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려, 뱃길로 세금을 걷다' 특별전

Gijuzzang Dream 2010. 1. 26. 01:50

 

 

 

 

 

 

 

 



 

 

‘高麗! 뱃길로 세금을 걷다’ 특별전은

우리 역사에서 국가의 세금 수취와 운송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고려시대 조운로(漕運路) 및 13 조창의 운영 모습을

고려 침몰선(난파선) 발굴 성과를 통해 그려보고자 기획했다.

 

특별전은 여러 조창지(漕倉地)에서 출토된 유물 및 조창 관련 문서를 비롯한 조운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이 밖에도 체험 공간으로서 고려시대 13곳 조창지 퍼즐 맞추기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역사적 사실을 쉽게 경험하도록 했다.  

 

고려시대 13개 조창은 강원도 1곳(원주 흥원창), 충청도 3곳(충주 덕흥창, 아산 하양창, 서산 영풍창),

전라도 6곳(부안 안흥창, 군산 진성창, 영광 부용창, 나주 해릉창, 영암 장흥창, 순천 해룡창),

경상도 2곳(마산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 있었고 뒤에 황해도의 안란창을 두었다.

한편, 2009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마도 1호선은 조운선으로 추정되며

발견된 목(죽)간의 내용을 통해  난파된 시점은 1208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배에는 여러 종류의 곡물과 최상급에 속하는 표주박모양 주전자를 포함하여

상당량의 청자와 대나무반, 석탄, 젓갈류, 건어물 등이 실려 있었다.

 

받는 사람으로는 대장군 김순영을 비롯한 중앙관료의 이름 등이 보이고

보낸 곳은 해남, 나주, 장흥 등 전라도 지역이며 공납의 종류와 정확한 수량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번 특별전은 고려시대 국가운영의 동맥 역할을 했던 고려시대 조운의 알려지지 않은 문화와 유물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사진 : 이철한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홍보과
- 2009-12-04, 문화재청

 

 

 

 

 

 

 
 
 
 
태안 해저유물과 고려시대 조운(漕運)

주      최 : 서울대학교박물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장소 : 서울대학교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
전시기간 : 2010년 3월 18일 - 5월 20일 
               월~토요일 10시-17시(일요일 및 공휴일 휴관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는 제49회 기획특별전으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공동주최로 “태안 해저유물과 고려시대 조운(漕運)” 특별전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고려시대 국가재정의 중추였던 조운제도의 이모저모와
그 조운의 운송항로였던 태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고려청자들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이 전시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2009년 개최한 “고려, 뱃길로 세금을 걷다” 특별전의 내용에, 태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다수의 고려청자를 추가하여 마련되었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통해 바다와 강을 통한 뱃길이
국가재정의 중추 역할을 했고, 그 운영을 위해 조창(漕倉)제도를 만들고
선박을 운용하였음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박을 이용한 세금과 물품의 운반 도중에 충청남도 태안 앞바다가
옛날부터 험한 항로로서 많은 해난사고가 일어났고,
현재에는 그 사고의 결과가 오히려 수중고고학적 발굴조사의 대상이 되어
많은 역사적, 문화적 발견의 장소가 되고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목포에 위치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근래 우리나라 수중고고학 조사의 중심지로서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한 많은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수중고고학의 여러 성과와
고려청자의 아름다움과 특징을 발견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주요 전시 작품


<청자주전자 · 승반 받침대(靑磁注子 · 承盤·臺)>

13세기, 태안 마도 출토. 높이 18.2cm.

강진에서 만들어져 개경(개성)으로 운송되던 중 태안에서 침몰된 배에서 인양된 것이다. 고려시대 주전자가 둥근 대접모양의 승반 위에 올려서 사용되던 원형을 잘 보여준다.

표주박형 몸체에는 양면에 모란무늬를 상감하였고, 접시형의 승반에는 꽃무늬가 음각되었으며, 받침대는 투각으로 장식되었다.

       
 

<청자사자모양 향로(靑磁獅子形香爐>

12세기, 태안 대섬 출토. 높이 16.9cm.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인양된 청자향로이다.

향로의 뚜껑부분이 사자가 앉아있는 모양으로 처리되었다.

12-13세기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색조와 세련된 조형미는 보이지 않고 번조과정에서 몸체가 균열된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대신 다른 청자에서는 보기 어려운 해학미가 두드러진다. 흔히 고려청자는 극히 세련된 귀족적 취향을 대변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사자형 향로에는 흘겨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 치켜뜬 코, 좌우 비대칭인 도식적인 표현 등에서 조선시대의 서민적 미감과 통하는 면이 있다.

       
 

<도기 항아리(陶器缸)>

1208년, 태안 마도 출토, 높이 39.5cm.

충남 태안 마도에서 인양된 도기이다.

항아리 속에는 게젓갈이 담겨 있었는데,

전라도에서 개경으로 보내는 별공품으로 추정된다.

또 이 항아리는 당시의 도량형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1항(缸)은 1석(石)과 같은 크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수산물류를 담는데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조운선 모형(朝鮮時代 漕運船 模型)>

길이 1.2m, 실물 길이 16.27m.

