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칸티노지도> <곤여만국전도> <양의현람도>

Gijuzzang Dream 2011. 1. 17. 22:55

 

 

 

 

 

 

 천하 유일본 <양의현람도>를 지켜낸 김양선

 

 

 

매산 김양선(梅山 金良善)은 목사로서, 교육자로서, 고고학자로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다는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를 찾아 지켜냈으며,

우리나라 고지도 연구의 토대를 닦는 데 이바지했다고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매산은 1907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부친 김관근 목사가 세운 의주 중원학교를 거쳐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4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시절 인문학과 어문학,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근대학문을 섭렵했는데 그에게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스승인 양주동 교수였다.

 

그는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위해 기독교 관계 자료를 모으다가

산실되어 가는 민족문화유산이 안타까워 수집하게 되었고 그 자료로 민족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돈을 주고도 입수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자

그는 기독교박물관을 설립하겠다는 전제로 자료를 수집했다.

이렇듯 민족유산을 모아 연구함에 고고학 논문이 나왔고,

근세 민족중흥의 길잡이가 된 실학사상을 연구하며 다섯 편의 논문을 남겼다.

 

 

전 세계 유일본인 희귀 자료

 

매산의 학문적 성과는

그가 타계한 지 2년 뒤인 1972년 '매산국학산고(梅山國學散稿)'란 논문집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고고학 관련 논문 4편, 실학관련 논문 5편이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지도와 관련된 논문이 3편이나 된다.

<明末淸初耶蘇會宣敎師들이 製作한 世界地圖(명말청초야소회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지도)>와

<朝鮮古地圖抄-世界地圖(조선고지도초-세계지도)>,

<朝鮮古地圖抄-韓國地圖(조선고지도초-한국지도)>이다.

특히 매산이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1년에 발표한 <한국고지도연구초>는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우리나라 고지도에 대한 논고로

고지도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 세계 유일본으로 알려진 <양의현람도>는

매산의 혜안과 의지가 없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양의현람도>는 중국 명나라 때인 1603년 북경에서 이응시(李應試)가 판각한 세계지도다.

이 지도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 리마두)가 제작하고

이지조(李之藻)가 판각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참조하여 판각한 것으로

6폭인 <곤여만국전도>보다 큰 8폭짜리 초대형 지도다.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 - 1603년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있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1603년 그린 세계지도를

이응시(李應試)가 목판으로 인쇄한 것.

‘양의(兩儀)’란 천구의와 지구의를 빌려 천지[하늘(天). 땅(地)]를 의미하며,

‘현람(玄覽)’이란 마음속의 만물을 안다는 도교의 용어이다.

이 지도의 네 모서리에 지구도와 이중천도(二重天圖), 구중천도(九重天圖),

십일중천도(十一重天圖) 등 천문도가 그려져 있다.

 

 

구형의 지구 인식 - 양의현람도(洋儀玄覽圖)

 

 

1603년 구형의 지구가 표현된 정밀한 세계지도

 

1601년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는

중국의 북경에 들어가 중국인들에게 천주교와 함께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소개하였다.

그는 서양의 과학으로 일식을 정확히 예측하여 중국인들이 새로운 과학에 호기심을 갖도록 했다.

1602년에는『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라는 세계지도를 제작하여

그간 알려져 있지 않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곤여만국전도』에는 서문과 발문 등이 붙어 있었는데

‘지형본원구(地形本圓球)’라 하여 지원설(地圓說)도 소개하였다.

1603년 중국을 다녀온 조선의 이광정(李光庭, 1552-1624)은

북경에서 간행된 세계지도인『곤여만국전도』를 들여와 홍문관에 전해주었다.

 

1602년 이응시(李應試)는『곤여만국전도』를 조금 크게 모사하여  

『양의현람도(洋儀玄覽圖)』라고 명명하고 8매의 목판에 새겼다.

『양의현람도』에는 대륙과 바다의 윤곽이 근대에 제작한 지도로 오해할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십일중천도(十一重天圖)」와 구형의 지구의 모습이 그려 있고,

「이중천도(二重天圖)」에도 황도대(12궁과 24기)와 북회귀선, 남회귀선, 지구가 묘사되어 있다.

