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고구려와 발해

Gijuzzang Dream 2010. 3. 20. 23:48

 

 

 

 

 

 

 

 

1. 고구려

 

1) 환인 일대 (첫번째 수도)
오녀산성, 하고성자성, 상고성자고분군, 미창구고분

 

2) 집안 일대 (두번째 수도)  


국내성, 환도산성

 

3) 요동 성곽
백암성, 위패산성, 후성산산성, 득리사산성, 고검지산성

(득리사산성)

 

4) 적석총
태왕릉, 광개토왕릉비, 장군총, 산성하고분군, 천추총 등

 

5) 벽화고분 (중국, 북한)
무용총, 각저총, 안악3호분, 쌍영총, 강서대묘 등

 

6) 평양 일대 (세번째 수도)

안학궁, 대성산성, 장안양성

 

7) 남한 고구려 성곽
임진강 일대 고구려 유적 (은대리성, 당포성, 호로고루)
한강유역 고구려 유적 (아차산, 용마산 일대 보루)
금강유역 고구려 유적 (남성골산성)

 

2. 발해

1) 동모산 일대 (첫번째 수도)
동모산(산성자산성)

 

2) 서고성 (두번째 수도)
서고성 항공사진 및 유적 사진

 

3) 상경성 (세번째 수도)

상경성 및 일대 유적 사진

 

4) 팔련성 (네번째 수도)
팔련성 유적 사진

 

5) 북한 내 발해유적
청해토성 및 부거고분군 유리건판 사진

 

6) 연해주 발해 성곽
크라스키노 성터, 스쵸클랴누하 성터, 니콜라예프카 성터 위성 · 항공 · 유적사진

(연해주의 성곽 - 니콜라예프카성터)

 

 

3. 유물

1) 기획 전시실
  고구려 유물 : 수막새, 소조불상, 그릇
  발해 유물 : 기와, 수막새, 소조불상, 그릇

 

2) 상설 전시실
  고고역사전시실 : 평양에서 출토된 고구려 수막새
  한강 유역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 및 철기
  중국 내 발해 성터에서 출토된 금속기 및 벽화편,
  발해 문자기와, 수막새, 불상 등
  전통미술전시실 : 광개토왕릉비 탁본
  19세기 평양성도(병풍)

 

 

 

고구려

고구려 두 번째 도성

집안

 

장군총

고구려 세 번째 도성

평양

요동에 위치한 고구려 성곽
득리사산성

 

 

 

발 해

발해의 세 번째 도성

- 상경성

연해주의 성곽

- 니콜라예프카성터

 

 

 

 

 

 

 

 

 한강유역의 고구려 군사요새
 
고구려는 우리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위대한 고대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 위치가 현재의 중국동북지역과 북한지역일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쩌면 낯선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런 고구려의 흔적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과 그 인근에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에 우리의 곁에 숨쉬고 있는 고구려의 발자취를 소개함으로써 고구려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아차산 일원의 군사요새 유적을 중심으로 고구려문화속으로 들어가보자

아차산 제4보루 유적은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위치하는데, 아차산 일대의 유적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일제강점기(1916년)때부터였다.

당시는 백제나 신라의 고분유적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1994년의 지표조사를 통해 고구려토기가 다량으로 수습됨에 따라 고구려 유적으로 재평가받게 되었다.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에서는 유적의 조사를 의뢰하였으며 이에 따라 1997년 -1998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기대이상으로 양호하게 남은 시설들과 다량의 고구려 유물들이 출토됨으로써 학계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유적이 한강 북쪽에 존재했던 고구려 군사시설임이 분명해졌다.

고구려의 유적이 한국내에서 정식발굴조사된 것은 아차산 제4보루 유적이 처음이었다. 여기에 유적의 발굴과정과 성과를 소개함으로써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고구려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잠자던 고구려를 깨우다 

 

 

       

 

유적이 위치한 곳은 해발 285.8m의 작은 봉우리로

남북으로 뻗은 아차산 능선의 가장 북단에 해당되는 곳이다.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유적의 일부는 군용헬기장과 시민들의 운동공간으로 이용되어

훼손이 심각한 편이었다.

