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0기 세계문화유산 지정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올랐다.
500년 동안 지속된 왕조의 무덤이 고스란히 보존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우리나라 세계문화유산(2010년 8월현재)
문화유산 1) 해인사 팔만대장경 장경판전(1995) 2) 종묘(1995) 3)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1995) 4) 창덕궁(1997) 5) 수원 화성(1997) 6) 경주 역사유적지구(2000) 7) 전북 고창, 전남 화순, 인천 강화의 고인돌(2000) 8) 조선왕릉(2009) 9)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2010) 자연유산 1)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기록유산 1) 훈민정음 해례본(1997) 2) 조선왕조실록(1997) 3)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2001) 4) 승정원일기(2001) 5)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기타경판(2007) 6) 조선왕조 의궤(2007) 7) 동의보감(2009)
무형유산 1)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 2) 판소리(2003) 3) 강릉 단오제(2005) 4) 강강술래(2009) 5) 남사당놀이(2009) 6) 영산재(2009) 7)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2009) 8) 처용무(2009)
**** 유네스코 세계유산 유네스코가 1972년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인류를 위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이다.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자연+문화)유산으로 나뉜다. 매년 6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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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은 조선시대 27대 왕과 왕비,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능 40기가 남아 있다.
왕의 무덤이지만 폐위돼 대군묘로 조성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의 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대상에서 제외됐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역사, 건축양식, 미의식, 생태관, 철학이 담긴 문화의 결정체로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경관 때문에 ‘신(神)의 정원’이라 불린다.
조선왕릉 40기 전체에서 매년 제례가 이어져
왕릉이 박제된 옛 유산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 숨쉬고 있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왕릉의 조성 과정 관리일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조선의 수준 높은 기록문화도 보여준다.
특히 2007년 한국을 찾은 ICOMOS 관계자들은
“도심 속에서 개발 압력을 견디고 녹지가 이렇게 잘 남아 있는 것만으로 세계유산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수도권 일대 조선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1935만3067m²에 이른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의 복원, 보존 관리 의지를 세계유산 지위의 유지에 중요한 요소로 평가하고 있어
도시화 과정에서 훼손된 조선왕릉의 원형 복원이 과제로 떠올랐다.
세계유산위원회는 6월27일 등재 결정문에서
왕릉 주변 개발 완충 지역 내 개발의 가이드라인을 만들라고 권고했다.
- 2009년 06월 29일
《조선 왕릉은 단순히 왕의 주검이 묻혀 있는 무덤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부터 당대의 건축양식과 미의식, 생태관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의 결정다.
서울 인근에 있는 조선 왕릉은 40여 기.
얼핏 비슷하게 보이지만 각 왕릉은 저마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오랜 세월 오롯이 숨쉬고 있는 조선 왕릉의 문화를 10회에 걸쳐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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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과 인공의 완벽한 조화 |
자연 위에 내려앉은 듯… 유럽도 놀란 '神의 정원'
인위적 구획 없이 숲이 곧 담장 봉분도 지형훼손 최대한 피해 聖과 俗 어우러진 신비의 공간 "이곳이 바로 신(神)의 정원이군요!" 최근 경기 남양주시 광릉(세조의 능) 등 조선의 왕릉을 둘러본 유럽 정원건축가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들은 "유럽의 '풍경식 정원(landscape garden)'의 이상인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조선 왕릉에 이미 실현돼 있다"며 놀라워했다.
'풍경식 정원'은 화려하나 인공적인 느낌이 짙은 '정형식 정원(formal garden)' 이후 등장한 유럽의 정원 양식이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의 정원처럼 정교하지만 자연과 분리된 정형식 정원에 질린 유럽인들은 인공미를 최대한 감추고 자연미를 가미한 풍경식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정원 중심의 저택이나 교회, 잔디와 수풀이 펼쳐지는 정원, 산과 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광….
유럽인들은 건축물 정원 풍광 등 삼박자를 갖춘 '통합된 시계(視界) 구조'를 이상으로 꼽았다. 하지만 풍경식 정원에도 건축물과 정원을 구분하는 담장, 곧게 닦인 길과 구획된 화단 등 인공적인 느낌은 가시지 않는다. 조선의 왕릉은 '통합된 시계 구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인공적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최종희(조경학) 배재대 교수는 이를 두고 "자연 위에 정원이 살짝 내려앉은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왕릉으로는 조선 17대 왕 효종의 영릉(경기 여주군)이 꼽힌다. 영릉의 봉분 뒤에는 주산(主山)이라 부르는 산이 있다. 이 산비탈 중허리에 봉분이 자리 잡고 있다. 영릉뿐 아니라 조선 왕릉 봉분의 평균 높이는 해발 53m다.
왜 봉분을 이렇게 산비탈에 만든 걸까?
