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송광사 복장물 ‘소현세자 가족의 염원’

Gijuzzang Dream 2009. 12. 6. 16:47

 

 

 

 

 

 

 송광사 복장유물 발견 

 

 

소현세자 며느리 허씨가 자신의 남편 경안군 건강 발원하며 불상 조성

 

 

 


복장유물이 나온 송광사 관음전 내 목조관음보살 좌상

 

 

최근 전남 순천 송광사의 관세음보살상에서 초대형급 복장유물이 발견됐다.

2009년 11월2일 보살상에 금을 새로 입히기(개금불사) 위해 상태를 확인하던 중
저고리, 화엄경 교장, 다라니, 후렴통 등 조선중기 유물 450여 점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불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나무를 깎거나 쇠를 녹여서 형상을 만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갖가지 경전이나 옷가지를 집어넣고
중앙에 사리나 보석, 유리 같은 신령스러운 물건들을 넣은 보물창고다.

이것을 복장물(腹藏物)이라고 부른다.



불상의 복장은 일종의 ‘타입캡슐’ 역할을 한다.

복장이 한 번 터지면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1000여 년 전 옷이나 책들이 쏟아져 나오며,
바깥 공기와 접한 적이 없어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경우가 많다. 으레 국보급에 이르는 유물인 경우가 많아

‘어디서 복장 터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주지스님이나 학자, 문화재 담당기자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복장유물은 일종의 ‘타임캡슐’

불복장이 열리면 그동안 숨겨져 있던 귀중한 역사가 되살아난다.
2005년에 해인사 쌍둥이 비로자나불의 복장물이 공개됐을 때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이 각각 조성한 불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골칫거리는 복장물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고찰 불상들의 복장이 도둑에 의해 터지는 일이 빈번해진다는 점이다.
절집에 ‘불상 복장(腹藏)이 터지면 스님들 복장(腹腸)이 터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복장 안의 신성한 물건들을 도둑맞으면 되찾을 길이 막막하니 말 그대로 복장 터질 노릇이라는 말이다.
 
보물 제959호로 지정된 기림사 비로자나불의 복장물들은
1986년 대적광전에 들어와 유물을 훔쳐 도망치는 절도범들을 잡아서 겨우 되찾은 것이다.
거기에는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무려 700여 년 동안 발행된 71권의 전적이 포함돼 있었다.

송광사 관세음보살상에서 이번에 터져 나온 것은 단순히 조선 중기의 복식이나 경전만이 아니었다.
복장 안에는 두 벌의 옷이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남자 저고리에는 이 보살상을 조성한 사람이 소현세자의 며느리 허씨이고,
그녀가 남편 경안군의 병이 낫기를 발원하며 이 불상을 조성했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이 불상은 법주사의 관세음보살과 아주 흡사해 17세기 중반에 조성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었다. 이번 불복장의 발견으로 1662년 경안군 부인 허씨가 조성했음이 밝혀졌다.

소현세자의 집안은 병자호란으로 인한 조선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아들로, 오래 살았다면 효종 대신 조선의 왕위를 이어갔을 인물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직후 소현세자와 그 가족들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빈 강씨는 그곳에서 장사 수완을 발휘해 조선에서 들여온 인삼이나 약재를 팔아 무역을 했고,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소현세자 또한 청나라 조정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어 대청외교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온 직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을 때 “온몸이 검은 빛이 됐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독살 가능성이 높다. 소현세자 부인인 강빈조차 왕실의 저주사건에 연루돼 누명을 쓰고 사사됐다.
이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는 “청나라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 것을 두려워한 인조가
아들과 며느리를 제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소현세자의 남은 자식들은 어미의 죄를 뒤집어쓰고 제주도로 유배됐다.
제주도에서 강화도, 곧이어 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긴 기간이 10년.
제주도로 끌려갈 당시 경안군은 겨우 네 살에 불과했다.
두 형과 함께 제주도를 거쳐 강화도, 교동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경안군은
10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 복권됐다. 이때 허씨를 만나 결혼도 했다.
 

소현세자 자식들 귀양살이 단명
 
10년 간의 귀양살이로 몸과 마음에 깊은 병을 얻었는지 6년 뒤인 1665년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죽었다.
경안군뿐만 아니라 그의 두 형과 누이들도 모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아
그들의 귀양살이가 얼마나 고달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소현세자 가문의 비극은 경안군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자식들 가운데 유일하게 후손을 남긴 경안군은
인조의 대통을 잇는 명실상부한 적장자였고, 효종은 어디까지나 차자일 뿐이었다.

