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 2009-12-12 ~ 2010-04-04
- 전시시간 : 평일 - 10시~21시
- : 토.일.공휴일 - 10시~18시(12월~2월)/ 10시~19시(3월~4월)
- 장 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2, 3층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에서 전시된 홍보포스터.
워홀이 20대 디자인한 구두 '토니(Tony)' 33×51cm 1957(아래)
동아일보 창간 90년을 맞아 서울시립미술관, MBC와 함께 주최하는
<시대를 초월한 팝 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특별전은
익숙하게 알려진 대표작에 머무르지 않고 워홀의 다채로운 예술세계 전반을 폭넓게 살펴볼 수 있다.
2009년 12월12일부터 2010년 4월4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미국 피츠버그의 앤디 워홀미술관, 뉴욕의 앤디 워홀재단, 프랑스 파리의 그랑 팔레미술관의 협력으로
페인팅과 실크스크린 102개 작품, 문서, 사진, 잡지 등 283개 자료를 한 자리에 모았다.
10개 섹션에 나눠 전시하는 작품 가운데
‘그림자 시리즈’와 ‘산화’ 등 7점의 추상화는 그동안 한국에 잘 소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워홀은 1928년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이주노동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대를 졸업한 광고디자이너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가
1960년대초 ‘캠벨 수프 깡통’ 등 실크스크린 작품을 발표하며 팝 아트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번 전시에서는 디자이너 시절 작품과
‘브릴로 상자’ ‘코카콜라 병’ ‘자화상 시리즈’ 등의 팝 아트 대표작을 함께 볼 수 있다.
그가 생전에 입전 재킷과 바지, 애용하던 가발을 쓴 마네킹도 전시된다.
마이클 잭슨, 비틀스, 알리, 아인슈타인 같은 유명인의 얼굴을 강렬한 이미지로 재생산한 ‘초상화 시리즈’,
그가 창간한 패션잡지 ‘인터뷰’실물자료,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와의 음악작업 영상도 선보인다.
"현대미술계의 철학과 패러다임을 바꾼 아티스트 – 앤디 워홀,
그의 국내 최대 규모의 회고전"
지난 10여 년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시회가 개최되었고,
매년 피카소와 함께 옥션 거래 총액 1~2위를 랭크하고 있는 아티스트 앤디 워홀.
미술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앤디 워홀의 작품 세계 전모를 만끽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 오는 12월 12일부터 2010년 4월 4일까지 100여 일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이번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 – Andy Warhol, the Greatest>展은
워홀 자화상과 대중 스타를 포함한 세계적인 유명인사의 110여 점에 달하는 초상화가 소개 된다.
또한 국내에 소개 되지 않았던 많은 작품이 포함된 110여 점에 달하는 그의 주요작품들로 구성된다.
더불어, 워홀과 관련된 다양한 영상과 사진, 기념물까지 총 400여 점이 넘게 소개 되어
캠벨수프 등 102점과 사진, 기록물 283점 등 총 385점
그리고 워홀이 수집한 580개의 상자 중 2개 분량도 공개된다.
앤디 워홀의 예술과 철학, 그리고 생전 그의 일상을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展의 특징
앤디 워홀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이다.
앤디 워홀하면 떠오르는 몇몇 작품의 이미지로 인해 팝아트의 거장 또는 제왕이란 타이틀로 불렸다면,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앤디 워홀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국내 전시에서는 좀처럼 소개되지 않았던 추상의 이미지 중 그림자 시리즈,
군인들의 위장복과 같은 이미지의 캐머플라쥬 패턴 시리즈나
앤디 워홀 뮤지엄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여기는 11m의 대형 리플렉트<회상>,
회화와 유화, 실크 스크린을 통해 작품화 한 마오, 비틀즈 등의 인물화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전시되지 않은, 오로지 앤디 워홀 뮤지엄에서만 볼 수 있었던 30여 점의 작품 등
많은 작품들이 전시, 소개 될 것이다.
물론 앤디 워홀하면 떠오르는 대표작들 - 캠벨 수프 캔, 플라워, 코카콜라, 브릴로 상자 등 -도 전시된다.
또한 이번 앤디 워홀 전시회는 최근 전 세계에서 전시되었던 앤디 워홀 전시회 중
가장 많은 작품들이 들어오는 대규모의 회고전이다.
앤디 워홀의 대표작에서부터 처음 접해보는 다양한 작품들까지 모두 만나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회고전이 될 것이다.
○ 테마별 전시 구성
<앤디워홀의 위대한 세계>展은 테마별로 구성되어
워홀의 다양한 작품 세계와 그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물을 보여준다.
미국 워홀 뮤지엄의 소장작품 중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과
아직까지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로 구성된다.
★ 인물전 섹션
<인물전>에서는 예술의 상업성을 옹호하고,
미술과 자본주의 사회의 관계를 재설정한 앤디 워홀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인물화 작품들이 소개된다.
대중스타로는 마이클 잭슨, 비틀즈, 마릴린 먼로, 존 웨인, 메릴 스트립, 크린트 이스트우드,
잉그리드 버그만, 실베스타 스탤론, 믹 재거 등의 초상화가 소개된다.
유명인사들로는 마오, 무하마드 알리, 재키(케네디 대통령 영부인), 레닌, 아인슈타인, 프란츠 카프카,
다이아나 왕세자비, 베토벤, 바스키아, 로이 리히텐슈타인, 록펠러 등 초상화가 소개 된다.
★ 일상적인 소재를 작품과 접목시킨 섹션
일상적 소재를 예술로 받아들여 코카콜라, 브릴로 상자, 캠벨 수프 깡통, 1달러 지폐, 꽃, 구두를 소재로 한
초기 드로잉과 대표적인 팝 아트 작품을 소개한다.
