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2010년 봄 정기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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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망국 100주년 추념회화전
심전 ‘성재수간’… 민영익 난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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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올해 봄 차린 ‘조선망국100주년추념회화’전에서 눈여겨볼 화가가 바로 심전이다.
1층에 그가 그린 봄, 여름, 겨울 산수화와 가을 산수 풍경인 <성재수간>이 따로 떨어져 전시되고 있다.
봄, 여름, 겨울 산수풍경들은 모두 경술년 국치 때인 1910년 그렸다. 쌀알 모양의 미점을 발랄한 기세로 가득 찍어 여름 산 숲의 청신한 신록을 드러낸 <계산연우>와 화사한 봄꽃의 기운을 잔뜩 부려놓은 <무궁춘색> 등에서 나라가 망했다는 비분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다음해 그린 대작 <성재수간>에서 분위기는 확 바뀐다.
그 맞은편 1918년 작 인물화 <한산충무> 또한 창을 거꾸로 들고 있는 충무공의 모습을 무속도풍으로 그렸다. 양화와 전통 화법이 뒤섞인 충무공의 ‘땅땅한’ 자태가 기괴한 느낌을 전하지만, 볼수록 비장감이 우러난다. 국권 상실 뒤 일제의 마수를 깨달은 심전의 고뇌가 필선과 채색에서 느껴진다. 1950년대 서구풍의 도식화한 충무공 표준 영정이 나오기 전 사람들이 인식했던 충무공의 원형적 이미지 또한 보여주는 그림이다.
일본의 국권 탈취로 1910년 조선왕조가 멸망한 지 100주년이 된 해를 맞아
간송미술관(서울 성북동)에서 ‘조선망국 100주년 추념회화전’을 오는 16일부터 30일까지 연다.
‘재미없고, 의미는 구구절절인’ 구한말 작품들을 부러 골라서 조명했다.
나라가 망하고, 서구의 근대 문물이 밀려오면서 전통 그림으로 밥벌이가 되지 않고
이미지와 감각을 억지춘향 식으로 익혀야 했던 당시 화단의 상황,
그 시대를 산 화인들의 의식 속을 작품으로 대리 체험할 수 있다.
한 시대의 문화역량을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그림을 통해
망국의 시대상황이 그림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망국 시점의 문화적 역량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망국의 시점이기 때문에 특별한 주도 이념 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탕으로 한 그림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며 “문화가 노쇠하면서 그림에서 생동감이 떨어지고
방만 · 해이 · 나태 · 무기력한 그림, 도식적인 그림들도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전시는 1910년에 활동했던 화가 중 당시 환갑이었던 추범 서병건, 연향 이창현에서부터
20대였던 춘곡 고희동까지를 포함했으며 이들의 작품 총 100여점을 전시한다.
맥 빠진 중국화풍에 젖은 작품들이 많지만,
간간이 전통 문인 정신이나 근대적 개성을 고집하는 수작들도 섞여 있다.
1층 전시실에서 심전과 더불어 주목되는 게 사군자다.
굳세고 단정한 필력으로 난과 댓잎을 그어낸 선비 민영익의 난죽과
혈기방장한 독립투사 김진우의 사방으로 뻗치는 듯한 난죽 그림을 대비해 보는 재미가 있다.
당시 활동 화가들은
전통을 지키려는 부류, 중국이나 일본 등의 화풍을 따르거나 항일정신을 표현한 부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관하지 않고 은둔해 자연을 그린 부류 등 다양한 모습을 띠었다.
조선왕조 최후의 화원이었던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은
오원 장승업이 추사화파의 청조문인화풍을 중국취향장식화풍으로 바꿔놓은 것을 전통기법으로 여기고
이를 후진들에게 전수하려 했다.
이들의 제자로 석촌 윤용구, 영운 김용진 등은 추사 문인화풍을 계승한 작품을 그렸으며,
일주 김진우는 날카로운 묵죽으로 항일의지를 표출했다.
은둔해서 그림만 그린 지운영, 일본풍 수묵산수화를 그린 성당 김돈희 등도 있다.
2층은 당시 작가들의 처세관을 드러내는 감각적 소품들이 많다.
분칠한 여인처럼 난꽃을 물들인 친일파 귀족 조동윤의 채색란과
근대 양화와 전통화 사이에서 어정쩡한 구도를 풀지 못하는 고희동의 인물풍경화 등이
시대상을 짐작케 한다.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의 제자로 일본에 유학했던 고희동은 전공한 서양화로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한편, 김규진의 학 그림과 안중식의 모란, 조석진의 물고기 그림이 맛깔스럽게 배어든 쥘부채 그림은
기개는 빠졌지만 발랄한 공간 감각이 깃든 수작들이다.
“눈 대신 머리로 보는 전시를 느껴보라”고 백인산 연구위원은 귀띔한다.
- ⓒ 경향신문 & 경향닷컴 ⓒ한겨레, 노형석 기자, 도판 간송미술관 제공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간송 전형필>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에서는
봄과 가을, 일 년에 두 차례 전시가 열린다.
관람객들은 적어도 한두 시간은 미술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정선, 김홍도, 신윤복, 김정희 등의 그림을 비롯해
우리 예술의 명품과 진품을 보기 위해
매년 1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은, 질적인 면에서 국내 국․공․사립을 불문하고 명실 공히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국보 12건, 보물 10건 등 22건의 국가 지정문화재와
뜰에 전시된 석탑, 부도, 불상 등 서울시 지정문화재 4건 외에
전체 규모를 알 수 없는 이곳은 ‘민족 문화유산의 보고’로 불린다.
