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매듭장 정봉섭 보유자(무형문화재 제22호)

Gijuzzang Dream 2010. 2. 7. 06:27

 

 

 

 

 

 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정봉섭 보유자

 4대, 매듭 계보를 잇다

 

 

 

 

 



 

 

 

매듭장, 그 천직(天職)에 순응하다

 

본디 장인(匠人)이란 노력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천성에 맞아야 하고, 그 다음이 노력이다.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매듭장 정봉섭 보유자는 가업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매듭장으로서 갖추어야 할 은근과 끈기까지 그대로 물려받았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가느다란 실 가닥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일이니만큼 어지간한 꼼꼼함이 아니고서는 버텨내기 힘든 일이 매듭을 만드는 일이다.

매듭장 무형문화재보유자였던 아버지(故 정연수 선생)와 어머니(故 최은순 선생)의 뒤를 이어 매듭장의 길을 걷고 있는 정봉섭 보유자는

반세기가 넘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천직 앞에 겸허하고 겸손하다.

 

“매듭장이 되는 일을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매듭장이었던 아버지와 그리고 일을 함께 거들며 매듭장으로서 대를 이으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랐으니까요. 매듭 공예를 배워야겠다고 정식으로 전수 받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을 옆에서 돕고 잔심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이 눈에 익고 손에 익더라구요.”

 

매듭을 만드는 그의 모습은 일흔이 넘은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꼿꼿한 힘이 있다.

허리 수술로 인해 혼자 힘으로 이동조차 어려운 몸이지만 매듭을 쥔 손끝만큼은 여느 어린 전수자들보다

훨씬 더 매섭다. 이제는 후진을 양성하며 조금은 느긋하게 지내도 될 듯하지만,

정봉섭 보유자의 열정은 매듭을 처음 잡았을 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적으로 전통 공예를 하면서 생활을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과 타협하다 보면 애써서 지켜온 전통의 맥을 놓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지요.

그게 제가 전수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구요.”  


매듭의 계보를 잇고 엮다 

 

매듭은 오색물감으로 명주실을 염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매듭을 맺어 대송곳으로 질서 있게 죄어서 쓰임새에 따라

오색영롱하게 엮어가는 작업이 이어진다.

노리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열흘 이상의 수공(手工)이 들어가야 한다. 노리개에 달린 한 가닥의 술을 만드는 데만도 수백 차례 이상 쉬지 않고 실을 꼬아야 완성된다. 매듭은 그야말로 온전히 인내와 공력으로 탄생되는 산물인 셈이다.

 

“며칠을 매달려 완성된 작품도 있고, 몇 달을 공을 들여 만들어내는 것도 있어요.

작품 하나하나 애틋하고 정이 가죠.

그런데 이런 전통공예가 사람들에게 대접을 못 받는 것 같아서 서운하고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해요.

요즘 사람들은 매듭에 대한 관심도 적은 편이고, 수요도 많지 않은 편이죠.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전통 매듭을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

아버지 정연수 선생이 처음 매듭을 시작할 때만 해도 매듭의 쓰임은 다양했다.

노리개와 목걸이, 팔찌 등 작은 소품에서부터 상여와 깃발 등에도 빠지지 않고 매듭이 쓰여졌다.

매듭을 생업으로 하던 이들이 광화문 일대에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며 살아갔을 정도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전후로 매듭 공예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먹고살기 급급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 매듭을 찾지 않았고,

매듭을 만들던 사람들 역시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네 전통매듭의 위기였다.



“아버지께서 그 동네를 지키던 마지막 보유자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나고 없는 그 동네에서 아버지 혼자 남아 매듭을 만들고 계셨죠.

먹고 살기는 힘들어도 무척 좋아했던 일이니까 등질 수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그렇게 1968년에 무형문화재 매듭장 기능보유자가 되셨고,

1976년 어머니가 그 뒤를 이어 기능보유자로 인정 받으셨죠. 2006년에는 저에게 그 영광이 왔네요.

부모님이 어렵게 지켜온 전통의 맥을 제가 잇고 있다는 것이 감개무량합니다.”


엄마와 딸 혹은 스승과 제자

 

3대를 이어온 매듭의 계보는 순리대로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정봉섭 보유자의 딸인 박선경 씨가 가업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매듭장 전수자로 지정돼 어머니와 할머니 곁에서 실을 풀고 꼬기를 하며

1994년 정식 이수 조교로 인정받아 4대의 공식적인 매듭 계보가 완성됐다.

박선경 씨의 전공은 무용으로 다소 의외다.

 

“저희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저 역시 어머님의 일을 도우며 자연스럽게 이 일을 배우게 됐죠. 그러나 이 일을 업으로 삼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천성은 어쩌지 못해 그녀는 운명에 이끌리듯 외할머니처럼, 어머니처럼 물레 앞에 앉았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그녀의 결정에서 비롯됐다. 정봉섭 보유자는 이런 딸에 대해 ‘될 성 싶은 아이였다’고 이야기한다.

 

“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아요. 제가 실 푸는 일을 시켰는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서 엉킨 실을 다 풀더라구요.

그게 보통 인내와 끈기가 없이는 못하는 일이거든요.

그 모습을 보고 ‘이 아이는 매듭을 해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죠.”


박선경 씨 역시 20년 넘게 매듭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깐깐한 어머니 앞에서는 종종 혼이 나곤 한다.

어렸을 적부터 매사에 완벽을 기하던 어머니였기에 그녀 역시 불평 없이 훈육을 달게 받아들인다.

“호랑이 엄마셨어요. 매듭일은 물론 집안일까지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으셨죠.

어떤 일을 하시든지 무서운 집중력으로 몰두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가 이루신 만큼은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이 되어보니, 어머니가 얼마나 대단하신지 알겠더군요.”

 

정봉섭 보유자와 박선경 씨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이자, 스승과 제자,

그리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동력자이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롤모델이다.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일이 외롭고 고단하지만 그래도 서로 어깨를 토닥여가며 힘든 길을 함께 하고 있다.

 



“상여에 매다는 대봉유소를 재현한 대작을 완성해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 상여매듭을 만들 때 긴 학교 울타리를 따라 실을 푸시던 부모님의 모습을

저도 이 세대에 남겨보고 싶어요.

그게 매듭장으로서 제 인생에 남은 숙제이자 맺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매듭의 매력에 대해 ‘無에서 창조되는 아름다운 有’라고 말하는 정봉섭 보유자.

힘 있게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나이를 잊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평생을 해왔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는 그에게서 잊고 있던 전통의 소중함이 절절하게 배어 나온다.

그가 만든 힘 있고 아름다운 매듭처럼,

그가 남긴 유업(遺業) 또한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으로 남을 것이리라.

그리고 그 유업은 우리네 역사와 함께 유수(流水)처럼 순리대로 흘러 갈 것이다. 
 

- 글 · 이미란  / 사진 · 최재만  

- 2010-01-20,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