풍수지리에 따라 산의 기운이 봉분 자리에 머무르게 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봉분 주변 풍경에 있다.
봉분은 유럽으로 치면 풍경식 정원의 중심인 저택이나 교회에 해당한다. 하지만 유럽의 정원과 달리 왕릉 구역을 구분하는 담장 따위는 없다. 그 대신 봉분 좌우로 겹겹이 에워싼 산림이 왕릉을 호위하듯 산등성이를 따라 뻗어간다. '자연 담'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녹색 파도가 출렁거리는 듯해 '녹해(綠海)'라 부른다.
봉분 뒤에서 보면 이 자연 담은
봉분 앞 왕릉구역에 있는 정자각, 홍살문까지 양팔로 감싸안듯 뻗어나간다.
뒤에 주산 외에도 봉분 앞으로는
자연 담 사이로 먼 산이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온다.
풍수지리의 조산(朝山 · 명당 터를 호위하는 여러 겹의 먼 산)이다.
보통 봉분에서 조산까지의 평균 거리는 2.6km나 된다.
유럽인들이 꿈꿨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광이다.
'통합된 시계 구조'의 완결판인 셈.
그러면 왜 '신'의 정원일까. 이창환(조경학) 상지영서대 교수는
"자연 담 속 정원(왕릉 구역)은 속(俗), 성(聖)+속, 성으로 나뉜다"고 말했다.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에서 왕릉 입구인 홍살문에 이르는 공간은 속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성+속이다.
제향공간이다. 정자각부터 봉분까지는 죽은 자만의 정원, 성의 공간이다.
상상해보자. 18대 조선 왕 현종이 선대왕 효종의 제향을 지내러 왔다. 재실을 떠나는 현종의 곁을 효종의 영혼이 함께한다.
재실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길에 풍경식 정원처럼 잘 닦인 직선은 없다.
'갈 지(之 )', '검을 현(玄)' 자 모양으로 구불구불하다.
수목이 우거져 왕릉이 보이지 않는다. 정원에 이르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가 고조된다.
그리고 제향. 선대왕의 영혼만이 정자각을 넘어 봉분 주위를 노닌다.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만드는 쌍릉이 조선 왕릉의 기본. 그런데 효종의 영릉은 효종 능 밑에 왕비 인선왕후의 능을 만들었다.
이창환 교수는 "봉분을 만들 면적이 좁았지만 구태여 자연 지형을 변화시키지 않고
언덕 줄기를 따라 내려온 또 다른 명당에 왕비의 무덤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왕릉 조성을 위해 자연을 개조하는 대신 왕릉에 맞는 곳을 찾아 왕릉을 '삽입'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 왕릉은 본래 풍광을 해치지 않고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했던 조선의 자연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표본인 태조 건원릉(健元陵 · 경기 구리시 동구릉)부터 25대 왕인 철종 예릉(睿陵 · 경기 고양시 서삼릉)까지, 조선의 마지막 두 왕인 26대 고종과 27대 순종 능을 제외한 모든 왕릉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건축물. 왕릉 입구인 홍살문과 봉분 사이에 자리한다.
선대왕의 제사를 모시던 정자각은
그런데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과 유릉에는 정자각 대신 '一' 자 모양 침전(寢殿)이 있다. 왜 그럴까.
그렇다면 고종 이전까지 조선 왕들의 능에 세워진 정자각은
"능 옆에 세운 침전은 임금의 숙소라는 뜻이다.
조선의 왕릉관은 달랐다.
왕의 죽음을 인정하고 왕릉을 죽어서도 통치하는 위압적 공간으로 규정하지 않은 것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폭 3m 남짓한 길인 참도(參道)가 뻗어있다.
정자각이 없는 홍,유릉도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참도가 나 있다.
모든 왕릉에서 박석 깔린 참도의 표면을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해 놓은 이유도 재미있다.
“많은 관람객이 신도의 의미를 모른 채 그냥 걸어간다. 신도는 임금도 디디지 못하던 신성한 길인데….
조선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의 봉분을 지키는 문석인(왼쪽)과 무석인.
미소 짓지도, 그렇다고 무섭지도 않은 중용의 표정 미학을 보여준다. 고양=윤완준 기자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중용’의 정수
조선 왕릉에는 봉분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주변에는 왕릉의 장엄함을 더하는 사람과 동물 조각상 16개가 능을 지킨다.
봉분 앞은 높낮이에 따라 3단계로 나뉜다.
가장 높은 상계(上階)가 봉분이 있는 곳. 병풍석과 난간석이 봉분을 에워싸고
수호의 상징인 호랑이와 양 조각이 2쌍씩 8마리가 봉분을 둘러싸고 있다.
