존부재들은 진흙 뻘에 깊게 묻혀 산소와 해충으로부터 차단되었기 때문에 천 년의 긴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다. 비록 상부구조는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하부구조가 대부분 남아있어 우리 한선의 구조를 밝히는 결정적 단초가 되었다.  

 

완도선을 비롯하여 위에 열거한 11척의 고려선박이 모두 기본적으로는 평저선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한선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선박은 일반적으로 시대에 따라 매우 느리게 변하지만 그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은 바뀐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만곡종통재(彎曲通材)1)의 사용이다.

완도선에서는 만곡종통재를 좌우에 각각 한 개씩 사용했지만, 십이동파도선에는 저판재가 3개인 대신 만곡종통재가 좌우현에 각각 2개씩이나 쓰였다. 이 배의 길이는 7.4M, 폭이 2.4M이며, 돛대가 한 개인 소형의 연안운반용 평저선으로 완도선보다는 조금 작은 배인데, 시대적으론 완도선보다 앞선 10세기의 배로 추정된다.

이러한 만곡종통재가 13세기로 넘어오면서 아예 사라지고 만다. 즉, 달리도선, 안좌도선 등 13세기의 고려선박들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평저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만곡종통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양현 끝 저판이 다른 저판보다 두껍고 이에 삼판을 직접 연결하는 구조로 발전한다.

결론적으로 우리 고유 한선은 기본적으로 평저선형인데, 만곡종통재가 십이동파도선에선 좌우 각 2개씩, 완도선에선 각 1개씩 쓰였지만 안좌도선에선 사라지고 만다. 만곡종통재가 없는 고려시대 13세기 선박의 형태는 후대로 내려와 조선시대 한선의 기본형으로 전승된다.

 


조선시대로 내려온 평저선

 

고려시대의 선박은 현재까지 11척이나 발굴되었지만, 시대적으로 더 가까운 조선시대의 선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선박이 언급되고 있으며, 관이 파악한 병선과 조운선의 숫자가 900척에 가까워 실제론 더 많은 수의 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병선 중 판옥선은 그 규모가 크고 성능이 우수한 포가 장착되어 크게 위세를 떨쳤는데, 특히 민족의 영웅 이충무공이 창제한 거북선에 대한 무용담은 자주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정조 때 출간한 이충무공전집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나, 아직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임란시 맹위를 떨치던 거북선의 구조와 치수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다.

 

조선시대 선박의 모습은 <각선도본>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미상이지만 조선조 말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자료에는 전선, 병선, 조운선 그리고 북조선 등 네 가지 종류의 선박 그림이 주요치수와 함께 그려져 있다. 이들 선박은 상장구조에서 차이를 보이나, 하부는 모두 저판과 삼판으로 이루어진 우리 고유의 평저선형을 보이고 있다.

 

순조 22년에 대마도로 보낸 사신선을 기록한 <헌성유고>에는 175개의 부재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배는 전선보다 큰 선박으로 임란 후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선과 같은 크기의 선박으로 비정된다. 이들 선박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고려 후기에 정착된 평저선으로 시대의 흐름에 그 크기가 점차 커져간 것으로 보인다.


천 년을 이어온 우리 조선기술

우리 고유의 선박인 한선의 특징은 밑면이 평편한 평저선이란 점이다. 이러한 형태의 선박은 용골이 중심부재인 중국이나 일본의 첨저형 선박에 비하여 건조하기가 용이하며, 간만의 차가 큰 우리 서해안에서 운용하기 적합하다.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못을 사용함으로써 해수에 의한 부식문제를 해결하였다. 특히 격벽 대신 가룡목을 사용함으로써 재료를 크게 절감했을 뿐 아니라 건조기간을 대폭 줄였다.

현대적 구조계산에 의하면 한선은 가룡목(加龍木)으로 충분한 종강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밑면이 평편한 평저선이라 먼 거리 항해에 불리한 점은 있지만 봉래3호선이 보여주듯 중국의 산동반도까지는 무난히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 우리 서남해안 같이 섬이 많고 물길이 자주 변하는 해역에서는 평저선이 첨저선보다 오히려 항해에 유리한 면이 있다.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탁월한 조선기술에 관한 DNA를 물려 받아 우리나라가 오늘날 부동의 세계 1등 조선국이 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각주1) 만곡종통재
만곡종통재는 선체의 저판과 외판 사이에서 두 부재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L’자형의 부재이다.