★ 자화상 섹션
스타가 되기를 열망했던 앤디 워홀은 역설적으로 <자화상>시리즈를 통해 자신을 은폐한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다양한 앤디 워홀의 자화상을 만날 수 있다.
★ 죽음과 재난 섹션
죽음과 재난을 소재로 한 연작으로 주목을 받았던 앤디 워홀의 주요작품인 <죽음과 재난>에서는
<앰뷸런스 사고>, <전기의자>, <두개골>, <재키> 등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 추상 이미지 섹션
<회상(시대정신 연작)>, <그림자> 시리즈, <산화>, 캐머플라쥬 패턴 시리즈 등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추상화적 경향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 타임캡슐 섹션
수집광으로 잘 알려진 앤디 워홀의 방대한 소장품들을 모아둔 타임캡슐이 소개된다.
워홀 자신이 틈틈이 수집한 각종 문서, 책, 설치작품 들이 전시 된다.
★ 워홀 라이브(Warhol Live) 섹션
이번 전시회에서는
8m x 8m 사이즈의 독립된 공간에 워홀 자신이 찍은 영화 장면,
자신이 프로듀서로 작업한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연습과 연주 장면,
자신이 디자인 한 이미지컷들이 모두 6개의 프로젝트를 통해 복합적으로 상영된다.
앤디 워홀(ANDY WARHOL : 1928-1987)
살아있는 동안 돈과 명성 모두를 움켜진 예술가는 드물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이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바로 앤디 워홀(Andy Warho, 본명 Andrew Warhola) 이다.
1952년 뉴욕에서 상업 디자이너로 출발하여 하이힐 등 여성신발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이에 만족치 않고 정식 작가가 되고파 1962년 LA에서 첫 전시를 연다.
마른 체구에 피부가 하얗게 되는 백반증을 앓았고 탈모로 가발도 애용하였다.
6O년대 팝아트로 미술계 정상에 올라 미술, 영화, 저널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누구보다도 많은 부(富)와 명성을 쌓았다. 그는 1987년 담낭 수술 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미국 문화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워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한쪽에서는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과 도전으로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위대한 예술가라고 평가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시대의 취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성공한 상업 디자이너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워홀의 실크스크린과 ‘팩토리’ 제작 방식
워홀을 시대를 앞서 간 위대한 미술가로 볼 것인가?
아니면 대중의 기호에 재빠르게 영합한 상업미술가로 볼 것인가?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이것만큼 적절한 질문은 없다.
워홀이 광고계가 아닌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초이다.
그는 <1달러 지폐>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것을 시작으로
<캠벨 수프 깡통 (Tomato Soup Can)>과 같은 익숙한 상품 이미지,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과 같은 스타 이미지를 닥치는 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했다.
워홀의 이러한 작업 전에는 그 당시 지배적인 사조였던 추상표현주의에 반기를 든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와 제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 )가
각각 실크스크린 작업과 일상 오브제를 사용하면서 예술과 일상을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들 작품 덕분에 일상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한 워홀의 작품도 미술계에 순조롭게 진입할 수
있었고,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제작방식에 있었다.
그는 ‘아틀리에’가 아니라 ‘공장(The Factory)’이라고 이름 붙인 작업실에서
타인의 작품이든 아이디어이든 상관없이 차용하였고, 조수를 고용하여 작품 제작의 전 과정을 맡겼으며,
동일한 작품을 상품처럼 무수히 반복하여 생산하였다.
마치 시장조사를 통해 이미지의 형태를 결정하는 광고처럼 작품 이미지의 색과 형태를 결정하고,
작품의 수량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결정하곤 했다.
이러한 생산방식은 지금까지 예술의 본질이라고 여겨왔던 작품의 독창성과 유일성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군의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워홀 작품은 광고 이미지처럼 쉽게 이해되고 친근하게 다가오지만
위대한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2%로 부족한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일상의 찬양과 실크스크린
워홀의 작품을 이렇게만 볼 것인가? 긍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널리 알려졌듯이 워홀은 50년대 뉴욕을 대표하는 <보그(Vogue)>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등의
패션잡지, <칼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 등 표지 디자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상업 디자이너였다.
그는 뉴욕의 화려한 광고계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누구보다도 ‘순수’예술가로 인정받길 바랐다.
그는 추상표현주의가 지나간 60년대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작품의 주제와 스타일을 찾는데
골몰했다. 워홀이 택한 것은 미국적인 것, 다시 말하면 미국 일상의 풍요로움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미국 피치버그로 이민 온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워홀은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했던 백화점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감동받고
미국 소비사회의 본성을 이해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광고 디자이너 시기에는 사치스러운 상품들을 어떻게 아름답게 장식할 것인지 고민했던 것처럼
어떤 방식으로 미국적인 것, 즉 일상의 풍요로움을 나타낼 것인지 몰두하게 된다.
결국 찾아낸 것이 실크스크린이다.
“내가 이렇게 그리는 까닭은 기계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기계처럼 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라고 워홀은 말했다.
그는 사진을 이용한 실크스크린 작업을 통해 작품에서 개인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변하지 않는 영구적인 이미지를 얻으려고 한 것이다.
또한 그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나란히 병렬적으로 배치하거나
혹은 색의 변화를 줌으로써 워홀이 나타내고자 하는 다양한 효과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난 수프를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수프를 좋아하면 난 기분이 좋아요”
워홀은 캠벨 수프에서 느끼는 친밀감을 확고하게 보여주기 위해
수프 깡통의 사진을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업은 미국의 일상을 찬양하기 위해 세심하게 선택된 표현 방식이지
손쉬운 제작방식이라는 이유로 채택된 것은 아니다.