조선시대 조운선 복원 모형이다.

고려시대 조운선도 조선시대 것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운선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연안을 항해하기 위해

바닥이 평평한 구조이다.

조운선은 11-12월에 거둔 세곡을 조창에 보관하였다가

바다에 풍파가 심하지 않은 이듬해 2-5월 사이에 운항하였다.

       
 

<영광 법성창의 조운 고문서(靈光 法聖倉 漕運 古文書)>

조선후기, 28×19.5cm. 김범진 소장

조선시대 조운선 복원 모형이다.

고려시대 조운선도 조선시대 것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운선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연안을 항해하기 위해

바닥이 평평한 구조이다.

조운선은 11-12월에 거둔 세곡을 조창에 보관하였다가

바다에 풍파가 심하지 않은 이듬해 2-5월 사이에 운항하였다.

 

 

 

 

 

 

'수중문화유산'이란

 

수중문화유산이란 바다나 강·호수·늪지 등 물에 잠겨져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말한다.

수중문화유산에는 지진으로 물에 잠겨버린 인류의 정착지나 교역 · 어로활동 · 해전 등 해상활동에서

침몰된 선박과 그 선적물 등이 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3백만 척의 난파선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지진으로 잠긴 지중해 알렉산드리아 등대(14세기), 자마이카 포트 로얄 고대 도시(17세기) 등

수많은 인류 정착지도 물 속에 잠겨 있다.

 

수중문화유산은 육상의 문화유산보다 보존이 잘 되어

한시대의 문화현상 단면을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중문화재와 수중고고학에 대한 관심은

1976년 신안해저문화재 발굴조사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신안해저발굴 이후, 10여 건에 이르는 수중문화재 발굴조사는

우리 해양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국 수중문화재 발굴역사
신안 해저발굴
신안 해저발굴 기간 : 1976~1984년
위치 :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
유물 : 200톤급 중국 무역선 1척, 동전 28톤, 도자기 등 22.000여 점
시대 : 14세기 초
배의 규모 : 길이 34m, 폭 11m, 선체 깊이 3.7m
완도 해저발굴
완도 해저발굴 기간 : 1983~1984년
위치 :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바다
유물 : 10톤급 고려시대 배 1척, 도자기 30,000여 점, 선원생활용품 등
시대 : 11세기
배의 규모 : 길이 9m, 폭 3.5m, 선체 깊이 1.7m
진도 통나무배 발굴
진도 통나무배 발굴 기간 :1991~1992년
위치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북면 수로 갯벌
유물 :초대형 목재를 U자로 파낸 통나무배 1척
시대 :13~14세기
배의 규모 : 길이 19m, 폭 2.3m, 선체 깊이 0.7m
목포 달리도배 발굴
목포 달리도배 발굴 기간 : 1995년
위치 : 전남 목포시 충무동 달리도 앞바다
유물 : 고려시대 배 1척
시대 : 13 ~ 14세기경
배의 규모 : 길이 10.5m, 폭 2.7m, 선체 깊이 0.8m
무안 도리포 고려청자 발굴
무안 도리포 고려청자 발굴 기간 : 1995~1996년
위치 : 전남 무안군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 앞바다
유물 : 고려청자 638점
시대 : 14세기 후반
비안도 고려청자 발굴
비안도 고려청자 발굴 기간 :2002~2003년
위치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앞바다
유물 :고려청자 3,000여 점
시대 :12~13세기
제주 신창리 해저발굴
제주 신창리 해저발굴 기간 : 1980, 1983, 1996년
위치 : 북제주군 현경면 신창리 앞바다
유물 : 금제장신구류, 중국 도자기
시대 : 12~13세기
태안반도 해저 발굴
신안 해저발굴 기간 : 1981~1987년
위치 : 충남 태안반도 해역
유물 : 고려청자 40여 점, 조선백자 등
시대 : 13~17세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기간 : 2003~2004년
위치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십이동파도 앞바다
유물 : 고려시대 선박 1척, 고려청자 9,000여 점 등
시대 : 11세기
2006년 군산 야미도 발굴
2006년 군산 야미도 발굴 기간 : 2006.4 ~ 2006.5
위치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야미도 동방해역
유물 : 고려청자 780여 점
시대 : 12세기 경
2006년 안산 대부도 한선 발굴
2006년 안산 대부도 한선 발굴 기간 : 2006. 12월
위치 : 안산시 대부도 서북쪽 해안
유물 : 고려시대 선박 1척, 고려청자 37여 점 등
시대 : 12세기 후반 ~ 13세기 초
 
 
세계 수중문화재 발굴역사
년도 내용
1446 이탈리아 네미호수에서 로마시대 배 발굴
1867 노르웨이에서 3척의 바이킹선 발굴
1928 이탈리아 네미호수에서 1세기 로마시대 바지선 발굴
1954 이집트 쿠프 대피라미드 옆에서 4,600년 전의 고선박 발굴
1958 덴마크 로스킬데 해협에서 11세기 바이킹선 5척 발굴
1961

