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폐사지, 잊혀진 역사의 흔적

Gijuzzang Dream 2009. 12. 31. 15:10

 

 

 

 

 


 
 

 

 

우리에게 절터란 무엇인가

 

절터의 사전적 의미는 절이 있었던 곳, 또는 절이 있을 법한 곳이다. 절이 있을 법한 곳이라는 것은 과거에 절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절이 들어서기에 마땅한 곳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절이 들어서는 곳은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일정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지 조건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 있었던 터에서 공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불상이나 석탑, 부도 탑, 기와더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주변 산세에 거슬리지 않고 들어선 대지, 그 한 켠에 보는 이 없어도 무성한 대나무 숲,

빈대 냄새가 난다는 샘 등에서 알 수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절터는 절이 없어진 자리이고

절은 원론적으로는 스님이 사는 곳이므로 스님이 살았던 시설이 있는 곳이 곧 절이고

그 시설이 없어진 곳이 절터인 것이다.

그런데 스님들은 무리를 이루어 수행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흩어져 수행을 하기도 하므로

절집이나 절터의 규모는 천차만별이다.

황룡사지, 미륵사지, 정릉사지 등 삼국시대의 유명한 절터를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몇 백 명의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하였을 절터들이 있는가 하면

초가 대신 근근이 기와를 얹은 삼간짜리 인법당 형태의 절터도 적지 않다.

 

절집의 이름만이 아니라 창건과 폐망에 대한 문헌 기록이나 사적기 등이 남아있는 절터도 있지만

이름조차 역사에 묻혀있는 절터가 더 많이 있다.

규모가 크거나 문헌 기록이 전해지는 절터에는 각종 유물이 남아있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들을 통하여 절터의 역사와 문화적 좌표를 연구하여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은 작은 절터는 그저 절터임을 알 수 있을 뿐

시간이나 공간적 좌표를 알기 어렵기 십상이다.

 

규모가 크건 작건 절터에는 불교라는 종교 시설이나 불교 문화의 요소로서만이 아니라 특정 시점의 문화가 집약되어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절이 종교 활동의 주된 공간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고 불교와 관련이 있는 각종 상징이 있고 그 공간 구성 자체에도 불교의 교리와 그 절이 조성될 당시의 문화가 반영되어있다. 황룡사지나 고구려 정릉사지의 1탑 3금당식 가람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미륵사지의 3탑 3금당식 가람은 또 그 나름의 구성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사천왕사지나 감은사지의 쌍탑식 가람이 당시의 문화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있으며 이런 점에서 절터의 공간 배치와 구성, 그리고 그 변화가 불교신앙에서 가지는 의미를 찾으려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규모가 아주 작은 절들의 조영도 불교 사상이나 불교문화에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나 정치 상황, 보다 넓게는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절터에 남아있는 석탑, 당간지주, 부도, 석등 등 신앙의 대상이나 상징들이

불교 교리나 신앙에서 가지는 의미를 파악할 수도 있지만

절집의 공간구성이나 공간구성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각종 상징물이나 신앙의 대상에는

그것들이 조성된 당시의 문화가 투영되어있다.

 

석탑 양식의 변화는 불교 교리에서만의 변화라기보다는 석조 공예의 변화,

넓게는 당시의 예술이나 문화, 그리고 정치, 사회, 경제의 변화에 바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절집이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공간이므로 예배나 수행의 공간만 있는 것은 아니며

스님들의 생활공간과 생활용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또 절에는 스님만이 아니라 당시의 보편적인 문화를 지닌 일반 신도들이 찾기도 하고

절집에 기대어 생활하는 일반 대중도 있다.

 

한마디로 종교 활동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다소의 특수성이 있을 수 있지만

절터에는 우리 문화가 집약되어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곧 역사가 투영되어있다.