또한 『적도북지반구지도(赤道北地半球之圖)』와 「적도남지반구지도(赤道南地半球之圖)」가

그려져 있어 지구를 구형으로 생각하고 있는 당시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양의현람도(洋儀玄覽圖)> 跋文

 

馮應京 跋文

輿地圖敍西泰子輿圖. 凡三授梓. 遞增國土. 而玆刻最後. 乃最詳. 大都以天度定輪廣. 以日行別寒燠. 以五大洲辨疆界. 物産民風之瓖奇附焉. 於戱. 天下之觀此圖者衆矣. 或供臥遊之興. 或廣經略之謨. 或鎖蠻觸之褊心. 或驚塵芥之虛見. 倘亦有進于道者乎. 記稱生聖德業施及天地之所覆載. 而莫不尊親. 盛矣. 崇伯子作禹貢. 伊尹作獻令. 姬公作王會. 母亦惟是誕敷文德以恢無外之仁. 乃周職方氏掌天下之圖. 四夷. 八蠻. 七閩. 九貂. 五戎. 六狄止爾. 延及我明. 多方砥屬. 東南際海. 若朝鮮暹羅瓜哇. 凡十有七國. 西南夷. 若姿羅滿剌加凡二十九國. 其由天方通者又十有六國. 西域則泥剌朶甘. 凡七國. 其由哈密通者又三十有八國. 北虜種類繁夥. 僉受羈縻. 視古聲敎爲尤盛. 視此圖僅五之一耳. 所稱無遠弗屆. 是耶非耶. 天下勢分有限. 心量無窮. 心者上帝所降衷. 宇宙同之. 隨分所及以盡此心. 遞相爲倡和. 遞相爲感應. 擬議一室之中. 流行八荒之表. 果且以時地限哉. 諦觀殊方風土. 尙有穴處者. 不粒食不火食者. 衣蟲魚皮者. 結繩刻木葉者. 食人者. 食子者. 爲驩鷂食者. 死而掛之樹. 之葬之腹中者. 其知宮室. 畋漁. 耕稼. 衣裳. 文字. 網罟. 棺槨. 人倫之制. 匪賴有聖人之敎不及此. 聖人立極緩猷. 代天以仁萬國. 夫亦順人心以利導. 而吾徒顧瞻寰宇. 倣法前修. 各以心之精神明道淑世. 薪火相傳. 曷知其盡. 卽如中國聖人之敎. 西士固未前聞. 而其所傳乾方先聖之書. 吾亦未之前聞. 乃玆交相發明. 交相裨益. 惟是六合一家. 心心相印. 故東漸西被不爽耳. 不物非吾所有者玩之喪志. 悠悠方儀. 萬象咸載. 吾道放之而皆準. 詎忍遐遺. 直當視如家園譜牒. 油然興倂包之思焉. 西泰子有云. 神之接物. 司記者受之. 司明者辨之. 司愛者處之. 要歸事上帝爲公父. 聯萬國爲弟兄. 是乃繪此坤輿之意與. 應京嘗備員職方. 見其獻圖于上. 倍蓗掌故. 乃悉其薀. 序而傳之. 用昭咸賓之盛. 且以資學者宏覽云 後學馮應京書

 

 

常胤緖 跋文

 

兩儀玄覽圖序

 