스웨덴 스톡홀름항에서 17세기 ‘바사’전함 발굴

1966

자마이카 근해에서 ‘포트로얄’ 수중유적지 발굴

1973 중국 천주항에서 송나라(13세기) 때 배 발굴
1974

일본에서 전함 ‘가이요마루’선(1868년) 발굴

1976 한국 신안 앞바다에서 중국 무역선(14세기) 발굴
1982

영국 솔렌트해에서 ‘메리로즈’전함(1545년) 발굴

1982 터어키 보드룸 해저에서 청동기시대 난파선 발굴
1984 한국 완도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배(11세기) 발굴
1992

필리핀에서 스페인 상선 ‘샌디에고’(17세기) 발굴

1994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14세기 등대 발굴
2003 한국 군산 비안도에서 고려청자 3천여 점 발굴
2004

한국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고려시대 배 · 도자기 발굴

 

 

- 고려시대 완도선

 

완도해저 발굴조사

완도 해저발굴조사 사진

1983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 바다에서 키조개 채취작업을 하던 잠수사들이 몇 점의 옛 그릇을 건져 올리게 되었다.

이 발견은 수중유물에 대한 관심을 한껏 높여준 신안해저 발굴이 끝나 갈 무렵이었으며, 또 한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문화재청(당시문화재관리국)은「완도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을 조직하고 수중발굴조사( 1983 - 1984년)를 실시하게 되었다. 해저에는 수 많은 유물을 가득 실은 옛 배 한 척이 침몰되어 있었다.

침몰된 배는 심하게 부식된 상태였지만, 특히 3만여 점의 도자기는 보존상태는 양호했으며,

이 외에 솥, 청동그릇, 숟가락 등의 선원생활품과 도구들도 남아 있었다.

완도 앞바다에 침몰한 이 배는 10톤 규모의 외돛배이며, 11세기 중·후반경 해남 진산리에서 그릇들을 싣고 항해하다가 완도 어두리 앞바다에 침몰한 고려시대 상선(商船)이었던 것이다.

 

완도해저 발굴의 성과는 11세기 후반경 고려 도자기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가 부진했던 '우리배(韓船)'의 역사와 그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자료를 제공한 점을 들 수 있다.

완도 해저발굴조사 사진

 
 
완도선의 규모

완도선 상상 복원도

길이 : 약 9 m
너비 : 약 3.5m
깊이 : 약 1.7m
적재중량 : 약 10 ton

 
 
완도선의 구조

완도해저 침몰선은 고려시대 11세기경 우리나라 배로 추정된다. 배 이름은 발견된 곳의 지명에 따라 '완도선(莞島船)'이라 부른다. 완도선은 천년이라는 시간동안 바다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뱃조각들은 심하게 부식되었으며, 이물(船首)과 고물(船尾)은 썩거나 센 물살에 의해 많은 부분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배밑(底板)과 삼(外板) 등 배의 구조는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 완도선을 만든 나무는 주로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이며, 일부 남해안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도 포함되어 있어서 남해안 지방의 배임을 알게 해 준다.

완도선은 지금까지 발견된 전통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구조선(構造船)으로서 '한선(韓船)"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으며, 우리 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이정표와 같은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완도선의 구조

 
 
완도선의 특징

완도선의 복원 모형


완도선은 후대 전통 한선의 구조와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완도선은 비록 삼과 배밑의 경계부에 구조된
'ㄴ'자형 부재처럼 통나무배의 전통이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구조선(構造船)으로서, 우리 배의 뿌리를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완도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배의 중앙단면이 마치 나무상자 처럼 평평한 평저(平底)단면구조를 지닌다. 이는 우리 배, 한선의 독특한 전통인 평저형선이다.
삼(外板)은 5단으로 구조되었으며, 삼은 '턱붙이 겹이음(rabbetted clinker joint) 방식으로 이음하도록 구조되어 있다.
배의 횡강도를 얻기 위해 게롱(加龍木)으로 좌·우 뱃전을 붙들고 있다.

이물과 고물은 배밑과 삼 등으로 미뤄 볼 때, 곧고 넓은 모습을 취했을 것이다.
배의 모든 구조는 나무못(피쇠)으로 고정하였다. 배밑은 긴 나무못인 가쇠로 연결되었다.
배 목재를 보호하기 위한 전통방법인 '불'과 '연기'로 그을리는 연훈법이 있는데, 이미 완도선 때에도 이 방법이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배밑 중앙의 시설로 보아 이 배는 외돛으로 항해했다.

 
 
완도선의 유물

도자기

완도선에는 30,701점이나 되는 유물이 실려 있었다.

고려청자가 30,645점, 잡유 26점, 토제품 2점, 철제품 18점, 목제품 9점, 석제품 1점 등이다.

 

완도해저 고려청자는 11세기 후반경에 만들어진 녹청자계통의 도자기이다.

도자기의 특징과 발견된 지점으로 보아 실생활용 그릇으로 추정된다.

