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은 문명의 교통로였다
'연행'은 조선시대 국가 외교사절로서 중국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연행사'는 국가의 공식적인 외교사절단이지만, 경제 · 문화교류의 창구 역할도 담당하였다. 이들이 경험한 수개월에 걸친 여정은 문화의 루트였고 자기 발견의 길이었다. 세계의 물산과 문화가 모여 있는 연경(북경)에서 동 · 서양이 어우러진 세계에 대한 경험은 실로 충격이었고,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의 서적, 천주교, 세계지도 등 서학(西學)이 이들을 통해 들어 왔다.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던 젊은 지식인들에게 연행은 배움의 길 그 자체였다.
실학자들, 국제적 안목을 키우다
18세기 연행에는 실학자들도 참여하였다. 중국 문물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온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유득공(柳得恭, 1749~1807) 등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한 실학자들은 그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고국에 돌아 온 뒤 자신들이 보고 경험한 새로운 세계를 중국기행문이라 할 수 있는 <연행록(燕行錄)>에 담았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보여 준 탁월한 국제적 감각은 중국 연행을 통해서 터득한 것이었다. |
'연행(燕行)', 조선을 바꾸다 - 실학박물관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展 |
① 1760년 화원 이필성이 현종이 살던 심양(선양)을 둘러보고 그린 <심양관도첩(瀋陽館圖帖)>의 일부.
② 정두원이 1631년 명나라 사행을 다녀와 왕(인조)에게 올린 보고서
<조천기지도(朝天記地圖, 성균관대 존경각 소장)>. 연행길 주요 지역의 그림과 견문을 적었다.
정두원은 명나라 사행에서 평안도를 출발해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해로를 거치고,
중국의 여러 도시를 들러 연경(燕京 · 베이징)에 도착한 여정이 그림에 상세히 담겼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서양 선교사를 만나 화포와 천리경, 자명종 등 서양 문물을 받아 조선에 들여왔다.
③ 조선 사신 유득공이 청나라 문인 여원과 이당에게서 받은 시 <모우심국서(冒雨尋菊序)>.
검은 종이에 금분으로 썼다. - 사진 제공, 실학박물관
이번 특별전의 특징은
첫째, 조선시대 연행록과 연행도 등을 중국 · 베트남 · 유구(오키나와) · 일본 등 주변국들의 사행자료를 비교 전시하여 당시대의 '연행'이 가지는 의미를 동아시아 공동체적 시각에서 조명한 것이다.
둘째, 연행로인 의주, 심양, 산해관, 북경, 열하 등 연행노정의 영상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연행길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세번째는 실학자들이 남긴 연행시, 송별시 등을 전시하여 '연행문학'이란 독특한 장르의 문학작품들을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였다.
실학박물관 관계자는
"조선후기 연행은 단순한 사행이 아닌 신문명에 대한 '문화로드'였으며
박지원 · 박제가 · 유득공 등 연행에 참여한 실학자들은
낡은 이데올로기를 벗고 새로운 문명론을 제시했다"며
"연행사들의 대중국 인식은 오늘날 대북,대중 외교정책에도 큰 시사점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 참고할 만한 행사 -
(1) 2010년10월 30일 한국실학학회와 공동으로 '연행의 문화사'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조선후기 동아시아 상황과 연행의 의미를 문화사적 관점에서 재인식하는 계기가 마련 될 것으로 보인다.
(2) 2010년 11월 6일, 11월 20일 2회에 걸쳐 "영상으로 보는 연행노정"을 주제로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의 영상강연회가 열릴 예정이다.
(3) 2011.2.12(토) '1780, 열하를 가다'(임종욱 『1780, 열하』작가),
'그림과 함께하는 연행(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등을 주제로 전시 관련 특별강연회 개최될 예정.
중국이 달려온다.
미국과 맞설 유일한 강대국이란 예측은
이제 진부한 상식이다.
중국은 향후 우리가 넘어야 할 거대한 암벽과 같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정답은 역사에 있다. 중국의 작은 기침에 일희일비했던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다.
이 시대 지식인의 책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았다.
조공을 통해 강대국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약소국으로 생존을 담보했던 '조공-책봉 체제'는
조선시대 한중관계의 기본 시스템이었다.
조선의 건설자들은 明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13세기 초반부터 200년 가까이 혹심한 몽골의 침략과 元 제국의 간섭을 목도한 그들은
몽골을 쫓아내고 들어선 明이야말로
한 · 당 · 송으로부터 이어지는 '중화제국'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인정했다.
