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중성리신라비(浦項 中城里新羅碑)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2009년 5월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 신고되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보관 중인
포항 중성리신라비(浦項 中城里新羅碑)에 대한 기본 자료집인『浦項 中城里新羅碑』를 발간하고,
관련 학술 심포지엄을 오는 9월 3일(목) 10시부터 17시 30분까지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대회의실에서 개최한다.
‘포항 중성리신라비’는 포항 중성리1)에서 도로공사 도중 주민이 발견, 신고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포항 중성리는 1989년에 발견된 ‘영일 냉수리신라비’(국보 제264호)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약 8.7㎞ 떨어져 있다.
이 중성리비는 부정형의 자연석 화강암(최대높이 104㎝, 최대폭 49㎝, 두께 12~13㎝, 무게 115kg)에
한 면에만 음각으로 한자를 새겨 넣었다.
글자는 전체 12행으로, 한 행에는 많으면 20자 정도로 모두 203자 정도가 확인되고 있고
하단부에 약 20㎝ 정도 글자를 새기지 않은 여유 공간이 있을 뿐,
윗부분은 비의 윤곽을 따라 최상단부까지 글자가 가득 새겨져 있다.
비의 맨 위쪽 일부와 우측면 일부가 결실되었을 뿐, 글자 대부분이 판독 가능한 양호한 상태이다.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 볼 때,
늦어도 지증왕 2년(辛巳 年, 501년)으로 비정(比定:유사한 다른 물체와 비교해 그 성질을 정함)되고 있다.
향후의 연구결과에 따라 좀 더 이른 시기에 대한 검토도 있을 수 있으나,
지금까지 최고의 비로 알려진 ‘영일 냉수리신라비’가 503년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에
이 중성리 비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신라비2)가 된다.
비의 내용은, 영일 냉수리비의 내용처럼, 재물(또는 토지 등 재산)과 관련된 소송의 평결로
‘과거에 모단벌의 것(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며, 향후 이에 대한 재론을 못하도록 한다’라고 하고
이러한 평결의 과정(관련자 등)과 내용을 현지에서 반포하여
현지인 등과 후세에 경계를 삼는 것을 담고 있다.
이 비와 관련하여 연구소에서는 향후 연구의 기본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기본 보고서 성격의
『浦項 中城里新羅碑』를 발간했다.
이 책자에는 비의 발견경위에서부터
현황, 비의 내용(판독문과 해석문 등)과 특징(암질 등 분석) 등이 실려 있다.
특히, 비문의 육안 판독이 가능할 정도의 원색사진과 탁본사진, 첨단 3D실측사진 등이 실려 있어
향후 이 방면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부록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 비들 즉, ‘영일 냉수리신라비’, ‘울진 봉평신라비’, ‘울주 천전리서석’,
‘단양 신라적성비’, ‘명활산성작성비’,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남산신성비’ 등의 발견 경위 및
비문내용과 현 관리상태 등을 사진 등과 함께 소개하여 자료로서의 활용도를 높였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홈페이지(www.gcp.go.kr)에 이 책자의 원문을 공개하여
누구든지 무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신라 비(碑)의 문자
신라는 6세기대에 이르러 급속하게 문자사용이 증가하여 문자 발달사상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는 6세기대에 이르러 무엇인가 많은 내용의 사실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신라 사회에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6세기 신라는 눈부신 발전을 해 나갔는데,
우경(牛耕)의 실시를 통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정치체제의 정비를 구체화하였고,
‘王’이라는 호칭과 ‘신라(新羅)’라는 국호(國號)를 확정하였다.
율령(律令) 반포 · 불교의 공인(公認) · 영토의 확장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나가는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친 질적 변화가 뚜렷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뿐만 아니라, 역사학의 문헌 연구를 통해서도
6세기대 신라에 대한 매우 많은 연구 성과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만큼 이 때가 신라에서 중요한 시기임을 반증하며,
이러한 사항이 당시 신라인이 남겨놓은 문자자료에 남아 있는 것이다.
신라에서 문자가 발생한 초기의 모습은
5세기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청동그릇이나 청동방울에 새겨진 단어에 해당하는 문자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전해져 신라 문자생활에 영향을 미친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격적인 문자생활을 보여주는 자료가 석문인데,
6세기 석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율령 반포 및 문자의 보급 등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반영구성을 가진 단단한 돌에 교시하는 내용을 써서 강한 시행 의지를 표명하려 한 것이다.
특히 영토 확장 과정에서 그 주민을 신라인으로 포섭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와 관련된 사항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석문이 널리 작성된 것이다.
지방으로 편입된 지역의 주민을 율령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최고(最古)의 비석인 ‘포항 중성리비’와 ‘영일 냉수리비’, ‘울진 봉평비’ 등이 있다.
