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실학자 연암, 조화 속의 변화를 논하다

Gijuzzang Dream 2010. 11. 13. 01:16

 

 

 

 

 

 

 

 실학자 연암, 조화 속의 변화를 논하다

 

 

정밀하다 못해 미로 같은 연암의 글 속을 헤매다보면

대개는 ‘대문호(大文豪) 연암’에 몰입하기 십상이다.

그의 문학과 사유는 날로 주목받는 반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자 연암’은

상식 수준의 정의로 박제되어 버렸다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 사회가 물질문명에 초고속으로 진입하고 실용이 과도하게 넘쳐나다 보니

실학자 연암으로서의 가치가 퇴색되고 만 듯하다.

오늘날 그의 실학을 다시 볼 여지는 없는 것일까.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의 개혁책은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지금 현실에 적합하지도 않을뿐더러 재미도 별로 없다.

그의 정책을 현대사회에 응용하려 한다면 정신 나갔다는 소리를 듣고 말 것이다.

때문에 그의 실학을 이해하려면 정책의 나열보다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연암의 실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학자들은 연암을 비롯한 북학파 학자들의 학문을 집약하는 말로 ‘이용후생’을 꼽는다.

이 말은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편에서 나왔다.

 

 

순(舜)임금의 신하 우(禹)가 순에게 아뢰길, “군주가 선정(善政)하고 양민(養民)하면 백성들의 덕을 바로잡는 일(正德), 백성들의 물화가 넉넉해지는 일(利用), 삶이 윤택해지는 일(厚生)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애초 이용과 후생은 정신적 가치를 바로잡는 정덕(正德)과 조화를 이루는,

선ㆍ후를 따질 수 없는 가치 개념이었다. 연암 또한 이용후생과 정덕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이용후생과 정덕에 대한 그의 단적인 정의는『열하일기』「도강록」편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용한 후에 후생할 수 있고, 후생한 후에 정덕할 수 있다.”

 

그런데 연암의 언급은『서경』과 좀 다르다.

당시 정덕은 이용후생의 전제로서, 말하자면 선행 개념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덕을 담당하는 사대부와 이용후생을 담당하는 상공업자 사이의 본말,

선후를 규정하는 통념으로 굳어졌다.

연암은 이러한 사고의 전복을 꾀한다. 선후를 따진다면 정덕이 이용후생의 전제가 아니라,

이용후생이 정덕의 전제이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상공업자의 사회적 영향력 또한 날로 커지고 있었지만,

상공업을 천시하는 사대부의 사고는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였다.

그 시절 연암은 상공업의 발전을 긍정하고 변화하는 현실에 사고를 맞추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우리는 연암이 말한 정덕, 이용, 후생의 두 가지 지향을 동시에 읽어내야 한다.

첫째는 연암이 세 개념의 조화를 부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용후생을 통한 물질의 풍요는 정신, 덕과 적절한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둘째는 이용후생 강조의 실제 의미이다.

 그는 이용후생을 강조함으로써 당시의 주류와 대결하고 파장을 일으켰다.

그 파장이 아마 연암의 지향이 근대의 그것과 맞아 떨어진 부분일 것이다.

 

 

움직이고 변하며, 상대적이고 다차원적인 세계

 

연암의 실학은 정신적 가치와 조화를 추구하면서,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고 생활의 물질적 측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실학 정신은 우리가 실학자로 일컫는 많은 학자들의 사상과 상당부분 겹쳐 있다.

연암이 속해있던 그 거대한 정신적 흐름은 무엇이었고 그 속에서 연암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그 답을 얻기 위한 고리는 서학(西學)의 충격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16세기 예수회가 중국에 전한 유럽 학문, 즉 서학은 17세기 초반 조선에도 알려졌다.

이후 병자호란으로 잠시 주춤했다가 18세기에 다시 관심을 끌었다.

특히 천문 역법, 지리, 수리 과학 등의 영향이 지대했다.

이익은 서학을 접한 후 “도구와 수학은 뒤에 나온 것이 더 교묘하다.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다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오늘날에는 이를 따를 것이다”라고 평했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다는 사고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물이 변화, 발전한다는 생각은 지금이야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고의 기준을 바꾸는 혁명적 전환이었다.