물론 실크스크린이 익명성을 보장해주고 손쉽게 대량 제작을 할 수 있는 점에서 워홀의 구미에 맞다.
그러나 그가 이 방식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실크스크린이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연출하는데 최적의 방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광고 디자이너로서 일할 때처럼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연출하기위해 표현방법을 고심했을 것이고,
그 선택의 결과가 실크스크린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익숙하게 접했던 <캠벨 수프 깡통> <코카콜라병> <브릴로 상자(1964)> <하인즈 케첩 상자> 등을
실크스크린으로 전시함으로써 미국의 표준적인 삶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작품의 주제로 선택한 것도
여배우의 성적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인의 성공신화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캠벨 수프처럼 미국의 표준적인 삶과 연관되어 있다.
워홀은 그것을 실크스크린의 방식으로 확고하게 잡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워홀의 실크스크린이 대중의 기호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매체와 기법의 세심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다.
<항공사고 신문기사> <자동차 충돌장면> <전기의자> 등 재난 시리즈의 작품은
위의 작품들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실크스크린 제작방식을 통해 실제와 대중매체의 간극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그는 대중매체가 재난을 보여주는 방식에 주목하고 이것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함으로써
그 대중매체가 실제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관람객에게 보여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알려졌듯이 워홀은 명성과 돈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상업미술가로 출발했으며 사업예술가로 마치기를 기대한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70년대 이후 그는 인물화나 꽃 그림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여전히 실크스크린의 방식을 고수했고, 그 주제에 따라 적절한 표현기법을 첨가했다.
인물화나 꽃 시리즈 작품들도 일상적인 것들이 지닌 가치와 삶 속에서의 의미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는 퇴색했지만 그 이전의 작품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의 종말’ 이후의 미술과 최대 규모의 <앤디 워홀의 회고전>
워홀은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대중스타와 상품의 이미지를 작품에 끌어들여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또한 순수예술이 추구해야 할 고유한 가치가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하고
상업미술의 기법을 과감히 차용하여 예술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아서 딘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후의 미술의 선구자로 워홀을 위치시킬 수 있다.
우리는 워홀 덕분에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고급과 저급 미술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외관상 하찮게 보이는 작업도 그 표현 목적에 부합되면
가치가 있는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작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워홀의 후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미술은 무엇을 나타낼 것이냐의 문제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나타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는 고급과 저급의 구분의 논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제는 표현주의이든 사실주의이든 벽화스타일이든 상관없다.
왜 그러한 방식으로 제작했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러한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해준 작가가 바로 바로 앤디 워홀이다.
[앤디 워홀의 연보]
워홀은 후기산업시대를 맞아 손이 아니라 실크스크린으로 작품을 찍어낸다.
작업실도 스튜디오가 아니라 '공장(factory)'이라 부른다.
현대미술은 손재주가 아니라 기계로 하는 시대임을 예고한다.
요즘 사진이 회화보다 더 부각되는 건 이런 맥락이다. 그는 이렇게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180도 바꾼다.
워홀은 뒤샹의 후손이다. 뒤샹이 변기를 들고 나오니까 워홀은 깡통을 들고 나온다.
손으로 그리는 피카소, 머리로 그리는 뒤샹, 이제는 기계로 그리는 워홀시대가 온 것이다.
요즘 일부 미술대학입시에서 실기를 생략하는 것도 뒤샹과 워홀의 영향이리라.
워홀은 디자이너, 화가뿐만 아니라 대안잡지 '인터뷰'의 편집자로,
록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프로듀서로, 280여 편을 찍은 영화제작자로 활약한다.
창조성이 돋보이는 25시간짜리 플롯 없는 영화로 유명하다.
그 밖에도 광고와 포장, 사진가와 수집가로 활동한다.
워홀은 일본의 오타쿠(특정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처럼 한 시대를 꼼꼼히 기록한다.
어디든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4천 개의 전화인터뷰도 녹음한다.
죽었을 때 받은 편지, 초대장, 신문과 잡지사진 등 날짜별로 600여 개의 상자에 보관한다.
게다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기록한 두꺼운 분량의 일기도 남긴다.
그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즐겨 먹고 마시는 걸 그린다.
'코카콜라', '하인즈 케첩', '브릴로 수프'를 그의 작업에 도입하여 기존예술을 해체시킨다.
그의 예술은 가장 평범한 일상에서 나온다. 하여간 예술이 결코 특정계층의 독점물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미술의 역사가 그랬지만 그는 미술의 범위를 넓혀간다.
존 케이지가 소음과 침묵도 음악에 도입하듯 워홀은 돈, 기계, 깡통, 광고도 미술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후 마오 같은 지도자나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 등도
맘껏 그린다.
"왜 사람들은 예술가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예술가란 또 다른 종류의 직업일 뿐"이라며
요셉 보이스처럼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미술관을 백화점처럼 친근하게 만들고 미술을 민주화한다. 미술 감상에서 감동 이상으로 재미를 중시한다.
60~70년대 미국은 히피, 반전, 흑인, 여성, 인권운동 등이 일어났고 나라는 이상과 열정, 에너지로 넘친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자 미국인은 크게 고무되어 자부심을 되찾으며 전성기를 맞는다.
이런 시기에 워홀이 나타난 것 우연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당시 미국대중문화는 전 세계를 강타한다.
소비맛에 빠진 미국인들은 쇼핑할 때 주는 즐거움 같은 '슈퍼스타 아이콘'을 원한다.
워홀은 이에 부응하여 대중적 소재로 대중적 예술을 만든다.
'마릴린 먼로'는 그런 상황 속에서 탄생된 '20세기 비너스'다.
그밖에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들이 위에서 보듯 화폭에 대거 등장한다.
인물연작 중 20세기 인류에게 기여한 유태인 10명을 선정한 전시가 흥미롭다.
