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우리나라 日章旗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올림픽 108년, 그리고 손기정'展(7/29~8/10)을 관람했다.
이 전시회에서는 강형구 화백이 수집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관련 사진, 손기정의 사진과 유품, 자료 등 3000여 점이 전시됐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의 우승 장면이 담긴 23분짜리 기록영화도 상영됐다.
이 기록영화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 '諸민족의 祭典'의 제작자인 레니 리펜슈탈 감독이
'諸민족의 祭典' 가운데 올림픽 개막식 장면과 마라톤 경기 장면, 시상식 장면, 폐막식 장면 등을
따로 엮어 만들어 손기정 선수에게 獻程(헌정)한 것이다.
불과 23분짜리 짧은 영화이지만,
"역시 레니 리펜슈탈은 巨匠"이라는 찬탄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좋은 영화였다.
로열 박스에서 득의에 찬 표정으로 각국 선수들을 사열하는 제3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
동족인 오스트리아 선수단이 나치식 경례를 하며 입장하자 열렬한 박수와 함성으로 환영하는 관중들,
파시스트 특유의 검은 셔츠를 입고 입장하는 이탈리아 선수단,
그리고 초청자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였는지 어정쩡한 모습으로 나치식 경례를 하면서 입장하는
프랑스 선수단의 모습에서 1930년대 중반 유럽을 휩쓸던 軍國主義의 狂氣와 시대의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레니 리펜슈탈은 이 영화에서 한계에 도전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도 함께 담았다.
반환점을 돌아 메인 스타디움을 향해 달리는 마라톤 선수들의 땀에 젖은 얼굴,
거칠게 숨을 내쉴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가슴의 근육, 앞으로 내닫는 걸음마다 꿈틀거리는 허벅지의 근육,
大地를 달리는 사내들의 그림자, 허공을 가르는 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수풀......
마치 그 필름을 보는 기자 자신이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에 거친 숨을 내쉬면서,
42.195km의 마라톤 풀 코스를 달리는 듯한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손기정이 반환점을 돌 때, 아나운서는 '손, 야판(일본)'이라고 외친다.
커다란 일장기를 휘두르며 손기정을 응원하는 일본인의 모습도 보인다.
자원봉사자인 한 여성이 손기정에게 물을 건네준다.
마침내 손기정이 영국의 하퍼 선수를 여유있게 제치고 메인 스타디움으로 들어와 결승점에 골인한다.
순간 아나운서는 "기타이 손, 야판!"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시상식 장면이 나온다.
일본 國歌인 기미가요가 울려퍼지면서 두 개의 일장기와 한 개의 영국 국기가 게양된다.
2위를 한 영국의 어네스트 하퍼 선수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국기를 응시하는 반면,
1등을 한 손기정과 3위를 한 남승룡은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전시회를 주관한 강형구 화백이 MBC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강화백은 낡은 유성기에 한 장의 음반을 올려 놓았다. 강화백이 음반에 대해 소개했다.
"이것은 손기정 선수가 일본의 강요에 의해 만든 선전 음반으로,
중간에 손선수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크게 말해'라고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릴 겁니다"
"나는 손기정입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음반에서
손기정 선수는 처음에는 담담한 목소리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회고한다.
출발 이후 줄곧 1위를 달리던 아르헨티나의 자바라를 제치는 얘기도 나온다.
여기까지는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여느 우승자들의 회고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日章旗가 나를 응원하였습니다. 큰 旗를 휘두르며 '6km남았다고 외쳐..."
"시상대에...우리나라 國歌가 엄숙하게...."
순간 숨이 탁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에 화살이 날아와 박힐 때, 이런 느낌, 이런 아픔이 느껴질까? 눈물이 났다.
청년 손기정이 살았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새삼 뼈저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때는 우리의 젊은이가 국제무대에 나가 외국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려면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나가야했던 시대였다.
일본을 '우리나라'라고 부르고, '일장기'를 '우리나라 국기'라고 말해야 했던 시대였다.
그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나라는 망해 버렸고,
그들이 태어났을 때 이 땅에는 이미 일장기만이 휘날리고 있었다.
손기정이 아니라 '기테이 손'이었고, '남승룡'이 아니라 '소류 난'이었던 시대였다.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에서 우승하고서도 고개를 들어 당당하게 '국기'를 응시하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어야 했던 시대였다.
모교인 양정고보에서 환영인파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귀국하자마자 경찰의 손에 이끌려 신사참배부터 해야 했던 시대였다.
두 선수의 우승 소식에 감격에 겨워 써내려갔을 신문 사설에서도
식민지 백성의 아픔이 먼저 느껴지는 시대였다.
"조선은 兩君에게 불우와 불행을 주었을 뿐이로되, 양군은 그래도 조선에 바치고 갚았다.
다같이 이 마음을 본받자.서로가 이 뜻을 간직하자."
시인 심훈은 손기정, 남승룡의 승리를 축하하는 詩에서
"이래도, 이래도, 너희는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외쳤다.
그것은 못난 식민지 백성의 열등감을 떨쳐 버리고 싶은 처절한 절규였다.
우리 할아버지,할머니들은 그런 시대를 살았다. 손기정은 그 시절 우리 할아버지,할머니의 자화상이었다.
손기정이 누구인가?
누가 물으면 자신을 '코리안'이라고 소개했고,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들이 남기는 서명판에
'KC Son,손긔졍'이라는 한글 서명을 고집했던 옹골찬 젊은이였다.
손기정이 광복 후에는 '孫基禎'이라고 한자로 서명했던 것을 보면,
'손긔졍'이라는 서명은 분명 日帝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그 손기정이 '우리나라 일장기' 운운할 때, 그 아픔이 오죽했을까?
손기정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꼈음일까?
점점 가라앉던 그의 목소리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 국민의..."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그 순간 옆에서 누군가가 "크게 읽어"라고 윽박질렀다.
손기정은 다시 큰 소리로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하면서 얘기를 이어나갔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물론 '대일본제국'이었다.'우리나라 국민'은 '대일본제국 국민'이었다.
그래,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일장기를 '우리나라 국기'라고, 기미가요를 '우리나라 國歌'라고 말해야 했던 조선 청년 손기정이
한 순간 가책을 받아 머뭇거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던 시대였다.
그렇게 손기정을 선전방송에 끌어내고서도
日帝는 '손기정'이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상징이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나 보다.
손기정은 일본 메이지大 법학부로 진학하면서 조용히 육상계에서 사라진다.
대학에 진학하는 조건은 "운동을 그만 두라"는 것과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가 육상계로 복귀한 것은 光復이 된 후였다.
광복 후 중국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손기정 때문에 세 번을 울었다.
한 번은 그가 우승을 해서, 두 번은 그가 일본군에 끌려가 사망했다고 해서,
세 번은 그것이 헛소문이고 그를 만나게 되어서..."
그 시대를 살았던 가장 투철한 민족지사들인 金九 선생도, 李承晩 박사도,
손기정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달렸다고 해서,
그가 일장기를 '우리나라 국기',기미가요를 '우리나라 國歌'라고 말했다고 해서,손기정을 꾸짖지 않았다.
두 巨人은 가슴에 일장기를 단 청년 손기정이 어떤 아픔을 안고 달렸는지,
일장기를 '우리나라 국기'라고,
기미가요를 '우리나라 國歌'라고 말할 때 그가 마음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몸은 비록 일장기를 달고 달렸어도
그의 분투가 겨레의 魂을 얼마나 고무, 각성시켰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월간조선, 배진영의 역사의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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