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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

Gijuzzang Dream 2010. 10. 27. 16:41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도록 제2책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소장품 중 

명성황후(1851∼1895)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詩箋紙ㆍ시나 편지 따위를 쓰는 종이)를 한데 엮어,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를 발간했다.

 

 

 

 

이 도록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도록』제2책으로,

명성황후 한글편지 122통과 왕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보관했던 시전지(詩箋紙) 1200여 점에 대한

유물 사진과 관련 논문을 엮은 것이다.  

 

 

 

 

  

 

 

 

 

 

 

 

 

    ▲ 명성황후 한글 글씨체 (사진제공: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명성황후 한글편지는 현재 약 180여 통이 알려져 있으나

이 도록에 수록된 122통은 명성황후가 조카인 민영소(閔泳韶, 1852~1917)에게 보낸 것으로,

황후의 일상적 모습이 있는 그대로 표현돼 있다.

 

편지 내용은 주로 고종과 세자인 순종에 대한 걱정과 안부를 담고 있다.

민영소 집안의 어린아이인 ‘충경이’의 건강을 염려하여

“무궁화를 어린아이 줌으로 반 줌쯤 넣고 물 두 보시기 부어 한 보시기쯤 되게 하여 먹으면

즉시 효험이 있다.”고 한 부분에서는 명성황후의 꼼꼼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 편지들을 통해 조선말기의 정치적 상황과 궁궐 내의 사정, 명성황후의 개인적인 면까지 엿볼 수 있다.

황후의 서체 표현은 정통적인 궁체 흘림필법에 따라 특유의 개성미가 가미돼

서예적 가치 또한 매우 높게 평가된다.  

 


  

 

 

 

 

 

 

 

 

 

 

 

▲ 조선 왕실서 쓰던 시전지 (사진제공: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이번에 수록된 시전지는 본격적인 공개가 처음이다.

대부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청나라에서 제작되었던 것이다.

편지를 쓰기 전 상태 그대로 남아있어, 화려한 색상과 다양한 문양 장식을 볼 수 있고,

조선 왕실에서 사용했던 시전지를 제작ㆍ판매했던 전문상점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자료이다.

각 장의 말미에는 종합적인 안목에서 정리된 관련논문이 수록되어 있어,

유물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으며 이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이번에 발간한 보고서는 국공립 도서관 등 전국 관련기관 등에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다.

- 2010년 10월27일


 

 

 

 

 

 

 

 

 

 

 

 

 

 

 

 

 


 

 

<참고>
 

명성황후 시해 1년 전 쓴 한글편지

 

"국운이 어찌해 이런 망극지경을… 나는 모질어 생불여사(生不如死)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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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보낸 한글편지 중 일부

왕실과 국가에 대한 걱정 등을 담은 내용으로 2009년 11월7일 경매에 나왔다.(서울 옥션 제공)

 

 

명성황후가 측근에게 손수 적어 보낸 편지 10통을 묶은 서첩을 포함, 총 194점을 출품한다고 밝혔다.

명성황후의 한글 친필 내용은 1974년 '문학사상'을 통해 소개된 적 있으나 실물 공개는 처음이다.

이 편지들은 명성황후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에게 시해당하기 1년 전인 1894년 음력 7월부터 9월 4일 사이에 쓴 것으로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장 등 역사의 격동기를 겪으며 느낀 심정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 등불처럼 놓여 있는 상황이 생생하다.

  

"어찌 이런 망극지경을 망극 긴 말 못하며 창황 중 어찌 피신하였느냐.

국운이 어찌하여 이런 망극지경을 당한지 망극하고

불행 중 정궁 옥체 면환하시고 너이들 살아난 일 창천이 도우심 축수한다."

"상감마마 우려 중 제절 깨끗지 못하오시고 동궁마마께오서도 설후로 깨끗지 못하시니 동동하다.

나는 화담 천기와 울화로 못 견디겠다. 아직까지는 별고 없으나

일일 위경이 몇 번이고 지어이 자리를 보전 못할 번하기가 몇 번이니 보기 전 이로 어찌 다 말하랴."

 


대원군과 권력 다툼을 벌이는 내용도 나온다. 명성황후의 괴로운 심사를 읽을 수 있다.

 

"작일 내가 대원을 보고 너와 혜당을 뒷일까지 잘 보아 달라 애걸하여 허락받고

네게와 혜당께 명첩까지 보내니 급한 화는 없을 듯하니 숨어 아직 있는 것이 좋다."

"살아 있음 죽음만 같다. 상감마마 제절 울화로 느루 깨끗지 못하시고

동궁마마 제절도 정충이 긴 하시니 동동하고 나는 모질어 이때 겨우 지내나 생불여사로 지낸다"

 


청일전쟁에 대해 쓴 편지도 있다.

 

"평양 적보는 들으니 청병은 십여만명이 나와 자 의주로 지 안주까지 모다 영채를 쳤더라 하며,

주운상 원위정 부대종이 나오고 수는 유병복이라 한다.

예는 탈신이 극난하여 아모리도 못하니 답답하고 앞일이 답답하다."