夫究(?)天地之津涯. 斯巨細咸得而物無不格. 深造化之去邃. 乃精粗不遺. 而理無不竅君子盡性之學也

性有未盡. 君子之生尙歉焉. 非自慊者也. 此西泰自西來本意. 而西泰之來也. 握圭挈矩. 方寸準折. 歷八萬里經數百國. 謂之究天地之津涯. 非耶. 陟輿浮海. 密陰較陽. 推二極之高卑以度晝夜之淺深. 測九天之廖廊以殷七政之次舍. 謂之窮造之玄邃. 非耶. 其言. 地體如球而懸擧于天之中. 上下八方人物咸麗焉. 其奉天主敎. 忠信爲務. 則所傳皆有所自實由至理. 非荒唐詭誕之設. 故吾黨以爲學者. 如都尉侯虞山公. 及縉紳憲臬馮慕岡. 銓衡吳左海. 繕部李我存. 典客祈念東. 駕部楊疑始. 都水陳堅白. 世胄李省勿阮余吾諸時賢. 皆信之而淑其學. 且以其所繪兩儀玄覽圖鋟諸梓. 以爲吾黨之未聞者聞. 未覩者覩. 是知理之未盡明者. 以物有未盡格也. 象胥掌故猶可擴充. 碩彦宿儒更須硏繹. 性分中事. 信無止法也. 又知天地之大. 造化之妙. 舟車所未到而涉略有限也. 心目所不及. 而識見或遺也. 何物之難博. 理之不易通. 寧若斯哉. 拘方之士得聞西泰之言. 豁然襟懷. 漠然瞻覿而無得于太極淸虛之境. 斯圖實可宗矣. 豫先王以元戎佐 高皇帝定一寰宇. 然猶方之內. 若海外諸方隸天織方者百一于玆圖. 又皆翊我 皇圖之大且遠也. 因諸賢之言. 而僣序于末焉. □□□榮祿夫柱國 左軍都督□事懷□□□難□謹□□□ 常胤緖撰

 

 

阮泰元 발문

髮齔聞雞丸蟻磨. 譬天地慒然爾己. 閱章亥終古孔甲准南桑欽. 裵秀賣耽吳臨川朱思本諸圖說. 竊疑其隘且茫. 然爾弱冠浮海南. 望巨浸. 似竭坤儀而凌星漢. 廼恍悟. 地凝氣運水隨氣旋. 猶人身血氣周流之無止息. 曾有謂高下耶. 然亦臆度爾. 每懷天高莫測. 地廣寧窮. 吾人窮理格物. 奚由而安. 遂負笈超大都. 大都人文藪. 冀有所遇. 會歐羅巴西泰先生及其二三會友 敭敭噩噩白月靑陽日與中國賢達者. 闡明性理正學. 其衍兩儀也. 天周于外. 地懸天中. 氣充盈乎兩間. 向所臆度庶幾乎而猶未深然也. 及出晷矩側北極考日星辯交食. 鑿鑿然徵諸形景. 復益以勾股推步. 指顧間己游神八極宅心萬有. 昔慒然茫然者廼蕩蕩然不能自喩其狀. 先生向因吳銓曹請. 刻大地圖于留都. 幅促而略. 李繕部復增其幅. 而稍詳. 第巳挈之南游. 大都多方士聞而未見者. 誓惜弗寧. 玆刻也. 幅愈廣. 述愈備. 視山海寰宇十洲諸荒唐說信如齒室夜話. 而忽對離婁披曦暉也 夫六合無垠. 萬目焉矚斯圖. 則不窺戶牗而群方掌上若算丸焉.

名之玄覽也宣諸. 耒(뢰)斯阮泰元

 

 

李應試의 跋文

(1)

五苧. 鍾伯相. 黃芳濟. 游文輝. 倪一誠. 丘良稟. 徐必登. 咸以性學從西泰先生游. 其貞瑜懿行. 多似之. 於是役也預焉. 李應試因議於此

 

(2)刻兩儀玄覽圖 

無論☐國朝二百餘年. 卽三代以繼今之父老. 蔑聞歐羅巴何. 亦蔑聞地球何. 往哲以鷄卵喩兩儀. 所憾言而未盡逮. 西方人自歐羅巴浮桴八萬里. 以其國人數千年涉歷大地圖說. 爲中土先達. 厥績偉歟. 庸是. 則冠丈夫志四方者披覩而罔或兩端. 夫中土人信道寧如是. 顧西方人貞瑜懿行. 齊衡三代上人. 所以三代未造未發. 甫憲於令日. 余之生亦厚矣. 余嗜中土玄象. 諸中西推步斯而圖心會神游. 理固宜然. 遂以是揭諸四方好夫同志. 惟余系漢(?)內史之涇野. 産於皇轂. 弱尉於楚郢. 嘗涔轍齊魯趙韓衛魏吳越遼鮮間. 視西方人八萬里風波. 自耿耿爾. 吁嗟呼. 齒髮不常攀轅莫及. 余之業無異扼罌灌畦而云. 歲豊. 又烏足以語大地乎哉. 余從西方人游越玆三禩. 其淑儀紳言. 非特一圖己也. 然西方人聲音文字與中土殊殊而能同. 蓋心同理同. 其學且周孔一轍. 故賢公鄕大夫日接而雅敬之云. 西方人西泰先生及其耶蘇會二三友人也.

