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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 순국 100주년

Gijuzzang Dream 2010. 3. 26. 11:39

 

 

 

 

 

 

 

안중근 의사(1879~1910) 순국 100년 

 

 

2010년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 되는 날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일본인으로 가장해 잠입하여 하얼빈(哈爾濱)역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뤼순(旅順) 감옥에 이송, 투옥되었다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1910년 3월26일 일제에 의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미지

안 의사 순국 직전 모습

  

일제는 안 의사의 유해를 은밀하게 처리했다.

'유해를 절대 가족에게 넘기지 말라'는 일본 당국의 방침이 적혀 있는 일본 기밀문서에서

유해 매장지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사형 당일 보고서에 적힌 '여순 매장'이라는 넉 자뿐.

 

해방된 지 60년도 더 넘었지만, 우리는 안 의사의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중국 뤼순교도소의 뒤쪽 야산 일대다.

안 의사 유해 찾기에 힘써온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정한 매장 예상 지역은

여순 감옥 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으로, 현재 아파트 공사 지역 인근이다.

각계에서 안 의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한 가운데 안 의사 다시 보기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목숨을 잃자 최초의 국장을 치른 뒤

1,000여 평이 넘는 부지에 각종 석물과 거목으로 단장한 묘지에 시신을 안치했다.

일본 역사 교과서와 참고서 등 각종 서적을 보면 대부분 이런 존경 받는 정치인이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에 의해 테러를 당했다고만 간략하게 기술돼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에 안 의사는 '테러범' '혹은 암살자' '사살자'라는 꼬리표를 가진

부정적 인물로만 여겨지는게 보통. 하지만 최근 일본 학계와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안 의사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의 전통 있는 한 극단은 한국의 식민지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연극을 공연하면서

안 의사와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며 역사 바로 보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 관람객은, "과거에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기념관 등에서 자료를 읽어보니까

아 훌륭한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일 과거사 문제를 바로 알리려고 일본의 시민들과 학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한국병합100년 시민네트워크'의 경우 이전 같으면 상상조치 하기 힘든 안 의사 자료 전시회를

지난해 개최했다. 이런 전시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일부 학자는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에 대한

단편적 시각에서 벗어나 독일의 비판철학의 대가 칸트와 비교하는 연구까지 진행하고 있다.


사사가와 노리가쓰, 일본 메이지대 교수는 " '자주독립과 전쟁하지 않는다'에 대해

(안 의사와 칸트) 비슷하게 말했지만, 이것에 대해 칸트는 구체적 계획을 내지 않았고,

안중근은 구체적인 평화정책을 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커다란 차이입니다."

일본 학계의 이같은 움직임은

안 의사의 평화 사상이 시대를 내다보는 선구자적인 탁견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 일을 했으며 내가 죽은 뒤에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주기 바란다"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일본에서 안 의사에 대한 재평가가 계속될 수 밖에 없는 이유 바로 여기에 있다.

 

◇<남국야화>에는 "사형집행일 순백의 조선복을 입고 간수에 끌려 집행장에 나타났을 때는 줄이은 집행관도 그의 거룩한 모습에 머리를 떨구어 훌쩍여 울었다"고 한 안중근 의사의 변호인 미즈노 키치타로 변호사의 증언이 기록돼 있다.

1910년 2월14일 사형 선고 후 3월26일 순국까지 40일간 안 의사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글씨를 썼다.

당시 법원과 감옥 관리들은 안 의사의 유묵을 받았다.

고치 현립도서관에 소장된 문예지 <남국야화>에는

안 의사의 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의 증언이 기록돼 있다.

 

 

 

 

 

 

 

 

 

  

 왜 안중근 의사를 되돌아보는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의거 직후 중국 뤼순(旅順)감옥 초기의 안중근 의사.

이 사진은 190년 11월초 안중근 장군이 뤼순감옥으로 이감된 직후에 찍은 사진으로

리본에는 수형번호 대신 '안응칠'로 표기돼 있다.

그리고 왼손 약지의 단지 흔적이 보인다.

일본 죠신지 소장으로 지금은 류코쿠대학에 기탁보관 돼 있다고 한다.

 

20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서거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중국 뤼순(旅順)감옥 내 사형장에서 순국했다.

요즘 안중근 의사를 '의사'로 명칭하느냐, '장군'으로 명칭해야 하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명칭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자.


 

▶ 안중근 의사의 호칭문제가 논란인데 '의사'라고 불린 것은 언제부터인가?
= 안중근 의사가 '의사'로 불린 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부터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항일 독립운동하는 분들이 '의사'라고 호칭했고 일본측 정탐기록에도

"저들이(한국인) 안중근을 '의사'라고 부른다"라고 나와 있다고 한다.

그 당시 신문에도 '의사'로 나와 있고

의로운 일을 은밀하게 비밀적으로 감행했다고 해서 '의사'로 호칭했던 것 같다.


▶ 우리가 항일운동시기 독립운동을 한 분들을 '의사' 또는 '열사'로 호칭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가?
= 학문적으로는 '의사'와 '열사'가 정확하게 개념정립이 돼있지 않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지적이다.

굳이 따져보면, '의사'는 자기 목숨을 던져 정의로운 행동을 한 분을 말하고

'열사'는 '특정한 운동을 하다가 희생을 당한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어로 말하면 'martyr'라고 하는데 '의사', '열사'를 모두 'martyr'로 해석하는 것 같다.

예를들면, 1400년대 전반 백년전쟁에서

영국의 침공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도 '마터, 잔다르크'로 불린다.

'장군'이라고 호칭한다면 'General'이 되는거다.

안중근 의사를 '의사'로 계속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장군'으로 불러야 하는지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는데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생각된다.


▶ 본질적인 문제는 호칭보다는

안중근 의사가 행한 의로운 행동이 더 부각돼야 하는 것 아닌가?
=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 100년이나 지나다보니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는 일본인 개인을 사살한 것처럼 인식이 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것.

실제로 어느중학교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고 하니까,

어떤 학생이 "의사가 왜 사람을 죽이나요"라는 웃지못할 질문도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 기억하게 되면서

그 분이 행했던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역사적 의미가 점점 잊혀져가는 느낌이 있다.


▶ 당시 이토히로부미는 어느정도급이었고

안중근 의사는 왜 이또히로부미를 저격대상으로 선택했는가?
=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든 사람이다.

일본 근대화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일본의 국가기본체제인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만든 사람이다.

일본 근대국가의 시스템 설정에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다.

자기들(일본인)은 그를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비견한다.

그는 내각총리대신, 수상을 지낸 뒤 1905년에 특명전권대사로 대한제국에 부임했고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 설치된 통감부에서 초대 통감으로 임명됐다.

1907년에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구성했고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해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조항을 들어 침략원흉으로 규정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것.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사살함으로써

오히려 일본이 한일강제합병에 나섰다는 주장도 있던데?
= 그것은 친일파나 일본측의 억지논리라는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 주장은 이토가 일본내에서는 온건파로 분류됐기 때문인데 이토가 죽으면서 온건파가 사라지고

강경파인 이토의 정치적 라이벌인 오구마 시게부노 등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된데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 내각은 그가 사살되기 전인 1909년 7월

이미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병합한다는 결정에 대해 일본왕의 재가를 얻은 상황이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 연구소의 신운용 책임연구원은

"1909년 7월 일본 각의에서 조선침략 결정이 이뤄졌고

안중근 의거와 관계없이 일본이 조선침략을 결정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일본에서는 이토가 사살되자 당연히 큰 충격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의 이또 저격 이후,

일본은 그들이 갖고 있는 의도가 무언지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됐다.

조선인들이 일본지배에 동의하는구나, 심하게 반발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일순간에 날려버린 사건이 됐다.
- 2010.03.25  CBS사회부 구용회 기자goodwill@cbs.co.kr

 

 

 

 

 

 

 

 

 "안중근 사형집행 연기 요청 거부당해"

 

 

안의사 순국 직전 뤼순형무소장 쓴 보고서 원본 공개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수감됐던 뤼순 감옥의 형무소장이 쓴 보고서 원본과

이토 히로부미 추모 포스터 등 미공개 자료가 일반에 공개됐다.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유묵전

'안중근, 독립을 넘어 평화로' 연장전시회에서

뤼순 감옥의 구리하라 전옥(형무소장)이 안 의사 순국 일주일 전에 쓴 보고서 원본이 전시됐다.

1919년 3월19일 구리하라는 조선통감부 사카이 경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안 의사가 '동양평화론' 완성을 위해

사형집행을 보름 정도 연기해달라고 요청한 상황을 기록했다.

구리하라는 편지에서 안 의사가 '동양평화론'의 서론을 끝내고 본문을 집필하는 중이라면서

"본인은 철저하게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원하고 사후에 반드시 빛을 볼 것으로 믿기 때문에

얼마 전 논문 저술을 이유로 사형 집행을 15일 정도 연기될 수 있도록 탄원했으나

허가되지 않을 것 같아 결국 '동양평화론'의 완성은 바라기 어려울 것 같다"고 썼다. 

             
                                        구리하라의 보고서

 

국내의 한 개인소장자가 보관하고 있는 이 편지는 사본이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돼있어

그 존재 및 내용은 알려져 왔으나 원본이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일본에서 제작된 이토 히로부미 추모 포스터도 처음으로 소개됐다.