옛것, 과거의 성인이 만사(萬事)의 기준이자 귀결로 인식되던 복고적 순환의 시간관이 깨지면서,

현재와 미래가 과거의 속박에서 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연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옛 화를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설정하고

현실을 과거에 맞추어야 한다는 사고를 근본적으로 뒤엎었다.

 

“옛것 역시 (그 시절에는) 또한 하나의 ‘지금’에 불과했다.”(『연암집』「영처고서(嬰處稿序)」)

 

따라서 지금 여기의 존재들, 짐승, 나무와 풀,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말들 따위가

모두 고전과 같은 의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일상과 사물에 대한 관심이 무척 중요해진 것이다.

시간의 변화에 대한 긍정은 공간의 변화에 대한 긍정과 짝해 있었다.

서학을 통해 얻은 지리 지식은 ‘땅은 지구이므로 중심이 없다.

나아가 자신의 위치와 시각을 중심으로 여기고 세상을 보아서는 안된다’라는 사고로 이어졌다.

지구론은 서학의 영향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사는 인간이 제각각 자기 사회를 중심으로 여겼던 사고에 대한 부정은

조선의 학자들, 특히 연암의 선배이자 지기(知己)인 홍대용이 고민하고 발전시킨 논리였다.

 

연암은 만물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홍대용의 성과를 고스란히 계승했다.

연행 때 그는 청의 학자에게 만약 달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면 우리가 달빛을 음미하듯이

그들도 지구에서 쏟아지는 빛을 구경하리라는 기발하고도 그럴듯한 상상을 펼쳐 보였다.

홍대용의 학설을 숙고한 결과였다.

 

연암의 몇몇 주옥같은 산문에서는 그 사고가 더욱 깊게 드러난다.

예컨대「말똥구리의 구술서문(낭환집서, 蜋丸集序)」에서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지지 말자는 논리가,

진리는 자신의 처지와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므로 다양한 차원의 정의(定意)가 공존한다는

논리로까지 확장되었다. 홍대용이 시작한 상대 인식이 연암을 통해 만개한 것이다.

 

 

점진적이고 장기적인 개혁을 꿈꾸다

 

낡은 기준에서 벗어나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음미하기 시작하니,

주변의 사물은 모두 스스로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

상공업이 발전하고 그 성과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작용했던 것은 물론이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보고 듣고 기록한 청나라의 이용후생 관련기물은

가옥, 벽돌, 우물, 시장, 용광로, 주점, 상인, 수레, 다리, 목축, 천문, 역산, 의약 등 다양하다.

기물에 대한 소개는 피상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생산에서 이용까지의 매커니즘 전반에 걸쳐 있었고

나아가 조선과의 비교, 그리고 현실에서의 필요성까지 세심하게 전개하였다.

그 골자는 생산, 일상 도구의 개선이었다.

 

생산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연암이 당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던 농업을 등한시할 리 없었다.

그는『과농소초(課農小抄)』라는 저술에서

노동력의 절약, 농기구의 개량, 거름마련법의 개선, 관개수리시설의 개선, 토지제 개혁 등을

세심하게 제시하며 농업이 혁신 또한 꿈꾸었다.

 

생산 혁신의 목표는 민부(民富)의 달성이고, 이는 연암 외에도 많은 학자들의 관심사였다.

박지원이 그들과 다른 점은 생산물의 증대에 그치지 않고 유통개선을 통해 물화의 국지성을 극복하고

여러 산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한데 있다.

그는 상대적으로 천시되었던 상업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꾀했다.

연암 개혁의 핵심으로 수레, 선박, 도로의 개선이 항상 거론되는 건 그 까닭이다.

또한 그 지점이 화폐와 상업의 발달을 근본적으로 회의한 농업중시자들,

예컨대 성호 이익과 연암이 갈라지는 곳이기도 하다.

 

연암처럼 상공업과 화폐유통을 중시했던 학자들은

이전에는 김육(金堉, 1580-1658)과 유수원(柳壽垣, 1694-1755)이 있었고

이후에는 박제가와 정약용이 있었다. 그런데 구체적인 화폐정책을 보면 연암식 개혁의 특징이 드러난다.

당시는 전황(錢荒)으로 인한 통화량 부족이 화폐유통의 가장 큰 문제였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고액전 발행이 대개 논의되었다.