萬曆癸卯秋分日耶蘇敎學子葆瑑李應試譔

 

侯拱宸 발문

歐羅巴. 職方不載于周. 博望未通于漢. 迄唐宋猶蔑聞爲焉. 盖域去中國八萬里遠也. 今我聖天子聲施八垠之外. 西泰利子姡自彼航海來朝. 視重九譯者無讓矣. 其人貞篤純粹. 學博天人. 爰制兩儀賢覽圖. 發揮乾坤精奧. 周徧法界人文. 乃自赤縣神州以至遐逖要荒. 居然圖次披閱之. 頃

 

 

마테오 리치의 기록에 의해 <곤여만국전도> 1판, 2판에 이어 제3판으로

<양의현람도>가 간행된 것을 알게 된 최초의 사람은

영국의 작가이며 <마테오 리치의 중국지도>의 저자인 바들리(John F. Baddeley)였다.

1917년 그의 논문에 의해 <양의현람도>의 존재가 알려지긴 했으나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고, 중국에서 그 지도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매산의 논고에 의하면 이 지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은

선조 때 크게 등용되었던 황여일(黃汝一)의 아들인 동명(東溟, 黃中允의 호)이

1604년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갔을 때 얻어온 것이다.

황씨 집안에서는 명나라 조정의 하사품이었다고 하나 황동명의 '연행록(燕行錄)'을 보면

이 지도는 북경에서 입수했다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지도가 1936년경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다.

강원도 평해 황씨 종가에서 300여 년간 비장되어 오던 것을

황씨 집안의 종손인 황병인(黃炳仁)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당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상과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건드리면 큰 병이 난다는 부모의 말에 감히 그것을 열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가

방학을 맞아 귀국하면서 그 물건이 궁금하여 열어 봤더니

<兩儀玄覽圖(양의현람도)>라고 표제한 세계지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 지도를 일본으로 들고 가 그의 스승이자 동서문화교류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시다 미키노스케(石田幹之助)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그 뒤 이시다 교수의 소개장을 갖고 고지도 연구가인 아유자와 신타로(鮎澤信太郞)를 찾아갔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일본학자 나카무라 히로시(中村拓)가 사진촬영을 했다고 한다.

중국 저장(折江)대학 양위레이(楊雨 )교수의 논문 <한국 所藏 마테오리치의 세계지도 연구>에

따르면 1936년 아유자와가 처음으로 이 지도를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고,

1941년 <일본문화에서의 利瑪竇(리마두)의 세계지도>,

1953년 <利瑪竇(리마두) 세계지도의 역사연구>, 1957년 <지리학사연구> 등 연이은 논저를 통하여

이 지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25 때 박물관 앞뜰에 파묻어 보전

 

광복 직후 이 지도는 우여곡절 끝에

황병인씨의 호의로 매산이 경영하는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매산은 이 지도와 안중근 의사 옥중 유필만을 챙긴 채 피란을 떠났으나

폭격으로 위험을 느끼자 박물관으로 되돌아와 지도를 박물관 뜰에 파묻고 다시 피란길에 올랐다.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되어 돌아와 보니 박물관 소장품은 대부분 소실되어 없어졌으나

땅속에 묻어두었던 <양의현람도>만은 온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다던 '양의현람도'가

중국 선양(瀋陽)의 랴오닝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에 한 본이 보존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이 지도는 1981년 랴오닝성박물관학술논문집에

<利瑪竇和他的兩儀玄覽圖簡錄(리마두화타적양의현람도간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왕선후(王綿厚)에 의해 중국 학계에 알려졌는데,

1994년 발간된 <中國古代地圖集(중국고대지도집)>에는

랴오닝성박물관 본이 세계 유일본이라고 적고 있다.

 

양위레이 교수의 논지에 의하면

숭실대본은 8폭으로서 세로 길이 199cm, 가로 길이 444cm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나,

랴오닝성 본은 1949년 선양 고궁상봉각(瀋陽故宮翔鳳閣)의 병풍에서 떼어낸 뒤 다시 표구하여

괘도로 제작한 것으로 폭마다 상하좌우로 훼손된 부분이 적지 않으며

남아 있는 부분도 글자나 지도의 내용이 희미하여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일본 신도(神道)에 대한 반감이 컸던 매산은

광복이 되자 1948년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 자리에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세웠다.

