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율도(栗島, 밤섬)의 뽕나무밭

Gijuzzang Dream 2010. 2. 5. 06:46

 

 

 

 

 

 

 율도(栗島, 밤섬)의 뽕나무밭 살인사건

 

 

 

 

서강대교가 지나가는 밤섬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1533년 정월 초 한양의 도성에서 10리 남짓 떨어진 한강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여인이 목이 묶인 채 얼굴이 깨지고 몸은 난자당한 모습으로 살해되었다. 시체는 율도(栗島)의 뽕나무 아래에 버려져 있었다. 이에 중종은 승정원에 명을 내려 범인을 잡도록 했다.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으니 매우 놀랍다. 삼성 교좌로 의심나는 사람을 끝까지 추문해야 한다.”

(중종실록 1533년 1월 17일)

삼성 교좌(三省交坐)란 세 관청이 임금의 특지를 받고 죄인을 교대로 추국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세 관청이란 대명률에 규정된 10악(惡)을 비롯해 중요한 사건에 관계된 죄인을 국문했던 곳으로서

주로 의정부와 사헌부, 의금부 등을 일컫는다.

임금이 직접 명을 내려 삼성 교좌로 범인을 끝까지 잡아들이도록 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이 사건을 얼마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로부터 열흘 후 이 사건에 대해 판의금부사 김근사 등이 중종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그 보고 내용을 보면 진실 파악보다는 좀 이상한 방향으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도의 유기된 시체는 반드시 대갓집의 사나운 부인이 투기하여 죽였을 터인데,

세 겨린(살인사건을 저지른 범인의 이웃에 사는 사람)이 알지 못합니다.

노비들에게 고발하도록 하라고 하문하셨기 때문에 신들이 대명률을 보니,

노비와 품팔이 하는 사람은 모반, 대역 외에는 자기 주인의 일을 고발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전례를 상고해 보아도 이런 예가 없으니 이제 전례를 만들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중종실록 1533년 1월 27일)

이 내용을 쉽게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즉, 그 여인이 처참하게 살해된 것은 대갓집 유부남과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질투심에 불탄 대갓집 마나님의 지시로 그 하인들이 저지른 일이므로 이웃도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중종은 범죄 사실을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

지시를 받고 살해에 가담한 노비들이 주인을 고발하도록 했는데,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는 것은 모반이나 대역사건 이외에는 전례가 없으므로 불가하다는 내용이다.

그럼 목격자도 없고 범죄에 가담한 노비의 고발도 받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김근사 등은 “만약 시체의 먼 친족이나 가까운 친족, 다른 집의 종이나 공노비가 고발할 경우에

종량(從良 ; 아버지가 양인이고 어머니가 천인일 때 그 자식이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것)

하도록 허락”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뒤에 범인이 잡혔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을 유야무야된 것으로 보인다.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면 피해자는 분명 천한 신분이었을 테고,

만약 피해자 가족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해도 대갓집을 상대로 하여 함부로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율도는 밤섬의 옛 명칭

그럼 이 사건이 발생한 율도는 대체 어디일까.

율도는 지금 한강 서강대교 바로 아래에 위치하여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밤섬이다.

그 당시 밤섬의 환경을 살펴보면 이 살인사건이 왜 하필이면 여기서 발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체가 발견된 곳이 뽕나무 아래였다고 했는데, 조선시대 때 밤섬은 뽕나무 천지였다.

세종실록을 보면 당시 밤섬의 뽕나무 수는 8천280주였다고 되어 있다.

또 밤섬의 흙 성질이 뽕나무에 매우 적합하다는 기록도 보이며,

성종 때에는 연희궁과 아차산, 낙천정의 세 잠실에 심은 뽕나무 묘목을 율도에 옮겨 심게 하고

관아의 노비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잠실이란 누에를 기르는 곳이란 뜻인데, 조선시대 때는 국가 차원에서 양잠업을 육성했다.

때문에 왕비가 친히 모범을 보이기 위해 궁내에는 내잠실을 설치하고,

각 도마다 뽕나무를 기르기 알맞은 곳에 도회잠실을 두었다.

밤섬에도 국가에 소속된 뽕나무 밭인 공상(公桑)이 있었는데, 상의원에 소속된 뽕밭 등이 그것이었다.

그밖에도 밤섬에는 봉상시에 딸린 채소밭과 응방(鷹坊)에 딸린 밭 등이 있었고 감초를 기르기도 했다.