도자기 종류는 대접과 접시, 완, 잔 등이 대부분이며,

청자광구병(廣口甁) 103점과 청자매병 11점, 그리고 청자장구 2점, 유병(油甁), 호(壺), 발(鉢) 등이 있다. 도자기는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진산리 가마터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녹청자 생산지로서, 1983년 가마터 104기가 조사되었다.

  

해남 진산리는 내륙과 바다, 영산강의 자유로운 해운교통 조건을 갖추고 있어

도자기 수송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다.

완도선은 이곳에서 도자기를 가득 싣고 진도와 해남 땅끝, 완도 본섬을 지나

남해안으로 항해하다 약산도 앞 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완도선 도자기 유물
 

그 밖의 유물

완도선에서 발굴된 유물은 대부분 도자기이지만

그밖에 도구, 선원생활품 등의 유물도 30여 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을 재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속제품은 18점으로 솥, 청동그릇, 숟가락, 국자 등이며,

바닷물에 의해 부식이 매우 심한 상태이다.

목제품은 9점인데 함지와 어로도구(조새), 나무망치 등이 있고,

토제품으로는 시루 등 2점이 있다.

또한 칼이나 도구를 가는데 쓰여진 숫돌도 1점이 포함되어 있다.

완도선 기타 유물
 
 

 

 

 

- 고려시대 항해와 선상생활

 

 
 고려시대 선상생활

완도 해저발굴조사 사진

고려시대 배는 11~12세기경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 14세기경 달리도선, 안좌도선 등 4척이 발굴되었다.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은 도자기운반선으로 선생생활용품으로 보이는 유물이 함께 실려 있었다. 달리도선의 경우는 삿갓 1점과 약 10cm두께의 밧줄만 발견되었다.

몇 일간의 항해동안 선원들은 배위에서 숙식하였다.
사기그릇 단지 등에 쌀이나 누룩, 된장, 간장 등을 실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조선시대 조운선에 지급되는 품목 중에는 술빚을 쌀과 장 담글 콩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선상생활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이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에서 발견되었다. 완도선에는 청동그릇류, 청동숟가락, 청동국자, 철제솥, 시루, 목제함지박 등, 십이동파도선에는 청동숟가락, 철제솥, 시루, 작은 단지, 항아리 등이 수만점의 도자기와 함께 실려 있었다.

이 유물들은 선원들이 직접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철제 삼족솥과 토제시루는 거의 같은 유형이다. 또한 십이동파도선의 철제솥 아래에는 넓고 평평한 돌판이 발견되어 눈길을 끌었다.

돌판은 솥에 불을 짚을때 목선이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돌판 윗부분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다.

 

이들 도자기운반선은 주로 연안 항로를 따라 소비지까지 항해하였다.

항해속도는 물때와 바람에 의해 좌우되지만 순풍과 조류를 잘 타면

일정은 절반이상 단축시킬 수 있었다.

『宋史』고려조에 명주(현재 영파)를 출발한 배가 2일 만에 흑산도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2일 만에 개성의 외항인 예성강 입구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최상의 조건일 때 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며칠 씩 더 걸렸을 것이다.

 

선원들은 나침반, 해도에 의존하기보다는 지형지물에 밝았으며,

섬과 연안의 높은 산 등을 가눔하며 배의 방향을 정하였다.

이러한 항해는 자연스럽게 육지나 섬을 따라가는 연안항해가 되었다.

 

고려시대 유물

고려시대 유물

 

 

 

 

 

 

바닷길로 운송하는 도자기

군산시 십이도파도헤저 도자기

우리나라 바다에서는 수많은 옛 도자기가 발견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은 고려시대 도자기이다.

 

고려시대 도자기 생산은 중요한 국가산업으로 초기부터 특수 마을을 지정하여 관에서 주도적으로 관리하였으며, 이들 지역은 송화 · 강화 · 부안 · 강진 · 해남 등으로서 해로를 통해 운반이 유리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 도자기기술은 9~10세기경 중국에서 전래되어, 11~12세기에는 비색(翡色) 청자를 생산하는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12~13세기에는 독창적인 상감청자를 탄생시켰다.

 

고려 후기인 14세기에는 청자가 쇠퇴하면서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전 단계의 청자들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 해역에서 발견된 도자기는 6만 2천여 점이 넘는다.

이들은 미술사뿐만 아니라 도자기 운송 해로와 포장방법, 생활사 연구 등

고려시대 생활사 복원에 중요한 자료이다.

 

수중발굴 고려청자

 
청자에 담긴 고려의 문화

도자기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다.

토기(土器)와 도기(陶器)가 만들어지고 보다 발전된 기술이 가미되어 자기(磁器)가 된 것이다.

자기에 유약을 바르고 높은 온도에서 구우면

청자(1200℃)나 조선백자(1300℃), 청사기와 같은 아름다운 도자기가 완성된다.

 

고려청자는 신비롭고 은은한 푸른색을 띠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 중 하나.

옥(玉)의 하나인 비취와 색이 비슷하다 하여 고려청자의 빛을 ‘비취색’이라고 한다.