- 글 · 사진/ 최항순 서울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 사진제공 ·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합콘텐츠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10년 12월호

 

 

 

 

 

 



 
부활한 옹기 돛단배를 말한다

 

옹기를 싣은 돛단배의 운항 노선(약 120㎞)은 강진 봉황(옹기마을)→고금도→평일도(1박)→시산도→외나로도(1박)→백야도→까막섬→소호요트장(1박)→여수 이순신광장 부두까지이다.

자연항해는 조류나 바람 등 조건이 합치할 때만 항해할 수 있다.

 

소멸된 돛단배의 자연항해술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옹기배는 근대 시기 강진군 봉황마을에서 생산된 옹기를 싣고 여수를 중심으로 마산, 부산, 제주까지 옹기를 팔러 다니던 개량식 황포 돛단배다. 그러나 30여년 전까지 운행되다 소멸했다.

승선원은 세 명으로 구성되는데, 사공은 키잡이로 지금의 선장이고, 웃동무는 돛잡이로 선장의 지시에 의하여 돛을 조정하며, 화장은 식사당번과 잡일을 한다.

 

이번 탐사의 사공은 신연호(80세, 강진 봉황마을, 이하 ‘사공’)님으로 30년간 옹기배를 탄 분이다.

옹기배에 대하여 살펴보면, 갑판 아래에 옹기를 싣는 짐칸이 있다. 이번 탐사에서는 침실로 이용되었다. 배의 앞부분을 ‘이물’이라 한다. 이물에는 닻이 있는데, 닻줄은 호롱(물레)에 감겨 있다. 뒷부분을 ‘고물’이라하고 사공이 키를 잡는다. 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상 돛대와 돛이다. 3개의 돛대는 앞에서부터 야웃돛(선수, 10m), 이물돛(배 앞부분, 15m), 허리돛(배뒤, 16m)이다. 돛은 황토물을 들인 광목을 사용하며, 돛폭의 가로로 묶는 대를 활대(10개 내외)라고 하는데,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상활대, 맨 아래에 있는 것을 질활대라고 한다.

 

항해의 조건은 첫째 조류, 둘째는 바람이다. 조류는 밀물과 썰물을 말하는데 자연항해는 순류를 타야 하며 도중에 역류로 바뀌면 6시간을 정박하였다가 다시 항해하는 것이 원칙이다. 남해안에서 밀물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썰물은 반대이다. ‘순풍에 돛달았다’는 말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말하는 순풍은 초속 10~12m정도로 주의보 직전의 센바람이다. 바람은 약 45°로 뒤에서 불어올 때 최고의 속력을 낸다. 조류, 바람의 조건이 맞으면 밤에도 항해하였다. 비는 항해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출항! 용왕님께 무사항해를 빌다

 

“남해용왕님, 서해용왕님, 동해용왕님, 으짜든지 우리 선원들 무사하게 해주시고, 가는 곳마다 장사가 잘 되어 물 묻은 쪼박(바가지)에 깨 달라 붙듯이 돈 많이 벌게 해주시요잉!” 무사항해를 비는 뱃고사다.

옛적에는 선주가 돼지를 잡아 준비했단다. 무사항해 기원은 일상생활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 꼭 ‘고수레’를 하면서 용왕님께 빈다. 이는 항해가 무사안녕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출항 전 배와 선창 간 안전거리를 확보하여 돛을 단다. 100여 M쯤 노를 저어 벗어났다.

“더~ 더” “으싸 으싸” 어찌된 일인지 돛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힘써! 잠깐 돛줄이 꼬였다.” 사공이 달려들어 풀었다. 제일 중요한 돛은 말썽도 많다. 부러지고, 찢어지고, 엉킨다. 심지어 돛은 바람이 변하면 반대쪽으로 급회전한다. 이때 질활대에 머리를 맞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잃다. 따라서 배에서는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어야한다.