간송미술관 소장품만으로 한국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책은 간송 전형필의 선각자적이고 감동적인 삶에 대한 평전이다.
서울 종로 4가의 99칸 대가의 자손이었던 전형필은
‘식민지 시대 조선 청년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
오세창을 만나면서 삶에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근역서화징’이라는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들의 총서를 집필하고 있던 스승의 모습에
전형필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온 재산을 털어서라도 일제가 빼앗으려는 문화유산을 조선 땅에서 지켜내고자 결심한다.
이후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들을 수집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꼭 찾아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값을 따지지 않고 사들였다.
국보 제68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사들인 때는 1935년으로 간송의 나이 30세 때였다.
1938년에는 고려청자 최고 컬렉터로 일본 주재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의 소장품 전체를 인수했다.
1943년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시 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1만원을 지불하고 입수했다.
한글 탄압을 일삼던 일제가 알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비밀리에 보관하다가
1945년 광복 후에야 이를 공개했다.
간송은 미술관을 세운 북단장에서 위창을 비롯한 고희동, 월탄 박종화,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등
당대 서화가와 문사들과 교류하며, 이들의 후원자 역할도 했다.
- 이충렬 지음 / 김영사/ 1만 8,000원
기와집 10채 값으로 고려청자 하나를 산 간송의 애국심
간송 전형필(1906~1962) 전기가 처음 나왔다는 소식에
바로 떠오른 생각은 '그동안 간송 전기가 없었다는 말인가'였다.
국내 최초 사립 미술관을 연 최고 컬렉터에 대한 전기가 아직 없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었다.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간송 전기 <간송 전형필> (김영사 펴냄)의 저자는 재미 소설가 이충렬씨다.
르포라이터로도 활동했던 이씨 역시 이름난 컬렉터로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 > 을 내기도 했다.
대수장가 간송 전형필 선생의 생전 모습
예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간송은 '큰 산'이다.
간송을 지나야 비로소 우리 예술에 대해 눈뜰 수 있다.
그런데 간송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없었다.
이씨는 우리 시대 대수장가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전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로 꼽은 것은 수집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고려청자 하나에 기와집 10채 값을 지불하는지 수집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씨는 "부자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가치 있는 것에 지불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진짜 부자의 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꼽은 것은 간송(澗松)미술관소장품의 가치를 이해할 만한
미술사적 · 문화사적 배경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대사까지 알아야 비로소 간송이 수집한 작품에 대한 입체적인 설명이 가능하단다.
이씨는 "간송이 왜 그토록 겸재 정선의 그림을 모았는지 이해하려면
숙종~영조 시대에 우리 것을 찾으려고 했던 흐름까지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하나는 간송이 수집에 기울였던 열정만큼 간송에게 열정을 쏟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1996년 간송미술관을 처음 접한 이후 충격을 받은 이씨는
모든 도록과 연구 논문을 구해 10년 동안 연구하고
2006년 간송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계기로 집필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주로 이역만리 미국 애리조나 소도시에서 진행되었다.
애리조나와 간송미술관을 수차례 오가며 간송의 삶을 복원했다.
관련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약간의 허구를 곁들여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그의 열정을 인정한 간송가의 유족들은 도판 협조와 사진 제공을 해주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 역시 "이야기로 풀어서 간송에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하나는 나라 잃은 시대에 언제 해방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수만금을 주고 우리 문화재를 모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것이 독립에 대한 확신과 우리 문화를 지킨다는 사명감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모은 것은 독립에 대한 희망이었다는 뜻이다.
간송 유족이 도판과 사진 협조
이씨는 전기에 역동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저자는 간송의 삶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 가지라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미술품 수집을 재테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송은 미술품 수집 과정에서 부를 버리고 문화를 얻었다.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서 부른 값의 열 배를 주었다.
그리고 해방될 때까지 이것을 비밀로 해서 지켜냈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대수장가 간송 전형필 선생이 어렵게 구해 피난 갈 때도 직접 들고 다녔던 <훈민정음> 해례본.
그의 또 다른 업적은 후대의 문화 연구에 기여한 부분이다.
가치 있는 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미술사를 재구성하기 쉽게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것이다.
간송의 수집품 덕에 조선 회화사와 고려청자 변천사가 말끔히 정리되었다.
간송은 또한 자신의 소장품을 통해 연구자들이 활발히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심지어 <훈민정음> 영인본을 만들기 위해 원본을 해체하는 것까지 허락했다.
간송이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현재 최고의 수집가인 삼성가와 비교해보면 확연해진다.
간송은 부를 버리고 문화를 얻었지만,
삼성가는 비자금 수사에서 나타났듯이 미술품이 또 하나의 '축재 도구'로 쓰였다.
후손들의 태도도 다르다.
간송가의 후손들은 간송의 정신이 이어지는 데 주목했지만,
삼성가는 리움미술관이 호암미술관을 서서히 흡수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과거의 유지를 받드는 것보다 지금의 영화를 과시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삼성가의 수집에 대해 이씨는 "삼성가는 근현대 회화 수집에서 독보적이다.
수집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안목이나 철학에서 간송가를 더 높이 볼 부분은 있지만
삼성가가 기여한 부분도 인정할 부분이 있다"라고 평가했다.
간송 전기는 암울한 시대 부자의 자세와 관련해서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마침 간송미술관에서 '조선 망국 100주년 추념 회화전'(5월16~30일)을 연다.
간송의 삶과, 그가 살았던 암울했던 시대와, 그 시대가 빚어낸 우울한 예술을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보인다.
- 고재열 기자 / scoop@sisain.co.kr
- 2010.05.26 ⓒ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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