아차산 일원에는 총 15개소의 고구려군사요새(보루)가 남아있는데

이들도 대부분 이와 같은 훼손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유적의 조사는 먼저 사방 5m의 격자구획을 유적 전체에 설치하여 각 구획 내부를 파내려가면서

유적의 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사진1 유적복원도] 조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ㄱ'자로 꺾인 온돌시설이 노출되었다.

[사진2 온돌 노출광경] 전형적인 고구려식의 온돌이었다.

온돌시설은 이후 여러지점에서 확인되어 이 유적을 점유했던 사람들의 생활공간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온돌시설을 포함한 거주시설 주위를 둘러싼 석축시설이

나타났으며 이는 최종적으로 대규모의 건물지였음이 판명되었다.

건물지에는 기둥을 받치던 주춧돌, 출입시설, 배수로, 저수시설 등 생활과 관련된 여러 시설들이

연이어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대형건물지의 구조와 시설을 파악해낼 수 있었다.

[사진3 토기노출상황]조사과정에서는 다량의 고구려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처럼 많은 고구려유물이한 곳에서 출토된 것은 이 유적이 처음이었다.

히 토기들은 원래의 위치를 유지한 채 출토되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했으며,

무기와 농공구 등 다양한 종류의 철기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무기류들은 이 유적의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사진4,5 배수로, 건물지 노출상황]

건물지 외부로는 다시 건물지와 평행하게 나아가는 석축성벽시설이 조사되었다.

[사진6 성벽노출광경] 이를 통해 조사단은 이 유적이 외곽의 석축성벽과

그 내부의 대형건물지, 건물지 내에 다시 각 온돌을 중심으로 한 생활공간을 가진 구조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조사가 마무리되면서 유적이 고구려의 군사시설-군사요새-임이 분명해졌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대립했던 고구려의 최전방 군사시설을 발굴조사함으로써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유적이 산위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조사단은 매일 무거운 장비와 유물을 들고 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힘겨운 발굴조사를 진행하였지만 이처럼 커다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드러난 고구려 군사요새와 고구려군

 

아차산 제4보루유적의 조사결과 밝혀진 고구려군사요새의 구조와

당시 사용되었던 각종 유물들에 대해 알아보자.

아차산보루의 구조는 유적전체를 둘러싼 타원형의 성벽(약 210m)이 있고

성벽의 한 부분에는 돌출된 雉가 설치되어 있다.

성벽 내부에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건물지가 총 7기 확인되었는데,

중요인물이 기거했던 것으로 보이는 독립된 건물지와 대형건물지,

대형건물지에 인접한 소형건물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건물지 내부에는 온돌이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대형건물지 내부에는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시설이 2개소 확인되었으며

출입시설, 주춧돌, 문비석 등 건물과 관련된 시설들도 확인되었다.

저수시설은 방수를 위해 땅을 파고 사방 벽과 바닥에 뻘흙을 두텁게 발랐으며

통나무를 가로로 쌓아 마감하였다.

건물 내부에서 나오는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시설도 4개소에서 확인되었다.

이처럼 아차산의 고구려군사요새는 고구려군이 주둔할 수 있는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며 이를 복원해보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다음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에 대해 살펴보자.

유적에서는 다량의 고구려토기와 철기류가 출토되어 고구려인의 생활도구는 물론

무기와 군사력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토기는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제작 · 사용된 토기를 말한다.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경 혼강(渾江)유역의 환인(桓仁)지방에서 건국하여

668년 멸망하기까지 700여 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환인지방과 압록강유역의 집안지방 및 대동강유역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발전하였고,

남으로는 한강유역 및 경상북도 · 충청도 일원까지 진출하였다.

따라서 고구려토기는 시간적으로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68년까지,

공간적으로는 중국의 환인-집안지방과 북한 및 남한의 한강유역과 경상북도 · 충청도 일원에서

고구려인들에 의해서 제작 · 사용된 토기를 말한다.

시간적 · 공간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토기는 바닥이 납작한 평저기(平底器)가 많고,

고운 점토로 된 니질(泥質) 태토가 대부분으로, 표면색조는 황색 · 흑색 · 회색이 주를 이룬다.

표면은 문질러 광택을 내는 경우가 많으며 문양을 시문하는 예는 극히 적은데,

중기 이후에 들어와서 일부 무늬가 시문되며, 유약을 바른 토기도 등장한다.