명에 대한 사대와 명 문물의 수입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국가적 대사가 됐다.
성군 세종의 빛나는 치적도
사실은 지성사대(至誠事大)를 외치면서까지 明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바탕에서 가능했다.
15세기 이후 조명관계는 안정됐지만 양국 사이의 인적 교류는 제한적이었다.
두 나라 모두 자국 국민의 국외 출입을 금지했던 상황에서
'조천행(朝天行)'이라 불리던 조선 사신의 사행(使行)이야말로 가장 주된 교류의 통로였다.
중화의 문물을 선망하던 조선의 지식인에게 황제를 알현하고
문사들과 교유하며 서책을 구입하고 무역까지 하는 사행은 실로 가슴 설레는 이벤트였다.
16세기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明나라에는 '중화'다운 품위와 아취(雅趣)가 넘치리라 여겼던 조선 사신들의 기대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깨졌다.
주요 도시를 통과할 때마다 뇌물을 요구하는 탐욕스런 관리, 곳곳에 세워진 화려한 불교와 도교 사원,
그리고 양명학과 같은 '이단'에 매몰된 지식인이 그들을 실망시켰다.
급기야 1574년(선조 7) 8월, 조선 사신 허봉은 예의와 염치가 사라져버린 明의 현실을 개탄한다.
허봉은 중국인보다 더 열렬히 '중화인'이 되기를 열망한 조선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야만족으로만 여기던 만주족의 淸이 중원을 차지하자 조선 지식인의 중국 인식은 또 달라졌다.
조선 사신들은 압록강을 건너며 목격한 淸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중원은 오랑캐가 풍기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조선 사신들은 사행로 곳곳에 남아 있는 명나라 인물들의 자취를 추념하며 탄식했다.
明이 사라진 이상 중원 어디에도 '중화 문명'은 없었다. 오로지 조선만이 그 계승자일 뿐이었다.
유몽인이나 박지원은 좀 달랐다. 그들은 사행 길에서 만난 평범한 중국인의 실생활에 눈을 돌렸다.
중국 사람이 조선 사람보다 유족하게 사는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들이 조선에는 없는 수레와 벽돌을 사용하고, 가축 사육에 열심이며,
조선 사람보다 '상업 마인드'에서 앞서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대다수 조선 지식인은 한족(漢族)의 중국만을 '짝사랑'했다.
하지만 明이 망한 뒤에도 많은 한족 지식인이 淸 조정에서 벼슬하고,
그들을 통해 '중화의 가치'가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이후 淸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세력이 몰려들고 일본의 부상이 두드러지면서,
淸 조정에 출사한 한족 관료들은 조선을 속방(屬邦)으로 삼으려고 덤볐다.
이제 淸, 아니 중국은
조선에 '조공-책봉 체제'가 지닌 최소한의 신의마저 저버린 제국주의 국가일 뿐이었다.
중국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채 '짝사랑'한 결과는 너무 허망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끊어졌다.
이후 일본이 중국을 대신해 한국 지식인의 '표준'이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한국 사회는 50년 가까이 중국과 단절됐다.
이 와중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과거 조선의 지식인이 축적했던 중국에 대한 경험과 지적 유산은 방치됐다.
중국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저 부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가 '중국 충격' 앞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오마에 겐이치 같은 일본의 미래학자는
중국의 부상을 '전후 일본이 처음 맞이하는 대전환'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면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우리는 어떤가.
과거 일본은 바다라는 천연 장애물을 통해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피하고 문화 수입의 속도도 조절할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바다'가 없다.
중국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생존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표준'의 전환을 강요받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청일전쟁 이후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 표준, 미국 표준 대신
중국 표준을 다시 수용하라는 요구의 출발점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밀어붙이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허망하게 끝난 과거의 짝사랑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중국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 한명기 명지대 교수, 대외관계사
●실학(實學)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015
●[실학박물관특별전]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596
●[실학박물관특별전]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전시내용)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597
●실학자 연암, 조화 속의 변화를 논하다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539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 16. 홍대용과 유리창(琉璃廠)
: http://blog.daum.net/gijuzzang/5330664
●작가미상의 ‘연행도’ - “단원 김홍도 작품” 결론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419
●연행길, 연행사, 연행록 : http://blog.daum.net/gijuzzang/1855731
●열하일기 : http://blog.daum.net/gijuzzang/1847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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