 

고려청자는 10세기경에 시작되어 11세기에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12세기에는 중국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 고려만의 특유한 세련되고 아름다운 선과 모양을

갖추고, 동시에 다양한 무늬 기법으로 장식한다.

또한 비색 청자가 완성되고 상감청자가 새롭게 개발되는 등 도자기 산업은 더욱 발전하였다.

13세기에는 중국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도자기 문화도 영향을 받게 된다.

14세기 후반에는 해안지역에 왜구 침략이 빈번함에 따라 강진과 부안의 장인들은 내륙으로

주하였으며, 청자는 점차 쇠퇴하였다.

이후 고려 말기의 상감청자는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어지게 된다.

 

청자는 대부분 귀족들이 사용하였으며 일반인들은 거친 막청자를 사용하였다.
고려청자는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에 새로운 귀족층이된 호족들,

그리고 불교와 차문화 등의 영향으로 급속히 유행하였다.

찻잔, 잔받침, 차단지, 술주전자, 꽃병, 향로, 연적, 벼루, 베개, 의자, 기와, 장식품 등

다양한 생활도구들이 청자로 만들었다.

 

고려청자는 무늬와 형태에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한국 전통의 토속신앙에서부터 불교, 노장사상, 도교, 풍수도참사상 등이 담겨 있다.

그 예로 청자에 자주 등장하는 용, 봉황, 사자, 연꽃 무늬는 왕실과 불교의 영향이며,

모란꽃은 부귀를 상징한다. 복숭아와 석류는 도교의 영향이다.

대나무와 학, 매화, 국화는 귀족과 선비문화가 담겨 있다.

 
고려청자의 생산과 포장, 운송

우리나라 여러 해안에서 신고되어 학술 발굴조사로 건져 올린 문화재는 거의 대부분 고려청자이다. 이것은 해상교류가 활발했던 국제적인 나라이자, 조운로와 같은 해상운송로가 발달했던 ‘고려’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또한 도자기의 성분은 오랜 기간 바다 속에서도 부식되지 않기 때문에 잘 남아있다.

고려시대 자기는 특수 지역을 지정하여 관에서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대표적인 산업이었다.

 

청자는 흙과 유약의 성분에 따라, 가마에 불 때는 조건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도자기 생산지는 우수한 기술이 바탕으로 조성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운송이 편리한 해안지역에 위치하였다.

강진, 부안, 해남 등 고려시대 주요 가마에서 생산된 자기는

바닷길을 통해 지방과 개경 등 여러 지역으로 운송되었다.

 
고려시대 도자기 운송 해로

지금까지 우리나라 해역에서 발견된 고려청자는 6만 9천 여 점이나 된다.

이들 청자는 대부분 운송 중 선박과 함께 침몰하였다.

청자운반선은 전남 완도, 군산 십이동파도, 충남 태안 대섬 등 3곳에서 발견되었다.

침몰선에는 고려시대의 도자기 포장과 적재상태가 매우 잘 남아 있었다.

십이동파도 청자운반선의 경우, 종류별로 긴 나무 막대를 이용하여 묶은 후,

묶음 사이사이에 짚이나 갈대를 끼워 깨지지 않도록 하였다.

고려시대 도자기 운송 일러스트

태안 대섬 청자운반선에는 약 4층 정도로 자기를 포개어 실었다.

십이동파도 청자운반선과 마찬가지로 종류별로 길게 포개었으며, 이것을 다시 가로와 세로로 겹쳐 실었다.

그 사이에는 깨지지 않도록 짚과 나무쐐기를 넣어 끈으로 묶어 포장하였다. 특히 태안에서는 탐진(耽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간이 발견됨에 따라 고려시대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인 강진에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목간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유적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유적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유적
▲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유적
태안 대섬 해저 유적
태안 대섬 해저 유적
태안 대섬 해저 유적
▲ 태안 대섬 해저 유적

도자기 포장상태 재현(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도자기 포장상태 재현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도자기 포장상태 재현(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 도자기 포장상태 재현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완도 해저의 고려청자


청자 병(완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병(완도 해저, 11 ~ 12세기)

완도 해저의 청자운반선에는 30,645점의 고려청자가 실려 있었다.

출토품은 대부분 고려 전기의 생활도자기로서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청자 가마터(海南 珍山里 窯址 ; 사적 제301호)에서 생산된 것과 동일하다.

 
그릇의 종류는 녹청색과 녹갈색을 띠는 대접과 접시, 완, 잔이 있으며, 광구병(廣口甁), 매병(梅甁), 장고(杖鼓) 등도 100여 점 발견되었다. 특히 매병과 장고에는 모란꽃과 국화, 넝쿨(唐草)무늬가 철화(鐵花)로 그려져 있다.

청자 대접(완도 해저, 11 ~ 12세기)
청자 대접(완도 해저, 11 ~ 12세기)
청자 철화 모란꽃·넝쿨무늬 장고(완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철화 모란꽃·넝쿨무늬 장고
(완도 해저, 11 ~ 12세기)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의 고려청자

십이동파도 해저 출토품
▲ 십이동파도 해저 출토품

십이동파도의 청자운반선에는 8,737점의 고려청자가 실려 있었다. 대부분 무늬가 없으며 색깔은 녹갈색과 담녹색을 띤다.
그릇의 종류는 대접과 접시, 꽃모양 접시가 가장 많으며, 찻잔과 기름병(油甁)
· 광구병(廣口甁) · 대접뚜껑

· 발받침대 모양 청자 등도 있습니다.