암 역시 고액전을 주장하였으나 다만 액면가가 높지 않은 당이전(當二錢) 발행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악화(惡貨)를 시장에서 장기간에 걸쳐 구축하자는 것이다.

 

점진성과 장기성은 연암의 토지개혁론과도 통한다.

실학자들은 대개 토지공유를 주장했는데,

그 중 가장 온건한 방식은 토지소유의 한계를 설정하여 토지의 균등화를 꾀하는 한전법(限田法)이었다.

한전법의 주창자는 이익과 연암이 대표적이다.

이익은 토지소유의 하한을 설정하는 방식을 주장한 데 비해,

연암은 일정시점 이전의 토지소유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고 일정시점 이후의 토지에 대해서만

상한을 설정하고자 했다. 모두를 동요시키지 않고 소유의 균등화를 꾀하는 방식이며,

실학자들의 구상 가운데 토지소유자의 동의를 가장 여유롭게 얻어내는 방식이었다.

소극적이긴 하지만 대신 현실적이다. 연암은 시장의 자연스러운 작동과 자율적 조절을 누구보다 중시했다.

 

 

연암의 분신, 허생이 이룬 사회

 

연암은 자신의 개혁책을 정연하게 정리한 독립 저술을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의 개혁책은 주옥같은 작품 속에서 번개처럼 빛을 발하고 지나가 버린다.

그것을 캐내 자신의 자양분으로 바꾸는 일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연암의 작품 가운데 개혁을 직접 실현한 그의 분신을 찾는다면 바로 허생이다.

 

허생은 조선 상업의 장단점을 훤히 꿰고 매점으로 돈을 번다.

도적을 이끌어 이상사회를 건설하고, 허울 좋은 명분에 절어 인재를 등용할 줄 모르는 당대의 지배층을

질타하며 은둔해 버린다. 허생은 상업의 중요성을 깨달은 근대인처럼 보이지만

지나친 물질화와 허문(虛文)의 폐해를 함께 경계한 인물이었다. 그는 예의와 물화로 이상사회를 건설하지만,

그곳을 나올 때 은자 50만냥을 바다에 처넣고 글을 아는 사람도 모두 데리고 온다.

그리고는 “미래의 화근을 없앴다”라고 하였다.

지나친 물질화와 허례허식이 가져올 폐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이리라.

허례허식에 절어 물질을 경시하는 사회에 대한 연암의 풍자는 일일이 그 예를 열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허생은 그 반대의 역기능도 질타한다.

 

만금이란 돈은 물건을 모조리 사재기할 수 있으니 …

마치 총총한 그물로 훑어내듯 싹쓸이할 수 있지요. …

한 가지 물종이 남몰래 잠겨있는 동안에 모든 장사치들의 물건이 말라버리게 되지요.

이런 방법은 백성을 해치는 길이 될 것이니,

후세에 당국자들이 내가 써먹었던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말 것이오.

 

 

허생은 큰 富를 벌 수 있었던 자신의 방법을 스스로 부정한다.

상공업의 발달은 긍정하지만 그것이 매점, 독점으로 나아갈 수 있는 면모를 지니고 있었음도 예견한 듯하다.

허생의 언급에서 우리는 강탈과 독점에 기반해 세계를 갈라놓은 초기 근대 상공업을 연상할 수도 있다.

허생의 나머지 면모는 독자에게는 췌언(贅言)일 것이다.

허생이 청의 현실을 무시하고 춘추의리만 부르짖는 양반의 자기 최면을 질타하는 장면에서는

사회의 위선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엿볼 수 있다.

변산의 도적을 이끌고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장면에서는 민중에 대한 신뢰와 열정이 넘쳐난다.

 

연암의 다른 작품을 함께 고려해 보면

그가 꿈꾼 사회는 변화에 눈감고 위선 떠는 풍조가 소멸된 사회가 아니겠는가.

 

 

 

- 박지원은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 할 산해관을 둘러보고「산해관기(山海關記)」라는 글을 남겼다.

여기서 중국의 앞선 축성기술과 제도를 강조하며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이 크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 <태평성시도(太平成市圖)>, 작자미상

조선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113.6×4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성시도’란 상공업의 성장으로 발달한 도시생활을 그린 풍속화로

이렇듯 생동감 넘치는 도시의 모습은 조선이 지향한 이상적인 사회상을 담고 있다.