 

“자~ 가자, 허리돛 줄 당겨!” 바람을 머금은 돛이 부풀어 올랐다. 봉황호는 썰물따라 속력을 서서히 내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사공은 관습적으로 ‘연횃불’ 의례를 행한다. 연횃불의 전체모양은 원뿔형이다. 하단은 짚으로 지름 1m 정도의 원을 만들고, 거기에 삼발이 모양으로 깻대를 묶는다. 꼭짓점인 깻대 끝에 신문지를 붙이고 기름을 발라 잘 타오르게 한다. 사공은 연횃불 꼭대기에 불을 붙였다. “비키시오!” 사공은 타오르는 연햇불을 들고 이물(앞)에서 고물(뒤)로 바삐 움직였다.  “남해, 서해용왕님…, 으짜든지 ~” 다시 한 번 사공의 소원이 빌어지고 연횃불은 바다에 던져졌다. “야 성공이다.” 타오르는 연횃불은 물 위에 똑바로 서서 떠내려가고 있다. 아니다. 사실은 연횃불은 가만히 있고 배가 움직이고 있다.


 

물 따라 바람 따라 자연 항해술

 

“전면에 막대기 조심, 양식장 있습니다.” 선수에서 망지기가 소리친다. “알았어.” 노련한 사공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장애물을 요리저리 피하여 가우섬 인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배가 거의 정지했다. ‘아니 왜 이러지!’ 바람이 섬에 막혔기 때문이란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봉황호가 돛단배임을 실감하였다.

 

거북이 마냥 나아간다. 초장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답답했다. 다행히 고금도 앞에 이르러 센바람이 나기 시작하였다. 배의 속력은 시속 7.4㎞(이하 ‘시속’은 생략)에 이르렀다. 바람이 남풍에서 남동향으로 변하자 속도는 7.7㎞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였다. 3분 후 속도는 곧 4.6㎞로 급감하였다가 4.2㎞로 더 떨어졌다. 잠시 후 “아이고 아파라.” 누군가가 소리를 냈다. 갑자기 바람이 나면서 돛조절하는 줄이 풀어졌는데, 그 줄에 맞은 것이다.

 

사공은 바람 중에서 통문바람을 제일 싫어한다. 배 뒤쪽과 일치하게 부는 바람을 말하는데, 돛이 갑자기 반대쪽으로 돌아가면서 전복 당한 적이 있었단다. 고금도 서쪽에 이르러 배가 거의 정지하였다. 잠시 후 배냉기 바람(산을 넘어오는 바람)이 불어와 배의 속력이 점점 상승하여 5.2㎞에서 10.1㎞에 이르렀다. 이렇게 섬 사이를 지날 때 수시로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변한다. 섬이 많은 남해안 뱃길이 어려운 이유다.

사공은 하루만에 봉황에서 여수까지 간 적도 있었단다. 그러나 30여년 동안 단 두 차례 뿐 이었고, 보통 3~4일 일정이었다. 그 때 항로는 안토배질(내해 항로, 마량~봉래도~여수)이었으니 이번 바토배질(외해 항로)과는 크게 다르다. 지금은 연육교, 양식장 때문에 돛단배의 안토배질은 불가능하다.


