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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조선왕릉의 10가지 비밀

Gijuzzang Dream 2010. 7. 29. 18:45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의 10가지 비밀

 

조선왕릉엔 ‘다빈치코드’ 뺨치는 ‘컬처코드’가…

  


 

《조선왕릉은 중국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띠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조선왕릉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10가지를 들여다본다.》

 


 

 

 


1. 조선왕릉은 왜 서울 경기에 몰려 있을까?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100리(40km) 떨어진 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다.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2. 어느 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힌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태종 능 위치는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 조선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으로 왕이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에,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3. 조선왕릉은 왜 거의 도굴이 안 됐을까?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빼고 도굴된 적이 없다.

세종의 영릉(경기 여주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4. 왕과 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 못한 까닭은?

왕릉은 당대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됐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명종을 수렴청정한 ‘여걸’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 정릉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결국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외로이 묻혔다. 태릉이다.

 


5. 봉분 앞 혼유석의 정체는?

봉분 앞 돌상인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

북을 닮은 고석(鼓石) 4개가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

이 큰 돌은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숨어 있다.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인 셈.

실제로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은 문고리를 물었다.

 

 


6. 최장신 문·무석인은 어디에 있을까?

문석인(문관)과 무석인(무관)은 대체로 사람 키를 훌쩍 넘어 권위를 뽐낸다.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다. 3m 이상이다.

중종 시대(16세기)는 석물의 장엄미가 최고조였던 때다.

철종은 19세기의 왕인데, 전문가들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몄다고 말한다.

 



7. 정자각의 계단은 왜 측면에 있을까?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8. 봉분 뒤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

왕릉에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다. 봉분 뒤 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뜻했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했다.

지대가 낮은 홍살문(왕릉 입구)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태조의 건원릉(경기 구리시) 봉분에는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한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9.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황제릉?  

고종은 1897년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대한제국)라고 선포했다.

경기 남양주시 홍릉과 유릉은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홍 · 유릉은 정자각(평면이 ‘丁’자 모양) 대신 중국의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의 석물도 코끼리, 낙타 같은 낯선 동물을 배치했다.

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인 반면 홍 · 유릉의 석물은 황제의 위용을 드러낸다.

 


10. 서삼릉에는 왕족의 공동묘지가 있다?

세 왕릉이 있는 서삼릉(고양시)에는 왕자, 공주, 후궁의 작은 묘 46기가 모여 있어 공동묘지를 연상시킨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도시화 과정에서 자리를 잃은 묘와 원(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들이

서삼릉으로 쫓겨 왔다. ‘공동묘지’ 옆에는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 54기도 있다.

원래 태실은 전국의 명소에 묻었는데 일제가 서삼릉으로 몰아넣었다.
- 2009년 06월 윤완준 동아일보 기자

 

 

 

 

*** 왕릉에 소나무를 왜 많이 심는 것일까.

“왕조실록에서도 자주 언급이 나오는 소나무는 왕릉을 대표하는 수종으로

왕의 장수와 권위의 상징”이며 “푸른 소나무의 영속성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왕릉의 숲 조성은 지금으로 말하면 계획적인 식재작업인 셈인데

소나무 외에도 떡갈나무와 오리나무를 집단적으로 심었다고 한다.

떡갈나무는 봉분을 보호하고 산불을 막는 역할을 했다.

지대가 낮은 홍살문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도굴 막은 조선 왕릉 건축 기술

두꺼운 돌에 시멘트벽까지 둘러싸

 

 

 

 

조선시대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한 왕조의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한 상태로 보존됐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왕릉은 완성 직후부터 도굴과의 전쟁을 치른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의 한 고고학 전문 작가는 “지금까지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 없다”며

중국의 도굴 역사를 담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고려왕릉 역시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부분 도굴 당했다.

고려청자 등 시신과 함께 넣은 부장품을 노리는 도굴꾼 앞에 대부분의 왕릉이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릉은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 외에는 도굴당하지 않았다.

 

조선왕릉이 도굴꾼의 만행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왕릉 40기 전체의 실측 도면을 작성했던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건축학부 교수는

“조선왕릉의 건축기술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

조선왕릉에서 시신을 모신 석실은 지하 3m 깊이에 위치한다.

당시 시신을 지하 1.5m에 묻어야 했던 국법을 도굴 방지를 위해 역이용한 것이다.

석실의 벽과 천장은 두께가 76cm나 되는 화강암을 통째로 사용했다.

조선시대 이전의 왕릉이 잡석을 쌓아올리거나 판 모양의 석재를 겹쳐 쌓은 것이 대부분이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단단한 구조를 갖췄다.

석재의 끝은 비스듬히 파서 이음매 부위를 서로 끼워 맞췄다.

목조 건축에서 못을 쓰지 않고 목재를 서로 끼워 넣는 방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거기다가 ‘工’(공)자 형태의 철제 고리로 두 석재를 고정시켜 석실 전체를 하나로 엮었다.

입구에는 61cm 두께의 돌을 두 겹으로 세워 외부의 접근을 막았다.

석실 주변에는 시멘트와 비슷한 삼물을 1.2m 두께로 둘러쌌다.

삼물은 석회에 가는 모래와 황토를 섞은 뒤 느릅나무 삶은 물에 이겨 만든다.

삼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하게 굳을 뿐 아니라

느릅나무 껍질에 있던 코르크층이 물과 공기를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7대조 세조의 광릉 때부터 일정 기간 동안은 삼물을 이용한 회곽으로 석실을 대신한 적도 있다.

석실을 만들 때보다 필요한 인력은 절반에 불과했지만 단단하기는 석실 못지 않다.

지난해 구희릉의 회곽을 발굴할 때 굴착기가 필요할 정도였다.

삼물 바깥에는 숯가루를 15cm 두께로 감싸 나무뿌리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1.2m 두께의 잡석으로 다지고 봉분을 쌓아올려 왕릉을 완성했다.

중국이나 고려시대와 달리 왕릉 안에 들어가는 부장품을 모조품으로 넣은 것도

도굴 시도를 막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왕릉의 부장품은 문헌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에

모조품이 든 조선왕릉은 도굴꾼의 표적에서 제외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교수는 “다른 유교국가에서는 왕릉을 만들 때 죽은 뒤에도 통치한다는 의미를 부여해

지하궁전처럼 거대한 인공 구조물을 만들었지만

조선왕릉은 속세의 고단함을 잊고 편안히 쉬는 공간으로 꾸몄다”며

“조선의 왕들이 값비싼 부장품조차 겉치레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2009년 07월 06, 이재웅 동아사이언스 기자 ilju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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