그 아래 중계(中階)에는 문관을 조각한 문석인(文石人) 1쌍과 말 1쌍,
그 아래 하계(下階)에는 무관을 표현한 무석인(武石人) 1쌍과 말 1쌍이 있다.
조선 11대 중종 능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과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능 희릉(경기 고양시)에서는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격조 높은 문·무석인이 눈길을 끈다.
현대 조각미로는 이해되지 않는, 머리가 과장된 3등신의 신체 비례가 낯설다.
그보다 더 낯선 것은 문·무석인들의 표정이다.
국보 84호 서산마애삼존불과 국보 78,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자랑하는 우리 조각 미술 특유의
그윽한 미소를 찾아볼 수 없다. 미소 짓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나거나 무서운 표정도 아니다.
근엄하게 다문 입에서 왕의 영혼을 변함없이 지키는 충정이 느껴진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변함없는 상태, ‘중용(中庸)의 표정’ 미학의 정수다.
왜 이렇게 무표정한 모습으로 조각했을까.
단순히 왕 앞에 도열한 신하 차원을 넘어 영혼을 보호하는 신인(神人)의 경지로 보았기 때문이다.
문 · 무석인을 사람 키보다 크게(최대 약 330cm · 희릉) 조각한 것도,
인체 곡선을 따르지 않고 사각기둥 형태로 조각한 것도, 목 없이 얼굴을 가슴에 묻은 비현실적 기법도
경건하게 왕을 지키는 영속적 신성(神性)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문 · 무석인은 왕 앞에 한껏 숙인 듯 존경을 나타내고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절제됐다.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에서 발견된 도용(무덤에 함께 묻는 허수아비)과 비교할 때
그 차이는 또렷이 드러난다.
수많은 기병과 보병 도용은 사실적이지만 키와 몸집이 실제 사람 크기에 불과하다.
도용들은 결국 황제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인간 군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조선 왕릉에는 문·무석인이 있지만, 표정이 조금씩 다르다.
김이순 홍익대(미술사) 교수는 “문·무석인의 얼굴에서는 시대별 미의식, 정치 사회상까지 읽을 수 있어
고유하고도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진경(眞景)과 사실주의 기법이 등장한 18세기부터는 표정 있는 문 · 무인도 등장한다.
영조 원릉(경기 구리시 동구릉)의 문 · 무석인은 ‘사람처럼’ 미소를 띤다.
원릉은 중계, 하계 구분 없이 문 · 무석인을 같은 높이에 뒀다.
영조가 계급에 상관없이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는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문 · 무관 사이의 차별이 완화된
당대 정치상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4>봉분 앞 ‘혼유석’의 비밀
7~8t 화강암 매끈하게 다듬어
석실 입구 지키는 ‘명품 자물쇠’
조선 왕릉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봉분 앞 돌상 하나.
가로 약 3m, 세로 2m, 높이 50cm의 거대한 직육면체. 얼핏 무덤 앞에 제사 음식 놓는 상처럼 보인다.
왕의 영혼을 지키는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조각의 장엄한 표정도,
봉분을 수호하는 호랑이와 양 조각의 상징성도 찾기 어렵다.
본래 명칭은 석상(石床)이다. 여기서 제사를 지냈을까. 그렇지 않다.
조선 왕릉의 제향 공간은 봉분 아래 정자각(丁字閣)이다. 봉분은 왕조차 발을 들이지 못한 곳이다.
그렇다면 이 멋없는 돌상이 왜 봉분 바로 앞에 있을까.
돌상은 임진왜란 이후 혼유석(魂遊石)이라고 불렸다. 봉분 아래 잠든 영혼이 나와 노니는 돌이라는 뜻이다.
혼유석은 둥근 북을 닮은 고석(鼓石 · 높이 50cm) 4개가 받치고 있어 무거운 돌을 공중에 띄운 듯한
느낌이다. 고석마다 잡귀를 막는 귀면(鬼面)을 새겼다.
태조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16대 왕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능 휘릉(구리시)은 고석이 5개다.
혼유석은 조선 왕릉만의 독창적 조각이다. 봉분 주변 조각 중 가장 귀하게 여겨졌다.
“혼유석은 몸체가 크고 품질이 좋아야 하니 어찌 인물석(人物石)과 쉽게 비교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22대 왕 정조 글을 엮은 전집 ‘홍재전서’ 중)
어떤 점에서 독창적일까. 빛이 나는 듯 매끈한 표면의 광택이 혼유석의 가치를 대변한다.
효종 능인 영릉(경기 여주군), 정조 능인 건릉(경기 화성시) 등의 혼유석은
표면이 요즘 현대 기계로 다듬은 듯 매끄럽다.