출토품들은 11~12세기 경에 전남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 가마터(全南 海南郡 花源面 新德里 窯址)에서 생산된 것과 비슷하다.

청자 접시(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접시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청자 대접(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대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청자 기름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 청자 기름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청자 단지(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단지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청자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 청자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청자 꽃모양 접시(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꽃모양 접시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태안 대섬 해저의 고려청자

태안 대섬의 고려청자운반선에는 강진에서 제작된 고려청자 약 3만 여점이 실려 있었다.

그 중에서 파손이 적고 상태가 좋은 도자기는 2만3천 여 점.

태안선에는 도자기 외에도 배의 부속도구인 닻돌(碇石) 2점과 닻줄 물레(호롱), 그리고 철제솥, 청동 그릇, 인골 등도 발견되었다.
도자기 꾸러미 사이에는 탐진(강진)과 개경 등이 기록된 목간도 발견되었다.

도자기는 12세기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개경의 귀족이나 관청 등 지배층과 사찰에서 사용하는 고급품으로 추정된다.

해저 고려청자

대부분 대접과 접시· 완 등이며, 사자장식 향로, 두꺼비모양 벼루, 참외모양 주전자와 항아리, 발, 잔, 합 등의 특수한 청자류도 있다.

특히 백자합 1점이 발견되어 눈길을 끈다.
대접과 접시에는 파도
· 물고기 · 앵무새 · 연꽃 · 모란 · 국화 넝쿨 등 다양한 무늬가 장식되었다.

또한 벼루에는 반점과 같은 희고 검은 무늬(鐵花·堆花)가 있으며, 잔과 잔뚜껑 일부에도 검은 풀잎(鐵花)이 간결하게 그려져 있다.

청자 항아리와 청자 참외모양 주전자 그리고 청자완

청자 사자모양 향로(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사자모양 향로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두꺼비모양 벼루(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두꺼비모양 벼루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발우(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발우(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연꽃잎무늬 대접(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연꽃잎무늬 대접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파도·물고기 무늬 완(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파도·물고기 무늬 완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잔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잔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철화무늬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철화무늬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비안도 해저 출토품
▲ 비안도 해저 출토품
 
군산 비안도 해저의 고려청자

비안도 해저에서는 고려청자 3,178점이 발굴되었으며, 안타깝게도 침몰선은 발견되지 않았다.

청자 연꽃잎무늬 잔(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연꽃잎무늬 잔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이곳은 새만금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곳과 가까운 해역으로서, 방조제 축조 때문에 생긴 빠른 조류가 바닷속 갯벌을 쓸어감에 따라 800여 년간 잠들었던 도자기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릇의 종류는 대부분 대접과 접시이며, 완과 통형잔(筒形盞), 상감무늬 합(盒) 등입이다.

대접과 접시에는 연꽃, 모란꽃, 앵무새 무늬 등이 그려져 있다. 특히 합 8점에는 음각 또는 흑백 상감의 국화와 모란꽃 무늬가 장식되었다.

 

이 청자들은 전북 부안군 유천리 가마터(全北 扶安郡 柳川里 窯址 ; 사적 제70호)에서 출토된 도자기와 가장 유사합니다. 고려시대의 부안은 고급 도자기를 많이 생산하여 강진 청자와 함께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청자 상감 국화무늬 합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상감 국화무늬 합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청자 모란무늬 합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모란무늬 합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청자 앵무새무늬 대접(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앵무새무늬 대접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청자 발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발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보령 원산도 해저의 고려청자

보령 원산도 고려청자 유적은 원산도 사창(社倉) 마을 앞 해안의 갯벌지역으로,

약 1,000여 점의 청자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비록 모두 파편이지만, 고려청자 전성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품질의 비색청자이다.

그릇 종류는 대접과 접시, 잔은 물론 특수한 용기인 향로와 매병, 의자, 베개 등 매우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그릇의 정교한 장식과 무늬, 유약, 제작기법이 국보나 보물급 청자들과 비슷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다.

 
원산도 청자들과 비슷한 유물로는

1237년 축조된 강화 길정리의 희종 석릉(江華 吉亭里 熙宗 碩陵 ; 사적 제369호),

1239년 축조된 강종비 원덕태후 곤릉(康宗妃 元德太后 坤陵 ; 사적 제371호),

1245년 창건된 강화 선원사(江華 禪源寺址 ; 사적 제259호) 등의 출토품이 있다.