초기에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일부 기종만 사용되었으나,

중기가 되면서 거의 모든 종류의 토기가 제작 · 사용되고,

후기의 토기는 일부 발해시기까지 계속 제작 · 사용된다.

아래에 소개된 유물들은 아차산 제4보루, 시루봉보루, 용마산 제2보루,

구의동보루 및 몽촌토성 내 고구려건물지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고구려 토기이다.

 

 

::: 고구려토기:::::::::::::::::::::::::::::::::::::::::::::::::::

나팔입항아리(四耳長頸壺·甕)

고구려토기의 가장 특징적인 기종으로 나팔처럼 벌어지는 긴 목과 네 개의 띠고리손잡이(帶狀把手)가 특징적이다. 크기와 형태에 따라 사이장경호(四耳長頸壺)·사이옹(四耳甕)·사이장경옹(四耳長頸甕)·장경호(長頸壺) 등으로 세분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기종이다.

몽촌토성과 파주 주월리 유적 출토품을 제외하면 주로 고분에서 출토되며, 부장용이나 의례용기로 제작·사용된 기종이다. 3세기경에 네 개의 띠고리손잡이가 달린 납작한 몸체에 좁고 긴 목이 달린 사이장경호만 사용되다가 4세기가 되면서 다른 형태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 중 가장 특징적인 사이장경옹은 동체와 목이 점차 세장(細長)한 형태로 변화 발전되는데,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예는 5세기 중후반 경에 속한다.

 

긴항아리(長胴壺)

최대경에 비해 긴 몸체가 특징으로,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실용기이다. 주로 음료를 담아서 사용하던 개인용기로 생각된다. 초기의 긴항아리는 목과 몸체의 구분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으나, 점차 목과 몸체의 구분이 뚜렷해지고 최대경이 어깨로 올라와 어깨가 발달하는 형태로 변화된다. 가장 많이 출토되는 기종 중의 하나이다.

 

 

 

 

 

 

항아리(壺)

항아리는 둥근 몸체에 짧은 목이 달린 그릇으로 가장 출토 예가 많은 기종이다. 항아리 중에서 높이 40센티미터 미만이 이 기종에 해당되며, 목과 동체부의 형태에 따라 세 종류로 구분된다.

즉, 공처럼 둥근 몸체에 목과 아가리가 곧추선 형태(A형)와 눌린 공모양(扁球形)의 몸체에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형태(B형), 짧게 밖으로 벌어진 아가리에 약간 긴 몸체를 가진 형태(C형)로 구분된다.
A형은 주로 4∼5세기경의 적석총(積石塚)에서 출토되어 부장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B형 역시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B형은 몸체가 점점 납작해지는 형태로 변화되어 발해시기까지 사용된다. C형은 항아리 중에서 비교적 몸체가 긴 형태로 실용적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점차 몸체가 길어지고 어깨가 발달하는 형태로 변화된다. C형은 일부 고분에서 출토되는 예가 있으나, 생활유적에서 출토되는 예가 많아 실용기로도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큰항아리(大甕)

큰항아리는 높이 40 이상의 항아리로 오늘날 사용되는 큰항아리와 비슷한 형태이다. 이 기종은 크기와 형태에 있어서도 실용적이지만 실제로 모두 생활유적에서 출토되어 실용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큰항아리의 용량은 평균 51ℓ 이며, 음료나 곡식을 저장하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고구려 중기 이후에 많이 사용되며, 몸체가 세장한 형태에서 점차 넓고 어깨가 발달한 형태로 변화되어 발해시기까지 사용된다.

 

 

동이(大鉢)

바닥에 비해 아가리가 넓고 높이가 낮은 대야모양의 토기로 자배기 또는 버치라고도 불리며, 중국에서는 분(盆)으로 불린다. 이 토기는 실용기로서 음식물 조리 준비용으로 사용되었으며, 고구려토기 중 가장 많이 쓰이던 토기 중의 하나이다.
동이는 아가리 지름이 17㎝에서 52㎝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대형과 소형으로 나뉜다. 5세기의 동이는 아가리 지름이 높이의 1.5배 가량 되는 것이 많으나 6세기의 동이는 아가리 지름이 높이의 두 배를 넘는 납작한 형태로 바뀌고, 발해시기가 되면 더욱 납작해지고 몸체에 한 쌍의 띠고리손잡이가 부착되기도 한다.