혼유석의 석재는 화강암인데 그 표면을 다듬어 광택을 내는 것은 현대 기술로도 힘들다는 게
석장들의 전언이다. 김이순(미술사) 홍익대 교수는
“조선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경기 남양주시) 조성 과정에서
석장 40명이 열흘간 혼유석에만 매달렸다”고 말했다.
혼유석은 무게가 7, 8t에 이른다. 조선 왕릉 봉분의 평균 높이는 해발 53m.
표면에 흠이 생기지 않게 봉분 앞으로 옮겨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건릉 조성 당시 혼유석을 옮기는 데 1000명이나 동원됐다.
이처럼 혼유석은 조선시대 명품 중의 명품이다.
이 최고급 명품이 봉분 앞에 자리 잡은 비밀은 혼유석 아래에 있다.
혼유석 밑에는 박석이 있고 그 아래에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이 통로는 모래 자갈 석회를 섞은 반죽으로 채웠다.
엄청난 무게의 혼유석을 들어내지 않고서는 석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셈.
이 덕분에 조선 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9대 성종 능인 선릉(서울 강남구 삼성동)과
11대 중종 능인 정릉(삼성동)을 훼손했을 뿐이다.
혼유석은 왕의 주검을 묻은 지하밀실을 영원히 봉안한 '명품 자물쇠'였던 것이다.
<5> 儒-佛-道사상의 결정체
부속 사찰 세워 극락왕생 기원
봉분 주변 조각에도 불교 사상
경기 화성시 용주사는 특이하다.
사찰 입구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붉은색 칠을 한 홍살문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됐다가 올해 6월 약 100년 만에 복원됐다.
그런데 홍살문은 조선 왕릉 입구를 나타내는 문이다.
궁궐, 관아에서도 볼 수 있지만 사찰 홍살문은 용주사가 유일하다.
홍살문을 지나면 삼문(三門)이다. 중앙의 대문 좌우에 문이 하나씩 더 있다. 전형적인 궁궐 건축 양식.
삼문 앞에는 화마를 물리친다는 해태 한 쌍이 있는데 해태 역시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조각.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소맷돌(난간) 형태와 소맷돌에 새긴 구름은
조선 왕릉의 제향공간 정자각(丁字閣) 계단을 꼭 닮았다.
비밀은 용주사에서 800여 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에 있다.
용주사는 융릉에 딸린 사찰이다.
○ ‘숭유억불’ 정책과 다르게 내세관은 불교적
조선 왕릉마다 능에 묻힌 왕의 극락영생을 비는 사찰을 둔 것이다.
왕릉 사찰은 조포사(造泡寺)라고도 불렸다. 선대왕에게 제사 지낼 때 올릴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이다.
500년 내내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에 선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을 세웠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내세관은 불교적이었던 것이다.
서울 강남 복판의 봉은사도 성종 능 선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딸린 사찰이다.
세종 능 영릉(경기 여주시)의 신륵사, 세조 능 광릉(경기 남양주시)의 봉선사도 왕릉 사찰이다.
조선 왕릉의 봉분 주변 조각에도 불교 사상이 녹아 있다.
봉분 앞 장명등은 사실 사찰의 석등과 다를 바 없다.
조선 시대 내내 사찰 창건을 억제해 석등 건조는 드물었다지만 석등은 장명등 형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태종 능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장명등에 불 켜는 일을 논의한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에는 실제로 기름등잔을 놓아 왕릉을 밝혔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태조 능 건원릉(경기 구리시), 헌릉 등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에는 낯선 형상이 새겨져 있다.
불교에서 부처를 경각시키거나 기쁘게 할 때 쓰이는 방울인 금강령(영탁),
번뇌를 깨뜨리고 불도를 닦을 때 쓰는 도구인 금강저(영저)다.
융릉 봉분은 불교의 상징인 연꽃 봉우리 조각으로 둘러싸였다.
왕의 영혼이 잠든 곳을 불심(佛心)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 태극문양-산신석 등 도교와 전통신앙도 어우러져
그런데 영탁과 영저 중간에는 음양(陰陽)의 이기(二氣)가 생성된 근원인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정자각 계단 소맷돌 아래에도 태극무늬가 있다.
불교뿐 아니라 음양의 조화를 중시한 도교 사상이 함께 녹아 든 것이다.
정자각에서 봉분을 바라봤을 때 정자각 오른편에 있는 돌도 눈여겨봐야 한다.
평균 가로 1.4m, 세로 0.9m의 돌 산신석이다.
왕릉 조성 이전 산을 지키던 산신에게 왕릉으로 산을 해친 미안한 마음을 제사지낸 곳.
산신 사상이라는 우리 고유의 민간 신앙까지 조선 왕릉에 어우려져 있다.
조선 왕릉은 선조를 기리는 유교의 효 사상과 불교, 도교, 민간 신앙 등
수천 년 전통 사상과 철학이 한데 집적된 결정체인 것이다.