청자 방형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방형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방형 향로 복원 후 모습

▲ 청자 방형 향로 복원 후 모습

청자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사자모양 향로 복원 후 모습 (국보 제 6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청자 사자모양 향로 복원 후 모습
(국보 제 6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 오리모양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오리모양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오리모양 연적 복원 후 모습(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오리모양 연적 복원 후 모습
(국보 제 74호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 동자상(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동자상(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동자상 복원 후 모습
▲ 청자 동자상 복원 후 모습

청자 의자(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의자(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국화·연꽃·넝쿨무늬 투각 의자 복원 후 모습 (보물 제416호,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 청자 국화·연꽃·넝쿨무늬투각의자 복원후 모습
(보물 제416호,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태안반도 해저의 간지명 고려청자

태안반도 주변 바다는 예로부터 연안항해를 할 때 반드시 지나가는 항로에 위치하며,

항해 중 난파로 해저에 가라앉은 문화재들은 1976년 이후 신고되고 있다.

수중 발굴은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이뤄졌다. 이때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수 십 점이 발굴되었다.
그 중 고려청자는 40점으로, 제작 시기가 빠른 해무리굽 청자완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

대표적인 유물은 청자투각받침대 1점과 『己巳』라는 글자가 새겨진 간지명(干支銘) 상감청자들이다.

己巳年(기사년)은 1329년으로, 출토된 청자의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태안반도 해저 출토품
▲ 태안반도 해저 출토품

청자 국화·연꽃·넝쿨무늬 투각 의자 복원 후 모습 (보물 제416호,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무안 도리포 해저의 상감청자

무안 도리포의 해저 유적에서는 고려청자 638점이 발견되었다.

모두 고려청자가 쇠퇴하는 14세기의 상감청자이다.

그릇의 종류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이고, 잔 · 잔 받침 · 발 등도 있다.

그릇의 안과 밖에는 구름과 봉황, 국화, 모란, 연꽃, 버드나무 무늬 등이 상감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 굽의 받침에는 모래나 흑색 태토빚음을 사용하였는데,

흑색 태토빚음 받침은 고려시대 강진의 가마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기법이다.

이런 특징으로 볼 때 무안 도리포의 상감청자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10호 가마터

(全南 康津郡 大口面 沙堂里 窯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리포 해저 출토품
▲ 도리포 해저 출토품

도리포 해저 출토품

 

 

 

 

 

 

 

 

 

 


 마도선은 조운선이 아니다



박종진(중세1분과)



1. 마도 앞 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시기 배



2009년에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앞바다에서 고려시기의 배를 발굴한 데 이어 올해도 근처 바다에서 고려시기 배를 발굴하고 있다. 먼저 마도선의 발굴에 대해서 현재까지 발표된 내용을 정리해보자. (참고자료: 2009년 11월 4일과 2010년 8월 4일 문화재청 보도자료. 임경희 최연식, 2010 「태안 마도 수중 출토 목간 판독과 내용」 『목간과 문자』 5)

길이 10.8m, 중앙 폭 3.7m규모의 ‘마도1호선’에서는 여러 종류의 곡물, 도자기를 비롯하여, 날짜(간지), 발신지(자), 수신자, 화물의 종류와 수량 등을 기록한 목간 69점을 발굴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인양유물과 목간 내용을 종합하여 1207년 겨울에서 1208년 초에 걸쳐 해남
· 나주 · 장흥 일대에서 곡물류와 젓갈류, 도자기 등을 모은 후, 개경에 있는 관직자에게 올려 보내고자 항해하던 중 마도에서 좌초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사진
1. 마도선 발굴 해역 지도(2009년 11월 4일 문화재청 보도자료)


사진
2. 마도 2호선 발굴 현장(2010년 8월 3일. 박종진)

오른쪽 배가 ‘마도 2호선’ 발굴현장이고 왼쪽 배는 발굴 준비 중인 배다. 

한편 ‘마도1호선’이 발굴된 곳에서 동쪽으로 약 900m지점에서 현재 발굴 중인 ‘마도2호선’에서도 각종 도자기, 곡물, 목
· 죽제품을 비롯하여 화물의 종류와 수신자 등을 기록한 목간 등 중요유물을 발굴했는데, 선체 중앙부 부엌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는 청동숟가락, 도기 항아리, 대바구니, 쇠솥, 맷돌 등 배에 탄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유물도 인양하였다.


사진
3. ‘마도 2호선’에서 나온 쇠솥(2010년 8월 3일. 박종진).

뒤쪽에 보이는 것은 솥다리이다.


사진
4. ‘마도 2호선’에서 나온 맷돌(2010년 8월 3일. 박종진).

같은 날 대바구니도 나왔다.

특히 마도선에서는 화물 종류와 그 수량, 발신자, 발송지가 적혀 있는 고려시기 목간 수십점이 발견되어 고려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발표된 내용만 보더라도 목간에 적힌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풍부하기 때문에 목간의 판독이 마무리되고 마도선에 대한 종합조사보고서가 발표되면 침체되어 있는 고려시기 사회경제사 연구의 활성화에 도움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2. ‘마도선’은 조운선이 아니다.

