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과학자가 본 <조선왕조실록>

Gijuzzang Dream 2010. 7. 29. 18:44

 

 

 

 

[과학자가 본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을 과학의 눈으로 보면 어떤 모습이 나타날까.

조선시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과학자가 본 조선왕조실록’을 5회 연재한다.

시리즈 연재는 이태식 한양대 교수가 맡는다.》

 


 

 

 

 

<1> 태종, 함경도에 신도시 강화엔 목장도시 개발

 

 

역사는 돌고 돈다.

600년 전 조선시대 초기에 벌어진 일들 중에는 요즘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실록을 보면 오히려 조선시대가 더 민주적이며 경제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 시대에도 요즘과 같은 신도시 개발이 있었다.

1417년 태종이 함길도(함경도)에 고을을 만들면서 각종 혜택과 세금 감면을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도 1438년 ‘신도시 개발’ 회의를 주재했다.

결론은 ‘함길도 부거(富居) 네 고을이 요지이므로 돌성을 새로 쌓아 군읍을 설치하고,

다른 고을 백성을 적당하게 옮기게 하며, 수령을 새로 골라 보내라’는 것이다.

세종 시대에는 토목과 도로 건설도 매우 과학적이고 인간적이었다.

1439년 세종 시절 “성을 둘러 길을 내는 것은 오래된 일인데 도성 옆에 사는 자들이 길을 막아 통행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초목이 무성하고 우로(雨露)에 젖어서 성곽이 무너지게 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한성부는 바로 성 안팎에 길을 내고 관리들이 날마다 순찰하게 해 문제가 있으면 봄가을마다 수리하게

했다. 예나 이제나 도로는 건설만큼 관리가 중요하다.

특히 시내 도로와 시외 도로의 폭을 달리해 교통의 효율성을 높였다.

도성 안에는 마차 두 대가 나란히 갈 수 있는 너비에 두 자(약 60cm)를 더하고,

성 밖에는 마차 두 대가 나란히 갈 수 있는 너비에 넉 자(약 120cm)를 더하게 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산업도시, 또는 혁신도시도 조선시대 초기에 등장했다.

1415년 태종이 강화에 새 목장을 건설하려 했다. 둘레가 6만7148척(약 20km)에 달했다.

신하들이 반대하자 태종은 “강화의 백성들이 그곳으로 이사 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득했다.

태종은 “제주는 해로가 험해 갑자기 급한 일이 있더라도 사용하지 못하는 일이 많은데

강화에 목장을 만들면 나라 말을 사용하는 데 여유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요즘 특정 지역에 새로운 산업 벨트를 육성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 2010년 04월 23, 이태식 한양대 건설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

 

 

 

 

<2>태조, 의술 뛰어난 왜인 발탁… 태종은 의학책 수입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기술을 중시하고 신분 국적 성별을 초월해 우수 인재를 등용하고 신임하는

‘조선시대의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제화, 평등화를 주장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대표적 사례다.

태조는 의술에 정통한 일본 승려 원해에게 머리를 길러 환속하게 하고 관직과 평씨 성을 줬다.

평원해는 태조 당시 명의인 양홍달과 함께 매일 대궐에 나올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1406년 평원해는 태종에게 약을 조제해 올렸다.

그런데 이 약을 먹은 태종이 구토를 하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임금에게 약을 먹이기 전에 먼저 맛보는 절차를 생략했다며 사헌부가 평원해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태종은 신하가 먼저 맛보게 안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며 그들을 용서했다.

태조는 가뭄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제생원이라는 의료기관을 설립해

빈민 및 걸인 치료와 미아 보호에 힘썼다. 신분을 막론하고 치료하도록 했다.

의원 수가 부족해 진료에 한계가 오자 지방 의사들을 불러 진료하도록 했다.

이 중 의술이 뛰어난 자는 관직에 등용하고 치료를 소홀히 한 자는 벌했다.

직접 문제점을 찾아내고 개선책을 제시하는 지도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태종은 의사 조청이 열 살이 조금 넘은 아이에게 어른과 같은 약을 지어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약재에 관한 서적(약방서)에서 어린 아이(소아)라 함은 5, 6세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직접 약재에 관한 서적들을 찾아봤다.

‘천금방’이란 서적에서 ‘2, 3세는 영아(영兒)라 하고, 10세 이하를 소아(小兒 · 어린아이)라 하고

15세 이하를 소아(少兒 · 청소년)라 한다’는 문구를 발견하고 조청을 꾸짖었다.

태종은 이후 선진 의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국 의학 서적을 모으고 배울 수 있도록 사람을 보냈다.

세계화는 조선시대에도 활발했음을 느낄 수 있다.

- 2010년 04월 30, 이태식 한양대 건설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건설문화원 공동대표)

 


 

<3>조선의 도로교통 정책

 

 

세종시대 大路 너비는 약 17m, 도시계획따라 집 헐고 길 뚫어

  

도로의 발전은 물자 수송과 사람의 이동을 편리하게 했다.