박지원이 매료된 청의 모습도 이 그림과 같았을 것이며, 그는 이런 류의 그림 4점에 제발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열하일기』에서 도시마다 시장이 번성하고

잘 정비된 도로와 교량에 수레와 배를 이용한 교통이 원활하며,

견고하고 화려한 벽돌 건물이 즐비한 시가지와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등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실상을 소개하였다.

 

 

 

- <연행도(燕行圖)>, 작자미상(혹은 傳 김홍도)

조선 18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각 35×45㎝, 숭실대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연행도'의 각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어느 장소, 어떤 일을 그렸는지를 밝힌 제기(題記)가 있지만

박락되어 잘 보이지 않거나 지워진 경우도 있어 대부분 알아보기 어렵다.

 

 

제 1폭은 청나라로 파견되는 조선 사신단이 정월 초하루 북경의 자금성(紫禁城) 태화전(太和殿)에서

청 황제를 배알하고 신년 하례하는 의식 절차를 그렸고,

제 2폭 화기는 '臺'(대)라는 한 글자만 남았지만 구혈대(嘔血臺)임을 알 수 있으며,

제 3폭은 누가 봐도 만리장성 그림인데 실제 화기에서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글자를

희미하게나마 확인한다.

제 4폭에서는 영원패루(寧遠牌樓)라는 제목을 읽을 수 있다.
제 5폭 제목은 완전히 지워졌지만 산해관(山海關) 동라성(東羅城),

제 6폭은 중간에 한 글자가 지워졌지만 망해정(望海亭)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제 7폭은 '門'이라는 마지막 글자만 남았지만 조양문(朝陽門)임이 드러난다.

제 8폭의 첫 글자가 지워졌으나 태화전(太和殿)임을 쉽사리 알 수 있고,

제 9폭 조공(朝貢)이란 두 글자가 뚜렷하다.
제 10폭 이후 13폭까지는 모두 제목 글자가 없어졌지만

제 10폭 벽옹(辟雍), 제 11폭 오룡정(五龍亭), 제 12폭 정양문(正陽門), 제 13폭 유리창(琉璃廠)이며,

마지막 제 14폭서산(西山)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따라서 제 2폭(구혈대)-6폭(망해정)까지는

한양에서 출발한 사절단이 산해관으로 들어가는 과정까지 들른 주요 사적을 그렸으며

제 7-9폭(조양문ㆍ태화전ㆍ조공)은 실제 청 황제를 배알하는 행위를 소재로 했다.
제 10폭(벽옹)-14폭(서산)은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마친 사신단이

북경 일대를 유람하면서 들른 주요 관광지나 명승지를 소재로 했음을 알 수 있다.

 

 

 


 

 

 

 

- 자금성 태화전(紫禁城 太和殿, 제1폭)

청나라로 파견되는 조선 사신단(冬至使)이 정월 초하루에

북경의 자금성(紫禁城) 태화전에서 청 황제를 배알하고 신년 하례하는 의식 절차를

'조선사신 부 연경시 연로 급 입공 절차(朝鮮使臣赴燕京時沿路及入貢節次)'라는 제목 아래 기록했다.

 

 

- 산해관 동라성(東羅城, 제5폭)

  

 

- 연경성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제7폭) : 조선사절이 들어가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 자금성(紫禁城) 태화전(제8폭)

 

 

- 조공(朝貢, 제9폭) 

조선사절단(오른쪽 아래)이 공복을 갖춰 입고

청 황제의 궁궐 밖 행차를 지영(祗迎 · 배관이 임금의 행차를 공경해 맞음)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 북경의 국자감에 있던 벽옹(辟雍, 제10폭)

  

1784년 겨울 준공된 벽옹을 중심으로 국자감을 묘사한 그림.

벽옹은 원래 주나라 천자가 만든 교육기관인 태학에서 기원했다.