여기엔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카프카 등도 포함된다.
워홀은 10명의 명사를 뽑다 힘들어 그냥 유태인박물관장에게 맡겨버린다.
이는 미국사회에 유태인 영향력이 큼을 짐작케 한다.
워홀은 예술가이면서도 사업가였다.
"사업을 잘 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고 뉴욕에서는 돈을 버는 것이 하나의 직업이다"라고 털어놓는다.
그에게 광고와 예술은 구별이 없다. 소비생활도 미술의 소재가 된다.
그런 면에서 그는 가장 미국적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TV 등 기계를 너무 좋아한다. "나는 10년 동안 녹음기라는 아내와 결혼했다"라고 말할 정도다.
이렇게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만든다.
그뿐 아니라 '산화(酸化)'에서는 물감 대신 오줌을 써 어떤 변화가 있는지 관찰한다.
워홀의 이런 엽기적 실험은 오줌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워홀의 빛과 그림자,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
'자화상'에서 보듯 워홀은 실제로 정신분열적이다.
가톨릭신자면서 동성애자였고 민주당원이면서도 레이건을 지지한다.
어떤 인터뷰에선 '예'와 '아니오'로만 대답한다. 자신의 이미지로만 보여주고 사적 영역은 철저히 숨긴다.
그는 또한 매일 밤 외출을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파티 광이었다.
1968년에는 여배우 발레리 솔라나스로부터 총격을 받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난다.
다행히 워홀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후에 그녀에게 왜 총을 쐈냐고 물으니
"워홀이 자기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당시 그의 영향력이 어떤지 알 듯하다.
워홀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그런지 삶의 덧없음(Vanitas)'과 '죽음의 기억(Memento Mori)'같은 주제를
마다하지 않는다. '두개골'이 그런 작품이다.
하지만 그는 피카소나 백남준처럼 21세기 유희적 인간의 전형이다.
이 세상에서 와 자신이 하고픈 것 원 없이 다 하고 간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세 사람은 동급이다.
재난, 인권, 인종갈등 등 사회적 이슈에도 관심
워홀은 팝아트작가답게 추상에서 중시하는 '숭고한 정신'보다는 '평범한 일상'에 더 초점을 둔다.
그래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재난, 사고, 시위 등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이를 독창적으로 조정하고 이미지로 재편하여 시각효과를 극대화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앰뷸런스사고'는 60년대 흔해진 차 사고에 관한 것으로
자유와 여가를 상징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죽음과 파괴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또한 당시 미국사회에서 큰 이슈였던 인종갈등도 다룬다.
'전자의자'는 50년대 뉴욕교도소에서 참혹하게 사형당한 2명의 죄수를 부각시키며 인권문제도 제기한다.
20세기 미술의 두 거장, 앤디 워홀과 백남준
'회상'은 워홀이 1982년 베를린에서 열리는 '시대정신'전에 참가하려고 만든 것이다.
빛의 스펙터클을 모티프로 어둠을 통과한 빨강, 파랑, 녹색이 주는 색의 효과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백남준의 랜덤액서스(아무것도 규정하지 않은 실험)정신을 풍긴다.
이제 워홀과 백남준의 간단한 비교로 글을 맺고자 한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워홀이 요셉 보이스는 그렸지만 백남준은 안 그렸다.
하긴 백남준이 60년대 "팝아트를 죽여라"라고 객쩍은 소리를 했는데 워홀이 들은 것인가.
워홀은 고급예술의 대중화와 기계화로,
백남준은 첨단과학의 인간화와 예술화로 세계미술사에 가장 큰 공적을 남겼다.
그리고 둘은 똑같이 대중과 소통을 중시했다.
그런데 백남준이 만약 미국사람이었다면 누가 더 우위였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앤디 워홀이 남긴 유명한 말들
- 세상이 나를 매혹시킨다.
- 나는 뼛속까지 천박한 사람이다.
-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 예술은 당신이 벗어날 수 있는 신세계다.
- 생각해 보면 백화점은 미술관과 비슷하다
- 뉴욕에선 돈을 버는 것이 하나의 직업이다.
- 나는 읽지 않는다. 다만 그림을 볼 뿐이다
- 나는 현실과 가상의 시종을 모르겠다.
- 유명인사에 초점을 맞출 때 작품이 된다.
- 내가 어떤 대지를 소유해도 그걸 황폐화시키지 않은 것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 예술가는 필요한 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 왜 사람들은 예술가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예술가란 또 다른 종류의 직업일 뿐이다.
- 예술가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다.
- 나는 사회적 질병에 걸려있다. 나는 밤이 되면 어딘가로 외출해야 한다.
만약 내가 어느 날 집에 머문다면 날 싫어하는 사람은 루머를 퍼뜨리기 시작할 것이다.
- 섹스는 환상이다. 가장 흥분되는 것은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은 그 나름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않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 공상적 사랑이 현실적 사랑보다 훨씬 더 좋다.
-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림만 그린다. 다만 최대한 많은 양의 그림을 생산하려고 노력한다.
- 나는 상업미술가로 출발했으며 사업예술가로 마치기를 기대한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 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 미래의 모든 사람들은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이다.
('미래에는 아주 빠르게 유명해질 수도 있고 아주 짧은 시간에 그 명성을 잃을 수도 있다'나
'변화는 순식간에 온다'로 해석할 수 있다)
- 2010.01.25 오마이뉴스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은 팝 아트의 슈퍼스타였다.
20세기 국제적인 금융, 예술, 상업의 도시 뉴욕에서 예술가도 살아서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대 사건의 주인공이자 예술을 대중화시키고 아트를 상품으로 평가 절하하는 동시에
무한한 부의 가치로 환원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사업을 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말하였다.