1909년 11월1일 '대정치가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나온 이 포스터는

안 의사의 저격으로 숨진 이토와 중경상을 입은 하얼빈 총영사 등 관리와 함께 안 의사 모습을 그렸다.

의거 후 3일만에 제작된 이 포스터에는

안 의사의 이름이 러시아식 발음을 한자로 옮긴 '운지안(運知安)'이라고 적혔고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돼

일본이 사건 초기 안 의사의 신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 추모 포스터

 

안 의사가 순국 직전에 명주옷을 입고 의연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도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선명한 사진으로 전시되고 이토의 장례식 모습을 담은 엽서 10장도 소개된다.
안 의사의 친필 글씨와 사진 등 안 의사 관련 자료 80여점을 전시하는 이번 연장전은

1월26일부터 2월25일까지 열린다.  ☎02-580-1660
- 2010-01-26

 

 

 

  

 
 

 

 안 의사 사형집행일, 순종 탄신일과 겹쳐 연기돼

 

 
 

"3월 25일이 바로 순종황제 탄신일입니다.

이 점을 일제가 우려해서 하루를 연기해서 3월26일 오전 10시에 사형을 집행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일은 당초 100년 전 3월 25일이었는데 이 날이 순종 탄신일과 겹쳐

일제가 여론을 무서워해 사형 집행일을 하루 늦춘 것으로 드러났다.

뤼순 감옥 부근에는 안중근 의사를 재판했던 일본 관동법원이 있다.

100년전 2월 14일, 일본 고등법원은 서른 두 살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집행을 선고했다. 

안 의사의 사형집행일은 당초 3월 25일.

하지만 일제는 이 날이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탄신일인 사실을 알고 사형집행일을 하루 늦췄다.

 

▲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된 교형장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된 교형장으로 새 교형장 건설로 이미 철거된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시켜놓은 것이다.

뤼순 감옥 수감 당시 54kg이었던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당시 몸무게가 2kg 늘었다.

사형 선고 이후 몸무게가 크게 줄어드는 일반 사형수들과 달리

죽음 앞에 매우 의연하고 당당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광복이 된 뒤 자신의 유해를 조국에 묻어달라고 했던 안 의사의 유언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최봉룡 다롄대학 교수는,

"역사의 100년전의 미스터리를 (한중일)공동으로 풀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게 우리 앞에 놓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과 일본에 있을 역사 자료를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순국까지 일관된 기개  

 

 

 

"집행순간까지 매우 침착하고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 안색과 언어에 이르기까지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침착하고 떳떳하게 죽음에 이르렀다."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인 1910년 3월26일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할 때

통역 소노키 스에요시가 사형집행 순간에 대해 외무성과 통감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26일의 하얼빈 의거 이후 5개월간 옥중생활을 하면서

재판과정에서 한 진술과 집필한 원고를 통해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에 대한 의지를 표출하고 짧지만 불꽃 같았던 삶을 마감했다.

 

 

◇ 재판에서 일제 침략상 밝혀
안 의사는 의거 후 하얼빈 영사관에 구금됐다가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점령한 중국 뤼순에 있던 감옥에 갇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그의 재판을 어느 나라에서 할지를 두고 고민하다 국제 여론의 관심을 피하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 장소를 뤼순으로 정했다.

1909년 11월3일 감옥에 갇힌 안 의사는

미조부치 검찰관과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사카이 경시로부터 강도 높은 신문을 받았다.

이후 열린 공판에서 안 의사는 자신이 한국 의병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해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인데 일본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최후진술을 통해 일본의 한국침략 실상과 이토의 죄상을 밝혔다.

첫 공판이 열린 지 일주일만인 1910년 2월14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마나베 재판장은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 다음날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2월15일자는 안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도 태연자약했으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 판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미소를 머금었다고 전했다.

 

 

◇ 자서전, '동양평화론' 집필
안 의사는 옥중에서 아무런 자료 없이 사형 집행을 앞둔 절박한 상황에서

혹한을 이겨가며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그는 자서전을 완성했으나 '동양평화론'은 끝내 마치지 못했다.

'동양평화론' 완성을 위해 사형집행 연기를 청했으나 당국이 이를 묵살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많은 연구자로부터 선구적인 제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한ㆍ중ㆍ일 삼국이 동양 평화회의체를 구성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하며 공동 군대를 창설하는 등

세 나라가 협력하는 공동체를 결성할 것을 제시했다.
이러한 지역 협력방안은

20세기 후반 동북아에서 논의되는 다자간 지역협력체 구상의 맹아적 요소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또 원고 외에도 많은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을 썼다. 유묵은 200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제까지 밝혀진 것은 57점이다. 

이 가운데 안중근의사기념관 등 국내 각처에 소장된 유묵 25점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물로 일괄 지정된 상태다.

안 의사는 높은 기개와 강한 애국심,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이룩하려는 염원, 돈독한 신앙심 등을

유묵에 담았다.

 


◇ 당당한 마지막 모습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날인 1910년 3월25일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만났다.

어머니, 두 동생, 뮈텔 주교 등에게 쓴 유서 같은 편지 6통을 동생들에게 전하고

아내가 지은 한복 바지와 저고리를 전달받았다.

또 면회온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서는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에는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해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그의 통역인 소노키 스에요시는 사형 집행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소노키의 기록에 따르면 사형은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감옥 안의 사형장에서 집행됐다.

안 의사는 유언을 남길 것인지 묻자

자신의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일본 관리들도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합심해 동양평화를 위해 힘쓸 것을 바란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아내가 고향에서 보낸 흰색 저고리와 흑색 바지를 입은 안중근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상태에서 2분여간 기도를 한 뒤 교수대에 올라 태연하게 형을 받았다.

10시4분께였다.

소노키는 오후 1시에 감옥의 장지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썼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2010/03/21 (c)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일본, 안중근 수감시 경계강화' 문서 발견

 

 

보훈처, 日 보고서ㆍ사형집행명령기록 등 확보

 

 

안중근 의사가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뤼순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일제가 감옥과 그 일대에 대한 경계를 대폭 강화했던 내용을 담은 일본 문서가 발견됐다.

 

국가보훈처는 3월22일 안 의사가 순국한 뤼순감옥을 관할하던

일제 행정기관인 관동도독부의 '정황보고 및 잡보' 자료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 자료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있던 것으로,

보훈처가 일본의 자료공개법 등을 활용해 전문가들과 함께 지난달 찾아내

복사해서 국내로 가져온 것이다.

 

관동도독이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것으로

1909년 10~12월의 정황을 담은 '정황보고 및 잡보 4권'은

"하얼빈에서의 살인사건으로 입감한 한국인 9명은 엄정 격리할 필요가 있어 모두 독거구금했다"며

"피고사건의 중대함으로 인해 계호자의 선정 및 사건의 성질상 감방 내외를 엄중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이어

"감옥서 내에 임시법정을 설치했으므로 그들을 수용할 구치감의 사무 및 계호간수와

임시법정에 따라붙일 계호자도 선정해 단속 처우의 적실 및 심문사항의 비밀을 확보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들의 일거일동에 주의해 특히 야간에는 수시로 간수로 하여금 그 행동을 비밀 정탐케 하는 등

야간경계는 종래의 감독자 외 간수 6명을 배치하던 것을 8명으로 증가하여 만일의 위험을 방지하는 데 힘썼다"고 했다.

 

1910년 1~3월의 정황을 담은 `정황보고 및 잡보 5권'은

"살인 피고인 안중근외 수명은... 2월7일부터 14일까지 연일 법원에 출정하기 때문에

미리 위험을 우려해 압송마차를 설비함으로써 연도의 왕복을 경계했으며,

법정 내에서 경호상의 단속도 실로 고심을 극하였다"고 보고했다.

 

특히 "사형 확정 후에는 더욱 경계를 엄히 할 필요가 있었으며,

야근간수를 증가시켜 감옥 안팎과 부속관사 부근 일원을 날이 샐 때까지 순찰경비를 시켰다"며

"야간에는 가능한 한 간수의 외출을 제한해 비상시에 대비하게 하고

특히 일반 간수를 독려해 주야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했다"고 보고했다.

이어 "다행히 본 사건이 종료되자 아무런 잘못이 없게 됐다"고 끝을 맺었다.

 

이와 더불어 안 의사에 대한 사형집행 명령기록 원본도 발견됐다.

이 기록은 일제가 1910년 2월14일 안 의사에 대한 사형을 선고한지 열흘 만인 2월24일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이틀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이 명령기록에는 안 의사의 주소를 '한국 평안도 진남포'라고 쓰고 있으며,

직업(무직)과 이름(안응칠 안중근), 나이(33세), 죄명(살인범), 형명(사형), 판결언도 (1910년 2월14일) 등이 명시돼 있다. 안응칠은 안 의사의 아명이다.

 

보훈처는 안 의사에 대한 내용이 담긴 이 같은 자료를 포함한 '관동도독부 정황 보고 및 잡보' 1~15권(1천884매)과 안 의사 수감시 증거품 목록 자료도 확보했다.

