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해치흉배

Gijuzzang Dream 2009. 12. 11. 05:53

  

 

 

 

 

 

 조경(趙儆) 해치흉배

 

 

 

 

해치(獬豸)가 서울의 새로운 상징물로 지정되면서 광화문광장의 조형물로

또는 버스와 택시의 문양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 해치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 조경(趙儆, 1541-1609) 해치흉배(서울시 민속자료 제31호)

경기도 화성시 출토(1998. 9)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이 흉배는 조선시대 무관(武官)인 조경(趙儆, 1541-1609)의 묘에서 1998년 9월에 출토된 것으로

함께 나온 옷들과 함께 서울시 민속자료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4백여 년의 긴 세월동안 땅 속에 있으면서 원래의 화려한 색은 모두 담황색으로 변해있지만,

선명한 해치의 모습과 섬세한 자수기법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해치흉배로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조경(趙儆)은 조선 중기 1598년(선조 31)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판윤을 지낸 인물로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과 함께 왜군을 막는 공을 세우고

훈련도감 당상, 훈련대장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해치흉배는 가로 34.5㎝, 세로 35㎝의 정사각형 형태로 바탕은 망사(網紗) 조직만 남아있고,

금사와 견사로 수를 놓았는데 기법이 특이하며 매우 정교하다.

평수와 자련수 기법으로 문양을 놓고 금사로 .

해치 위쪽으로는 구름, 아래쪽으로는 불로초와 파도, 꽃을 장식하였다.

중심의 해치는 머리 위쪽의 갈기와 꼬리는 푼사로 평평하게 수를 놓은 후

금사로 꼬리결을 만들면서 징금수로, 몸체는 꼰사로 평수와 자련수의 기법으로 수놓았다.

수놓은 후 모든 테두리를 돌아가며 굵은 금사로 윤곽선을 강조하며 장식하였다.

 

흉배는 관리의 근무복 앞뒤에 부착하여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조선 세종 때 논의가 있었으나 사치를 우려한 영의정 황희의 반대로 제정되지 않았다.

그 후 단종 때 명나라와 흉배제도에 이등체강(二等遞降) 원칙을 적용한 흉배제도를 반포하였고,

30년 뒤인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에서는 착용대상을 확대하고 기존의 문양을 수정하여 수록하였다.

연산군 때는 명나라와 별개의 문양을 적용한 흉배제도를 제정하였으나

10개월 후에 중종반정이 일어났으므로 시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해치는 단종 때 <경국대전>의 기록에 모두 사헌부(司憲府)의 장관인 대사헌의 흉배문양으로 나온다.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도 대사헌과 유사한 직책인 풍헌관(風憲官)의 문양인데,

해치는 일명 ‘해태’ 라고 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안다는 상상의 동물로,

뿔 달린 머리에 갈기가 돋아 있고 몸에 상서로운 기운이 차 있어서 천지의 조화와 정의를 상징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사악한 자를 처벌한다는 해치에 대한 인식 때문에 흉배문양으로 채택되었을 것이다.

   

<대명회전>에 함께 실려 있는 도안을 살펴보면

조경의 해치흉배처럼 머리 가운데의 긴 외뿔과 정수리의 수북한 갈기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해치흉배 유물은 숙종 때 대사헌을 지낸 임영(林泳, 1649-96)의 유품도 있는데

조경의 것과 형태는 약간 다르나 역시 외뿔이 있는 해치이다.

 

  


 

 

 

 

 

▲조경 무덤출토 단령(團領) Official Robe with Round Neck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31호

조경(1541-1609) 

경기도 화성시 출토(1998. 9)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복식유물은 출토될 당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누런색을 띄는데

이 유물의 경우 검정에 가까운 짙은 밤색을 띄고 있다.

형태는 목파임이 적고 소매는 긴 조선전기 단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앞무와 소매배래의 처리방법은 지금까지의 출토유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형태이다.

앞무의 윗부분을 삼각형으로 잘라내고 소매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삼각형 모양을 이어주어

배래를 마무리하였다. 뒷길에는 대(帶)를 끼울 수 있는 고리가 있다. 주(紬)를 사용한 홑옷이다.

 


조경 무덤출토 답호 Coat with Short Sleeve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31호

조경(1541-1609) 

경기도 화성시 출토(1998. 9)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겉과 안이 모두 칼깃이고 10㎝ 너비의 동정이 달려있다.

소매부리로 갈수록 약간 넓어지는 직선배래 모양이고,

매부리로 갈수록 약간 넓어지는 직선배래 모양이다.

정응두(1508-1572)의 답호와는 달리 무의 윗부분이 뾰족하다.

밑단과 옆단은 따로 바느질하지 않고 대부분 식서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길과 무의 경계는 앞길과 뒷길에 각각 4㎝를 삼각형 모양으로 접어서 줄여주었다.

연화만초문(蓮花蔓草紋)으로 제작한 홑옷으로

어깨바대에는 주(紬), 옷고름에는 채화라(菜花羅)를 사용하였다.

 


▲조경 무덤출토 철릭(帖裏) Coat with Pleats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31호

조경(1541-1609) 

경기도 화성시 출토(1998. 9)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겉깃은 칼깃이며 소매는 매듭단추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다.

아래의 치마부분에는 0.3~0.4㎝의 잔주름을 잡고 4.5㎝의 너비로 안단을 대주었다.

고름바대는 직금단(織金緞)을 사용하고, 도련의 안단은 문사(紋紗)로 마무리하였다.

대화문단을 사용한 홑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