뉴욕의 예술계는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워홀에 대한 관심은 불꽃처럼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예술의 중심지는 더 이상 파리가 아니었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유명화랑들이 뉴욕에 앞다투어 들어섰고, 이곳에서 세계 미술품 가격을 결정하였다.
윌리엄 드 쿠닝과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소위 추상표현주의가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미술의 선두주자 위치를 굳건히 지키던 유럽은 뉴욕으로 그 자리를 내 주어야만 했다.
‘예술이 곧 삶이고, 삶은 예술이다’를 모토로 내건 팝 예술가들은 일상소품에서 조형 모티브를 찾았고,
앤디 워홀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워홀의 유년시절
앤디 워홀(본명은 Andrew Warhola)은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계의 가난한 이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직 광부였고, 어린 워홀은 2차 세계대전의 불안과 경제적 암울함 속에
도시의 소외된 빈민구역에서 기죽고 소심한 소년으로 자랐다.
비위생적이고 소란스러운 좁은 골목과 널린 빨래 때문에 창문이 보이는 날이 없는 낡은 집.
하얗게 야윈 얼굴의 소년 워홀은 이처럼 열악한 환경속에 자아를 형성해 나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워홀의 그리기 능력은 남달랐다.
워홀의 재능을 간파한 선생님은 그가 카네기 미술관에서 주관하는 미술 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고등학생이 된 워홀은 그림 외에 또 다른 관심사가 생겨났다. 바로 영화였다.
워홀은 당시에 이미 여배우 셜리 템플의 사인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 후 일생에 걸쳐 수많은 스타의 소품을 수집하였다.
그의 영화사랑은 후에 스스로 영화제작을 하고,
실크스크린 작업으로 리즈 테일러, 마릴린 먼로 같은 배우들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식으로 이어졌다.
스타의 꿈
워홀은 1945년 피츠버그 카네기 멜론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1947년 단돈 200달러를 들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몇몇 광고 잡지에 일러스트를 선보인 뒤 기발한 콘셉트와 기법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하여
오래지 않아 <보그> <하퍼스 바자> <뉴욕커> 같은 대형 잡지사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하게 된다.
초기의 일러스트 중에서 널리 알려진 그림으로는 일련의 구두 그림을 꼽을 수 있다.
잉크 얼룩을 느슨하게 이용한 그 드로잉은 워홀을 단번에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그는 여러 상을 거머쥐고, 1956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드로잉 작품이 전시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의 나이 불과 28살 때의 일이다.
아인슈타인, 리즈 테일러, 마릴린 먼로, 재키, 리히텐슈타인, 마이클 잭슨, 존 웨인, 잉그리드 버그먼, 제인 폰다, 마오 102×81cm, 1967(시계방향)
하지만 워홀의 꿈은 디자이너가 아닌 순수 화가였다.
그를 세상에 알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실크스크린 기법의 대량 복제화였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코카콜라나 캠벨 수프 같은 일상의 상품에서부터
할리우드의 스타 마릴린 먼로와 존 F. 케네디와 부인 재클린 케네디 등 명사들을 캔버스 위에 옮겨
산업사회의 대량생산과 소비를 냉소적으로 풍자한 작품이었다.
워홀은 이런 이미지를 한 번에 수백 점씩 대량으로 찍어내었다.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이’ 찍어내는 그의 실크스크린 작업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스타가 되고 싶은 워홀의 꿈이 한 발짝 더 가까이 실현되고 있었다.
드라셀라, 앤디 워홀
워홀은 친구들로부터 <드라셀라(Dracella)>라는 별명을 얻었다.
<드라셀라>는 드라큘라와 신데렐라를 합쳐 만든 신조어로
그의 이중적인 성격과 뉴욕 예술계의 스타적 삶이 압축되어 들어있다.
그는 말없고 수줍음 많고 세심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속임수에 능한 자질을 가졌기 때문에
드라큘라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현대미술의 스타라는 점에서 신델레라적이었다.
평소 워홀은 “훌륭한 그림에 관한 나의 아이디어는 유명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라든가
“미국이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부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도
똑같은 물건을 살 수밖에 없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누구나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
대통령도 리즈 테일러도 코카콜라를 마신다”라는 말을 했다.
또 “나는 매일 같은 일을 한다. 내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많이 그림을 생산하도록 노력한다”는 말도 남겼다.
이런 말들로 표현된 그의 예술관은 그가 전 미국을 들썩이게 하고
나아가 세계적 스타가 되게 한 최고의 자산이었다.
새로운 시도
워홀은 1950년대 말 이미 뉴욕 최고의 상업디자이너로서 명성을 누리더니
드디어 1957년 29세의 나이로 ‘앤디 워홀 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업은 그의 든든한 인적 구성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워홀의 어머니 줄리아 워홀라는 인쇄된 실크스크린에 아들 워홀 대신 사인을 하였고,
조수인 네이선 글럭은 프로젝트 수주를 담당했다.
작업실에 놀러온 친구들과 손님들도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워홀은 이들을 ‘컬러링 팀’이라고 부르며 인쇄물의 색상 작업을 맡기기도 하였다.
워홀은 ‘오리지널’이라는 개념에 크게 고민하지 않은 듯하다.