관동도독부 정황보고 자료에는 안 의사를 포함해 228명의 독립운동가가 적시되어 있었고,

이 중 89명은 최초로 확인된 인물이라고 보훈처는 밝혔다.

 

증거품 목록으로는 당시 러시아 측에서 발간했던 한자신문인 '원동보' 1부와 이토 암살을 암시한 '동청철도 기차 발착시간표', 손가방 등이 적혀 있다.

 

사형 직후 안 의사의 동생들이 유해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한 내용이 담긴 '두 동생의 유해 인도 요구에 대한 처리 경위 보고' 원문도 확보됐다.

또 동생 안정근이 안 의사의 사진으로 5종의 엽서를 만들어

미국 하와이에 300매, 샌프란시스코에 500매를 보냈다는 기록도 사진과 함께 발견됐다.

특히 안 의사의 사진 아래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을 붙여 만든 엽서도 있었다.

 

일본감옥협회가 1910년 1월20일 발행한 감옥협회잡지에

안 의사를 '보통의 형사피고인이지만 국사범과 동격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내용도 나왔다.

이와 함께 1906~1916년 기간에 뤼순감옥의 조선인 입감인원이 수록된 '일본감옥 교회사' 자료도

확보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번에 발굴된 자료는 이미 알려진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지만

일본정부가 관련 자료가 없다고 한 것이 허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며

"일본 정부의 성의가 무엇보다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 2010-03-22

 

 

 

 

 

 

  

 

 

 

 안중근 의사 “조국 안장” 유언…

 

 

 

‘뤼순감옥 뒷산’ 유해발굴 먼 길

 

 중국, 자료 뒷받침 안되면 발굴 불허
사료·문헌증거 철저히 추가 조사해야
정부, 한-중-일 공동발굴 제안 검토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굴돼 봉환되면 모시기 위해

1946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미리 조성된 가묘의 모습. 김명진 기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 쓸 것이다.”

 

32살의 나이로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두 동생 정근 · 공근에게 남긴 유언이다.

 

국권이 회복된 지 60년이 휠씬 넘었지만 우리는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도 모르고 있다.

안 의사 유해를 찾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지난 1992년에야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었고,

그 전까지는 뤼순 감옥 근처 유해 매장 추정지에 대한 현장 조사가 불가능했다.

또 안 의사 순국 뒤 시간이 많이 흘러 유해 매장 지역에 대한 결정적인 고증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안 의사 유해를 찾으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백범 김구 선생 묘소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에는 ‘3의사 묘역’이 있다.

광복 뒤 해외에 묻힌 독립운동가 유해 찾기에 나선 백범이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찾아

1946년 7월 이곳에 안장했다. 그런데 3의사 묘역에는 묘소가 3기가 아니라 4기다.

제일 왼쪽에 있는 1기는 묘비가 없다. 봉분만 먼저 만든 가묘다.

백범이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자, 유해 국내 봉환에 대비해 가묘를 만든 것이다.

 

안 의사 유해 찾기가 본격화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로 현장을 찾아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2000년 이후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등이 일본외교사료관 등에서 찾아낸 관련 자료와 현지 조사 등을 통해 뤼순 감옥 뒷산의 유해가 매장됐을 것으로 보이는 추정지를 제시하면서다.

 

  이미지

 

안 의사가 황해도 신천 출신이라 북한에도 연고가 있기 때문에

안 의사 유해 발굴은 남북 공동으로 이뤄졌다.

2005~2007년 여러 차례 남북실무접촉과 남북 공동조사단이 뤼순 현지 조사를 벌인 바 있다.

가보훈처는 남북 공동조사 결과 및 각종 증언과 자료 등을 종합해,

뤼순 감옥 뒷산을 유력한 안 의사 유해 매장지로 지목했다.

2008년 3월말 남쪽 정부는 북쪽의 동의와 중국의 협력을 얻어 ‘한-중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단’을 꾸려 두 차례로 나눠 29일 동안 발굴 작업을 했다.

그러나 유해를 찾는 데는 실패하고 그해 5월 유해 발굴 작업이 잠정 중단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2008년 10월 안 의사 유해를 둘러싼 여러 설과 논란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유해 추정지에 대한 과학적인 발굴 작업을 담은 176쪽의 발굴보고서를 내놓은 건 귀중한 성과였다.


2008년 3~4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려고 29일동안 발굴 작업을 벌였던 중국 뤼순 감옥 뒷산. 국가보훈처 제공

이명박 대통령이 “안 의사 유해발굴 사업을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중국 및 일본 정부에 협조를 요청할 것을 관계 당국에 지시함에 따라,

정부는 5월 열릴 예정인 한-중-일 3국 외교장관회의에서 공식 의제로 다루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관계부처와 학계 등 각계 인사들을 참여시켜

안 의사 유해발굴을 위한 ‘합동유해발굴단’을 구성하기로 했다.

 

2008년 뤼순 감옥 뒷산 발굴작업에 발굴조사팀장으로 참여한 박선주 충북대 교수(고고미술사학)는

“안 의사가 묻힌 곳에 대한 여러 주장이 있지만,

2008년 발굴했던 지역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라며

“그럼에도 여러 주장들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2008년의 발굴 보고서를 재검토하고

매장 추정지역의 현상변경 등에 대한 사료와 문헌증거를 찾는 추가 조사를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중국 정부가 발굴 허가를 내주지 않기 때문에

무작정 중국에서 발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안 의사의 영혼은 돌아가신 지 100년이 되도록

찬비를 맞으며 을씨년스런 이역 하늘을 헤매고 있다”며,

국군 유해 발굴처럼 안의사 유해발굴은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일관되고 지속적인 작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안중근 유해발굴' 총력... 성과 불투명

 

"1% 가능성만 있어도 노력 멈추지 않을 것" 

 

 

'대한 독립'의 염원을 안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민관합동 유해발굴추진단을 출범시키고

외교통상부에 이를 위한 지원반을 설치하는 등 범정부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봉환하기 위한 노력은

이전부터 계속됐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광복 후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은

제일 먼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의사 및 열사의 유해를 되찾는 일에 착수해

1946년 7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찾아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이들 묘 옆에 안 의사의 허묘(虛墓)를 조성했다.

김구 선생은 이어 1948년 4월 남북협상회의 참석 차 평양을 방문,

당시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중국 뤼순(旅順)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안 의사 묘의 발굴을 제안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중국과 외교관계 단절로 안 의사 유해발굴 사업은 추진되지 못하다가

1992년 중국과 국교 수립을 계기로 다시 활기를 찾았다.
1993년 7월 일본측에 안 의사 매장 자료에 대한 확인을 요청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정부는 일본에는 안 의사 매장 관련 자료를,

중국측에는 매장 추정 지역 현지 조사 및 유해 발굴을 위한 협조를 지속적으로 요청해 왔다.

그 과정에서 1993년 11월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실무추진단이 구성돼

중국 현지에 묘소실태 조사를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2006년 6월에는 제1차 남북공동 유해조사단이 중국 다롄에 파견돼

뤼순감옥 북서쪽 야산을 유해 매장 추정지로 확인했다.
이어 2008년 3∼4월 한.중 안중근의사 유해발굴단(남측 단독)이 뤼순감옥 북쪽 매장 추정지에 대해

29일간 발굴작업을 벌였으나 동물 뼛조각만 발견했다.

안 의사 유해 발굴 노력이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해자격인 일본은 1993년 7월 '뤼순감옥에서 사형집행 후 매장했다'는 내용 이외에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게 외교부의 설명이다.
아울러 현지 조사 및 발굴과정에서 협조가 필수적인 중국이 북한의 입장을 많이 고려하고 있다는 점도 사업 추진의 장애 요소로 꼽힌다.

중국은 실제 2008년 당시에도 북한으로부터 '남측 단독으로 조사해도 무방하다'는 통보를 받고서야

우리 발굴단의 작업을 허가했다. 세월의 흐름 등 여러 어려움을 감안할 때

향후 정부의 노력이 구체적인 결실로 연결될지 여전히 불투명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부는 우선 일본 등을 대상으로

안 의사 사형 및 매장과 관련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또 자료가 수집되는 대로 중국 측에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필요할 경우 한.중.일 외교장관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다룬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25일 "정부로서는 1%의 가능성만 있더라도

안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연합뉴스 2010.03.25

 

 

 

 

 

 

 
 

 

 2008년 '1차 발굴조사단' 지휘 박선주 충북대 교수

 

 

"매장 추정 감옥뒷편 공장세워져 이장이나 멸실 우려"
"뤼순감옥 기록 소실불구 日엔 자료 존재 가능성 커"

 

 

"안중근 의사유해 발굴의 성패는 일본 정부나 민간에서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관련 자료를

어떻게, 얼마나 확보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2008년 3월 안 의사 유해발굴조사단에서 발굴 작업을 지휘했던 박선주 충북대 교수는 

"현재로선 발굴 가능성이 높지 않다. 때문에 지난번 발굴 실패의 원인과 추가 발굴 후보지 등에 대해

다각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박 교수는 당시 보훈처 주관으로 이뤄진 유해발굴조사에서

유해 매장지를 추측할 수 있는 사형 당일 보고서에 적힌 '뤼순(旅順) 매장'이란 기록과,

뤼순감옥 일본인 소장 딸이 공개한 사진 2장을 근거로

감옥 뒷편 매장 추정지 발굴작업을 했지만 성과를 못 거뒀다.