영역 확장과 관련해서는 진흥왕이 새로 편입된 지역인 ‘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 등에 세운
4개의 순수비’와 ‘단양 적성비’ 등이 남아 있다.
한편 신라 영역에 들어온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주민들을 성 쌓는 작업에 동원하는 등의 모습은
‘남산신성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또한 전국에 댐을 쌓아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켰는데,
영천 청제(菁堤)를 쌓을 때 세운 ‘청제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비문과 더불어 신라 삼국통일에 기여를 한 화랑도와 관련된 ‘임신서기석(보물 1411호)’의
화랑의 맹세를 통하여 통일의 기운도 느낄 수 있다.
한편, 이번 학술심포지엄에서는
‘비의 발견경위와 향후과제’, ‘포항 흥해지방의 역사고고학적 고찰’ 등에 대한 보고를 비롯하여,
이 비에 대한 ‘금석학적 검토’(선석렬, 부산대), ‘어문학적 고찰’(권인한, 성균관대),
‘내용과 제작시기’(이우태, 서울시립대), 그리고 ‘서체와 고신라 문자생활’(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대한 심도 있는 주제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또한, 신라사전공의 원로학자 신형식(前 이화여대) 선생의 사회로
여러 전문가와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종합토론이 심도있게 진행될 것이며,
특히 이번 학술회의를 참관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당일 현장에서 비의 탁본자료(실물의 약 70%)를
영인한 기념품이 제공된다.
연구소에서는 학술심포지엄 개최를 기념하고 비의 실물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고려하여,
국립경주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한시적으로 오는 9월 2일(수)부터 9월 9일(수)까지(단, 9. 7 휴관)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1층에서 일반 공개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번 발견을 계기로 우리 고대사, 특히 신라사에 대한 연구 활성화와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애호사상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한시적인 공개 후, 좀 더 과학적인 분석과 처리 등을 거쳐 보
다 안전하게 보존하고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고
관련 절차 등을 거쳐 정당한 가치 평가와 활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1) 당시는 발견지점이 학성리로 보고되었으나 정밀측량 결과 흥해읍 중성리로 밝혀져
비의 명칭을 ‘포항 중성리신라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2) 이는 비 첫머리에 등장하는 辛巳에 근거한 것으로, 연구자에 따라 441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정확한 제작시기는 향후의 연구결과에 따라 변동될 수도 있으나,
현재는 잠정적으로 501년을 제작시기로 보고자 한다.
담당자 : 박종익, 김보상
연락처 : 054-777-8800
"빼앗은 재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라"
재산 소송 판결문으로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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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경북 포항에서 발견돼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 비석으로 추정됐던 '포항 중성리신라비(中城里新羅碑)'는 재산 분쟁과 관련된 소송의 판결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조사 보고서〈포항 중성리신라비〉를 발간하고, 9월3일 오전 10시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대회의실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비문 판독 결과, "과거에 모단벌(牟旦伐 · 사람 이름)의 것(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향후 이에 대한 재론(再論)을 못하도록 한다." "이런 판결 과정을 반포해 현지인과 후세에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비문에는 신라 6부(部) 중 가장 강력했던 '喙部(훼부)'와 '沙喙部(사훼부)'가 등장하며, '居伐(거벌)' '古利村(고리촌)' 등 현재의 포항 부근으로 추정되는 지명이 들어 있었다.
'阿干支(아간지·6등급)' '沙干支(사간지·8등급)' 등의 관등명과 '道使(도사)' '使人(사인)' 같은 관직명도 확인됐다.
중성리비는 부정형(不定形) 자연석 화강암(최대 높이 104㎝, 최대 폭 49㎝, 두께 12~13㎝, 무게 115㎏)에 한 면에만 글자를 음각했다. 글자는 전체 12행(行)이며 행별로 최대 20자까지 새겨져 있어 모두 203자가 확인됐다.
비석 하단부의 약 20㎝ 공간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
중성리 비문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의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비문 첫 대목에 보이는 '辛巳(신사)'라는 간지가 중요한 단서다.
연구소측은 "비의 형식이나 서체, 비문에 등장하는 6부의 명칭이나 관직명 등으로 볼 때
신라 지증왕 2년(501년)으로 추정되지만, 비석의 한문 구사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신라의 옛 국호인 '斯盧(사로)'를 사용했다는 추정에서 이보다 60년 빠른 441년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고 밝혔다.
501년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최고(最古) 신라비로 알려진 영일 냉수리비(503년 추정)보다 2년 앞선 것이라
이 비가 '신라 최고비'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중성리비는 지난 1989년 '영일 냉수리비'가 발견된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8.7㎞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보고서 전문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www.gcp.go.kr)에서 볼 수 있다.
포항 중성리비는 9월2일부터 9월9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1층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 2009.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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