 

 


시루(甑)

시루는 음식물을 쪄서 익히던 그릇으로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몸체에는 한 쌍의 띠고리손잡이가 부착되어 있다. 시루 역시 음식물을 조리하던 실용기지만 5세기 전반경까지는 고분에서 출토되기도 한다. 이미 고구려 초기부터 시루가 등장하지만 4세기말까지는 형태가 정형화되지 않으며, 바닥의 구멍도 작은 구멍이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다.
5세기 중반 이후의 시루는 형태도 정형화 되었지만 시루의 기능을 좌우하는 바닥의 구멍도 일정한 패턴을 갖추게 된다.

사발

오늘날의 사발과 같은 형태이며, 개인용 배식기로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실용기의 하나이다. 사발은 이미 고구려 초기부터 사용되는데 바닥에 얕은 굽이 달린 것과 굽이 없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또 일부 고분에서 출토된 예를 보면 보주형(寶珠形) 꼭지가 달린 뚜껑이 덮여 있는 예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실용기로 사용된 사발도 일부는 뚜껑을 덮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닥에는 '井', '小', '大' 등과 같은 부호를 새기거나 부조한 것이 많이 있는데, 제작지나 주문처 또는 사용자를 표시한 것이거나, 벽사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귀잔(耳杯)

사발모양 토기의 구연부 양쪽에 좁은 귀를 부착한 형태의 그릇이다. 초기의 귀잔은 그릇의 아가리가 타원형이며, 아가리의 긴 변쪽에 귀를 붙였다. 그러나 5세기 이후 아가리가 사발과 같이 둥글게 바뀌며, 여기에 약간 넓은 귀가 부착된다. 또, 초기의 귀잔은 주로 고분에서 출토되며, 유약이 발라진 예가 많아서 비실용기로서 부장용이나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5세기 이후가 되면서 주로 실용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뚜껑(蓋)

뚜껑은 여러 종류의 그릇에 덮어서 사용하던 것으로 하나의 독립된 기종은 아니다. 뚜껑의 크기를 나타내는 드림부의 지름은 9센티미터에서 48센티미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크기와 형태에 따라 대략 4가지로 구분된다. 일부 뚜껑의 경우에는 뒤집어서 쟁반처럼 사용하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접시(皿)

납작한 바닥에 얕은 구연이 달린 형태의 토기로 사발과 함께 개인용 배식기로 사용되었던 그릇이다. 접시는 바닥에 얕은 굽이 달린 것과 굽이 없는 것의 두 가지가 있는데, 굽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접시의 바닥에는 「후부도○형(後部都○兄)」,「염모형(牟兄)」, 「지도형(支都兄)」등의 명문이나 '井', '小', '×' 등의 부호가 새겨진 경우가 많이 있다. 접시에 새겨진 명문은 주로 이 그릇을 사용하던 사람의 출신지와 이름 또는 관직명을 새긴 것이고, 부호는 벽사(僻邪)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병(甁)

공처럼 둥글거나 약간 눌린 공모양의 몸체에 좁고 긴 목이 달린 형태의 그릇으로 바닥에는 얕은 굽이 붙고 아가리는 'ㄴ'자로 꺾인 반구형(半球形)이 많다. 초기의 병은 유약을 바른 경우가 많으며 형태는 중국 육조(六朝)시대의 자기병과 유사하다.
5∼6세기경에는 토기로 제작된 병이 나타나며, 몸체의 형태도 점차 눌린 공모양으로 납작하게 변화된다. 병은 부장용이나 의례용으로 생각되며, 실용기로 사용되었더라도 향료와 같은 귀한 액체를 담는데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굴뚝(煙筒)

온돌의 굴뚝으로 사용된 토기로 역시 아차산 제4보루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형태는 원통형과 항아리형, 끝이 좁아든 원통형 등이 있으며, 굴뚝의 크기에 따라 크기도 다양하다. 이 중 가장 큰 온돌에 사용된 굴뚝은 높이 81센티미터, 지름 47㎝의 대형이며 몸체에 네 개의 띠고리손잡이가 부착되어 있다. 발달된 고구려토기 제작기술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오절판(五折坂)