이후 발굴 실패 원인과 유해 매립 예상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됐다.

박 교수는 1차 발굴 실패 원인과 2차 발굴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레 언급했다.

그는 "1차 발굴 실패는 조사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매장지로 추정된 감옥 뒷편 위안바오산(元寶山) 하단부가 길이 30m, 깊이 4∼5m로 파여져

도자기 파편 등 쓰레기로 채워졌기 때문"이라며

"이는 1916년과 1918년, 1921년 일본이 뤼순감옥 증·개축을 하면서 인근에 벽돌공장을 지었고

벽돌을 만들기 위한 흙을 파내면서 매장지로 유력시되던 곳을 쓰레기로 채웠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안 의사 유해는 이장됐을 가능성이 높고, 그러지 않다면 멸실(滅失)의 우려도 있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묘역이

뤼순감옥에서 동남쪽으로 500여m 떨어진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라는 표지석이 설치된 야산'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신빙성이 낮다고 말했다.

대신 새로 구성되는 발굴단이 위안바오산 끝자락에 있는 길이 20m, 폭 2∼3m의 가톨릭 신자 묘지와

2008년 발굴 지역과 경계선상에 있던 군부대 쪽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두 지역은 안 의사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뤼순감옥 간수와 그 가족들이 살았던 곳이며,

마을 주민들로부터 1910년대 사형을 당한 사람들의 묘지가 조성돼 있었다는 진술을 들었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유해 발굴의 성패를 묻는 질문에 박 교수는

"정확한 문헌자료가 나와야 한다"면서 일본정부를 겨냥했다.

안 의사가 순국한 1910년을 기점으로 1920년 사이 발굴 대상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뤼순감옥에선 사형 집행 후 시신을 가족들에게 대부분 돌려줬으며,

당시 감옥묘지에 매장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이 없는 무연고였다.

이 때문에 일본정부가 가족이 있는 안 의사를 감옥 인근에 매장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뤼순감옥 기록이 3일간 불태워졌다고 하나 기록을 중시하는 일본의 특성상 본국에 관련자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전했다.

그는 일본정부가 계속 입을 닫을 경우 민간 차원의 조사도 뒤따라야 한다고 주문했다.

"1911년 뤼순감옥에서 천도법회를 지낸 사진이 있는 만큼

일본 불교계 등에서 사형 집행과 관련된 흔적을 찾거나 벽돌공장 관련 기록,

뤼순감옥에 근무했던 간수나 그 가족의 후손을 찾아 자료를 모으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후 중국대륙이 열광

 安의사는 벗같은 존재”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중국 쑹청여우(宋成有) 베이징대역사학과 교수와

일본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가

26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리는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동양포럼'에 참석, 특별 강연을 한다.

또 산자부장관을 지낸 김영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안중근의 동양평화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이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행사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운동'의 배경이 된 국채보상운동 발상지가 대구라는 점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3월25일 미리 배포된 강연내용에서 쑹청여우 교수는

"한국 근대사에서 중국 전체를 감동시키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안중근 의사만한 사람은 없다."면서

근대 중국은 다음과 같이 세 차례에 걸쳐 안중근 의사에 열광했다고 강조했다.


# 첫번째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소식은

중국 대륙 각계 인사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줬다.

1914년 박은식 선생이 쓴 '안중근전'은 대륙에 추모열기를 더했다.


# 두번째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던 즈음에 삼천리강산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두 달 뒤 5·4애국운동이 폭발해 항일정신이 고조됐다.

이 기간 동안 학생들은 (중국)전국을 돌며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 '안중근-망국한'을 올렸다.


# 세번째
항일전쟁기간이다. 1931년 9·18사변 이후 일본은 동삼성을 침략, 점령했다.

그리고 1937년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략해왔다.

국공합작이 체결됐고 광복군, 조선의용대 등도 항일전쟁에 동참했다.

안중근 연극을 올렸고 1944년 후난성의 명사인 쩡위안이 '안중근'을 썼다.

쑹청여우 교수는 이와 함께

"중국인에게 안중근 의사는 어려움을 함께 겪은 벗과 같은 존재이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면서

1992년 한·중 국교체결 이후 안중근 연구는 더욱 본격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도 비중있게 언급했다.

한편 와다 하루키 교수는 안중근 의사 입장에서 일본 사회에 뿌리깊이 박힌 보수사관을 비판했으며,

김영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회장은 "안 의사는 국채보상운동이 시민 주도로 일어나고

시민대표에 의해 진행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이것을 동양 전체로 확대해

새로운 시민층의 대표로 구성되는 동양평화회의를 구상했다." 고 밝혔다.

- 김문 부국장 · 박록삼기자 km@seoul.co.kr
- 서울신문 2010.03.26

 

 

 

 

 

 

 

  

 안중근 의사(義士),  안중근 장군(將軍)" 호칭 논란

 

평화향군 "군인으로 인정을"  

 

 

 

 

안중근 의사의 호칭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예비역 준장인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는 25일 평군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안 의사는 거사 직후 '나는 대한민국 참모중장이다'고 당당히 밝혔고 뤼순(旅順) 법정에서도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전쟁 중에 적장을 사살했노라'고 외쳤다"며

"그의 의거는 투철한 군인 정신의 발로였음에도 광복된 조국이 그를 군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친일 세력들이 온통 군을 장악하고 있어 자랑스런 국군사가 실종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표 대표는 26일 경기 안성시 미리내 성지에서 열리는 안중근 토마스 장군 순국 100주기 추념식에

참석해 이 같은 내용의 축사를 할 예정이다.

이 행사는 그를 의사가 아닌 장군으로 호칭해 열리는 최초의 공식 행사다.

육군은 이날 충남 계룡대 육군본부에서 안중근장군실로 명명한 지휘부회의실을 개관했다.

안 의사의 유품과 일대기를 전시한 회의실은 안 의사의 군인 정신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육군의 안보 현장 견학 코스로 개방할 예정이다.

육군과 달리 국방부는 아직 안 의사의 호칭 변경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며,

국가보훈처는 의사 호칭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한편 외교통상부는 최근 일본 정부에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에 협조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유명환 장관이 지난달 한일외교장관회담에서

유해 발굴 협조를 요청했고 이후 외교 채널로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에 일본 측은 "알아보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 당국자는 "일본이 안 의사 유해 관련 자료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지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며

"조사해 볼 만한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직후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다"라고 의연 당당히 밝혔으며,

뤼순법정에서도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전쟁 중에 적장을 사살했노라"외쳤다.

사형 집행 전날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그는 자신이 군인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겨 각별히 강조했다.

그의 의거는 이처럼 투철한 군인정신의 발로였음에도 광복된 조국은 그를 군인으로 인정치 않았다.

그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일본군 출신 친일세력들이 온통 군을 장악하고 있어

항일독립전쟁의 자랑스러운 국군사가 실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안 의사를 의병대장으로 모셔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특히 최근에는 '안중근 평화재단'이 열정을 쏟아 추진해 오고 있는

"안중근 장군으로 호칭부터 바로잡자"라는 운동이 크게 힘을 받아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물론 여기서 "바로 잡자"는 의미는 '의사(義士)'라는 호칭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를 군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에 대한 강한 자기 질책적인 각성의 의미라 여겨진다.

 

안중근 의사는 분명 항일무장투쟁 중에 적장을 사살하고 목숨 바친 위대한 '군인'이었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와 냉전의 와중에서 지워지고 잊혀져 가고 있는 '군인 안중근'을

우리 군이 장군 호칭의 기치를 높이 들어 제자리로 모셔오려 하고 있다.

육군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육군본부 내의 지휘관 회의실을 '안중근 장군실'로 명명키로 했다.

이는 회의실 명칭을 그렇게 정했을 뿐인 단순한 조치가 아니다.

항일독립 전쟁으로부터 국군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원려가 담긴 의의 깊은 결행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갑자기 장군(將軍)으로 전면 호칭해 국민정서상 혼란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장군(將軍)'에 대한 이미지가

바람직하게 형성되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과거 장군 출신들은 거의가 일본군에 부역한 친일파들로서 대부분 자신들의 존립과 입신영달을

위해 독립운동가와 민족진영 인사들을 학살 제거하는 데 앞장섰고

군사반란에 적극 가담하여 민주주의를 압살한 주범들이 많았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안중근 의사를 장군으로 모심으로써

모든 장군들이 본받고 지향해야할 참 장군의 모본이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 군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 철저히 정훈교육 함으로서

제대 장병들에 의해서 '장군(將軍)'호칭이 자연스럽게 전파 일반화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장군 호칭은 그동안 반민족 매국세력에 의해 배척 삭제되어온

항일독립전쟁의 정신과 전통을 새롭게 부활시킴으로써

군이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신뢰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감방

: 아직도 책상 위에는 지필묵이 그대로 놓여있다.

안중근 장군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방대한 내용의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정도로

열렬한 평화사상가이기도 하다.