이제는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전국의 모든 지역을 반나절이면 갈 수 있다.

자동차가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기원전(BC) 312년 로마의 아피아가도를 시작으로 도로는 발전했다.

로마는 효율성을 위해 도로를 직선으로 건설했다.

이 때문에 사유지와 기존 건물을 통과하는 문제가 생겼다.

 

조선시대에도 토지보상 등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조선의 도로 정책은 태조 태종 세종 등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다.
도로 건설, 관리, 노폭까지 규정했다.

세종 대인 1426년 서울을 관할하는 관청인 한성부는 중국 주대의 관제를 기록한 책인 ‘주례’에 따라

도성 내의 큰 길을 ‘일곱 수레바퀴’로, 중간 도로는 두 수레바퀴로, 작은 길은 한 수레바퀴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경국대전에는 서울의 도로를 대로, 중로, 소로로 분류하고

노폭은 영조척(30.65cm) 단위로 소로 11척(약 3m), 중로 16척(약 5m), 대로 56척(약 17m)으로 규정했다.

이 도로들은 빈 공간에 설치된 것이 아니다.

세종은 이러한 도로 건설은 도시 재정비 성격이 있다고 보고

인구 및 토지 등을 관리하는 호조와 산림 및 공장 등을 맡았던 공조가 협의하도록 했다.

공간과 교통량 등을 감안해 도로를 확장하도록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도로 건설에 따른 토지보상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세종 당시 소방 기능을 담당하는 금화도감에서는 도로를 넓히기 위해 가까운 집들을 헐었다.

1428년에 종1품 벼슬인 찬성을 지냈던 권진은 세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세종은 ‘인가를 헐다 보면 반드시 소송하는 이가 있을 테니 시간을 두고 진행하도록’ 명했다.

문제점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다.

고생하는 백성을 배려한 사례도 있다.

정조 대인 1777년 신천교와 도로를 연결하는 공사가 있었다.

정조는 공사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해 규모를 줄이도록 직접 포고문을 내렸다.

노동력 동원과 사고의 발생을 염려해 필수 공사 이외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2010년 05월 07, 이태식 한양대 건설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 (건설문화원 공동대표)

 

 

 

 

 

<4> 조선의 임금들, ‘강병’위해 병장기 개발

 

 

방패 - 갑옷 - 병선 만들때 왕들이 ‘한수 지도’

 

조선시대의 왕은 특히 ‘강병’에 힘을 쏟았다. 무기를 만들고 수리하고 새로운 병장기를 개발했다.

왜적 및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고 나라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다.

조선 태종은 1407년 삼군의 방패를 만들도록 했다. 널판으로 둥글게 만들기도 하고 길게 만들기도 했다.

방패는 모두 안쪽으로 오그라들게 했고 가운데는 거울을 달았다.

왼손으로 자기 몸을 가리고 오른손으로는 병기를 잡을 수 있었다.

병사들은 이 방패를 들고 기마병 앞에 서서 용맹하게 싸울 수 있었다.

태종은 1414년 최해산(崔海山)에게 중국의 경번갑(鏡幡甲)이라는 갑옷을 만들어 각 지역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최해산이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자 태종은 병조에 명해 기존 갑옷의 견본을 이용해 좀 더 견고하고 치밀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는 “철을 이용해 꿰면 썩지도 않고 단단할 것이어서 수리비용도 없앨 수 있다”는 제안도 직접 했다.

왕이 무기와 금속 기술에 대해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1430년에 세종은 병조에 일러 각 포구에 있는 병선의 이음부위를 개선하게 했다.

당시 병선은 송판(松板)으로 만들고 나무못을 사용했다.

어 붙인 곳이 어그러지고 쉽게 풀어져 틈새로 물이 샜다. 이 때문에 빨리 썩어서 7, 8년을 견디지 못했다.

중국 배는 달랐다. 소나무로 만들었으나 20∼30년을 거뜬히 견뎠다. 나무못 대신 쇠못을 썼다.

세종은 이를 참고해 개선작업을 하도록 했다.

상판 위에 유약의 일종인 ‘회’를 바르고 다시 느티나무를 겹겹으로 쌌다.

느티나무를 구하기 어려우면 노나무[(노,로)] 전나무[檜] 느릅나무[楡] 가래나무[楸] 등을

바닷물에 담가 시험한 뒤 사용하도록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평소에 군장비의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재의 기술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단점을 들여다보며 기술을 개발하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않을까.

- 2010년 05월 14일
- 이태식 한양대 건설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건설문화원 공동대표)

 

 

 

 

 

<5> 지도를 지혜롭게 이용한 조선의 왕들

 

 

태종, 토지 측량 제대로 안한 신하들 파문

 

지도는 지역과 국가의 경계 구분에 사용된다.

등산과 항해 및 항공로는 물론이고 고대 유적 발굴에서 미래의 토지 이용 계획 등에도 필요하다.

작게는 지역 단위부터 크게는 국가 단위까지 현대사회의 필수 도구다.