이는 그만큼 밤섬의 땅이 기름졌다는 증거이다.

마포팔경 중에서 율도의 모래밭 풍경은

으뜸으로 꼽혔다. 사진은 6‧25 전쟁 전의 밤섬 풍경. 


 

따라서 인조 때에는 밤섬에 뽕나무를 심지 않고

사대부들이 토지를 점유하여 개인 밭으로 만들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즉, 조선시대 때만 해도 밤섬은 그만큼 탐나는 땅이었다.

이에 비해 밤섬 바로 옆에 위치한 여의도는 당시만 해도 별로 쓸모없는 땅이었다.

예부터 여의도는 곡식이 잘 자라지 못하는 모래땅이 많았다.

그래서 여의도라는 명칭도 ‘하잘 것 없는 섬이니 너나 가져라’라는 뜻에서

너의 섬, 즉 여의도(汝矣島)가 되었다고 한다.

여의도의 또 다른 이름인 나의주(羅衣州)나 잉화도(仍火島) 역시 너벌섬이란 뜻을 지닌 말로서,

너른 벌의 섬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조선시대 때 여의도에는 전생서와 사축서를 두어 돼지와 양, 염소 등을 방목하여 가축을 길렀다.

그런데 1556년(명종 11) 4월 4일자의 명종실록을 보면

당시 여의도에 사는 주민들의 성풍습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잉화도에는 전생서와 사축서에 딸린 종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그들의 풍속이 족친끼리 서로 혼인을 하여 사촌이나 오촌도 피하지 않는가 하면

홀아비나 과부가 있으면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어 결혼시키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같이 살면서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대개 섬의 사면이 모두 물이고 인접한 마을이 없어 사람들의 이목이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섬을 출입하기 위해 물을 건널 적에 예사로 남녀가 서로 끼고 업고 건너는데

그들의 추잡한 행실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원래 여의도와 밤섬은 강물의 양에 따라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같은 섬이었다.

한말 때만 해도 여의도와 밤섬이 '여율도'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여의도의 성풍습이 그토록 개방적이었다면

사랑의 밀회 장소로는 너른 벌뿐인 여의도보다 오히려 뽕나무가 우거진 밤섬이 적합했을 것이다.



에로티시즘의 이미지가 강한 뽕나무

예로부터 뽕나무 하면 유난히 섹스나 에로티시즘의 이미지가 강했다. 

당시에는 한양에서 보이는 한강의 동쪽을 동호, 서쪽을 서호라고 했다. 지금도 동호는 동호대교, 서호는 서강대교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동호의 경우 도성에서 비교적 가깝고 독서당이 있어 문인들의 문화공간이었다. 그러나 10리 남짓 떨어진 서호는 면학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유흥 문화가 더욱 돋보이는 곳이었다.

마포강변의 경우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밤섬의 모래밭은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여 마포팔경 중 으뜸으로 꼽혔다.

양녕대군이 말년을 보낸 영복정과 안평대군의 담담정 등 풍류객들의 정자와 누각이 마포강변에 유독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마포강변에서 얼큰하게 취한 풍류객들이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기에 밤섬의 뽕나무 밭만큼

좋은 곳도 없었을 것이다. 즉,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체가 밤섬의 뽕나무 아래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예로부터 뽕나무 하면 유난히 섹스나 에로티시즘의 이미지가 강했다.

나도향의 단편소설 ‘뽕’에서 유부녀가 남의 뽕을 훔치러 갔다가 뽕지기에게 들켜 정조를 파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작품에서 뽕나무는 물질적 욕구와 탐욕적인 본능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뽕’ 시리즈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에로티시즘 영화로 인정받고 있다.

일석이조를 의미하는 ‘뽕도 따고 임도 본다’는 속담 역시

뽕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맺어지는 남녀 관계를 암시한다.

왜 뽕나무는 이처럼 남녀의 애정 관계와 얽힌 이미지가 강했던 것일까?

 

 

뽕나무 속에 숨겨진 에로티시즘

 

 

뽕나무과에 속하는 작은 키나무인 뽕나무는 오디라는 열매가 열려 오디나무라고도 부른다.

'뽕나무 상(桑)' 자는 3개의 가지가 뻗은 뽕나무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을 철칙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젊은 남녀가 몰래 만날 만한 장소가 없었다.

따라서 뽕잎을 따던 뽕나무 밭은 이와 같은 남녀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밤섬은 고려 때 죄인의 귀양지였다.