오후 3시 무렵, 완도 신지대교를 지났다. 다리 상판을 아슬아슬하게 허리돛이 통과했다. 6.6㎞의 속력이다. 환호를 질렀으나 그 기분은 곧 바꿔야했다. 신지대교를 지나자 바람이 거의 멈추었다. 속력도 0.1㎞에 불과하다. 번갈아 노를 저었다. 잠깐 배냉기 바람이 불었다. 5분여 동안 겨우 100여 M를 나아갔으나 들물(역류)을 만나 곧 정지하고 말았다. 잠시 후 “앗! 배가 뒤로 간다.” 앞에 있던 완도항의 방파제가 멀어지고 아까 통과한 신지대교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밀리다가 갯바위나 신지대교에 부딪쳐 박살날 것 같았다. 바람, 조류에 밀려 난파되는 이유를 깨달았다. 이와 같은 경험은 고흥 나로도 인근에서 한 차례 더 있었다. 이럴 때 옛날에는 포구에 들어가 6시간을 쉬었다. 자연항해는 물 따라 바람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는 계획에 따라 예인선을 기다려 문제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해질녘, 신지도 끝을 지나자 큰 바다가 나타났다. 파도가 세어지고 들물이 빨라졌다. 어두워지면서 비까지 오락가락하였다. 사공은 손으로 키를 잡는 것이 힘들었는지 발로 조종대 끝을 꽉 밟고 있었다. 그 발을 본 순간 갑자기 멀미가 왔다. 식은땀과 구토가 나올 듯 말 듯했다. 메스꺼웠다. 토해버리면 오히려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음날 정오 무렵, 고흥군의 남쪽 시산바다에서 두 번째 자연항해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류나 바람(초속 6m의 북동풍)이 역방향이어서 만만치 않았다. 그때 앞에 그물줄이 나타났다. “허리(허리돛)  돌려” 간신히 비켜 갔다. 돛단배는 정면에서 부는 바람을  60° 정도 방향으로 비스듬히 전진할 수 있다. 정면 역풍을 만나면 배를 지그재그 모양으로 몬다. 북동쪽으로 가려면 북쪽과 동쪽으로 번갈아 진행하다. 이를 ‘헤쳐간다’라고 하고 직선 주행 후 꺽기 전까지를 ‘한참(육지에서는 30리 정도)’이라고 한다. 이때는 자칫 배가 뒤로 밀리기도 하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북쪽으로 전환했다. 이때 아득히 멀리에서 보고 있던 해경에게 전화가 왔다. “왜 그리 가나?”  봉황호가 동쪽으로 가야하는데 북쪽으로 가고 있으니 해경은 의문을 품어 즉시 연락했던 것이다. ‘헤쳐가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만에 2㎞ 정도 전진했다. “우드드득” 그 때 갑자기 배가 진동하면서 굉음이 났다. “걸렸다” “넘어갔다” 순간 어망줄에 키가 걸렸던 것이다. 사공은 키에 줄이 걸리면 재빨리 키를 고정한 윗줄을 잘라 키가 풀리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서야 키대 옆에 식칼이 있는 이유를 알았다.

자연항해에서는 온탕(편안)과 냉탕(긴장)이 반복된다. 따라서 현명한 사공은 온탕일 때 냉탕을 대비한다. 따라서 긴장의 연속이다.
 

 

뱃사람은 뱃멀미 대신 육지멀미를 한다

 

선상 생활은 육상에 비하여 최소한으로 축소된다. 별도의 화장실은 없다. 고물에서 재주껏 해결 한다.

사공은 12월에 겨울 솜(겹)바지를 입고 나가 이듬해 봄이 되어 더워지자 솜을 점점 빼내 홑바지로 귀가했더니 죽었다고 소문이 났더란다.

3대 필수품은 쌀, 물, 화목이다. 육지에서는 보리밥이지만  바다에서는 쌀밥을 먹는다. 보리는 밥이 빨리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밥하는 사람을 화장이라 한다. 쌀 씻기는 먼저 바닷물로, 나중에 민물로 행군 후 밥을 한다. 설거지도 마찬가지고, 심지어는 빨래도 바닷물로 한다. 밥 짓는 화덕은 옹기 뚜껑에 흙을 채워 넣고 그 위에 화덕을 놓는다. 화목은 칼집을 넣어 잘게 뽀개어 불이 잘 붙게 한다. 잠은 이물의 갑판 아래에서 잔다.

“철~썩 철~썩” “흔들 흔들” 밤새 그네타기하면서 잔다. 파도가 배를 두드리는 소리는 다양하여 귀신도 흉내를 못 낸다고 한다. 돛단배는 후진과 브레이크가 없어 오직 전진만 한다. 따라서 정박은 항상 위험하다. 배의 무게(28톤) 때문에 선창과 충돌하면 배가 박살난다. 따라서 돛단배의 정박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또한 뱃사람들은 뱃멀미는 하지 않는다. 대신 육지에 나오면 육지멀미를 한다. 땅위에 서면 흔들흔들 어지럽다. 여수항에서 사라진 옹기배는 그렇게 40여년만에 나타났다.

강진옹기배의 탐사는 경이로움과 함께하는 감동의 여정이었다.

- 글 · 사진/ 변남주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겸 문학박사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1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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