경안군의 아들들은 강화도에서 누군가가 “소현세자의 손자 임천군은 경안군의 아들로,
이분이 진짜 성인이며 나라의 종통(宗統)이다”라는 격문을 붙인 사건으로 인해 또다시 유배를 당했고,
경안군의 손자 밀풍군은 영조 때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됐다가
난이 평정된 뒤 자결했다.

송광사 관세음보살이 조성된 것은 1662년으로, 경안군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이다.
병든 남편에 대한 걱정, 가족들에게 밀어닥칠 불행에 대한 두려움을
허씨는 불상 조성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이번 송광사 관음전 보살상의 복장물과 관련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이 보살상이 모셔진 전각이 조선 왕실에서 지어준 왕실원당이라는 점이다.
송광사 관음전의 원래 이름은 '성수전(聖壽殿)'이었다.
성스러운 이들의 무병장수를 발원하기 위한 건물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1903년 기로소 원당으로 지어준 것이다.
‘기로소’는 왕과 정2품 이상의 문신(文臣)들이 70세가 넘으면 들어갈 수 있었던 일종의 사교클럽으로,
그들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한 법당을 왕실에서 지어준 것이었다.

원래 성수전 바로 앞에는 관음전 건물이 있었지만 관음전이 쇠락해 무너질 지경이 되자
1950년대 초 법당을 부수고 관음전 안에 있던 관세음보살을 '성수전'으로 옮겼다.
망국의 군주가 된 고종의 위패가 놓여 있던 자리에 관세음보살이 안치되면서
이 건물의 이름도 '관음전'으로 바뀌게 됐다.

고종의 위패 자리에 놓인 관세음보살이 하필 그의 7대조 할아버지뻘이 되는 경안군을 위해 조성한
불상일 줄이야. 어쨌거나 고종이 지은 건물에 경안군의 불상이 모셔지게 되고,
벽화에 그려진 조정대신들은 경안군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게 됐으니
우연치고는 꽤나 재미있는 우연이라 할 수 있다.
소현세자와 효종의 운명이 400년 전에 뒤바뀌지 않았더라면
불상의 조성자와 건물의 창건주가 지금과는 정반대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 탁효정 <미디어붓다 기자>
bellaide@naver.com

- 2009 12/08   위클리경향 853호

 

 

 

송광사 복장유물(위쪽)과 유물중 발원묵서가 있는 저고리(아래 왼쪽)

 

불상을 개금(改金 · 불상에 금을 다시 입히는 작업)하는 과정에서

대각국사 의천(義天 · 1055~1101)이 간행한 교장(敎藏 · 불경 해석서)을 비롯한 각종 경전(經典)과

의복, 직물, 다라니 등 복장(腹藏) 유물 450여 점을 발견했다.

 

복장물이 발견된 관음보살좌상은

1662년(현종 3) 경안군(慶安君, 1644-1665, 소현세자의 3남)의 처 허씨(許氏, ?-1684)가 발원(發願)

조성했는데, 17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조각승 혜희를 비롯한 6명의 조각승이 공동으로 제작했다. 


대각국사 의천 <대방광불화엄경합론(大方廣佛華嚴經合論)> 


 

특히 이 유물 중에는 현존 유일의 대방광불화엄경합론(大方廣佛華嚴經合論) 권제 73, 74, 75는

의천이 11세기에 간행한 것을 조선시대 1462년(세조 8) 간경도감에서 전라도 광주목으로 하여금 판각,

간행하게 한 교장(敎藏)으로 현존 유일본이다.

문화재청은 “고려시대 교장의 성격을 밝히는데 새로운 자료”라며

“불교문화사 · 서지학 · 인쇄문화사에 매우 귀중한 전적”이라고 설명했다.

복장 유물 중 복식은 남성용 저고리와 여성용 배자(褙子) 두 점이 발견됐다.

저고리는 남성용, 배자(褙子)는 여성용이고 모두 수준급이며 보존 상태 또한 양호하다.

또 11점이 확인된 직물편에는 명주, 모시, 무명실 등으로 짠 항라(亢羅)가 발견됐다.

이 직물은 현재까지 조사된 동일 직물로는 시기가 가장 오래됐다고 문화재청은 덧붙였다.


발견된 유물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다라니(기원을 비는 주문) 등은 다시 불상 내  복장에 봉안됐다.

보존이 필요한 유물들은 송광사박물관에 별도로 보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