그러나 이 박물관이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자 1958년 박물관을 폐관하고 소장품을 사저로 옮겼다.

이후 숭실대가 매산의 유물을 기증받아 1967년 부설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매산은 “이 일을 위해 나는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전시된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하신 것뿐이지요”라고 말했다.

-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 · 매핑코리아 대표

- <월간 山> [최선웅의 지도이야기 67]

 

 

 

 

 

《곤여만국전도》

한역서학서와 세계지도 등 각종 서양문물이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해 1603년 베이징에서 사신으로 갔던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가 마테로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가져왔다.

 

목판으로 찍어서 펴낸 6폭의 커다란 타원형으로 그려진 세계의 서쪽 부분에

거대한 유럽대륙이 자리하고 있는 존재에 놀랐던 이수광(李晬光, 1563-1629)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구라파국여지도(歐羅巴國輿地圖)>라고

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지도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피아누스도법(Apian projection)을 따르고 있는데

오르델리우스의 1570년도판 지도첩과 메르카토르의 1595년판 지도첩, 플라시우스의 1592년판 세계지도를

참고해서 제작된 것으로 16세기말 유럽의 최신지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보통 유럽의 세계지도와 달리 중국대륙을 지도의 중앙부에 놓고 다른 대륙을 배치해서

중화사상의 중국인들이 쉽게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세계지도에는 구라파(歐羅巴, 유럽), 리미아(利未亞, 아프리카),

남북아묵리가(南北亞墨利加, 남북 아메리카), 묵와랍니가(墨瓦蠟泥加, 메가라니카)의 5대륙이 그려 있다.

한자로 된 음을 우리 발음으로 읽으면 유럽이 ‘구라파’가 되고, 아메리카가 ‘아묵리가’가 되지만

중국발음으로 읽으면 원음에 훨씬 가깝다.

그리고 ‘묵와랍니가’는 ‘메가라니카’라는 이름의 미지의 남방대륙으로 상상의 나라였다.

 

전체적으로 850여 곳이 넘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고

각지의 민족과 물산에 대한 지지적(地誌的) 기술이 소개되어 있었다.

또한 타원형의 세계지도 바깥쪽에는 극투영(極投影)의 방위도법에 의한 남북의 2반구도(半球圖)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구조론에 의한 구중천설(九重天說),

일식과 월식의 그림, 천지으도(天地儀圖) 등이 그려져 있었다.

 

이 <곤여만국전도>가 나온 지 2년 후 1604년(선조 37) 증보판인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가

새로 제작되어 조선에 전래되었고 그 뒤에도 몇 폭의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가 조선에 소개되었으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숭실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의현람도>뿐인데

그 지도는 중국 본토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이다.

 

1604년 처음으로 <곤여만국전도>를 접한 조선인들은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였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인줄 알았는데 중국보다 더 넓은 대륙이 있었으며

상상할 수 없이 넓은 태평양, 아메리카대륙 등 새로운 땅이 있었다.

조선학자들의 중화적 세계관은 서양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을 자극했고

중국에 와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한 시각도 새로워졌다.

 

만력(萬曆) 계묘년(癸卯年, 1603) 내가 부제학의 자리에 있을 때,

중국 수도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이광정과 권희가 구라파국의 여지도 1건 6폭을

본관(本館)에 보내왔다. 아마 경사(京師)에서 구독한 지도일 것이다.

그 지도를 보니 매우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특히 서역(西域)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중국의 지방과 우리나라의 팔도와 일본의 60州의 지리에 이르기까지 멀고 가까운 곳,

크고 작은 곳을 모두 기재해 빠뜨린 데가 없었다.

이른바 구라파국은 서역에서 가장 동떨어진 먼 곳에 있는데 그 거리가 중국에서 8만리나 되었다.

구라파는 오랫동안 중국과 통하지 않다가 명나라 때에 비로소 두 번 입공(入貢)했다.