그 일례로 고객 증정용 판화 <샘이라는 이름의 고양이 스물다섯과 푸른 고양이 하나>를 제작했는데,
모두가 앞쪽 특정번호를 원하자 작품 전체에 같은 에디션 번호를 매겨
이 화보가 몇 권이 나왔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예술작품 컬렉터들은 유일한 작품을 소유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마련인데
워홀은 이마저도 무시한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Flowers>, 각 205×205㎝, 1964년
Synthtic polymer paint and Silkscreen ink on canvas, 개인소장
작업의 모티브
<Gold mariyn Monroe>
Synthetic polymer paint and Silkscreen ink on canvas
211×145㎝, 1964, The museum of Modern Art, NewYork
"팝(Pop)아트는 대중적이고, 일시적이며, 재치있고, 전략적이며, 섹시하고, 젊다.”(리처드 해밀턴)
워홀은 맨해튼 작업실에서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다양한 모티브를 캔버스에 담기 시작한다.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이나 해골, 전기의자가 등장하기도 했고,
마릴린 먼로나 리즈 테일러, 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도 즐겨 채택하는 모티브가 되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연일 스타들의 사생활이 보도 되었다.
제임스 딘의 요절, 리즈 테일러의 지병과 여러 명의 남편, 마릴린 먼로의 죽음 등이
워홀에게는 모두 작업의 훌륭한 모티브였다.
한편,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돈이라는 주제는 워홀에게도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Green Coca-Cola Bottl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York
워홀은 여러 가지 돈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캔버스에 가득 2달러 지폐 이미지를 실크스크린기법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가 하면,
코카콜라 병의 이미지를 통해 미국 문화의 단면을 투영하기도 하였다.
캠벨 수프 박스 Campbell's Soup Box / 1962
베니어판에 카세인 물감, 스프레이 페인트, 연필 / 55.9x40x40㎝
워홀의 작품가운데 <캠벨 수프> 깡통 이미지는 1961년 말에 탄생했다.
대량생산되어 반듯하게 진열된 캠벨 수프 깡통의 이미지는
이듬해 7월 로스엔젤레스 피러스 미술관에서 소개되고
유럽으로 순회전을 개최하면서 워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워홀의 ‘팩토리’
워홀은 1965년 뉴욕 맨해튼 남쪽 231 이스트 47번가 5층의 넓은 작업실로 이사한다.
워홀은 이곳을 ‘팩토리(Factory)’라고 이름 짓고 다양한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공간은 작업실이면서 영화촬영장, 주거공간이기도 하였다.
팩토리에는 매일 새로운 인물들이 드나들었고, 워홀은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코드가 필요했다.
워홀은 어린 시절, 유전병인 신경질환을 자주 앓았고,
색소결핍증으로 피부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버린 탓에 일찍부터 은빛 가발을 썼다.
검은 색 폴라 스웨터에 청바지와 가죽점퍼, 선글라스 등은 워홀의 이미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됐다.
특히 워홀의 가발은 후에 자화상 시리즈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워홀의 트레이드마크인 가발과 안경, 성형한 코 등 그의 이미지를 잘 드러낸 대표적 사진이다.
워홀은 웬만해서는 참석할 수 있는 범위의 모든 파티와 대중적인 사건을 놓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때로는 대역을 통해 등장하길 좋아했다.
첫 번째 사건은 워홀이 <첼시의 소녀들>로 영화제작자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였고, 두 번째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몇 차례 강연을 마친 후였다.
그는 앨런 미첼에게 자신의 대역을 맡기고 해야 할 일들을 넘겨주어 워홀 행세를 하도록 하였다.
워홀다운 이 두 사건은 결과적으로 큰 소동을 일으켰다. 워홀처럼 보이기는 아주 쉬웠다.
이를 위해 워홀은 자신의 대역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형적인 워홀패션으로 꾸미고
검은 안경과 은빛가발까지 씌웠다. 참으로 앤디 워홀다운 발상이 아닌가.
앤디 워홀은 새로운 종류의 스타였다.
창작자 제작자 배우를 겸했던 그는 우리에게 미술세계의 우상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던 그는 정의하기 어려운 그의 재능을 매매함과 동시에 ‘팩토리’ 작업실에서
일하는 18명의 조수들, 일명 ‘소년들과 소녀들’의 대표자 역할을 통해서 자신을 매매했다.
워홀은 “예술은 근본적으로 금전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획득한다”라고 했는데
결국 사업과 예술을 매혹적으로 결합하여 20세기 예술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워홀의 시련
워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68년 6월 3일, 팩토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수많은 워홀영화에 조연을 맡았던 극단주의적인 여성주의자 발레리 솔라나스가
팩토리에서 작업하던 워홀을 저격한 것이다.
워홀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후송됐고, 뉴욕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언론매체는 흥분에 휩싸였다. <뉴욕포스트>는 1면 기사에
‘앤디 워홀, 위독’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희생자와 가해자의 사진을 나란히 실었다.
솔라나스는 구속 후 정신이상으로 진단받고 병원에 강제로 입원됐다.
범행 동기는 워홀이 영화에서 여성을 폄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워홀의 부상은 점차 호전되었고, 9월에는 팩토리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하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평생 코르셋을 착용했고,
또 솔라리스가 자신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워홀은 다시 자신의 회화와 실크스크린 작품 제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조수들에게 맡기는 분량도 늘어갔다.
워홀은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발견한 후 팩토리의 일상을 열심히 영상으로 담기 시작했다.
팝 아트의 신화
워홀은 갈수록 쇠약해져 갔다.
“나는 항상 기계이기를 바랐다”던 워홀은 담낭질환을 앓고 있던 1987년 2월
자신이 제작한 <최후의 만찬>전시회 오프닝에 참석차 이탈리아 밀라노로 향했지만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곧바로 뉴욕으로 돌아왔다.
워홀은 2월 20일 뉴욕종합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지만 합병증이 발생해 다음날 아침 세상을 떠났다.
앤디 워홀을 애도하기 위해 뉴욕 세인트 패트릭 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에 200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죽음이 그를 덮쳤을 때 의심의 여지없이 앤디 워홀 자신은 팝아트의 신화가 되었다.
