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옛길을 밟다 관갑천 잔도(串岬遷 棧道) |
여행길 우연히 얻은 행운 ‘관갑천 잔도’
1972년 1월 중순의 어느 날 나흘 예정의 대구출장 업무를 이틀 만에 마치고 얻은 여유를 즐겨보기로 작정하고 다부동, 해평, 낙동, 문경, 수안보 등지를 경유하여 상경로를 잡았다. 당시 이 경로는 대부분이 비포장도로로 이어졌으며 몇 시간을 기다려야 비로소 차를 옮겨 타고 다음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 내륙의 오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나는 미래에 수행하게 될 영남대로(嶺南大路) 연구의 기초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으므로 원활하지 못한 시골버스의 연계망이 오히려 나에게는 복을 안겨준 셈이다. 관갑천 잔도의 발견도 이 여행에서 얻은 행운이었다.
상주 낙동리에서부터 시작된 눈이 영강협곡에 이르렀을 때는 폭설로 변하여 몇 안 되는 승객들은 난방이 안 되는 버스 안에서 겁먹은 표정을 짓고 몸을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오른 쪽 창가에 앉은 내 눈에 검은 절벽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하얀 띠가 보였다. 차에서 내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눈으로 덮인 절벽 위의 흰 선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흥분되어 있었다. 서울 도착 즉시 청량리 밖에 있던 국립지리원을 찾아 항공사진을 판독해 본 결과 그 흰 선은 인간이 만든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귀가하여『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문경현 지지를 읽으면서 그것이 유서 깊은 옛 도로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월 말 나는 지도, 줄자, 사진기 등을 지참하고 현장 답사를 실시하였다.
수십 년간 인적이 끊어졌었기 때문에 오늘날 복원된 진남관(鎭南關) 부근부터 옛 길로 올라가는 길은 마른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그러나 돌 축대[오늘날 석현성(石峴城)으로 복원되었다] 밑을 지나자 수백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의 짚세기에 닳아 광택이 날 정도로 반들거리는 청석(slate) 노면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노면에 새겨놓은 ‘암도(岩道)’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최초의 발견자가 나라고 나설 수는 없으나 학계에서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으므로 글을 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반들반들한 옛길과 그 안에 남은 역사적 풍광의 아름다움
노면은 암반으로 된 부분과 토석으로 덮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청석과 역암이 섞인 암반 중에는 썩어서 부서지고 깎여 여행자가 실족할 염려가 있는 장소가 있고 급사면에서 쏟아지는 폭우로 토석을 다져 만든 길이 유실된 곳도 있었다. 그러므로 길 폭은 넓은 곳은 약 1.5m, 좁은 곳은 20~30cm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면밀히 관찰해 본 결과 과거에는 좁은 장소마다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난간을 설치하여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있을 정도의 길 폭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관갑천 잔도의 핵심부는 영강(潁江) 유로가 U자형을 이루는 상부의 인공 안부(鞍部)이다. 암석을 약 3m 정도 절개하여 약 2m 폭의 길을 낸 이 안부에 올라서면 영강 하류의 견탄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 안부 우측의 옛 잔도는 폐광된 문경탄좌의 갱도로 인하여 막혔으므로 총 연장 2km 남짓했던 관갑천 옛 잔도 가운데 현존하는 구간은 토끼비리의 500~600m에 불과하다.
관갑천 잔도의 개통과 관련된 고사(故事)는 <여지승람> 문경현 형승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관갑천은 용연(龍淵)의 동쪽 벼랑을 말하며 토천(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만든 잔도가 구불구불 6, 7리나 이어진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남정(南征) 시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
이 잔도(棧道)의 개척은 아마도 고려 태조 19년(936) 9월 고려군이 후백제의 신검과 벌였던 일리천(오늘날의 서산읍 앞을 흐르는 甘川)전투를 위한 원정군의 파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관갑천 잔도(串岬遷 棧道)는 고려군 공병대가 건설하였으며 한반도 재통일의 계기가 된 통일로인 셈이다.
그러나 잔도 입구의 고모산성에서 신라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영강 협곡에는 고려 이전에도 다른 통로가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관갑천 잔도(串岬遷 棧道)는 조선시대에도 영남으로 들어가는 인후지지(人喉之地) 역할을 하였다. 문경새재를 넘은 여행자들은 넓은 마성들을 보고 험로가 끝났다고 여기기 쉬웠으나 이 들판을 지나면 바로 관갑천 잔도가 나타나는데 이 험로를 지나야 비로소 영남 각지로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여지승람> 역원조를 보면 “여러 계곡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벼랑을 따라 잔도를 열어 겨우 인마가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있고 아래로는 깊은 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길손들이 모두 두려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내를 건너는데 이것이 견탄(犬灘)이다.”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화엄대사(華嚴大師) 진공(眞公)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모진 돌을 까서 치우고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하여 관갑의 길을 보수하였으므로 좁은 길, 위험한 잔도가 모두 평평해졌다. 이로써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밟는 것 같아 걸어가도 몸을 숙일 필요가 없고, 타고 가도 마음이 떨리지 않아 다시는(절벽에서) 굴러 떨어질 위험이 없게 되었으니...(중략).”라 하여 잔도의 보수와 관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관갑천 잔도는 영강 수면으로부터 5~10m 높이의 절벽을 깎아 만든 길인데 토끼비리 쪽은 동 · 남이 막혀 그늘지기 때문에 겨울에는 결빙이 되므로 위험하며 여름 호우 시에는 동쪽의 오봉산 사면에서 쏟아지는 물로 길이 막힐 염려도 있다.
개통 당시에는 일시적인 병력이동이 주목적이었으므로 간단하게 공사를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따라서 후대에는 인마의 통행을 위하여 보수작업이 필요했을 것인 바, 도로의 보수와 관리를 국가가 아닌 승려들이 맡았음을 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유럽에서는 알프스의 험로를 가톨릭 수사들이 맡은 것처럼 카라코름의 천축로(天竺路)에서는 불승(佛僧)들이 인도를 오가는 여행자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중의 험로에서 행려병자를 보살피고 길을 닦는 일을 승려들이 맡아 이른바 길 보시(普施)를 하였던 것이다.
관갑천 잔도는 지형적으로 험한 곳에 위치하므로 전략적으로도 중요시되었다. 임진란 당시 이곳에 이른 왜적들은 조선군의 매복이 두려워 망설였다가 지키는 병력이 없음을 알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지났다고 하였는데(문경현지,1760), 신립장군이 만일 이곳에서 왜적을 막았다면 왜란의 피해를 덜 입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새재는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길에 넘던 고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길은 만인을 위한 것이지 선비들만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새재를 오르기 전에 먼저 통과해야 하는 관갑천 잔도는 장돌뱅이, 시집간 딸을 찾아가는 부모, 산사를 탐방하던 불자 등 모두가 함께 오가던 만인의 길이었음을 18세기의 화가 권신응(權信應)은 그의 그림 봉생천(鳳生川)에 잘 묘사하고 있다. - 글 · 최영준 문화재위원, 고려대 명예교수 - 문화재청, 2009-12-04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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