조선시대에도 지도가 활발하게 이용됐다. 왕들은 지도를 제작하고 활용하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세종은 1434년에 기존 지도에서 틀린 점을 찾았다. 이를 바로잡고자 각 도의 수령과 감사에게 명령해

고을의 관사 배치와 산과 하천의 경로를 제대로 표기하도록 했다.

도로의 거리를 수치화했고 지역의 경계가 갖춰진 지도를 그리도록 했다.

문종은 1450년에 각 도에 있는 주, 군 간의 거리를 상세히 기록해 지도를 제작하라고 명령했다.

군사 징발 시 지역 간 거리가 모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정확한 지역 기관의 위치와 도로망을 파악해 유사시에 대비하려는

조선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도는 새 도읍을 결정할 때도 쓰였다.

태조는 1393년 정2품 관리인 권중화(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 · 의료인)로부터

제사와 궁궐 건설 장소가 표시된 새 도읍지 ‘한양’의 지도를 보고받았다.

태조는 지도를 토대로 지면의 형세를 살피고 조사와 측량을 실시했다.

성종 15년(1484)에는 영안도에서 새롭게 발견된 땅을 조사했다.

수목이 빼곡하고 나무들이 쓰러져 있어 사람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지역도 지도에 그려냈다.

그 장소에 가보지 않고도 지도만으로 형세를 가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과거 정책을 분석해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지도를 활용했다.

1470년 성종은 세조가 설치한 군사 행정구역인 진 지도를 보고 설치 목적과 선왕의 의도를 파악했다.

지역의 지리, 지형에 대한 정보 수집을 소홀히 하면 벌을 내렸다.

태종은 1402년 새로 개간한 토지를 측량해 보고하라는 명을 어긴 죄를 물어

연관된 신하들을 귀양 보내는 등 문책했다.

지도는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빠르게 변화, 발전되고 있다.

지리정보 발전이라는 물줄기에는

지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슬기롭게 사용한 선조들의 지혜가 밑바탕이 돼 흐르고 있다.
- 2010년 05월 28

- 이태식 한양대 건설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건설문화원 공동대표)

 

 

 

 

 

 

 

 

 

 

 

 

 

 

 

 ‘여진족 골머리’ 세종, 권총 개발을 명하다

 

[북&링크] <화염조선> 박재광 지음/ 글항아리

임진왜란 초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육상전투에서 패배하던 조선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水軍)이었다.

수군 활약의 배경에는 거북선과 판옥선(板屋船 · 명종 때 만든 조선 수군의 전투용 선박)에 장착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등 고려 말부터 개량해온 대형 화포가 있었다.

이 책은 화약무기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무기와 그 개발 배경을 살핀다.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이자 전통 무기 전문가인 저자는

특히 전통 무기가 가장 많이 개발된 조선시대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 초기의 화기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휴대용 권총의 초기 형태인 세총통(細銃筒)이다.

세종이 평안도와 함경도 산악지대를 휘젓던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개발을 지시한 지상용 화약병기의

하나가 ‘길이 14cm, 구경 0.9cm’로 조선시대 화기 중 가장 작고 가벼운 세총통이었다.

적진에 침투하는 정찰병의 휴대용으로 고안된 세총통은

실전에서는 기병들이 말을 타고 쏘는 무기로 주로 사용됐다고 한다.

조선의 독창적인 화기는 선조 때 화포장(火砲匠)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였다.

비격진천뢰는 폭탄의 점화장치(신관) 역할을 하는 죽통이라는 장치를 포탄 안에 넣어

목표 지점에 떨어뜨리는 무기. 천둥 번개 같은 굉음, 섬광과 함께 폭발해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는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9월 일본군에 함락당한 경주성을 탈환할 때 큰 효과를 냈다.

저자는 고려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부터 15세기 중반 개발된 미사일의 초기 형태인 신기전(神機箭),

1593년 평양성 탈환 전투 때 사용된 스페인에서 온 고성능 신식화포 불랑기(佛狼機),

고종 때 대원군 주도로 제작된 근대적 화포인 소포와 중포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통 무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흥미로운 주제다.

‘무기와 폭약’(호비스트)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현대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전쟁에서 사용된 무기와 화약을 망라한다.

일본 전쟁 만화의 대표적인 작가인 저자는

화포와 철갑탄, 수류탄, 박격포, 지뢰 등 신무기의 발명과 진화를 글로써 상세하게 그린다.

‘무기의 역사’(가람기획)는 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무기와 갑옷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19세기 영국 고고학자이자 무기와 관련된 저술을 남긴 저자는

공격하는 무기와 방어하는 갑옷이 나란히 발달해온 과정과

그것들이 백년전쟁과 십자군전쟁 등 구체적인 전투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 설명한다.

‘무기체계@현대 · 미래전’(이십일세기군사연구소)은 현대의 무기체계를 분석한 책이다.

국방대 국방관리대학원 교수인 저자는 전차와 화포, 항공기, 함정부터 유도무기와 대량살상무기,

최첨단의 무인체계 무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기 이야기를 담았다.

-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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