그는 6개의 각기 다른 자화상 연작을 제작하면서 확실한 슈퍼스타가 되었고,
1981년 미키마우스와 엉클 샘, 슈퍼맨 같은 미국인의 신화 속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현대미술섹션에 전시중인 앤디 워홀의 <마오쩌둥 Mao>
1973 /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 61x50.8x2.5㎝
- 2010년 1월 13일
"나는 수줍은 성격이었지만 좀 더 내가 차지하는 영역을 넓히고 싶어 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너무 나서지 말도록 해라. 그러나 모두에게 네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언제나 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영향력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수줍은 성격이어서 주목을 받게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텔레비전을 좋아했다. 나는 텔레비전 안에서 내 자신이 가장 빛날 수 있다고 느낀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자신만의 쇼 프로그램을 가진 사람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나는 ‘낫싱 스페셜’이라는 이름의 쇼를 가지고 싶었다.”
팝 아트의 선구자인 앤디 워홀(1928~ 1987)은 생전에 어느 작가보다 많은 명성과 부를 누렸다.
21살에 <보그> <하퍼스 바자>의 일러스트를 그리는 상업미술가로 출발한 그는
순수미술로 전환한 뒤 1962년 ‘캠벨 수프 캔’ 그림을 전시하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 뉴욕에 ‘팩토리’란 스튜디오를 열고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해 자신의 작품을 찍어내게 했다.
워홀의 예술세계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한 평면작업뿐만 아니라 100여 편의 실험영화 제작 및 출연,
<인터뷰> 잡지 발간, 언더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니코’의 음반 프로듀싱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는 믹 재거, 실베스터 스탤론, 리처드 기어 등 수많은 스타와 사귀고 하룻밤에 여섯 군데를 돌 만큼
파티를 즐겼다. 때로는 주변 인물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밸러리 솔래너스란 여배우는 ‘그가 내 인생을 너무 많이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로 워홀을 저격했고,
영화 <팩토리 걸>의 주인공인 에디 세즈위크는 백만장자의 상속녀로서
19살의 하버드대 학생일 때 워홀을 만난 뒤 40여 편의 워홀 영화에 출연하는 등
팩토리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워홀에게 버림받고 스물여덟에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다.
어린시절 열등감 지독한 자의식 키워
워홀의 팝 아트는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문 현대미술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워홀의 대표작은 워홀 자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에고는 강하고 개성적이었다.
숨고 싶은 욕망과 드러내고 싶은 욕망 이 두 가지 사이의 긴장이 워홀이란 작가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매체에 의존해 작품과 자아를 재구성했다.
1950년대 후반에 텔레비전과의 ‘연애’를 시작한 그는 침실에 텔레비전 4대를 놓고 살았다.
1964년 테이프 레코더를 산 뒤 10년 동안 자신의 독백 및 지인들과의 대화를 4000개 녹음했다.
이를 놓고 그는 “내 아내 테이프 레코더와 나는 10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1976년 11월 24일부터 숨지기 직전인 1987년 2월 17일까지는
팩토리의 동료인 팻 해킷에게 매일 오전 9시 반 전화로 전날의 일과를 불러서
원고지 6900쪽 분량을 기록하게 했다. 녹음을 풀어낸 내용은 <앤디 워홀의 철학>이란 책,
전화메모를 정리한 내용은 <앤디 워홀의 일기>란 책으로 각각 출간됐다.
가장 내밀한 일상과 생각까지 기계와 타자의 편집에 의해 걸러지고 변형 또는 왜곡되게 했다.
그의 지독한 자의식은 어린 시절의 가난과 외모에 대한 열등감, 예민한 감수성에서 비롯됐다.
앤드루 워홀라(본명)는 피츠버그의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건축노동자인 아버지 온드레이와 어머니 줄리아 사이에 태어났다.
9살 때 희귀병인 무도병에 걸려 집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미술 · 만화 · 영화 등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4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어머니 줄리아와의 관계는 더욱 밀착된다.
줄리아는 아들에게 카메라와 필름 프로젝터를 사주고 스케치와 색칠에 대해 칭찬했다.
카네기공대에서 상업미술을 전공한 그는 뉴욕으로 가 디자이너로 자리잡은 뒤
29세 때 코 성형수술을 받았다. 그는 “이전에 나는 내 코 모양이 정말 싫었다. 코가 언제나 빨갰고,
그래서 샌드페이퍼로 닦아 내고 싶었다. 가족조차 나를 ‘앤디 빨간코 워홀라’라고 불렀다”(<철학>)고
회상했다.
또 말년의 그는 “오, 요즘 내 모습은 너무 흉하다. 주름제거 수술을 받아야겠다.
화장은 하나도 먹지 않고, 볼과 목살은 축 처졌다. 목은 터틀넥 스웨터로도 숨길 수가 없다”(<일기>)
라고 탄식했다.
유명인사의 이미지 다시 탄생시켜
작가로서 워홀의 출발점은 미국의 대량생산과 대중문화다.
대통령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건달이나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을 더 낸다고 더 좋은 콜라를 마실 수 있는 건 아니다.
돈을 더 내면 양이 많아질 뿐 질은 좋아지지 않는다.
브릴로 비누와 하인즈 케첩상자, 캠벨 수프 캔을 현대의 정물로 삼아서 캔버스에 그린 것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현재 거래 가격이 개당 250억원인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일반 시장에 쌓여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에는
소재가 나무와 종이라는 차이밖에 없다. 브릴로 상자는 워홀이 그림으로써 미술작품이 됐다.
이런 점에서 워홀은 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전시한 마르셀 뒤샹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뒤샹이 예술이라는 개념에 담긴 전시대의 맥락을 존중한 반면에
워홀은 예술과 상품의 경계를 해체하는 데까지 나갔다.