<6> 숨어 있는 봉분
조선 왕릉은 참배자가 올려다보며 느끼는 존경심과 죽은 자가 사방을 굽어 살피는 듯한 시선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사진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
홍살문 뒤 정자각이 시선 차단
王의 영혼에 신비-경외감 심어
조선 왕릉은 산등성 끝자락의 완만한 언덕에 있다.
죽은 자의 성스러운 영역인 봉분은
제향 공간인 정자각에서 왕릉 입구인 홍살문에 이르는 산 자의 영역보다 높은 곳에 있다.
홍살문에 들어선 참배자가 봉분을 올려다보며 자연스럽게 존경과 위엄을 느끼도록 조성된 것.
그런데 이상하다.
11대 왕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은 홍살문에 서서 이리저리 올려다봐도
참배 대상인 봉분이 보이지 않는다. 봉분과 홍살문 사이에 있는 정자각이 시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에 조성 원칙은 일정하지 않다.
봉분 높이도 해발 27∼260m로 다양하고 정자각과 봉분의 높이 차도 9∼39m에 이른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는 평평하기도 하고 경사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 왕릉 어디서나 홍살문에서 정자각이 봉분을 가리는 양상은 같다.
홍살문에 선 참배자의 눈높이(150cm)에서 정자각 지붕을 향해 일직선을 그어 생기는 수직각 안에도,
홍살문 중앙에서 정자각의 양끝을 향해 그어 생기는 수평각 안에도 봉분은 어김없이 숨는다.
이창환(조경학) 상지영서대 교수가 조선 왕릉 40기를 실측한 결과
수직각은 5.3∼16.2도, 수평각은 6.5∼18도로 나타났다.
수직각과 수평각은 조선 후기에 이를수록 커지는데,
봉분에서 정자각까지 거리가 짧아지는 것과 상관관계를 보인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거리만 300척(약 90m)으로 정한 뒤
그리 크지 않은 1층짜리 목조건축물인 정자각의 높이와 폭을 자연 본래의 지형에 따라
절묘하게 조절해 ‘시선의 폐쇄성’을 유도한 것이다.
이런 폐쇄성은 신(神)의 정원인 왕릉의 성역화와 신비감을 배가한다.
유교문화권인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왕릉과 중국 황릉에서 봉분 주위에 여러 채의 건물이나 높은 벽을 세워
인위적으로 시선 차단 효과를 노린 것에 비해 간결하고도 탁월한 장치다.
정자각을 지나도 봉분은 쉬이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정자각 뒤편에는 푸른 잔디가 덮인 또 다른 언덕인 사초지(莎草地)가 조성돼 시선을 가로막는다. 사초지 너머로 봉분의 봉긋한 윗부분과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등 봉분 주변 조각들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사초지를 통해 봉분에 올라가려면 가파른 경사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다.
능을 지키는 참봉이 봉분에 올라가며 왕의 영혼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왕의 영혼이 잠든 봉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의 느낌은 정반대다.
봉분 좌우와 뒤를 감싼 곡장(曲墻)은 눈높이보다 낮다.
곡장은 봉분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먼 산까지 시야에 들어오도록 트여 있다.
정자각은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조선 왕릉은 이처럼 참배자 입장에서는 폐쇄적이지만
죽은 자의 시각에서는 사방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조로 돼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존경을 느끼는 앙감(仰感)과
위에서 내려다보며 굽어 살피는 느낌의 부감(俯感)을 조화시켜 시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7>‘그린벨트’의 원조
사진 제공 문화재청 |
후대에 선물로 준 ‘1935만㎡ 녹지’
조선 왕릉은 ‘자연과 어우러진 인공 정원’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숲도 울창하다. 이 숲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1790년(정조 14) 융릉(경기 화성시) 일대에 심은 소나무가 45만3300여 그루에 달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주변의 잡풀을 베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으라고 명했다.
영조는 효종 능 영릉(寧陵·경기 여주군)에 직접 잣나무를 심었다.
이뿐 아니다. 왕릉에 나무가 적을 때는 나무를 보충하고, 나무가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를 왕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했다. 왕릉에 심은 나무의 수도 기록했고 함부로 벌목한 자는 엄하게 처벌했다.
왕릉에 계획적으로 나무를 심은 뒤 집중 관리한 것이다.
왕릉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밖, 100리(약 40km) 안에 조성하라는 기준에 따라 대부분 수도권에 자리 잡았다.
도심의 녹지를 보존하는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정책이 1971년에 시행됐으나 수백 년 전 조선 시대에 이미 정착된 셈이다.
나무의 종류와 위치도 계획적이다.