납작한 쟁반모양의 그릇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칸으로 나누어놓은 형태의 그릇으로 오늘날 반찬그릇과 유사한 형태이다.
이 그릇은 아차산 제4보루에서 한 점 출토되었는데, 가운데를 원형으로 막고 주위를 네 개의 판으로 막아 다섯 칸으로 구분한 형태이다. 이 토기는 고구려인들이 기능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만들어 썼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 고구려의 철기 :::::::::::::::::::::::::::::::::::::::::::::::::::

고구려는 제철 기술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압록강유역에는 이미 기원전 3세기경 주조철기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기원전 2∼1세기경의 로남리(魯南里)유적에서는 제철유적과 함께

선철(銑鐵)과 강철(鋼鐵)제 무기와 공구들이 출토되고 있다.

고구려 중기에 들어서 제철기술은 더욱 발전하는데,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화살촉과 도끼의 분석결과 초강(炒鋼)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탄소 함량이 0.86%에 달하는 고탄강(高炭鋼)으로

오늘날의 공구강 수준에 맞먹는 강도를 지닌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그밖에 고분벽화에도 다양한 종류의 철제 무기와 마구 및 수레부속구 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투구와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군사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발달한 제철기술을 엿볼 수 있다.

제철기술의 발달은 철제 농기구와 공구류의 발달 및 보급을 통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철제 무기류의 발달로 인해 활발한 대외 정복활동을 가능하게 하여

고구려 국가체제의 확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래에 소개하는 철기들은 아차산 제4보루와 몽촌토성,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고구려철기로

당시의 철기제작수준과 종류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기류

무기는 공격용무기와 방어용무기로 크게 나뉘어지며,

공격용무기는 다시 활(弓)과 쇠뇌(弩)와 같은 원거리무기와

칼(刀劍) · 도끼(斧) · 창(矛) · 꺽창(戈) · 극(戟) · 낫(鎌) 등의 근거리무기,

그리고 성을 공격할 때 사용되는 공성용무기 등으로 나뉜다.

방어용무기는 갑옷(甲胄)과 방패 등이 있으나,

방패는 벽화의 그림에서만 볼 수 있고 실물로 발견된 예는 없다.

고구려의 활은 길이가 짧은 단궁(短弓)으로 맥궁(貊弓) 또는 각궁(角弓)이라고도 불리며,

성능이 우수해서 당시에 이미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활을 제외한 고구려 군의 주요 무기는 칼 · 창 · 도끼 등인데,

칼과 도끼는 단병기(短兵器)로 근접전에서 창을 놓쳤거나 적의 목을 벨 때 사용하였으며,

일반적으로는 창이 주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창은 용도에 따라 길이가 다른데,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삭( :장창) · 모(矛 : 중창) · 정(鋌 : 단창) 등의 구분이 있었다.

장창인 삭은 기병이 주로 사용하였으며, 모와 정은 보병이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갑옷은 작은 철판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서로 연결한 비늘갑옷(札甲)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몇 장의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단갑(短甲)에 비해 활동성이 좋고 충격에 더 잘 견디도록 고안된 것이다.

고구려의 투구는 이른바 관모형복발주(冠帽形伏鉢胄) 또는 몽고발형투구의 일종으로

가운데 복발(伏鉢)에 여러 장의 찰편(札片)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벽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투구가 등장한다.



 

 

 

 

 

 

 

마구(馬具)류

마구는 말에 올라타기 위한 기구와 말을 조정하기 위한 기구, 말을 장식하던 기구 등으로 구성된다.

말에 오르기 위한 기구로는 안장(鞍裝)과 등자(子), 여러 종류의 말띠와 말띠고리()등이 있다.

말을 조정하기 위한 기구는 주로 재갈(銜)과 관련된 것으로

말의 입에 물리던 재갈과 재갈멈치(鏡板) 및 고삐이음쇠와 고삐 등으로 구성된다.

말을 장식하던 기구는 여러 종류의 말방울(馬鐸)과 말궁둥이 옆에 매다는 행엽(杏葉),

말 등에 세우는 운주(雲珠)와 운주를 세우기 위한 고들개 등이 있다.