문헌기록이나 사적기 등이 남아있는 절터, 그리고 각종 조사와 연구가 충실하게 이루어진 절터는

그 창건 동기와 과정, 그리고 폐찰의 원인 등을 우리에게 말해주며

각종 상징물들을 통해서 당시의 건축, 미술, 공예 등을 가늠할 수도 있다.

기록이나 신앙의 대상, 상징이 남아있지 않은 절터에도 우리가 알 수 없을 뿐

나름의 창건 동기와 배경, 그리고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이어졌고

어느 때인가 법등이 꺼지게 된 이런저런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동기나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각각에 대한 시간적인 좌표,

즉 어느 때 창건되었고 어느 때 폐사가 되었는지 알게 되면 그에 따라 공간적인 의미를 추론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같은 추론은 보다 많은 절터에 대하여 연구하고 조사한다면 그 역사적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중이 무도하여 빈대가 들끓게 되었고 그래서 절이 없어졌다는 속칭 ‘빈대절터’ 에는

불교 승려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숨어있거나 절이 없어진 것을 나중에 그럴 듯하게  

절에서 그 이유를 찾아 설명하려는 것이며

그 절이 망한 시점의 정치, 사회상, 그리고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절터 - 소리 없는 역사, 읽히지 않은 문화  

 

절터, 특히 이름조차 없는 작은 절터의 작은 역사는 절터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어느 때, 어느 문화적 맥락에서 폐허로 변했는지를 직접 말해주는 것은 없고

오직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는 기와더미와 돌담, 그리고 폐허로 변하고 난 다음

어느 농부가 일구었을 법한 밭뙈기가 들어섰던 대지만 남아있을 뿐이다.

작고 초라하여 역사나 문화에서 그리 크게 주목할 바가 아니라 할지 모르지만

이들 절터도 그 나름의 소박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이들이 모여 보다 큰 문화와 역사를 이룬다.

 

깊은 산, 험준한 바위에 새겨진 불상 앞 작은 집터는 어느 이름 없는 수도승의 절집이었을 것이고

그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당시의 문화나 역사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때로 불상조차 변변하게 새기지 못하여 그저 그런 돌조각을 미륵으로 모셨던 초라한 절터에는

민중들의 소박한 신앙과 의식이 반영되어있으며 크고 화려한 절집에 들어설 수 없었던,

또는 그런 절집에 들어서기를 꺼릴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리저리 나뒹구는 기와조각에는 격자문, 나뭇가지문, 물결문, 연꽃이나 이름 없는 풀꽃문,

그리고 보다 많은 경우 무늬가  없는 것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깨어져 형체를 어림할 수 없는 토기조각, 자기조각에도 그 나름의 시간이 새겨져있으며

그들의 얘기를 모두 들려 줄 수 있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자연과 인위적인 파괴를 버티며 끈질기게 남아있다.

절터에는 승려의 부도탑도 있고 무너진 석탑, 석등, 맷돌 등이 본디의 자리에서

절집의 역사와 문화를 말해주려는 듯 오랜 세월 법등이 끊어진 절터에 남아있다.

하지만 호젓한 산속에도 인간들의 욕심은 끊이지 않아

어느 부잣집 정원을 장식하도록 이들 문화재를 실어 나르기도 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버텨온 유물들을 장난스럽게도 부수어 버리기도 한다.

 

전국 방방곡곡 3,000여 곳을 헤아리는 절터들의 목록과 절터들은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았으니

임시방편으로라도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연고가 있는 절집이나 시설이면 더욱 좋을 것이고

옮겨져 신앙의 대상이나 특정 시점의 문화와 역사 자료로 활용된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다.

그리고 1차적으로 절터들에 대한 기초적인 기록과 남겨진 유물, 유구들에 대한 조사,

그리고 급속하게 사라져가는 절터와 관련하여 전승이나 구전의 채록 등이 시급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이를 절터와 절터에 남아있는 유물, 유구들에 바탕하여

역사,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 윤덕향 전북대학교 교수  / 사진 · 문화복지연대, 프리랜서 고려진

- 2009-12-04  월간문화재사랑,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