특히 뽕나무 꽃이 피는 4~6월은 젊은 남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계절로서, 키 작은 가지에 뽕잎이 무수하게 달리면 밖에서 잘 보이지 않아 밀회 장소로서는 그만이었다.

뽕나무를 밀회 장소로 이용한 것은 다른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시경’의 ‘용풍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포함된 연애시가 실려 있다.

‘누구를 그리워하나(云誰之思) / 아름다운 강씨네 맏딸(美孟姜矣) /

만나자고 한 곳은 상중이고요(期我乎桑中)’

여기서 상중은 바로 뽕나무 밭이다. 따라서 상중은 남녀의 밀회 장소를 의미하고,

남녀 간의 밀회 또는 음행의 즐거움을 ‘상중지희(桑中之喜)’라고 했다.

남녀 간의 만나자는 약속을 일컬어 ‘상중지약’이라 한 것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으로서 비극적 사랑의 대명사인 ‘로미오와 줄리엣’도 뽕나무와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 비극의 소재가 된 것은 바로 바빌로니아의 설화인 ‘피라모스와 티스베’이야기다.

바빌론의 한 마을에 살던 피라모스와 티스베는 서로 첫 눈에 반해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지만,

양가 부모들은 둘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둘의 관계를 눈치 챈 아버지에 의해 티스베는 방에 갇혔고,

이웃한 두 집의 벽에 나 있는 틈으로 두 사람은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다 두 사람은 몰래 도망가기로 약속하고, 니노스 왕릉의 뽕나무 아래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티스베는 갑자기 나타난 사자 때문에 몸을 숨겼고,

한 발 늦게 온 피라모스는 피투성이가 된 채 떨어져 있는 티스베의 베일을 발견하고

그녀가 사자에게 죽음을 당한 줄 안다.
절망한 피라모스는 뽕나무 밑에서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자살한다.

잠시 후 숲 속에서 나온 티스베는 자신 때문에 자살한 피라모스를 발견하고는 그의 뒤를 따라 자결한다.

이 둘의 피가 흘러서 흰 뽕나무 열매가 진홍색으로 물들었고,

오늘날까지 뽕나무는 새빨간 오디를 맺는다는 이야기다.



뽕잎에는 단백질이 많아

1968년 당시 밤섬의 폭파 장면 

뽕나무와 에로티시즘과의 연관은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다. 누에는 뽕잎만을 먹고 단백질 덩어리인 비단을 토해낸다. 이는 뽕잎이 콩 다음으로 단백질이 많은 식품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용해 지난 2001년에는 누에의 수나방과 번데기를 원료로 하여 성호르몬과 정자 수, 지구력을 현저히 증가시키는 한국형 발기부전 치료제가 개발되기도 했다.

또 중앙아시아에서는 양고기를 구울 때 뽕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면 보양 효과가 증진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야기를 다시 살인사건이 벌어진 조선의 밤섬으로 되돌려 보자.

당시 밤섬은 오늘날처럼 무인도가 아니라 꽤 많은 가구가 거주하고 있던 유인도였다.

한글학회가 편찬한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밤섬은 고려 말기 때 죄인을 귀양 보내는 곳이었다.

그 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밤섬에 정착했다.

이들의 배 만드는 기술은 상당히 뛰어나 한강 상류로는 단양과 영월까지,

한강 하류로는 강화도와 서해에서까지 배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동국여지비고라는 옛 문헌에 의하면 당시 율도는 길이가 무려 7리나 되는 큰 섬이었다.

또 섬의 복판에는 암수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고려 말 충신 김주가 심었다고 해서 충신목으로 받들여졌는데, 밤섬의 상징목이기도 했다.

배를 만들거나 물고기를 잡고 채소를 키운 밤섬 주민들의 생활은 비교적 풍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 도둑이 없는 마을로도 유명했다.

 

다만 한 가지 근심이 있었다면 물난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밤섬은 큰 홍수가 나면 섬이 물속에 거의 잠겨 버린다.

때문에 밤섬 주민들은 마을을 지켜준다는 부군신을 모시며

해마다 가을이면 부군신당에 모여 함께 무사 안녕을 비는 제를 올렸다.

때문에 밤섬 주민 간의 유대는 어느 마을보다도 깊었다.

그런데 이런 섬 마을에서 처참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니 아마 섬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만했다.


굉음과 함께 사라진 밤섬

밤섬 주민들이 빨래하는 모습 

근대에 들어서 밤섬은 두 차례나 큰 위기를 겪었다.