원형 연못 위에 자리 잡았고 4면에 석교를 두어 통하게 했는데,

이처럼 중심 건물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모습은 황제의 교화가 두루 미치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실물 크기의 그림을 수록한 영인본에 실린 논문에서 연행도 전문가인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는

‘연행도’ 제10폭의 ‘벽옹(국자감의 중심건물)’이 건륭제(乾隆帝 · 재위 1735~1795)의 명에 의해

1784년 겨울 완공된 사실을 밝혀냈다.

 

1784년 이후 작품이란 전제 아래 조선후기 회화사를 전공하는 박효은 홍익대 강사는

‘연행도’에 그려진 건축물의 지붕, 서까래, 공포의 묘사 등 세부 표현 기법을 분석한 결과,

김홍도의 작품이 확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이나 ‘금강산도(金剛山圖)’ 등 김홍도의 1790년대 작품과 비교할 때

‘연행도’는 김홍도의 사실적인 산수화풍 직전 단계에 해당하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김홍도가 정조 13년(1789) 정사 이성원(李性源)의 주청에 의해 동지사행(冬至使行)의 일원으로

연행에 참가했다는 ‘일성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에 주목한 박씨는

“‘연행도’가 이성원 등의 주문에 의해 연행에서 돌아온 1790년이나 그 직후 그려졌던 것이다”고 밝혔다.

문화일보 2009-04-21

 

 

- 유리창(琉璃廠, 제13폭)

북경의 저명한 서점 거리인 유리창의 화려한 가게들과 번화한 거리를 묘사한 그림.

2명의 인물이 각각 낙타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은 조선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낯선 풍경이다.

후대에 홍대용, 박지원 등 조선사절과 청나라 문인들의 문화적 교유를 상징하는 유리창 번화가의 모습.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연행도(燕行圖)'

단원 김홍도 작품으로 밝혀져···학계, 언론 비상한 관심


'연행도(燕行圖)'는

사절단이 육로로 왕래하는 풍경과 공식 행사 장면 등을

1폭의 발문(跋文)과 함께 13폭의 그림에 담은 것으로,

지금까지 200년이 넘게 '작자 미상의 1760년대 작품'으로 분류됐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 그림을 현존하는 최고의 사행기록화로 꼽아왔다.

연행노정의 경물(景物)과 행사 장면의 화면 포착, 회화적 기법과 그 수준에서

'현행도'를 최고의 작품으로 평해온 것이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이 작품의 영인본을 발간하면서 정밀 연구 조사를 벌인 결과,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밝혀냈다. 

'연행도'가 1789년 연행 사절단으로 중국을 방문했던 단원 김홍도(1745~?)가

정조 13년(1789) 또는 그 이후 그린 작품으로 밝혀졌다.

이 '연행도'는 정확한 수집경위와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연행도'에 찍혀있는 인장 '獨立紀念基督敎博物館長章'으로 보아

광복 후 서울 남산의 구 조선신궁 자리에 기독교박물관을 개관한 1948년 4월 이전에

수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행도 제10폭에 국자감(청나라의 교육기관)의 중심건물인 '벽옹(1784년 완공)'이 그려져 있어

연행도는 1784년 이후 제작된 것이며

그림 속 건축물의 표현기법과 화풍이 1790년대 김홍도의 '화성능행도병', 각종 '금강전도', '화성추팔경도'

등에 묘사되어 있는 기법을 분석한 결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화성능행도병'은 건축물 지붕이나 서까래, 공포 등 세부 표현기법들이

연행도와 비슷하다고 강조했다.

김홍도는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 따르면 1789년(정조 13) 연행에 참가했으며,

'연행도'는 숭실대 소장품을 포함해 현재 3점이 남아 있다.

- 이경구,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 삼성문화재단, <문화와나> 2010년 가을호

 

 

 

그동안 국내에 알려진 몇 점 안되는 육로사행 기록화 중에서도

그동안 작가와 제작연대를 몰랐던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연행도(燕行圖)’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 1745~1806 이후)가 도화서 화원시절인 1790년

또는 그 직후 그린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매산 김양선(梅山 金良善 · 1907~1970) 선생이 박물관을 숭실대에 기증할 때

함께 인계한 ‘연행도’를 영인본으로 제작, 발간하기 위한 연구 과정에서

1789년 연행사절의 일원이었던 김홍도의 작품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조선사절단이 육로로 청나라 연경(燕京 · 베이징)을 왕래한 노정과 연경에서의 공적인 행사를

1폭(35.4×45.3㎝)의 발문과 13폭의 화면에 나눠 담은 ‘연행도’는

부연(赴燕)시 연로(沿路) 및 조공 절차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총 14폭을 전체 627.2㎝ 길이인 종이에 세로로 이어붙인 형식이다.