봉분 뒤에서 ‘신(神)의 정원’의 배경이 되는 숲은 소나무 숲이다. 봉분을 중심으로 죽은 자의 공간에는 소나무 젓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를,
왕릉 입구 홍살문에서 제향 공간 정자각에 이르는 곳에는 소나무 오리나무를,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진입 공간은 소나무 떡갈나무 젓나무를 심었다.
이는 나무마다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조 때 문신 강희안이 지은 원예 책 ‘양화소록’에 따르면
소나무는 명당의 기둥이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상징했다. 십장생의 하나로
왕조의 지속적 번영을 뜻한다.
생태학적으로도 소나무 숲에는 지표를 낮게 덮는 지피식물이 자라지 못해 곤충이 없다.
곤충이 없으니 개구리가 없고 불길한 징조로 여겨진 뱀도 살지 못했다.
봉분 주변의 떡갈나무는 껍질이 두꺼워 산불에 강하고 줄기가 곧게 자라기 때문에
왕릉의 ‘방호수(防護樹)’ 역할을 했다. 정자각 앞에는 5월경 흰색 꽃이 피는 때죽나무도 심었는데,
밤에 정자각 앞을 환하게 밝히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홍살문 주변의 오리나무는 습지에 강하고 뿌리가 많이 뻗는다.
이 공간이 지대가 낮은 습지여서 많은 비에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한 기능을 고려한 것이다.
정자각 뒤에서 봉분 앞까지 펼쳐진 언덕인 사초지(莎草地)의 푸른 잔디까지 종자가 관리된 점도 놀랍다.
현 독립문(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터에 있었던 ‘모화관(慕華館)’에서
잎이 가늘고 짧은 ‘한국형 들잔디’만 왕릉에 공급한 것이다. 이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졌다.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 사릉(경기 남양주시) 등 왕릉 5곳 인근의 문화재청 양묘장에서
왕릉 나무의 혈통을 키워 왕릉에 공급하고 있다. 왕릉 나무는 모두 ‘족보 있는 나무’인 셈이다.
인근 도로변에 줄지은 젓나무 군락이 유명한 세조 능 광릉(경기 남양주시)의 울창한 숲은
국립수목원의 기반을 마련했다.
900여 종 수목이 어우러진 이곳은 현재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 보전 지역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태종 능 헌릉, 순조 능 인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오리나무 숲은 서울시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수도권 일대 조선 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1935만3067m²에 이른다.
조선의 철저한 녹지 보존 정책이 후대에 건네준 선물이다.
<8>정자각 건축에 숨은 원리
“신성한 봉분, 홍살문서 보이지 않게”
정면 입구를 오른쪽 90도 방향 배치
조선 영조 원비 정성왕후의 홍릉(경기 고양시)에 들어서는 순간, 잠시 헷갈린다.
조선 왕릉 입구인 홍살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丁’자 형태의 건축물인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의 방향이 입구를 향해 있으니 정면이 분명한데,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의 모습은 전형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건축물 정면에 응당 있어야 할 계단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측면이 정면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정자각은 조선 왕릉 어디서나 신주를 모신 ‘一’자 형의 정전(正殿) 앞에 붙은 ‘궐’ 자 모양의
절하는 공간 배전(拜殿)의 맞배지붕(지붕의 앞면과 뒷면이 맞닿아 있는 지붕 양식) 옆면이
정면처럼 앞을 보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參道)의 방향은
정자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90도 꺾였다가 정자각을 따라 왼쪽으로 다시 90도 꺾인다.
건축물 오른쪽에 이르러서야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그렇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의 ‘측면’이라고 생각한 면이 실제로는 ‘정면’인 셈.
정자각은 ‘시각적 정면’과 ‘행위적 정면’이 다른 건축물이다.
정자각은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다.
이는 참배자가 정자각 뒤 봉분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도록 해 왕릉의 위엄과 권위를 배가하는 효과를 낸다.
또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듯 동쪽은 시작과 탄생,
즉 양(陽)을 뜻하고 서쪽은 끝과 죽음, 음(陰)을 뜻한다. 자연의 섭리를 인공적 건축물에 구현한 것이다.
‘행위적 정면’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다.
하나는 수려한 구름무늬를 새긴 소맷돌(난간)과
삼태극 무늬의 고석(鼓石 · 북 모양의 둥근 돌)을 꾸민 화려한 계단이다.
다른 하나는 소박한 계단만 갖췄다.
여기에도 신성한 세계와 세속 세계를 구분하는 원리가 숨어 있다.
화려한 계단은 선대 임금의 영혼이 땅을 떠나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징이다.
왕릉 입구 홍살문의 삼태극과 상통하는 고석의 삼태극은 참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기호이기도 하다.
그 옆 간소한 계단은 임금이 이용한다.
복잡한 원리는 끝이 없다. 동쪽의 올라가는 계단이 2개인 반면 서쪽의 내려오는 계단은 하나밖에 없다.