그의 중심사상인 '민족'과 '평화'는 바로 우리 국군의 군사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 군은 그의 숭고한 평화사상과 뜨거운 애국애족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겨레의 안녕을 분명히 지켜내는 필승의 군대가 될 것임을 믿는다.

 

 

 

 

 

 

 
 
 

 안중근 스스로 장군으로 기록되길 원했다


 

◇ 1914년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이 제작한 사진엽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입니다.

우리는 안중근 100주년에 몇 가지 재정리해야 할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 급선무가 호칭문제입니다.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안중근 이름 뒤에 ´의사´라는 호칭을 붙여 왔습니다.

'의사'라는 호칭은 종교적 개념에서 순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라는 것은 민족적인 용어이고 내부적인 '우리끼리'의 존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안중근 장군, ´장군´이라는 호칭은 국제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하기 이전부터

무장 항일운동에 나선 독립군이었습니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만 사살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생사를 넘나든 조직적인 무장항일 독립군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부대 이름이 '대한의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의사'라는 호칭을 붙이면 딱 한 건,

민간인 신분으로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제거한 것으로

안중근의 활동이 협소해지고 역사적 평가가 빈약해집니다.

'의사'라는 것과 '장군'이라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국제법상 안중근의 하얼빈 작전의 해석이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또한 장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경우

종교적 관점에서 안중근을 이해하는데 100년의 고민이 소멸됩니다.

장군이란 용어가 국제적이라는 것에는

100년 전 안중근의 하얼빈 투쟁을 국제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100년 전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한 안중근 재판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서도

´의사´와 ´장군´에 따라 그 해석이 크게 달라집니다.

안중근에 의해 숨진 이등박문이 일본의 영웅으로 일본 역사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영웅과 일본의 영웅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의 호칭이 장군으로 통하는 날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해결됩니다.

우리가 안중근 장군 호칭을 외면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일본은 안중근 호칭이 장군으로 규정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안중근은 ´의사´를 뛰어넘어 ´장군´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안중근은 일제법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군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포로로 대접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일제 법정은 그 같은 주장을 묵살했습니다.

안중근에 대해 장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자고 하는 것은

100년 전 안중근의 주장을 이제라도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안중근 장군이 순국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 ´위국헌신 군인본분´입니다.

사형집행을 몇 시간 앞두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라는 글을 남긴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자신을 군인으로 기록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안중근의 재발견, 이것은 호칭부터 바꿔야 합니다.

2010년, 안중근 장군 순국 100주기에 우리가 할 일 중에 하나가

안중근이 그토록 원했던 독립군으로, 군인으로 신분을 복원해야 합니다.

´의사´가 ´장군´ 보다 더 거룩한 호칭이라고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장군은 1년에 수 십명 배출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의사라는 호칭이 장군보다 훨씬 값진 것으로 믿는 분들도 있습니다.

순국선열들의 애국충정은 의사든 장군이든 모두 거룩하고 값진 것입니다.

호칭으로 애국충정의 혼을 등급화 하는 것은 모독입니다. 이순신 장군, 김좌진 장군,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를 장군과 의사 호칭으로 서열화 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론'은 100년 전 안중근이 최후법정진술에서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독립 전쟁 중에 적장을 사살한 것이다.

나를 국제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하라"고 했던 절규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장군론'은 안중근이 주장했던 것입니다.

안중근은 역사가 자신을 독립군으로 기록해 주길 간절히 바랐고

독립전쟁 중에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으로 기록되길 원했습니다.

순국 100년, 최근 국회의원 150명이 안중근 장군 1계급 특진 국회청원 추인서에 서명했습니다.

비록 법적 효력은 없지만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

이라는 100년 전 안중근 주장을 추인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10년 3월 26일 '안중근 장군' 호칭을 사용한 최초의 동상이

순국 100주기에 애국충절의 고장 전남 함평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역사관에서

제막식을 갖게 된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 특별기고 : 정광일, 안중근청년아카데미 대표
- 2010.03.26  데일리안 ⓒ (주)이비뉴스

 

 

 

 

 
 

 

 고종황제 막후설

 

 

이태진 안중근하얼빈학회장 "'의사'보다 '장군' 호칭 써야"


 

"일본의 외무대신에게 보고된 정탐 기록에는 당시 의거 배후에는 고종황제가 있다고 나옵니다.

잘못된 정보는 아닐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안중근하얼빈학회 공동회장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하얼빈 의거의 막후에 고종황제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오는 26일 그의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최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이 교수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고종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안중근이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중근은 그 사실을 알았을까? 그게 큰 의문이었는데 재미있는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안중근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 전시회에서

실마리를 찾았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글씨 가운데 대부분은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 서(書)'라고 서명했다.

이 교수는 '삼가 절한다', '삼가 드린다'는 뜻으로 '서' 대신 '근배(謹拜)'라고 쓴 유묵에

관심을 뒀다.

'근배'가 적힌 유묵은 보통 받는 사람 이름도 함께 나와있지만,

유묵 3점은 이름이 없다는 점이 이 교수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특히

'사군천리(思君千里) 망안욕천(望眼欲穿) 이표촌성(以表寸誠) 행물부정(幸勿負情)' 유묵은

'천 리 밖의 임금을 걱정합니다.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합니다.

작은 충성을 표시했으니 내 충정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이는 왕에게 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임적선진위장보무(臨敵先進爲將義務. 적을 맞아 먼저 전진하는 것이 장수의 의무다)' 같은 유묵에 대해서는 지휘자의 신분으로 국가를 위해 해야 할 본분을 밝힌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 교수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그동안 줄기차게 제기한 '안중근 장군'론으로 흘러갔다.

그는 안중근에게 '의사' 대신 '장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중근이 법정에서 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힌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에 대한 호칭도 있어야 합니다. '의사'라면 의거를 혼자 한 걸로 돼버립니다.

법정에서 안중근을 단독살인범으로 몬 것은 일본의 의도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의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잘못됐으며

이를 바로잡으려면 군인 신분으로 했다는 것을 밝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얼빈역에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5번)

 

 

이 교수는 "독립운동가 연구는 조직보다 개인 중심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일본과 싸운 사람들이 맨주먹으로 싸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조광 고려대 교수나 신운용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 등은

장군이라는 호칭은 역사성이 없으며 안중근은 일개 군인으로 평가할 수 없는 사상가였다면서

'장군' 호칭을 사용하자는 이 교수의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그런 의식은 안티밀리터리즘(반군사주의) 때문이다"고 반박했다.
그는 "의사라는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문제가 많다.

우리 민족이 시대를 이겨내려 한 노력을 왜소화할 수 있으며

개인 중심의 역사를 만들어버리는 우려도 있다"면서

"본인이 한 얘기인데 지금의 기준으로 '장군'이라는 용어를 꺼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수감중의 안중근

 

그는 안 의사를 "공부할수록 놀랍다"면서

"자기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남긴 기록만 있는데 평소 쓴 기록이 나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전통교육을 잘 받은 인성과 탁월한 지능이 결합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을 유교사상, 또는 유불선(儒佛仙)이 결합해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 선교사를 통해 신지식도 많이 받아들였다.

직접 읽지는 못했더라도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접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안 의사가 당시 많은 사람이 읽던 중국 근대사상가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칸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또 "유묵 가운데 '운제(雲齊)'라는 당호(堂號)가 있는데

하늘 세계에 있을 자기 집을 얘기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은 모습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면서

"안중근은 나라가 없는 삶은 천한 것이라고 인식해 목숨에 연연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2010/03/21 (c)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안중근 가문의 ‘빛과 어둠’

 

 

40여 명 독립운동, 아들 · 딸은 ‘친일’

정근 · 공근 등 독립유공인물록에 11명 등재
준생 “죽은 아버지 죄 내가 속죄” 이토 추모

 

 

국가보훈처의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을 보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라는 최고 훈장을 받은 안중근을 비롯해

동생 정근 · 공근 등 안 의사 가문의 인물 11명이 명단에 올라있다.

특정가문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례는 없지 않으나

10명이 넘는 유공자를 배출한 것은 안 의사 가문이 유일하다.

안 의사 가문은 모두 합하면 40여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 순국 뒤 이산과 유랑을 거듭했던 가족들의 행적을 보면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안 의사의 아들 준생처럼 민족반역자로 지탄의 대상이 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안 의사 남동생인 정근(1885~1949)과 공근(1889~1940?)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정근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회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정근의 차녀 미생은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의 비서로 일했고, 백범의 아들(김인)과 결혼했다.

 

안 의사보다 열살 아래인 공근은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를 계획한 한인애국단이 백범의 주도로 결성되자 단장을 맡는 등

1930년대 백범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백범과 불화를 빚은 뒤, 1940년 행방불명돼 묘를 찾을 수 없다.

 

정근은 49년 상하이 만국묘지에 묻혔다고 하나 중국 혁명 와중에서 묘의 행방은 찾을 수 없게 됐다.

안 의사의 유해뿐만 아니라 동생 2명의 유해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안 의사의 직계인 아들(준생)과 딸(현생)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친일 행각으로 민족반역자란 손가락질을 받았다.

상하이에서 성장한 준생은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1939년 10월 조선을 방문했다.

그는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지금 서울 신라호텔 근처)을 찾아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고도 말했다.