서울옥션은

"이 서첩은 고종 때 예조판서를 지내고 임오군란 때 자택을 명성황후의 피신처로 제공한

민응식과 그의 아들 민병승에게 보낸 한글서첩 10통인데, 민병승이 묶고 주석을 달았다"면서

"경매 추정가는 1억5000만∼2억원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2009년 10월27일 국민일보

 

 

 

문화재 경매

 

1936년 11월 국내 최초의 미술품경매장인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장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돌았다.

한 일본인이 국보급 도자기 한 점을 경매물건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경매는 500원에서 시작, 순식간에 1만원을 넘겼다. 큰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조선갑부 간송(澗松) 전형필이 일본 골동품 회사 대표와의 경합 끝에 낙찰받았다.

그 도자기가 국보 29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이다.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할 당시 이야기는 더욱 극적이다.

1942년 친분있던 골동품 상인으로부터 소중한 정보를 들은 전 형필선생은 숨이 멎는 듯했다고 한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매물로 나왔는데, 책 주인이 1000원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한 그는 가격의 10배를 주고 사들여 국내 보존이 가능했다.

 

세종 때 발간한 <동국정운>을 비롯해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 등의 수많은 명품서화들도 비슷한 경로로 살아 남았다고 한다.

문화재 경매는 개인 간 거래이기도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대응,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견이 많다.

국보급 문화재들이 합법적으로 해외 반출되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약탈당한 경험이 있는 나라들이 경매에 민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프랑스법원은 청나라 황제 여름별궁인 원명원에서 가져온 쥐 · 토끼머리 동상에 대한 경매를

허용했다. 중국은 즉각 경매중단 소송을 냈지만 기각됐고,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로랑 등이 소장해 온 중국문화재 경매를 강행해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회중시계와 명성황후의 한글 서간문이

최근 K옥션에 경매물건으로 나왔다는 소식이다.

회중시계 뒷면에는 대한제국의 문장이었던 ‘이화문(李花文)’이 새겨져 있다.

명성황후 한글 서간문은 친척 동생에게 보낸 편지묶음으로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편지지인 시전지(詩箋紙)를 사용해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문화재는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사료일 뿐 아니라 조상의 얼이 담긴 정신문화 유산이다.

국보급 문화재들이 경매를 통해 해외로 빠져 나간다면 우리 역사에 구멍이 뚫린 것과 무엇이 다른가.

관련 당국의 대안 마련이 절실하다.
- 박성수 논설위원

- 2010-03-01 ⓒ 경향신문 [여적]

 

 

 

 

 명성황후가 쓴 한글편지 

 

 

오라버니 민승호에게 심신의 아픔을 절절히 적어 보낸 명성황후의 편지 두 통.

청나라제 예쁜 색지에는 대나무와 꽃이, 편지 봉투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다.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가 2005년 10월27일 조선일보에 제공)

- 한문 해석=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을사늑약(1905년) 직후 자결한 민영환(閔泳煥)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받는 사람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이 편지는 적색과 황색된 청나라제 예쁜 색지(色紙)에 한글로 썼다.

꽃과 나비 그림에

‘위천연우’(渭川煙雨 · 중국 시안에 흐르는 강인 위천의 안개와 비)

‘당호동원사어미몽헌(當湖東園寫於味夢軒 · 중국 저장성의 호수 당호의 화가 ‘동원’이 미몽헌에서 그렸다)

이라는 글을 곁들인 아름다운 편지지에서 당시 스물넷 한창나이였던 명성황후의 취향을 읽을 수 있다.

 

명성황후가 1874년 오빠 민승호(閔升鎬 · 1830~1874)에 보낸 2통의 한글편지는

예쁜 색지와 깔끔한 글씨체로 눈길을 끈다.

정갈한 궁서체로 씌어진 편지 글은 색지에 그려진 대나무, 꽃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24세의 나이였던 명성황후는

정적(政敵)이었던 대원군이 1873년 실각한 이후 어수선한 정세로 편치 않은 심경을 드러냈다.

 

" (오빠의) 편지에서 밤사이 탈이 없다 하니 다행이다.

주상과 동궁(훗날 순종)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니 좋지만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박재양 경희대 교수(국어학)는

“아주 잘 쓴 궁체(宮體)인데, 획의 돌림 등에서 날카롭고 꼼꼼한 성격이 엿보인다”고 밝혔다.

 

언제 쓴 편지일까.

날짜가 나와 있지 않지만, 두 통 모두 1874년 2월에 태어난 순종에 대해 언급했으며,

민승호는 1874년 11월 폭사(爆死)했기 때문에 편지는 그 해 쓴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의 편지는 현재 3~4점 정도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조선일보

 


 

 

 

 

명성황후 한글서간

미술품 경매회사 K옥션 2010 첫 메이저 경매(2010년 3월10일) 출품


명성황후(1852∼1917)가 1890년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서간문은

명성황후가 친척 민영소에게 보내는 것으로 총 8통의 편지와 6매의 봉투로 구성돼 있다.
글이 쓰인 색색의 시전지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종이가 아니었다.

 

추정가 5000만~8000만원에 출품될 명성황후의 친필 서간문은

고종과 세자에 대한 안부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 변화,정치적 문제나 인척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명성황후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 2010.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