누군가는 올라갈 수만 있고 내려올 수 없다는 뜻. 서쪽 계단은 임금이 제향을 마치고 내려오는 계단이다.
내려오지 못하는 선대왕의 영혼은 어디로 갈까?
같은 제향 공간이지만 조선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 정전과 정자각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종묘 정전의 뒤에는 문이 없다. 신위에 혼백이 담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자각 뒤에는 문이 나 있다.
동쪽 계단으로 올라온 왕의 영혼이 이 문을 통해 봉분으로 홀연히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문은 정자각에서 봉분 앞까지 펼쳐진 언덕인 푸른 사초지(莎草地)와
그 위 봉분 및 문·무석인, 장명등 같은 조각을 어렴풋이 보여주면서
정전의 어두운 공간 뒤로 펼쳐진 또 하나의 신비로운 경관을 창조한다.
태조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인조 능인 장릉(경기 파주시),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 능인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 등의 풍경이 일품이다.
또 정자각 기둥은 주춧돌에서 70cm 높이까지는 하얀색으로 칠해져
멀리서 보면 마치 기둥이 공중에 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구름 위 천계의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이영 경원대 건축학과 교수)이다.
<9>봉분 밑 금단의 성역 ‘석실’
화강암 짜맞춰 만든 ‘완벽한 밀실’
도굴 원천봉쇄… 발굴조사도 안해
조선 왕릉의 봉분 밑 지하에는 ‘비밀의 방’이 있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잠든 석실(石室)이다.
석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실체가 드러난 적 없다. 한 번도 발굴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석실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현재로선 국가 의례의 예법과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석실의 비밀에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조선 최초의 합장릉인 영릉(경기 여주군). 지하 3m에 석실이 있다.
조선시대 국법에 따르면 시신은 지하 1.5m 깊이에 묻어야 했다.
하지만 왕과 왕비는 지하 3m 깊이로 묻었는데 당시 극비사항이었다. 도굴을 막기 위해서였다.
영릉의 석실은 길이 3.80m, 너비 6m, 높이 1.70m에 이르렀다.
화강암으로 벽과 문, 천장을 만들어 이었는데,
석실 좌우 벽으로 쓰인 화강암 하나의 길이가 3.80m, 높이는 1.70m, 두께는 0.76m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이 거대하고 무거운 돌 부재(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재료)들을 잇는 데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부재를 서로 견고하게 짜 맞추는 목조 건축 방식이 도입됐다.
돌 부재 사이의 이음매는 인정(引釘)이라 불리는 대형 철제 연결고리로 고정시켰다.
조선 왕릉 석실의 구조를 연구한 김상협(명지대) 박사에 따르면
“이런 석조 건축 방식은 유례없는 첨단 기술”이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어 붙인 석실 입구는 미닫이 형식의 돌문으로 막은 뒤 마지막으로 그 앞에 문의석을 설치해 '이중 돌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와 모래, 흙을 섞은 삼물 반죽과 다진 잡석으로 이중 방어막을 만들었다. 사진제공, 김상협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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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 부재의 이음매 사이 틈은 석회와 모래, 흙을 섞은 삼물(三物)로 채우고
느릅나무 껍질을 삶은 물에 이겨 만든 방수재를 발랐다.
느릅나무 껍질의 코르크층은 물을 거의 통과시키지 않는 성질이 있는데 선조들이 이를 알았던 것이다.
석실 입구는 미닫이 형식의 돌문으로 막았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시신을 안치한 뒤
마지막으로 이 돌문 앞에 문의석(門倚石)이라 불리는 넓이 2m, 높이 1.5m의 돌을 설치해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도굴범이 이렇게 탄탄한 석실의 방어 구조를 뚫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석실은커녕 석실 입구까지 오기도 힘들다.
석실 사방은 삼물 반죽을 1.20m 두께로 채우고 다진 잡석을 또 그만큼의 두께로 채웠다.
삼물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는다. 석실 외부도 이중 방어막이 구축돼 있는 셈.
조선 왕릉의 석실은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다.
석실 바닥 관이 놓이는 부분에는 돌을 깔지 않았다.
돌은 시신을 차갑게 할 뿐 아니라 땅의 기운을 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구리로 만든 촘촘한 그물망인 동망(銅網)을 깔았다.
물길을 만들어 빗물을 내보내고 뱀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다.
왕과 왕비의 시신 사이에는 두께 1.20m의 돌벽을 설치하고
벽의 중간에는 0.50m² 크기의 창혈(窓穴)이라는 구멍을 뚫었다.
그 틈 사이에 부장품을 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영혼이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뚫은 통로라는 낭만적인 해석도 있다.