격분한 백범이 광복 뒤 귀국을 기다리다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안 의사 가문이 독립운동 최고의 명가가 된 데에는 역설적으로 일본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며

“안 의사 가문의 사람들에겐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었고 준생의 경우 일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파가 된 경우와는 구분해서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진순 창원대 교수(사학)는

2009년 안 의사 의거 100돌을 기념해 발표한 ‘안중근 가문의 백세유방과 망각지대'라는 논문에서

“현재 안중근의 직계후손은 미국에, 동생 정근의 직계는 남한과 미국에,

공근의 직계는 북한과 파나마에 흩어져 있다.

또 다른 친인척 중에는 독일, 남미 파나마 등에 거주자도 있다.”며

남과 북, 해외로 흩어진 그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안 의사 유해 발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 2010-03-25  한겨레, 권혁철 기자

 

 

 

 

안중근 의사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 준생씨는 친일 행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중근 - 안준생(한국전쟁 당시 부산서 사망) - 안웅호(미국거주) - 안 토니주니어(45세 미국 거주)가 있다. 안 토니 주니어가 안씨 성을 가진 안중근 증손자다.

 

한편 안중근에게는  정근, 공근 두 남동생과 여동생 안성녀가 있었다.

안정근, 공근 형제는 1910년 3월 9일과 10일에 중국 대련 여순감옥에 형 안중근을 면회했다.

이 자리에서 형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몇 가지 유언을 전한다.

그 중 하나가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라'하는 것이다.

두 동생은 형 안중근 순국 이후 가족을 데리고 연해주로 망명한 뒤

1919년 이후 중국 상해로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선다.

막내동생 안공근은 한인애국단 단장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기획했으며

1939년 전후 의문의 죽음(행불)이 있었고 ,

안정근은 해방후 귀국하지 않고 1949년 상해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안정근은 슬하에 아들로 원생, 진생, 딸은 미생, 혜생,옥생, 은생을 두었다.

안진생은 미안마, 콜롬비아 대사를 지낸 바 있있고,

딸 미생은 상해에서 김구 선생 비서로 일하다가 김구 선생 장남 김인과 결혼한다.

그 사이에 딸(김효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해방직전 김인이 병사한다.

해방직후 미생(김구 큰 며느리이자 안중근 남동생 딸)은 김구선생을 수행하고 함께 귀국한다.

그러나 김구선생이 암살 당한후 남북 단독정부 꿈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남한을 떠나 미국으로 홀연히 떠나 단 한번도 귀국하지 않았다.

수 십년 후 김구의 큰 손녀 효자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모녀의 소식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안정근의 아들 안진생의 친딸 안기수, 안기려 자매는 안중근 장군 친동생인 안정근 친손녀다.

안중근 의사는 큰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이들이 안씨 성을 가진 유일한 국내 유가족이다.

  

           

1910년 3월 9일, 형 안중근을 면회하는 두 동생 정근과 공근(사진 왼쪽)

정근의 직계 후손은 남한에, 공근 직계 후손은 북한에, 안중근 직계는 미국에 산다.

(자료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www.danji12.com )

 

 

 

 

 

 

 안중근 의사의 북한의 친척들

 

조카 안우생 유족 20여명 평양 등 거주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태생이며 북반부에는 그의 친척들이 있다.”(<로동신문> 1984년 9월4일치)

<로동신문>이 언급한 친척은 안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아들인 독립운동가 안우생의 후손들이다.

최근 <춘천문화방송>(MBC)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북한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취재한 결과,

안우생의 유족 20여명이 평양을 비롯한 북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전했다.

 

안우생은 일제 때 백범의 대외담당비서로 일하며 좌우합작에 헌신했고,

광복 뒤에는 분단을 막으려고 남북합작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49년 백범이 흉탄에 숨진 뒤 홍콩으로 갔다가 북한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은

자신이 북한에서 만났던 납북 · 월북인사 220명의 소식을 설명한 <소식을 전합니다>란 책에서

“안우생은 북한에서 ‘비밀사업’에 종사하다가 1991년 평양에서 사망하여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고 밝혔다. 안우생은 기철 · 기호 · 기영,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기철은 제주 4·3때 유격대장이었던 김달삼의 딸과 결혼해 장모와 함께 평양에서 살고 있으며,

셋째 아들 기영은 99년 사망한 김병식 전 북한 부주석의 사위가 됐다고 성혜랑이 전했다.

- 2010-03-25  한겨레, 권혁철 기자

 

 

 

 

 

 

 

 

 

 안중근 유족을 가난과 탄압에 가둔 ‘친일파’ 대한민국

 

 

 

안중근 의사 집안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명문가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40명이 넘고, 독립유공자 훈장을 탄 사람도 10명이 넘는다.
안 의사의 업적과 가문이 빛난 만큼 가족의 어려움은 컸다. 그림자도 짙었다.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유언을 받았던 동생인 정근(1885~1949)과 공근(1889~1940)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정근은 청산리전투에 참가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내무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된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1949년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근의 차녀 미생은 백범 김구 주석의 큰아들 인과 결혼했다.
인은 광복 5개월 전 폐병으로 사망했다.
미생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집안과 연락이 끊겼다.
 
안 의사의 막내 동생 공근은 김구 주석의 최측근이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선서를 하고 사진을 찍은 곳이 공근의 집이었다.
1933년에는 김구 주석과 함께 장제스 국민당 총통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1939년 백범의 신임을 잃은 직후 충칭에서 행방불명됐다.
안 의사와 마찬가지로 정근과 공근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

광복 후에도 안 의사 집안은 가난과 탄압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정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김구 선생 계열에서 활동하던 안 의사 집안은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철저히 소외되고 박해받았다.
안 의사의 사촌 동생 경근씨는 '민주구국동지회'에서 활동하다 박정희 정권에서 7년간 투옥됐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통일운동을 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민생씨는 중국 옌지에 있는 사촌 동생 경옥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다"라고 한탄했다.
 

안 의사 아들, 일제 선전도구로 이용돼

안 의사 직계 가족들의 과거는 더 아프고 어두웠다.
안 의사 가족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코르지포, 중국 길림성 무링(목릉)현, 러시아 니톨리스크, 중국 상하이 등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안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는 1946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숨졌다.
안 의사가 신부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큰아들 분도(1905~1911)는
1911년 지린성 무림현에서 일곱 살에 죽었다.
일본 밀정에게 독살됐다는 설이 제기됐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의거 다음 날인 1909년 10월27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찍은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아들 분도(오른쪽) · 준생

 

둘째아들 준생(1907~1952)은 중국 상하이 식당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했다.
마약 장사를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1939년 10월 준생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 · 현 서울 신라호텔 자리)를
찾아 분향했다. 또 이토의 아들 이토 분기치(일본광업 사장)를 만나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치밀한 각본대로 연출된 화해극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조선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라며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준생이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 말했다고
보도했다. 후에 일본은 영국인 세관장이 살던 고급 주택을 사주는 등 준생을 특별 관리했다.

1945년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김구 주석은
"안중근 자식이 일본에 항복하여 상하이에서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하며 아편을 매매하므로
실로 유감이다. 직접 명령을 내려 안준생을 구금해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1945년 11월 귀국길에 김구 주석은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1950년 귀국한 준생은 1952년 피란 도중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숨졌다.
부인 정옥녀씨와 1남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권위자가 됐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안 의사의 둘째아들 준생, 동생 정근, 정근의 아들 원생, 안 의사의 딸 현생,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

 
장녀 현생(1902~1959)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1909년 어머니가 두 아들만 데리고 망명하자,
현생은 프랑스 신부의 보호 아래 서울 명동의 수녀원에서 지냈다.
1914년 13세가 돼서야 현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족과 합류했다.
19세가 되던 1919년 안 의사 가족은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이사했고,
여기서 현생은 불문학을 공부한다.
1941년 3월26일 현생은 남편 황일청과 박문사를 참배하고 아버지의 죄를 사죄했다.
현생 부부도 일본의 특별 관리를 받았다. 1946년 현생은 서울로 돌아왔고,
한국전쟁 당시 대구 효성여대에서 프랑스어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서울에서 궁핍하게 생활하다 1959년 서울 북아현동 집에서 고혈압으로 숨졌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윤원일 사무총장은
"안 의사 유족은 광복된 후에도 미국 · 파나마 · 독일 · 북한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불우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사는 독립운동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라고 말했다.
- <시사IN> 2010.03.26
 
 
 

 

 

 

 장남 ‘분도’ 독살설, 엄밀한 검증 없어

 

 

'위국헌신' 사형직전 유묵인지 불분명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신화라는 말이 있다.
오류가 반복되다 보면 사실로 굳어지고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느덧 잘못된 사실에 근거를 둔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백범어록>을 펴내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 잡으려 했던
도진순 창원대 교수(사학)는 '백범 신화'를 깨야 백범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백범이 쓴 것으로 알려졌던 대단한 명문인 '선열기도추념문' '류인석 추도 제문'이
위당 정인보의 대필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잘못된 '신화' 또한 존재한다.

많은 학자들이 근거가 불분명한 안중근 의사 장남 분도의 독살설을 확정된 사실로 쓰고 있다.