각 화면 가운데는 접힌 흔적이 있어 이 연행도는 원래는 책 형태인 화첩(畵帖)이었는데

나중에 이를 소장한 누군가가 배접을 해서 두루마리 형식으로 바꿨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연행도는 1931년 동경부(東京府)미술관에서 열린 조선 명화 전람회에 처음 소개됐으니,

당시 그 도록으로 발간된 '조선명화전람회목록'에는 연행도 중에서도 제12폭인 정양문을 게재하고는

일본인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이 소장한 노가재연행도(老稼齋燕行圖)라고 했다.

'노가재(老稼齋)'란 연행을 한 경험이 있는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호.

후대에 이 화첩은 노가재가 1712년 11월 3일 동지사 정사이자 친형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동행한 김창업의 사행(使行)과 관련된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것이 숭실대 교수를 역임한 매산(梅山) 김양선(金良善. 1907-1970)의 수중에 들어가고,

1967년 그가 설립한 한국기독교박물관 전체를 숭실대에 기증함에 따라 소장처가 이동됐다.
이후 이 연행도는 어찌 된 셈인지 1760년 작품이라 소개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국내에 알려진 몇 점 안 되는 육로 사행 기록화 중에서도

여행 노정의 경치와 행사장면의 화면 포착, 회화적 기법과 수준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혀 왔다.

 

하지만 이 연행도 제10폭이 소재로 삼은 벽옹(辟雍)은 청나라 국가 최고 학부인 국자감의 공묘 서측에

1784년 겨울 준공됐다는 점에서 제작 시기는 당연히 그 이후가 되어야 한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그 영인본을 제작하면서 이 연행도를 상세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제작시기와 관련해 이런 중대한 사실을 밝혀내고,

아울러 그것이 다름 아닌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확신해도 좋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연합뉴스, 2009/04/21

 

 

 

 

 

 

 

 

 

 

 

세계로 열린 창 - 연경(燕京)

 

조선 후기 서양 문물과의 만남은 연경을 통해 이루어졌다.

연경이나 에도(江戶)는 조선에 있어 세계로 열린 창구였다.

16세기부터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예수회(Society of Jesus, SJ) 등 여러 부류의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우리 나라는 19세기까지 선교사의 내왕이 없었기에

우리는 이 창을 통하여 우리는 간접적으로 서양과 만났던 셈이다.

 

 

 

 

동도서기- 혼란과 수용의 소용돌이


한국사에서 다루는 조선시대는 1600년을 전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는 원과 명(元明)의 문화를 도입하여 문물과 제도를 창안한 시기이며,

후기는 청조(淸朝)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중국과 일본을 통해 서양문물과 제도를 수용한 시기이다.

 

한편 이처럼 서양 문물의 도입이 이루어진 조선 후기에는 고유의 사상과 새로운 사조가 충돌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이 일기도 하였다.

서양과의 교류와 이로 인한 혼란과 대립의 역사를 재일 한국사학자인 강재언 교수는

<서양과 조선>이라는 책에서 “이문화(異文化)와의 격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인 논쟁은 19세기 중반을 넘어 지식인들 사이에

‘우리의 정신이 굳건하여 성인(소위 성리학)의 도를 지킬 수만 있다면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민생에 활용한들 어떻겠는가’라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으로 발전되어

한말의 개화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사상적 논쟁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일어나 중국에서는

‘중국의 몸체에 서양과학’이라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풍조가,

일본에서는 ‘일본의 정신에 서양의 과학기술’이라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2원적 형태로 귀결되었다.

 

 

서학의 전래  


서학(西學)과 서교(西敎)는 서양의 문화를 지칭하여 쓰이는 말이다.

이들 중 서학은 서양의 과학과 종교를 지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주로 서양과학의 의미로 쓰이며,

서교는 천주교를 일컫는 말이다(필자주 : 학자들 가운데는 서학을 천주교로 보는 이도 더러 있다).