부장품은 나무로 만들어 금칠한 옥쇄와 왕이 평상시 좋아했던 글이나 그림을 넣었다.
조선 왕릉의 석실에도 고구려 고분이나 고려 왕릉처럼 벽화가 있었다.
석회를 바른 뒤 기름먹으로 천장에는 해, 달, 별, 은하를 그려 천상을 나타내고
사방에는 청룡(동쪽) 백호(서쪽) 주작(남쪽), 현무(북쪽)를 그렸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조선시대에 어떻게 계승됐는지 보여 주는 단서가 조선 왕릉의 석실에 숨어 있는 것이다.
<10·끝>과거와 현재의 만남
왕릉 40기서 해마다 제사
유-무형 유산 ‘귀중한 소통’
조선 왕릉의 정자각 서쪽 앞.
봉분으로 이어지는 푸른 언덕인 사초지(莎草地)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낯선 석조물.
땅 위에 평균 1m의 기다란 화강암을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어 놓았다. 정사각형 내부는 땅을 파 깊숙하다.
조선 왕릉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예감(예坎)이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묻는 구덩이’.
무엇을 묻었을까. 예감의 또 다른 이름인 망료위(望燎位)로 그 쓰임새를 추적해 보자.
망료는 제사 때 선대왕의 평안을 기원하며 읽은 축문(祝文)을
제사가 끝난 뒤 태우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을 뜻한다.
예감은 정자각 서쪽에 위치해 있다.
제향 공간인 정자각은 동쪽 방향이 정면인데 제향은 정자각 동쪽에서 시작해 서쪽에서 끝났을 것이다.
예감은 제사가 끝난 뒤 축문을 태우고 땅에 묻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예감 위에 소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어 놓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예감의 진짜 가치는 과거에 축문을 ‘태워 묻었던’ 곳이 아니라
지금도 축문을 ‘태우고 묻는’ 곳이라는 데 있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경우 등을 포함해 조선 왕릉 40기에서 모두 제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600년의 1∼27대 모든 왕과 왕비를 위한 제향 의식이 기일마다 열리고 있다.
건원릉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다른 곳은 왕릉마다 봉향회가 제향을 주관한다.
매년 6월 27일 열리는 건원릉 제향에는 1500여 명이, 다른 왕릉에는 300∼500여 명씩 참가한다.
이렇듯 해마다 수십 차례씩 소프트웨어(무형유산)와 하드웨어(유형유산)가 만나
조선 왕릉의 가치를 완성하고 있는 셈이다.
제향날에 왕은 홍살문에서 참도를 통해 정자각까지 걸어간다.
평소 정자각은 기둥마다 신렴(神簾)이라 불리는 일종의 ‘커튼’을 쳐놓았다가 제향날 걷어 올렸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렴은 2006년 원종(인조의 아버지) 능인 장릉(경기 김포시)에서 발견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왕은 선대왕에게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 역할을 맡는다.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은 영의정이, 마지막 잔을 올리는 종헌관(終獻官)은 좌의정이 한다.
올해 건원릉 제향에서는 태조 600주기를 맞아
의친왕의 손자인 이원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가 직접 초헌관을 맡았다.
초헌관이 정자각 동쪽의 계단을 오른다.
정자각의 절하는 공간 배전(拜殿)에서 헌관(제사에서 잔을 올리는 사람)들은 항상 서쪽을 봐야 한다.
제상(祭床)을 차린 정전(正殿)에는 문이 3개 있는데, 출입문처럼 보이는 중앙 문은 제향 때 쓰이지 않는다.
헌관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 서쪽 문으로 나온다.
시작을 뜻하는 동쪽과 끝을 뜻하는 서쪽의 원리 동입서출(東入西出)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왕릉 제향은 왕이 승하한 지 3년 뒤 올리기 시작했다.
왕이 세상을 떠나고 왕릉이 조성되려면 5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창덕궁에 임시 건축물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했는데,
부패를 막기 위해 동빙고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침대’를 만들었다.
시신은 왕릉 석실에 자리할 때까지도 세상을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의친왕의 손자인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은 말한다.
“중국은 명, 청 시대 황릉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제향의 전통을 상실한 ‘옛 유적’일 뿐이다.
조선 왕릉은 애초의 기능을 잃은 박제된 문화유산이 아니라 현재적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살아 숨쉬게 만든 유산은 조선 왕릉뿐이다.”
● 연재에 도움말 주신 분들
김기덕 건국대 교수, 김두규 우석대 교수, 김상협 박사, 김이순 홍익대 교수, 목을수 전 융건릉관리소장,
박동석 문화재청 사무관, 은광준 조선왕릉연구소장, 이선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이영 경원대 교수,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 최종희 배재대 교수,
각 왕릉관리소장(가나다순)
- 윤완준 기자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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