마구 중에서 안장과 등자 및 재갈은 말타기 기술과 관련된 것으로

이러한 기구의 발달은 전력의 향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기병전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마구의 많은 부분은 백제와 신라 · 가야 및 일본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농공구(農工具)류

제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철제 농공구류도 발달하였다.

농기구로는 보습(犁)과 삽날 · 살포(鋤) · 낫(鎌) 등이 있으며,

공구류로는 굴지구나 목공구로 사용된 단조철부(鍛造鐵斧)와 끌(鑿) 및 여러 종류의 정(釘)이 있다.

이들 농공구류는 기능에 따라 서로 다른 재질의 철기를 사용하였으며,

제작 기법도 다양하여 발달된 고구려 철기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용기(容器)류

고구려는 철을 이용해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었는데,

여러 종류의 철제 단지와 항아리를 비롯해 철솥(鐵釜) · 세발솥(鼎) · 부뚜막(鋤) 등을 만들어 썼다.

철솥은 비교적 많은 예가 남아 있는데,

초기의 철솥은 바닥에 높은 굽이 달려 있으나 점차 굽이 얕아지고 몸체가 납작한 형태로 변화된다.

 

 

 

 

 

 

 

 

 

한강유역의 고구려요새 -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전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중심부로 남북간 왕래의 통로인 동시에

넓은 들이 있고 서해로의 진출이 용이하여

선사시대 이래 우리 조상들의 주요 생활터전이 되어왔으며,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삼국 중 백제가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차지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의해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551년 일시적으로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가 553년 이후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한강유역에는 한성시대 백제의 주요 유적을 비롯한

많은 삼국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며, 최근 고구려의 유적들이 확인 · 발굴되고 있다.


고구려 군사유적은 주로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서 확인되는데,

한강 유역의 점령과 지배과정에서 북상하는 백제와 신라를 맞아 대항하던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발굴 조사된 고구려 유적으로

당시 고구려 군대의 전모를 생생히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한강을 둘러싼 삼국간의 각축양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발해의 소조불상

해, 우리에게 발해는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발해는 699년 고구려의 장군 출신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세운 국가로,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에 걸치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는데

인안(仁安), 대흥(大興)과 같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강성했으며

당, 일본 등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화를 발전시켰고

남쪽의 통일 신라와 마주보며 함께 한반도에서 남북국 시대를 펼쳐 나갔다.

 

이러한 사실을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발해는 동시기의 통일신라에 비해 아직도 먼 나라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발해의 영토가 백제나 신라와는 달리 현재 우리가 쉽게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거리감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그보다도 멀리 떨어진,

심지어 민족조차 동일하지 않은 서구 어느 나라의 문화보다도

발해 문화에 대한 인상은 훨씬 약하기만 하다.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공간의 물리적인 거리의 요원함을 메워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바로 그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현재 발해의 유물과 직접 만나기는 참 어려운 실정이다,

 

 

발해유물

 

발해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30년대 일본의 한반도와 중국 침략이 수행되던 시기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1960년대부터 중국의 동북지방은 한중공동고고학발굴대에 의하여,

그리고 연해주 지역은 러시아, 혹은 한러공동발굴조사단에 의한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발굴된 유물들은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있으며

한국에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유물들을 접함으로써 체득되는 심리적인 친밀감이 일으키는 효과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발해의 문화와 너무나도 멀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발해유물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발해의 숨결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발해 유물들은 총 283건 346점에 달하는데

이는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발해의 문화유산이다.

이 유물들은 1941년 설립된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진열관

시절부터 소장되어 온 것이다.

이 유물들은 1934년에서 1942년 사이 경성제국대학의 鳥山喜一, 藤田亮策 교수를 비롯,

秋葉隆, 稅田利秋, 川崎大太郞, 森田芳夫, 尹泰衫 등 7인이 기증한 것인데

특히 가장 많은 유물을 기증한 鳥山喜一(1887-1959)은 발해사 전문 연구자로

별칭이 '발해왕'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1934년 전후로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많은 발해 유물을 수집하였고 그 유물들을 1941년 경성제국대학 진열관에 기증한 것이다.