구라파 땅의 경계는 남쪽은 지중해에 이르고, 북은 빙해(氷海)에 이르고,

동쪽은 대내하(大乃河)에 이르고, 서쪽은 대서양(大西洋)에 이른다.

지중해라는 바다는 그것이 바로 천지(天地)의 한가운데라고 해서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라 한다.

- 이수광의 <지봉유설>

 

서양사람들을 처음 본 신기함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다.

그 사람을 보니 눈썹이 속눈썹과 통해 하나가 되었고, 수염은 염소수염과 같았다.

그가 거느린 사람은 얼굴에 옻칠을 한 것처럼 검어서 형상이 더욱 추하고 괴상했다.

아마 해귀(海鬼)와 등류(等類)일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므로 왜인의 통역을 통해 물으니, 자신들의 나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

중국에서 8만리나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왜인들은 그곳에 진기한 보물이 많기 때문에 왕래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를 떠난 지 8년만에 비로소 그 나라에 도착한다고 했다.

아마도 무척 떨어진 외딴 나라인 모양이다.

- 이수광의 <지봉유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VS 칸티노지도

 

제작한 나라에는 없는 현존 최고의 세계지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현존하는 세계지도는

1402년(태종 2)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고,

포르투갈 최고의 현존하는 세계지도는 <칸티노지도(Cantino Planisphere)>이다.

그러나 이 두 지도는 공교롭게도 자국에는 없고 제3국에만 존재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일본 교토(京都)의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도서관과

나가사키 본광사 등 두 곳에 소장되어 있고,

칸티노지도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모데나(Modena)市의 에스텐세(Estense)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크기가 가로 168cm 세로 158.5cm이고, 비단에 그려진 채색본으로,

지도 상단에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자간을 벌려 지도 제목이 커다랗게 차지하고,

그 밑으로는 종서로 지도 제목에 부합하는 중국 역대 제왕의 국도(國都)와

원나라의 행정부 소재지가 나열돼 있다.

 

지도 중앙부에는 거대한 중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동쪽에 조선이 위치하며,

그 아래쪽으로 일본이 조그맣게 그것도 방위가 틀어져 그려져 있다.

중국 대륙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라 여겨지는 돌출된 서아시아와

마치 혀 모양으로 늘어진 아프리카와 유럽이 대단히 불완전한 형태로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다.

 

지도 하단에는 이 지도의 제작 경위를 밝힌 권근(權近)의 발문이 종서로 적혀 있는데,

그의 저서 <양촌집(陽村集)>에도 나와 있는 이 발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제작된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중국 역대 국도의 변천을 나타낸 천태승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합쳐 하나로 만들고,

거기에 조선과 일본을 그려 넣어 건문(建文) 4년(1402)에 완성한 것이고,

조선의 중신 김사형(金士衡)과 이무(李茂)의 명에 따라

이회(李薈)가 두 지도를 편집하고 조선과 일본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일본 류코쿠대학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진본은 아니고 16세기에 모사한 것이며,

이 지도가 일본에 전해진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역사학자 오다 다케오(織田茂雄)에 따르면

메이지(明治) 시대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라 한다.

 

1988년에 일본 큐슈 시마바라시(島原市) 혼코지(本光寺)에서 이와 유사한 지도가 발견되었는데,

지도 제목 끝 부분이 ‘~之圖’가 아니라 ‘~地圖’로 되어 있는 것만 다르고, 지도 내용도 거의 같고,

제목 밑의 주기나 권근의 발문도 그대로인데, 지명의 가감삭제가 다소 다르다고 한다.

 

이밖에 일본에는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쿠마모토(熊本)의 혼묘지(本妙寺)에 헌납한

'대명국지도(大明國地圖)'와 천리대(天理大) 도서관에 있는 '대명국도(大明國圖)'가

이 지도와 같은 계통의 지도로 본다.

다만 이 두 지도는 제목과 권근의 발문이 없으며, 내용도 바뀐 곳이 많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고려대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에 이와 비슷한 지도가 소장되어 있으나

지도 제목이 <혼일역대국도강리도(混一歷代國都疆理圖)>로 되어 제목이 약간 다르고,

1980년대에 일본으로부터 구입해온 것이라 한다.