최서면 한국국제연구원 원장은 "분도가 일본 밀정에 의해 독살당했다면

당시 중국 언론 또는 러시아 연해주의 한글판 러시아어판 언론들이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은

대서 특필했기 때문에 어디든 크게 다뤘을 것인데 그에 대해 보도한 언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분도 독살설은 안 의사 거사 당시 러시아어 통역인 유동하(당시 18살)의 누이동생 유동선이

그 아들인 김파 시인에게 했다는 말인데 ,

모친인 유동선의 얘기에 근거를 둔 김파 시인의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 이라는 글은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많은 문헌에서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는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에게 감화돼 사형 직전 '최후의 유묵'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 헌병 치바 토시치의 이야기다. 치바는 당시 뤼순 관동도독부 육군 헌병 상등병으로,

동양 평화를 깨뜨린 일본의 범죄에 대한 단죄의 정당성을 주장한 안 의사한테 감화돼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대림사(大林寺, 다이린지)라는 절에 안 의사의 위패를 모셨던 인물이다.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인 주지 사이토 다이켄은 치바의 이야기를 담아

1985년 <내 마음의 안중근> 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을 보면,

안 의사는 치바가 유묵을 부탁하는 것을 한차례 거절했던 것을 미안하게 여겨 오던 중,

사형 집행 5분 전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이다)'이라는 유묵을 써서 건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유묵이 흔히 알려졌듯 과연 최후의 유묵이었는지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직접 치바에게 써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안중근 기념사업회의 신운용 박사는 "안 의사의 최후 사형집행 전까지 함께 한 '간수'로 돼 있는

치바는 실제로는 호송을 맡았던 헌병이었다"며

"무엇보다 치바는 한국말을, 안 의사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 치바로부터 직접 이 유묵을 구입한 최서면 한국국제연구원 원장은

안 의사 유묵에는

손가락이 잘린 손을 낙관으로 해 안중근(安重根)하고 나서 '서(書)'라는 표현을 쓴 것과

'근배(謹拜, 삼가 드린다)'라고 한 것이 있는데,

근배는 지휘관 급의 장교 또는 검사장 등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줄 때 썼다고 지적했다.

 

위국헌신 유묵에는 명확하게 근배라고 쓰고 있어 헌병 상병에게 준 유묵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안중근 관련 글이나 논문은 이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고 신 박사는 지적한다.

'위국헌신 군인본분'은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 2010년 3월25일 ⓒ 한겨레신문사,

 
 
 

 

 

 

 

 

 

 安의사 큰딸 안현생씨

 대구 효성여대 불문학 교수로 3년간 재직 기록 발견

대구가톨릭대, 사령원부(辭令原簿) 발견, 공개

 

안중근 의사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다.

1902년에 태어난 딸 현생씨가 아버지를 여읜 것은 8살 때였다.

프랑스인 신부의 보호 속에서 지내다가 13세 때 일제를 피해 제정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16세 때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불문학과 미술을 
공부했다.

해방이후 1946년 귀국해 서울에서 지내다가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란,

효성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수복 후 서울 북아현동에서 생활하다 1960년 58세를 일기로 고혈압으로 타계,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묻혔다.

 

안중근 의사의 큰딸 안현생(1902~1960)씨의 해방 이후 행적은 풍문으로만 전해져 왔다.

그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문학과 불문학 담당 교수로 재직한 사실을 기록한 서류가

처음 발견됐다.

 

국립대구박물관은 25일 “대구가톨릭대 사령원부(辭令原簿)에 따르면

안 의사의 딸이 1953년 4월1일부터 1956년 3월31일까지 교수로 재직한 사실이 확인됐다.” 밝혔다.

 

사령원부에는 ‘단기 4286년 2월18일(양력 1953년 4월1일) 교수에 임함. 安賢生’이라고 적혀 있다.

3년 뒤에는 ‘원(願)에 의하여 본직을 면(免)함’이라고 기록돼있다.

안씨가 소속된 문학과는 국문과, 영문과, 불문과 등의 전공으로 이뤄졌으며

시인 조지훈, 구상도 국문학 전공으로 국문학 전임강사 및 부교수로

안씨와 함께 문학과에 재직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녀가 교수로 재직한 사실은 1992년 발간된 '효성여대 40년사'에도 기록돼 있으나

당시에는 안 중근 의사의 딸인지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로 주거지를 옮기기 위해 스스로 교수직을 그만둔 것으로 추정된다.   

 

안중근 의사의 장녀 안현생씨의 발령사항(굵은 선으로 표시)을 기록한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전신)의 당시 '사령원부(辭令原簿)'. (대구가톨릭대 제공)- 3월 25일 공개됐다.

'순국 100주년 안중근 특별전'(2월23일~4월25일)을 열고 있는 국립대구박물관 이내옥 관장이 3월22일 대구가톨릭대를 방문, 소병욱 총장과 50여년 전 사령원부를 뒤져 확인했다.

"안중근 의사는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의 관서지부장을 맡아 활동했고

1899년 가톨릭 근대교육기관인 대구 해성재(현 효성초교)에서 강연하는 등

대구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덧붙였다.

 

 

 

▲ 1920년 연해주에서 상하이로 옮겨와 살던 안중근 의사 유족들.

딸 현생(앞줄 왼쪽)씨를 비롯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동생 정근, 차남 후생, 조카 원생(정근의 아들), 조카 우생(동생 공근의 아들).

-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 2010.03.25  ⓒ 경향신문, 연합신문

 

  

 

 

 

 

 

 

 

 安의사 조카며느리 안노길 할머니

 

中 감옥서 치마 풀어 만든 태극기 간직

“일본은 안씨가문, 조선의 원수야”

 

“일본은 안씨 가문의 원수, 조선의 원수야!”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를 사흘 앞둔 23일

거사 장소인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에서 만난

5촌 조카며느리 안노길(96) 할머니는 연신 태극기와 안 의사 관련 자료들을 어루만지며

어눌한 우리 말로 “일본, 원수, 안씨 가문….” 등을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하얼빈시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며느리 안노길 할머니. 안 할머니 방에는 안 의사 사진(왼쪽)과 시할아버지 부부 사진, 그리고 비록 규격에는 맞지 않지만 손수 만든 태극기가 걸려 있다.

 

할머니는 17살에 안 의사의 사촌동생인 홍근씨의 3남 무생씨와 결혼했지만

일제에 의해 남편이 숨진 뒤 원래 차씨였던 성을 안씨로 바꾸고

‘안 의사 알리기’에 매달린 채 여태 혼자 살아왔다.

특히 중국 건국 이후 대약진운동이 한창이던 1958년 종교(가톨릭) 문제로

중국 당국에 의해 반혁명죄로 체포돼 1998년 석방될 때까지

감옥과 교화소에서 외부와 단절된 40년의 세월을 보냈다.

얼마나 시달렸던지 2000년 처음으로 할머니를 만나 지금까지 현지에서 보살피고 있는

최선옥(72· 전 성모자애병원 원장) 수녀는 “차마 못볼 꼴이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광복회가 3월25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추모제향에서 안 의사의 증손자(토니 안)가 절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세상과의 단절도 할머니의 고국사랑과 안씨 가문에 대한 열정은 식혀놓지 못했다.

감옥 안에서 치마 실오라기를 풀어 만든 태극기를 속옷 속에 수십년간 감춰 보관해올 정도로

할머니의 애국심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치매 때문에 정신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지금도 안 의사 관련 자료만큼은 손수 챙기고 있다.

 

3월 25일 뤼순 항일열사기념관의 안 의사 흉상 앞에 꽃이 놓여져 있다. 

박진(왼쪽 두번째)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을 비롯한 외통위 소속 의원들이 3월25일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중국 하얼빈을 방문, 안 의사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안 의사 유해 문제를 꺼내자 할머니는 “일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의 유해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할머니는 안 의사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멀리 고국 땅에서 찾아온 방문객의 손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지난해 방문객들이 용돈으로 쓰라며 쥐여준 돈 5000위안을

최 수녀를 통해 하얼빈의 안 의사 기념사업 일꾼들에게 기탁하기도 했다.

최 수녀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귀띔했다.

‘안중근’은 할머니의 100년 삶 그 자체인 셈이다.

- 연합뉴스

 

 

 

 

   안중근 손녀 “유해 발굴 미온적 100년이 섭섭했다”

 

 

- 한중일 유해발굴 계획 '희망적 기대'
- 고난의 가족 삶 "원망 없어요"

- 호칭 '장군'보다 '의사'가 더 뜻 깊어

 

 

 


■ 방송 : FM 98.1 (07:00~09:00) CBS <김현정의 뉴스쇼>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안중근 의사 외손녀 황은주 씨

 

2010년 3월25일 오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추모제향에

안중근 의사의 후손으로 증손자 토니 안(46), 친손녀 안연호(73), 외손녀 황은주(83), 황은실(79) 및

광복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렸다.

안 의사의 허묘(虛墓)가 있는 효창공원에서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개최한 추모제가 열렸다.

 

3월26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념식에서 정운찬 국무총리, 김양 국가보훈처장과  증손자 토니 안 · 손녀 안연호, 외손녀 황은주 · 황은실씨(오른쪽부터)가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김현정 앵커 :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 황은주 : 83살 이예요.