유물들은 각종 문양이 시문되거나 문자가 새겨진 기와나 토기를 비롯하여

절터에서 출토, 수집된 불, 보살상과 벽화 파편 등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들의 출토지는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黑龍江省 寧安縣 東京城),

길림성 옥춘시 팔련성(吉林省 琿春市 八連城) 및 그 주변 여러 지역으로 다양하다.

그 중 동경성은 756년∼785년, 794년∼926년 동안 발해의 수도로서 영광을 누렸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위치했던 곳이며,

팔련성은 일제시대에 주로 반랍성(半拉城)이라 불렸던 곳인데

785년∼794년까지 10년간 수도의 역할을 했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있던 곳이다.

 
 소조불상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발해 유물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소조불, 보살상들이다. 이들은 모두 상경용천부, 즉 동경성의 절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모두 크기는 10㎝ 내외의 소형이며 부드러운 점토를 조각틀에 채워 넣어

불,보살상의 형태를 찍어낸 후 소성(燒成)한 소조상들이다.


여래상


여래상들은 모두 앙련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고 광배를 가지고 있으며

얼굴은 온화하며 전체적으로 풍만한 살의 느낌이 살아있다.

여래상들은 법의와 수인의 형태에 따라 5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두 손을 옷 속에 넣고 법의의 끝자락을 왼쪽으로 빼낸 형식,

양 어깨로 내려오는 법의를 입고 두 손을 배 앞에 두어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싼 형식,

목에서 U자의 선을 그리며 주름져 내려오는 통견을 입고

두 손은 앞으로 모았으나 옷 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 형식,

양 어깨로 내려오는 법의를 입고 두 손을 배 앞에 두었는데 법의의 한 쪽 끝이 왼쪽으로 나온 형식,

두 손을 모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 상품중생인을 짓고 있는 형식 등이 있다.

 

 

보살상



보살상들은 하나의 틀에서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듯이 모두 같은 유형이다.

보주형 광배에 높은 삼화관(三花冠)을 쓰고 있으며

관 중앙에는 화불(化佛)이 남아있어 관세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동그랗고 뺨에 살이 많아 통통하며 목에는 구슬 목걸이를 걸치고

오른손은 들어서 가슴 부근까지 올리고 왼손은 내려서 천의를 잡고 있으며

발 밑에는 연화좌가 있다.

천의는 2단으로 늘어져있고 군의는 다리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져 U자형의 옷주름을

만들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머리에 비해 몸의 길이가 짧은 단구형의 신체비례를 하고 있다.

이 상들의 제작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양식적인 특징을 통해 볼 때 대체로 당(唐) 양식의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어

8세기∼9세기 사이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편 같은 시기 당 혹은 신라에서 제작되었던 상들과 비교해 볼 때

고식(古式)의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세 번째 유형의 여래상은 법의의 형식에 있어 인도 간다라 초기의 상을 직접 모방한

중국의 4∼5세기 선정인(禪定印) 불좌상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며, 그 외 다른 유형의 불상들도

당의 불상들에 비해 육감적인 신체의 표현 등이 절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의 경우에 있어서도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은 점이나

보주형 광배, 2단의 천의(天衣) 형식 등은 중국 북제(北齊), 북주(北周)에서 시작하여

수대(隋代) 조각에서 특히 유행했던 보살상의 유형과 유사하다.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 외에 다른 지역에 소장되어 있는 불, 보살상들을 살펴볼 때

대체로 발해 조각에서는 보수적인 측면이 기저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제3, 4사지 출토 소조불

 

불상과 보살상들은 대체로 크기가 유사하고 소조 기법이 동일한데

모두 대좌 밑에 쇠못을 꽂을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이 불, 보살상들은 1933~1934년, 동아고고학회에서

1,2차에 걸친 발굴 후 펴낸 발굴조사보고서인

『東京城-渤海國上京龍泉府址の發掘調査』(東方考古學叢刊 甲種第五冊, 1939)에 실린

제3,4사지에서 출토된 소조불들과 유형이 거의 동일하다.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제3사지, 제4사지라고 명명되는 이 두 절터는

5間4面의 외진(外陳)에 3間2面의 내진(內陳)을 가지고 있는 내·외진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금당 내에 따로 벽체를 세워 내진을 감실화한 내 · 외진 이중의 평면 형식은

상경 용천부 도성 안팎에서 발굴 조사된 절터의 금당에 보이는 특수한 형식으로,

신라의 황룡사지 금당만 예외적으로 내·외진 이중 구조로 되어 있을 뿐

고구려나 백제의 사지에서는 그러한 형식의 금당을 찾아보기 어렵다.