1925년 일어난 사상 최대의 을축년대홍수로 인해 주민들은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밤섬의 집들이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밤섬이 지금처럼 무인도로 변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밤섬에는 1968년까지만 해도 62가구 443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밤섬 주민들은 호롱불을 켜고 한강물을 그대로 떠다 밥을 지어 먹고 식수로 마셨지만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은 않았다.

하지만 1968년 2월 10일 오후 3시 밤섬은 굉음과 함께 폭파되었다.

그 후 하루 687명씩 연 7만 명의 인부와 수많은 중장비가 투입되어

트럭 4만대 분의 돌과 그보다 더 많은 흙을 밤섬에서 걷어냈다.

그 결과 그해 5월 말 밤섬은 강물 높이인 표고 4m까지 깎여져 완전히 물속에 잠겨버렸다.

밤섬에서 나온 흙과 돌은 그대로 바로 옆의 여의도로 옮겨갔다.

밤섬이 사라진 것은 바로 여의도 때문이었다. 여의도의 윤중제를 쌓아올리고, 한강 흐름이 막히지 않도록

하구 쪽을 넓히기 위해 밤섬을 폭파 해체한 것이다.

밤섬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밤섬이 잘 내려다보이는 마포 창전동 와우산 기슭의 연립주택으로 이주했다.

그 후 1986년 무렵부터 밤섬에 새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강관리사업소가 생겨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면서부터였다.

결국 서울시는 1999년 밤섬을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밤섬에는 조류 41종 이상, 식물 189종 이상, 곤충 15종 이상이 서식하고 있다.

청둥오리와 해오라기, 개개비, 쇠물닭, 도요새, 비오리 등의 새가 밤섬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

또 원래는 겨울철새였으나 아예 밤섬에 정착해 텃새가 되어버린 흰빰검둥오리도 흔히 볼 수 있다.

생태계의 맨 위자리를 차지하는 사냥꾼 황조롱이도 밤섬에서 먹이사냥을 할 정도이다.


도심 한복판의 철새도래지 장관

1999년 밤섬은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예전과 달리 지금 밤섬에서 가장 많이 자라고 있는 나무는 버드나무이다. 버드나무는 홍수에 강해서 뿌리가 뽑혀도 물이 빠지면 곧바로 땅에 뿌리를 내려 다른 식물이 서식할 수 있는 1차적 환경을 만들어준다.

때문에 밤섬에는 버드나무를 비롯해 느릅나무, 억새, 갈풀, 환삼덩굴 등이 정글처럼 우거져 있다.

또 밤섬은 잉어나 붕어, 누치, 쏘가리, 메기, 뱀장어 등의 산란장소로서도 매우 적합하다. 이런 환경적 요소가 수많은 새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셈이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에는 시베리아나 몽골 등의 북방 지역에서 수천 마리의 겨울철새들이 모여들은 밤섬은 장관을 이룬다.

덕분에 서울은 전 세계적으로 도심 한복판에 철새도래지가 있는 유일한 수도가 되었다.

그럼 폭파 해체되어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밤섬이

어떻게 이처럼 많은 생명을 불러 모으는 생태계 보전지역이 될 수 있었을까?

폭파 전 총 5만2천여 평(주민 거주지는 약 1만7천여 평)이었던 밤섬은

폭파 뒤 약 4만7천여 평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주민 거주지 중 많은 면적이 날아가 버려

강물이 불어나면 섬 전체가 거의 물에 잠겨버리는 쓸모없는 땅이 되었다.

그러나 밤섬은 1985년 5만3천여 평, 1991년 6만여 평, 1996년 7만여 평, 2002년 7만5천여 평으로

차츰 늘어났다. 특히 폭파 전 마포 쪽의 윗밤섬은 1천여 평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4만여 평으로 늘어나

아랫밤섬보다 오히려 더 커졌다.

밤섬이 이렇게 커진 이유는 밑바닥이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1968년의 폭파에도 불구하고 섬의 기저를 이루는 암반은 그대로 남아서

상류로부터 떠내려오는 흙과 모래들을 품안에 켜켜이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때 조선업과 뽕밭으로 번성했던 밤섬이

이제는 도심에서 보기 힘든 온갖 생명들이 번성하는 생태보전지역으로 변했으니

이 또한 상전벽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2010.02.01/ 02.04 ⓒ ScienceTimes <이야기 과학 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