◇ 김현정 앵커 : 손녀 세 분 가운데 다른 두 분은 미국에 오래 사셔서 우리말을 못하신다고요.

외할아버지 순국 100년을 맞는 감회가 어떠세요?
◆ 황은주 : 감회가 남다르게 가슴 벅차고 할아버지의 위대하심을 깨닫죠.

◇ 김현정 앵커 :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할아버지님에 대한 이야기하신 게 있을까요?
◆ 황은주 : 그 때는 제가 너무 어렸고 어머니도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안 의사 께서는 나라를 위하는 일념으로 집안에 잘 안 계셨기 때문에

저희 어머니 어렸을 때에도 기억이 명명하게 떠오르지 않고요. 다만 젊어서는 사냥을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사냥총을 매고 들락날락하시는 것을 엿 보셨던 추억만 남아있으신 것 같아요.

◇ 김현정 앵커 : 안 의사 돌아가신 게 어머니 나이 고작 8살 때시니까.

그 기간 동안도 계속해서 나라 일 하시느라고 집안 챙길 여력이 없으셨던 거죠?
◆ 황은주 : 그렇죠.

◇ 김현정 앵커 : 할아버님에 대해서 어머니가 원망은 안하시던가요?
◆ 황은주 : 원망을 왜 하나요. 우리 아버지는 으레 그런 분이시다, 하고 항상 존경하셨죠.

그때는 어려서 그런 판단력도 없었을 때고 5~7살 그때에 늘 아버지께서 외부의 일에 전념하셨기 때문에

가족들과 한 자리에 모여서 생활하신 기억이 없으신가 봐요.

보통 우리네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가정생활과는 다르죠.

◇ 김현정 앵커 : 그런데 어머니, 그러니까 안 의사의 따님께서는 대구에서 불문과교수로 재직하셨어요?
◆ 황은주 : 피난시절에 저희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삼촌께서 명동성당 수녀원에 보호를 부탁했어요.

그리고 그 가족은 모두 러시아로 망명하셨거든요.

어머니, 그러니까 안 의사의 8살 딸을 명동성당에 맡겨놓았어요.

나머지 가족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피난을 갔어요.

그 이후에 어머니를 또 데리고 안 의사 가족들 거주하는 러시아로 데려왔어요.

어머니가 당분간 수녀원에서 몇 년 보호를 받았는지 확실한 게 없고.

그 다음에는 16살 때 상해로 가족이 이동했습니다. 피난시절에 효성여대가 창설됐거든요.

16살 이후에 상해에서 프랑스계 숭실여전이라고 대학교를 나오셨어요. 그래서 불문학을 불어를 잘 하세요.

◇ 김현정 앵커 : 그래서 가족들이 어려운 삶을 사셨다, 고초를 많이 당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교육을 받으셨네요.
◆ 황은주 : 물론이죠. 왜냐하면 천주교 계통에서 무상으로 학비 안 받고 면제해줬고요.

사비로 공부를 한 게 아니에요. 효성여대 창설 때 불문과 교수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혈압으로 얼마 못 다녔어요.

◇ 김현정 앵커 : 할아버지 안중근 의사 때문에 가족 전체가 평탄치 않은 삶을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원망은 없으세요?
◆ 황은주 : 당연히 일제치하에서 안 의사가 적인데 좋게 봐줬겠어요?

◇ 김현정 앵커 : 일가친척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사시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 가문은 독립운동가의 가문인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은 안 드시던가요?
◆ 황은주 : 그런 생각 없어요.

◇ 김현정 앵커 : 최근에 안중근 의사를 장군으로 불러야 되느냐, 의사로 불러야 되느냐,

이런 논란들이 있습니다. 유가족분 입장에선 어떠세요?
◆ 황은주 : 제 생각에는 물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상해 일대에서 의군활동을 하셨지만

장군이라는 것보다는 의사라는 게 뜻이 깊은 것 같아요.

◇ 김현정 앵커 : 이번엔 정부가 유해 발굴 작업을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합니다.

정부에 바라시는 점이 있다면요?
◆ 황은주 : 그게 제일 초점이죠.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굉장히 그동안 안타깝고 섭섭하고 그동안에 미온적인 것은 사실이고요.

이번에 이명박대통령과 보훈처장이 다 협의가 돼서 적극적으로 한중일 3개국에서 발굴사업 추진 중이라

아주 희망적이고 기대가 많습니다. 

 

2010.03.26 ⓒ CBS 노컷뉴스

 

 

  

 

 

 

 

 

 가톨릭 ‘안중근 껴안기’…

 “친일 반성이 먼저”

 

3월26일 추기경 집전 순국 100주년 기념미사

 

과거 '신자'로 인정치 않았던 뼈아픈 과거

"일제 협조하며 성장… 면죄부 활용 경계를"

 

 

2010년 3월26일 한국 가톨릭은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집전으로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는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한국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가

주교좌성당에서 교구 차원의 공식적인 안 의사 추모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처음이다.

     

도마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저격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도였다.

이토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그는 성호를 그으며 감사 기도를 올렸고,

뤼순 감옥에서 형장으로 나아갈 때도 기도를 잊지 않았다.

그는 영세를 받은 이후 마지막까지 신앙을 놓지 않은 신실한 천주교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19살 때인 1897년 1월, 안 의사와 가족, 친척들은 아버지 안태훈의 권유로 36명이 동시에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토마스란 세례명을 받은 안중근은 교리공부를 열심히 해 총대(성당 사무장)로서 독실하게 교회활동을 했다.

 

국외로 망명해 의병활동을 하던 안중근이 1909년 10월26일 일제의 최고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당시 한국 가톨릭의 최고지도자인 조선교구장 뮈텔(1854~1933, 프랑스인) 주교는 사형을 앞두고 마지막 성사를 원한 안 의사의 요청을 거부하고, 일본 검사도 허락한 신부의 면회와 성체성사를 거부하고, 안중근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도 부인했다.

또 그는 황해도 신천 성당에서 함께 지내던 안 의사를 찾아가 사형 직전 종부성사를 한 빌렘 신부에 대해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2개월간 미사 집전을 금하는 성무집행 금지 조처를 내렸다. 십계명의 하나인 '살인죄'를 범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안중근의 신앙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일본인 검사 앞에서 가톨릭 신자임을 밝혔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가톨릭에서 죄악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평화로운 남의 나라를 침략해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죄악이 되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장남 분도를 가톨릭 신부로 키워달라고 아내에게 유언했다.

 

1890년부터 1933년 숨질 때까지 우리나라 가톨릭의 최고지도자였던 뮈텔 주교는

일제의 침탈을 수수방관하는데서 나아가 일제를 적극 도왔다.

 

지난해 공개된 뮈텔 주교의 1911년 1월11일 일기를 보면,

안중근 일가족과 가까운 빌렘 신부가 안중근의 사촌동생 야고보(안명근)로부터 고해성사를 듣고는

'조선인들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안중근의 동생 야고보가 있다'는

'정보 보고'를 편지로 보내자, '눈길을 헤치고 가서' 일제 아카보 장군에게 알려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의 밀고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 105인'이 검거된다.

후일 개신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 힘을 합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가톨릭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을 비롯해 가톨릭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국외자'로 남는다.

 

1970년대에 출범한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한국 가톨릭계에선

안중근 복권운동과 함께 안중근 정신을 잇는 운동이 벌어졌다.

제국주의의 일원이던 프랑스인의 시각으로 식민지 백성의 의거를 '살인 행위'로 단죄한 것을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을 놓고 가톨릭 지도부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김수환 추기경(2009년 선종)은 1993년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드리고,

"일제치하 교회가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과오를 범한 데 연대책임을 느끼며,

안 의사를 포함해 일제 때 이 땅의 국민이 자구책으로 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로, 의거로 봐야 한다"며

안 의사를 복권시켰다.

 

이후 안중근은 가톨릭 제도권으로 돌아왔고, 한국 가톨릭의 상징으로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에 협조하며 가톨릭의 성장만을 꾀하던 당시 지도부의 맥을 이어온 한국 가톨릭이

'가톨릭에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인물이 있다'며 안중근을 이용하는 데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안중근 평전>과 <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 등의 저서를 통해 '가톨릭교인 안중근'을 조명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권력의 편에 서서 약자의 편에 서는 신부들을 내치는 현 가톨릭에서

안중근 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깨물지 못한 혀> 에서 이 문제를 다룬 김유철 '가톨릭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은

"한국 가톨릭에서 안중근과 친일 등에 대한 참회가 선행됐다면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나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참여하는 등

권력 협조라는 이름으로 불의가 계속 이어져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안성 미리내실버타운에 3월26일 안중근 동상을 봉헌하기에 앞서

5억원 규모의 바보장학회를 설립한 방상복 신부는

"안중근, 노무현, 김수환처럼 공익을 위해 개인을 버릴 수 있는 바보들의 출현을 염원하며

가톨릭도 그렇지 못했던 과거를 참회하고 그런 행동과 삶을 보여주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 2010.03.09 한겨레신문사

-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더보기


● 안중근,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쏘다 !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048


● 위인 안중근과 위인전의 안중근 :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