때문에 내진의 역할과 그 안에서의 불상의 배치 방법 등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불, 보살상들은

내진의 벽이 어떻게 장엄되었는지에 대해 일말의 해답을 던져줄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불들은 내진의 북벽과 수미단 전방 사이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10cm 내외의 작은 전불 들은 내진의 북벽에 천불(千佛)로서

대좌 밑으로 쇠못을 꽂아 부착하는 형식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벽면에 천불을 배치하는 것은 주로 중국의 석굴사원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인데

당대에 조성된 중국의 용문석굴 만불동이나 천룡산 석굴의 천불 혹은 보살상들을 보면

상들은 모두 연화좌 위에 앉아있으며 상의 대좌 밑으로 줄기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

길게 나와있음을 볼 수가 있다. 서울대 박물관 소장의 상들 역시 모두 연화좌를 가지고 있으며

길죽한 것을 꽂을 수 있도록 제작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마치 연꽃 줄기로 각각의 상들을 잇는 형상으로 내진의 북벽에 장엄되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서울대박물관 소장 발해 소조불상의 의의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불, 보살상들이 출토된 동경성, 즉 상경 용천부는

제3대 문왕 대흠무가 755년경 수도로 정한 이후 잠시 10년 정도의 공백기가 있었을 뿐

160여 년에 걸쳐 발해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영광을 누린 곳이다.

현재 그곳에서는 모두 10개의 절터가 발견되었는데

발굴 결과 그 규모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여 일찍부터 불교는 널리 신앙되고 있었다.

기록을 통해 보아도 당 개원 원년(719) 발해 왕자가 사신으로 당을 방문하여

절에 가서 예불하길 원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약 130회에 걸쳐 승려들이 왕래하였고

석인정(?-815)과 같은 승려는 불법을 구하러 여러 차례 입당하였다.

이를 통해 불교미술을 비롯한 당의 문화는 발해에 매우 자연스럽게 널리 수용되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발해사에 대한 관심 증가하여 발해 불교조각에 대한 연구도 더불어 차차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발해가 차지했던 넓은 지역에 비해 출토되는 조각 작품의 수가 적고,

발견되는 자료를 직접 조사하기 어려운 난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발해 조각은 공백기에 다름없는 고구려말 7세기 조각의 일면을 살펴보는데,

그리고 발해 멸망 후 만주지역 지배하였던 요대(遼代) 조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더 그 가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수도로서 문화의 정점을 꽃피웠던 상경 용천부 출토의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발해 불, 보살상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발해 불교미술의 국제성과 고유성을 살펴보는데 매우 가치 있고 소중한 자료이다.

 

 

발해불교미술 연구 문헌 목록

 
 

발해의 불교 조각은 동경성 이외의 지역에서도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참고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상들을 포함하여

발해의 불교 미술 연구에 관한 연구 논문들을 아래에 모아보았다

 
차옥신 「발해 불상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 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송기호 · 전호태

「함화사년명 발해 비상 검토」,

『서암조항래교수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아세아문화사, 1992.

샤프쿠노프 저, 송기호 역 「연해주에서 출토된 발해 불판」, 『미술자료』 50, 1992.
문명대

 「코르사코프카 불교사원지 발굴」,

『러시아연해주 발해유적』, 대륙연구소, 1994.

정영호 「발해의 불교와 불상」, 『고구려연구』 6 (발해건국 1300주년(698-1998) 제4회 고구려국제학  술대회 발표논집) 1999.
임석규  「동경대박물관소장 발해불상」, 『고구려연구』 6(발해건국 1300주년(698-1998) 제4회 고구  려 국제학술대회 발표논집), 1999.
최성은 「발해의 보살상 양식에 대한 고찰」, 『강좌미술사』 14, 1999.
이강근 「발해 상경용천부의 사원건축」, 『강좌미술사』 14, 1999.
 
 

- 서울대학교박물관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