문화재청의 보도자료에서는 발굴한 화물 종류와 목간의 내용을 종합하여 마도선을 세곡운반선(조운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필자는 목간을 비롯하여 마도선에서 수중 발굴한 내용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판단한 문화재청의 견해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다만 현재까지 발표된 내용만 보더라도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1)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보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마도선의 크기와 구조가 『고려사』에서 설명하고 있는 연안 조창의 조운선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마도 1호선’은 길이 10.8m, 중앙 폭 3.7m규모이고, ‘마도 2호선’은 길이 12m, 너비 5m, 깊이 1.5m 가량으로 1호선보다 약간 크다. 물론 두 배 모두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한강 상류의 조창(충주의 덕흥창과 원주의 흥원창)에는 200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이 있었지만 해안에 위치한 조창에는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보기 어렵다. 다만 『고려사』의 내용은 고려 초인 정종대의 사정을 말하고 있고 ‘마도선’은 고려 중기의 것이기 때문에 이후에 연안의 조창에도 평저선이 추가로 배치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앞으로 ‘마도선’의 구조와 적재용량 등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통하여 고려시기 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보기 어려운 둘째 이유는 목간에 기록된 화물을 받는 주체가 모두 개인이기 때문이다. 조운은 공적인 운송체계로서 주로 지방의 조세를 중앙으로 보내는데 이용하였다. 고려시기 조세는 지방 군현 단위에서 수령과 향리의 책임 아래 중앙으로 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보도자료에서도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 배를 조운선으로 판단한 듯하다. 그렇지만 조세는 개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관청으로 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다양한 잡물로 구성된 공물(貢物)은 중앙관청으로 보내야 한다.


사진
5. 대장군 김순영 이름이 적힌 목간(2009년 11월 4일 문화재청 보도자료).

대장군 김순영 댁에 벼 6석씩 보내는 목간 6개가 발견되었다.

김순영이 최충헌 집권기에 대장군이 된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에

함께 발굴된 다른 목간에 기록된 정묘년과 무진년은 1207년과 1208년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토지에서 수확한(田出) 곡물류의 경우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전출’은 화물주의 소유지에서 거둔 지대일 수도 있고 화물주의 수조지에서 거둔 전조일 수도 있다. (임경희 최연식, 앞논문) 고려시기에는 소유지에서의 지대 징수는 말할 것도 없고 수조지에서의 수조 역시 수조권가 직접 하도록 되어 있지만 『고려사』의 기록을 유추해 볼 때 지방에서 수조한 곡물은 조운을 이용하여 개경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목간의 ‘전출’은 개인이 수조한 곡물이 향리의 도움으로 조운을 이용하여 중앙의 수조권자에게 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전출’의 화물주 중 상당수가 산직(散職)이라는 점에서 ‘전출’은 화물주의 수조지에서 거둔 수조액으로 볼 수 없다. 고려 문종 때 정해진 경정전시과에서는 직사가 없는 산직 관리에게는 토지(수조지)를 분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발굴되어 판독된 목간이 배에 실렸던 화물 전체의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현재 판독된 것은 개인에게 가는 것만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마도선’에 실린 화물은 조세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마도선의 물품은 지방의 향리들이 보낸 개인 화물(지대, 선물, 뇌물 등)일 가능성이 높다. 마도선과 그 화물의 성격, 특히 화물 전체의 양과 무게, 각 화물 사이의 비율 등 화물 전체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3) 결과적으로 마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시기 배는 조창에서 관리하는 배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조운선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고려시기 조창에서는 『고려사』에 기록된 정기 조운선 외에도 다양한 배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배를 이용하여 부정기적인 조세를 납부하거나 중앙관리에게 선물 등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배들을 고려시기 조운선으로 추정한 문화재청의 판단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각도의 연구를 통하여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다.


3. 고려 사회경제사 연구의 ‘보물단지’

고려배가 발견된 마도 앞바다에는 ‘1호선’과 ‘2호선’ 외에도 발굴 준비 중인 배가 있으며, 근처에서 상당히 많은 닻돌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물살이 세고 안개가 짙은 이곳 난행량을 지나다 많은 배가 침몰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아울러 고려중기 송나라 사신 일행이 정박하여 고려정부로부터 군산도(선유도)에 이어 공식 영접을 받은 곳도 바로 이곳 마도의 안흥정이다. 이 사실은 이곳 태안 앞바다가 고려시기 수도 개경으로 가는 항로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곳의 발굴이 관심을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
6. 닻돌(2010년 8월 3일. 박종진)


사진
7. 마도 등대에서 본 신진항(2009년 11월 11일. 박종진).

당시 서긍 일행은 마도와 신진도 사이 지금 신진항에 정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도선’은 생생하고 풍부한 고려시기 사회경제사 자료를 담고 있는 ‘보물단지’이다.

발굴 자료의 정확한 조사와 정리가 선행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한다면 고려시기 사회경제사 연구의 많은 부분에 일정한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농장 규모와 경영형태, 도량형, 향리의 기능, 중앙과 지방 사람들의 관계와 교류, 배의 구조와 기능, 조운을 비롯한 해상 운송, 곡물의 종류와 형태, 음식물의 종류와 저장방법 등등....

 

- 2010-09-07 한국역사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