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의 철기 :::::::::::::::::::::::::::::::::::::::::::::::::::고구려는 제철 기술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압록강유역에는 이미 기원전 3세기경 주조철기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기원전 2∼1세기경의 로남리(魯南里)유적에서는 제철유적과 함께
선철(銑鐵)과 강철(鋼鐵)제 무기와 공구들이 출토되고 있다.
고구려 중기에 들어서 제철기술은 더욱 발전하는데,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화살촉과 도끼의 분석결과 초강(炒鋼)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탄소 함량이 0.86%에 달하는 고탄강(高炭鋼)으로
오늘날의 공구강 수준에 맞먹는 강도를 지닌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그밖에 고분벽화에도 다양한 종류의 철제 무기와 마구 및 수레부속구 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투구와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군사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발달한 제철기술을 엿볼 수 있다.
제철기술의 발달은 철제 농기구와 공구류의 발달 및 보급을 통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철제 무기류의 발달로 인해 활발한 대외 정복활동을 가능하게 하여
고구려 국가체제의 확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래에 소개하는 철기들은 아차산 제4보루와 몽촌토성,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고구려철기로
당시의 철기제작수준과 종류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기류
무기는 공격용무기와 방어용무기로 크게 나뉘어지며,
공격용무기는 다시 활(弓)과 쇠뇌(弩)와 같은 원거리무기와
칼(刀劍) · 도끼(斧) · 창(矛) · 꺽창(戈) · 극(戟) · 낫(鎌) 등의 근거리무기,
그리고 성을 공격할 때 사용되는 공성용무기 등으로 나뉜다.
방어용무기는 갑옷(甲胄)과 방패 등이 있으나,
방패는 벽화의 그림에서만 볼 수 있고 실물로 발견된 예는 없다.
고구려의 활은 길이가 짧은 단궁(短弓)으로 맥궁(貊弓) 또는 각궁(角弓)이라고도 불리며,
성능이 우수해서 당시에 이미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활을 제외한 고구려 군의 주요 무기는 칼 · 창 · 도끼 등인데,
칼과 도끼는 단병기(短兵器)로 근접전에서 창을 놓쳤거나 적의 목을 벨 때 사용하였으며,
일반적으로는 창이 주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창은 용도에 따라 길이가 다른데,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삭( :장창) · 모(矛 : 중창) · 정(鋌 : 단창) 등의 구분이 있었다.
장창인 삭은 기병이 주로 사용하였으며, 모와 정은 보병이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갑옷은 작은 철판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서로 연결한 비늘갑옷(札甲)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몇 장의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단갑(短甲)에 비해 활동성이 좋고 충격에 더 잘 견디도록 고안된 것이다.
고구려의 투구는 이른바 관모형복발주(冠帽形伏鉢胄) 또는 몽고발형투구의 일종으로
가운데 복발(伏鉢)에 여러 장의 찰편(札片)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벽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투구가 등장한다.
마구(馬具)류
마구는 말에 올라타기 위한 기구와 말을 조정하기 위한 기구, 말을 장식하던 기구 등으로 구성된다.
말에 오르기 위한 기구로는 안장(鞍裝)과 등자(子), 여러 종류의 말띠와 말띠고리()등이 있다.
말을 조정하기 위한 기구는 주로 재갈(銜)과 관련된 것으로
말의 입에 물리던 재갈과 재갈멈치(鏡板) 및 고삐이음쇠와 고삐 등으로 구성된다.
말을 장식하던 기구는 여러 종류의 말방울(馬鐸)과 말궁둥이 옆에 매다는 행엽(杏葉),
말 등에 세우는 운주(雲珠)와 운주를 세우기 위한 고들개 등이 있다.
마구 중에서 안장과 등자 및 재갈은 말타기 기술과 관련된 것으로
이러한 기구의 발달은 전력의 향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기병전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마구의 많은 부분은 백제와 신라 · 가야 및 일본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농공구(農工具)류
제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철제 농공구류도 발달하였다.
농기구로는 보습(犁)과 삽날 · 살포(鋤) · 낫(鎌) 등이 있으며,
공구류로는 굴지구나 목공구로 사용된 단조철부(鍛造鐵斧)와 끌(鑿) 및 여러 종류의 정(釘)이 있다.
이들 농공구류는 기능에 따라 서로 다른 재질의 철기를 사용하였으며,
제작 기법도 다양하여 발달된 고구려 철기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용기(容器)류
고구려는 철을 이용해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었는데,
여러 종류의 철제 단지와 항아리를 비롯해 철솥(鐵釜) · 세발솥(鼎) · 부뚜막(鋤) 등을 만들어 썼다.
철솥은 비교적 많은 예가 남아 있는데,
초기의 철솥은 바닥에 높은 굽이 달려 있으나 점차 굽이 얕아지고 몸체가 납작한 형태로 변화된다.
한강유역의 고구려요새 -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전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중심부로 남북간 왕래의 통로인 동시에
넓은 들이 있고 서해로의 진출이 용이하여
선사시대 이래 우리 조상들의 주요 생활터전이 되어왔으며,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삼국 중 백제가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차지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의해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551년 일시적으로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가 553년 이후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한강유역에는 한성시대 백제의 주요 유적을 비롯한
많은 삼국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며, 최근 고구려의 유적들이 확인 · 발굴되고 있다.
고구려 군사유적은 주로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서 확인되는데,
한강 유역의 점령과 지배과정에서 북상하는 백제와 신라를 맞아 대항하던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발굴 조사된 고구려 유적으로
당시 고구려 군대의 전모를 생생히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한강을 둘러싼 삼국간의 각축양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