워홀이 무엇보다 끌린 것은 대중매체에 나타난 스타의 이미지다.
워홀은 19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인 재클린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재현했다. 존 레넌, 주디 갤런드, 존 웨인, 믹 재거, 마이클 잭슨, 무하마드 알리, 매릴 스트립,
클린트 이스트우드, 발렌티노, 다이애나 빈, 마오쩌둥, 레닌, 아인슈타인, 카프카, 베토벤 등
그의 ‘팩토리’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유명인사는 거의 없을 정도다.
감춤과 드러냄이라는 워홀식 사고의 양면성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1963년에 처음 주문받은 초상화는
초기 팝아트의 대표적인 컬렉터인 로버트 스컬의 아내인 에셀의 것이었다.
워홀은 그녀의 다양한 표정과 포즈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면서
마치 신문에서 잘못 인쇄된 부분처럼 진하거나 흐리거나 아예 안보이게 만들었고,
이것이 신선한 효과를 자아냈다.
워홀의 초상화는 대중에게 익숙하게 각인된 이미지에다
여러 가지 색과 윤곽선을 덧입혀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데 후기로 가면서 기법의 갱신 없이 주문제작한 초상화는 팩토리의 주요 수입원이 됐다.
그의 골수팬이던 평론가들조차 “벼락부자들, 남미 독재자의 부인들, 아는 사람들로 좌석을 채운
B급 TV 프로그램이나 라스베이거스 쇼와 유사하다”고 독설을 퍼부을 정도였다.
워홀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자화상이다. 그는 여러 시기에 걸친 자화상을 남겼다.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의 일상을 테이프 레코더나 전화통화로 드러냈듯이
스스로의 이미지 역시 감추고 연출하고 왜곡시켰다.
코를 파고 있는 소년 상반신 (1948~1949)
워홀의 초기 자화상 가운데 하나는 ‘코를 파고 있는 소년’이다.
카네기공대 시절 피츠버그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다가 탈락한 이 작업은
종이에 흑연 드로잉으로, 지저분하게 왼쪽 코를 후비는 못생긴 소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코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
팝 아트 작가로 부각되기 시작한 1960년대 초반의 그는
할리우드 스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내린 신비로운 이미지를 연출했다.
자화상(1963~1964)
1970년대 자화상 속의 그는 입에 손가락을 대고 잠시 생각에 잠긴 할리우드 스타의 전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얼굴이 색면으로 칠해진 반면에
왼쪽 얼굴은 강렬한 명암 대비 속에 그림자로 완전히 지워져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자화상(1978)
또 다른 자화상에서 워홀은 초점을 달리한 옆모습을 반복적으로 배치하고,
최소한의 얼굴 윤곽 표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모두 검은색으로 처리했다.
삼중으로 겹쳐진 이미지와 화면을 뒤덮은 검은색은 인물이 누구인지조차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자화상 Self-Portrait(1966~1967)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 55.9x55.9㎝
마지막 자화상은 담낭수술 이후 심장부정맥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6년에 제작된 것이다.
머리가 사방으로 뻗친 은색의 가발을 쓰고 찍은 사진을 이용한 이 작품에서
그는 해골처럼 수척해진 얼굴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화면 중간에 떠 있는 워홀의 얼굴은 유령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수세기동안 예술에서 자주 언급된 주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형상화한 것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과 유한한 인생을 상징한다.
자화상(1986)
워홀은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긴 1970년대에 이미 해골 작업을 선보였다.
두개골 Skull(1976)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 182.9x203.5㎝
워홀의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 밸러리 솔래너스가 1968년 그를 저격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거의 죽을 뻔했으나 5시간에 가까운 수술을 통해 소생됐다.
이 사건은 워홀의 삶과 예술관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갑작스럽게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공포와 싸우면서 워홀은 ‘두개골’ 시리즈를 구상했다.
1976년 작업실 조수인 로니 커트론에게 프랑스 파리의 고물상에서 해골을 구입하게 한 뒤
사진을 찍고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제작한다.
화려한 색감을 지닌 그의 해골은 죽음과 공포의 이미지에다 아름다움과 매혹을 결합시킨다.
현대미술의 악동이라고 불리는 데미언 허스트는 워홀의 ‘두개골’에서
해골에 8600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600개 다양한 유품상자 남겨
워홀은 수많은 작품과 함께 ‘타임캡슐’이라고 불린 600개의 유품상자를 남겼다.
종이 한 장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아키비스트였던 그는
편지 · 초대장 · 잡지 · 책 · 신문클립 등 자기시대와 자기자신을 증언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남겼다.
전문가들에 의해 조금씩 ‘발굴’되기 시작한 이 상자에서는
워홀이 유명인사의 신발을 수집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의 부인인 케이가 보낸
게이블의 ‘스펙테이터’ 브랜드 맞춤구두가 나오기도 했다.
또 얼마 전에는 재클린 케네디의 나체 뒷모습이 나와서 워홀과 재클린의 관계에 대한 억측이 나돌기도
했으나 워홀과 절친했던 재키(재클린의 애칭)가 우정의 표시로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을 선물한 것으로
밝혀졌다.
“살이 30㎏이나 빠진 스탤론이 귀엽고 섹시하다”는 기록을 일기장에 남긴 워홀은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앤디 워홀의 20주기였던 2007년 리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데 이어
지금까지의 워홀 전시 가운데 국내 최대 규모라는
‘시대를 초월한 팝 아트의 제왕 -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전이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지형을 바꿔 놓은 팝 아트라는 예술사적 관점뿐만 아니라
워홀이라는 괴팍한 천재의 삶으로부터 작품을 감상한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싸우는 서로 다른 경향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재능이 발현되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 2010 01/19 ⓒ 위클리경향 859호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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