한편 서학을 받아들이는 풍조는 북학파(北學派)와 실학파(實學派)로 나누어졌는데

이들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우리 나라의 사신으로 연경(燕京)을 다녀온 사람들 가운데

오랑캐인 청조(淸朝)의 문화일지라도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된다면 과감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박제가, 이덕무 등을 소위 ‘북학파’라고 한다.

이들은 청조의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전통사회를 개혁하려는 강한 의욕을 보인 부류이다.

반면 서학과 관련하여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여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힘쓰자고 주장한

홍대용, 박지원, 이익 등을 ‘실학파’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연경을 다녀오거나 수입한 한역 서양 과학서적을 통하여 서양문물을 접한 학자들로서

심성론(心性論)에 치우쳐 있었던 주자학에 반하여 서양 과학기술의 이해와 수용을 통해

과학기술 발전으로 국가를 부강하게 하자고 주장한 부류들이다.

 

실학파는 이익(李瀷,1682∼1764), 홍대용(洪大容,1730∼1783), 박규수(朴珪壽,1807-1877),

남병철(南秉哲,1817-1863)과 그의 동생 남병길(南秉吉,1820-1869), 최한기(崔漢綺, 1803∼1879)에게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서양 문물과의 만남은 연경을 통해 이루어졌다.

연경이나 에도(江戶)는 조선에 있어 세계로 열린 창구였다.

16세기부터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예수회(Society of Jesus, SJ) 등 여러 부류의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우리 나라는 19세기까지 선교사의 내왕이 없었기에

우리는 이 창을 통하여 우리는 간접적으로 서양과 만났던 셈이다.  

 

 

신구문화의 갈등


조선 전기와 후기의 천문 과학 분야를 살펴보자면

전기에는 중국 전통의 천문학과 아라비아의 천문학이 가미된

대통력(大統曆, 元의 수시력을 이름 바꾼 것)을 교정하여 <칠정산 내편>을 편찬하고

여기에 회회력(回回曆)을 바탕으로 <칠정산 외편>을 편찬하여 두 가지를 공용하였다.

따라서 일년의 길이는 수시력에서 정한 365.2425일, 원주의 각도는 365.25도,

하루의 길이는 12시와 100각으로 나타내었다. 이것을 구법(舊法)이라 한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중반부터 종래의 역법을 포기하고 서양선교사들이

명말 청초에 편찬한 <서양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수용하여

1년의 길이는 365.25일, 원주는 360도, 1일은 12시96각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신법(新法)이다.

 

이와 같이 17세기는 신구법의 교체기로 조선의 전통적인 문화가 세계 문화에 편입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출병하여 도움을 주었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못하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16세기의 관념의 틀을 깬 시기였다.

연경을 다녀 온 사신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문화를 과감하게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즉, 이들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새로운 문물이 밀려들기 시작하였으며

기존의 우주관과 세계관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연행사 - 동서 문화교류의 중개자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빈번한 사신의 왕래로 한양과 연경은 항상 통로가 뚫려 있었다.

조선은 명에 1년에 세 번 정기적인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정월 초하루의 하정사(賀正使), 명 황제의 생일에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에 천추사(千秋使),

그리고 동지에 역서(曆書)를 받으러 가는 동지사(冬至使)가 있었다.

그밖에 양국간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파견되었는데

이 때마다 무역이 이루어져 말, 인삼 등이 수출되고 견직물, 약재, 서적 등이 수입되었다.

사절의 구성은 정사, 부사, 종사관 등의 고급관료와

이를 보좌하는 각종 수행원, 역관, 상인 등을 합하여 보통 200명, 많을 때는 400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절의 왕래는 청조가 들어서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연경 통로를 통해 조선은 중국과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 사절의 왕래로 인해 기행 문학이 발전하기도 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김창집의 <연행록>은

당시 여행안내서로서 사신들의 필독서였고,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은 18세기 중엽의 여행문학의 한 장르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18세기 최고 과학자인 홍대용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비롯한 과학사상과

그의 저서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 대한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처럼 당시의 연행은 오늘날의 정치 경제, 과학기술의 시찰 내지는 단기유학의 성격을 띈 것으로

문화 이전(culture transfer)의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 남문현  건국대 박물관장, 한국산업기술사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