이밖에 류코쿠대학 소장본을 고 이찬(李澯) 선생이 사람을 시켜 모사해온 것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하여튼 이 지도는 중국의 전통적인 국토 전역과 서방세계를 자세하게 그린 이슬람지도,

거기에 조선8도도가 합쳐진 것으로,

17세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제작되기까지는

동양에 있어 가장 빼어난 세계지도라 할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인 칸티노지도(Cantino Map)15세기 대항해 전성기 때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세계지도를 훔치기 위해 이탈리아의 페라라 공작(Duke of Ferrara)이 밀파한

알베르토 칸티노(Alberto Cantino)의 이름을 딴 지도다.

말 장사를 하던 칸티노는 페라라 공작의 밀명을 받고 포르투갈에 잠입하여 왕실 지도사를 매수하여

1502년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 약 1개월간 세계지도를 몰래 모사하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주도하면서 항해를 위한 해도를 제작하였는데,

모든 지도는 비밀히 취급되고 왕실에 엄중히 보관하고 있었으나

1755년 수도 리스본을 덮친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왕실에 비장되었던 지도가 모두 불타고 말았다.

 

한편 이탈리아로 가져간 칸티노지도는 페라라에서 모데나로 옮겨져

1859년까지는 모데나의 에스테가 궁전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그 해 시민폭동이 일어나자 지도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9년 뒤인 1868년 에스텐세 도서관장인 보니가 시내를 지나다가

정육점의 뒷벽 가리개로 쓰고 있는 이 지도를 우연찮게 발견하여 오늘에 전해지게 되었다.

 

최근 이 지도를 다룬 <世界地圖의 誕生>이란 책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

저자 오지 도시아키(地利明)는 이 지도가 전하는 다채로운 메시지를

세계도에서 세계지도로 옮겨가는 분기점이자

지도에 요구되는 사상성, 예술성, 과학성, 실용성의  네 가지 특질을 모두 갖춘 걸작으로 평가한다.

 

이 지도의 크기는 가로 220cm, 세로 105cm이고,

지도 좌측 아래쪽에 ‘인디아스의 여러 지방에서 근년 발견된 섬들의 항해를 위한 해도’라고 써 있어

당시 포르투갈이 파악하고 있던 인도를 향한 항해지도로 보고 있다.

 

지도 중앙부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 동쪽으로 인도와 인도양의 섬들이 묘사되어 있으나

코끼리 코 모양의 인도지나 반도가 과장되게 그려져 있고, 그 동쪽은 아예 밋밋하게 생략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중앙아메리카의 섬들과 남미의 일부만이 묘사되어 있으나

포르투갈이 영유하고 있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지대를 채색하고

한가운데 32방위를 나타내는 방위문자판인 항해에 필요한 컴퍼스 로즈(compass rose)와

그로부터 방위선이 사방으로 뻗어 연결되어 도면 곳곳을 장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포르투갈이 파악하고 있던 세계를 그린 이 지도는

측량 또는 천측(天測)을 통해 경도 · 위도를 측정해 세계를 그리려고 시도한 최초의 지도다.

 

인도까지 항해해 다녀온 바스쿠 다 가마의 업적을 기념해 만든 이 지도는

사상적으로 세계 중심에 군림하는 '해양 제국 포르투갈'을 상징하는 것이며,

실측에 기초해 정확하게 그렸으며 확인하지 않았거나 근거가 없는 부분

곧, 답사하지 못한 주변부는 공백으로 제외하고 오로지 실측 가능한 것만 그린 점에서

과학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인도로 항해하기 위한 해도라는 점에서 실용적 목적도 뚜렷하다.

상품에 대한 해설도 풍부하게 담아 실용성을 더욱 높였다.

  

포르투갈이 이른바 대항해 시대를 열면서 만들어낸 '칸티노 세계지도'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의미한다는 내용 등도 흥미롭다.

 

 

꼭 100년 간격으로 제작된 귀중한 이 두 지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VS 칸티노지도)

정작 제작한 나라에는 남아있지 않고 제3국에만 존재한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지만,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최고의 세계지도로서 지도사상 걸작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모사본이 일본에만 여러 본 남아있다는 것은

역사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 · 매핑코리아 대표

- <월간 山>458호, 2007년 12월호 [최선웅의 지도이야기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