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조선왕실 백자의 고향 - 경기도 분원(分院)

Gijuzzang Dream 2009. 12. 31. 13:39

 

 

 




 

 

오래된 과거, 분원의 역사를 돌아보다 

 

조선 초기에 이미 광주 일대에 들어선 왕실 도자기 제작소는 보통 10년을 주기로 주변지역으로 가마를 옮겨 다녔다고 한다.

분원(分院)이 눈같이 하얗다는 설백색의 백자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금사리에서 분원리로 옮겨간 것은 1752년(영조 28) 무렵이다. 분원이 사실상 폐지된 19세기말까지 머물면서 동네의 이름까지 아예 분원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경남 통영시나 전라병영성이 있던 전남 강진 병영면이 비슷하게 이름이 지어진 사례이다.

 

그런데 영조 당시 금사리는 광주군 퇴촌면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금사리에서 작은 언덕 하나 너머로, 걸어서 10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의 남종면 분원리는 광주군이 아닌 양근군이었다. 양근군은 1908년 지평군과 합치면서 땅이름에서 글자 하나씩을 조합한 양평군이 되었고, 1914년 남종면이 양평군에서 떨어져 나와 광주군에 편입되었으니 분원리는 100년 전 까지도 양평 땅이었다.

 

그린벨트에다 수도권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개발이 거의 불가능한 분원리가 현재 갖고 있는 중요한 문화적 자산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연히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옛날 도자기를 굽던 가마의 일부를 발굴한 자리에

2003년 세워진 경기도자박물관 분원백자자료관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시대 도자기 관련 유적이다.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 또 하나의 자산은 붕어며, 메기 같은 민물고기를 재료로 하는 갖가지 음식이다.

 

이처럼 분원이 먹을거리로 유명하게 된 데는 음식 맛도 음식 맛이려니와

마을 앞으로 호쾌하게 펼쳐진 팔당호수의 뛰어난 풍광이 단단히 한몫을 했을 것이다.

요즘 분원이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백자를 얘기하는 사람보다,

붕어찜을 얘기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해마다 5월이면 이곳에서 분원 붕어찜 축제가 열리는데,

불과 30년 남짓한 역사를 가진 이 마을의 붕어찜이 500년 역사를 가진 조선 백자의 역사를 훨씬 뛰어넘는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 산업적 자산으로 떠올랐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재미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이다.

이렇게 된 데는 분원이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데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곳에서 생산된 도자기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에 그치지 않고

경제사 및 생활사적 연구도 상당 부분 진척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요즘같이 스토리텔링이 강조되는 시대에

그동안 밝혀진 분원에 얽힌 갖가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물길 따라 뱃길 따라 시작된 조선후기 도자기 르네상스



광주의 가마터 조사는 조선총독부 시절 일찌감치 시작됐다.

우리 학계도 1960년대부터 조사를 벌였고,

최근까지 이루어진 지표조사 결과 현재 광주시에서 무려 312개의 가마터가 확인됐다.

물론 이 많은 가마가 모두 백자를 생산한 것도 아니고, 모두 왕실 도자기를 생산한 것도 아니었지만

1467년에서 1468년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옹원 분원의 설립 이후 왕실용 가마는

그만큼 자주 옮겨 다녀야 했음을 보여준다.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땔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잦은 이사는 가마의 규모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분원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강원도에서 흘러드는 북한강과 충청도에서 내려오는 남한강이 합쳐져

도성으로 이어지고 바닷길을 이용하면 우리나라 어디든 통하는 한강이라는 사통팔달의 물길을 접한

분원리의 입지는 그런 점에서 절묘하다.

육운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 원료조달과 소비처로 완제품을 수송하는데 편리하다는 점에서

분원리는 도자기 공장을 세우는 데는 그만이었다.

아담 스미스도 유명한 ‘국부론’에서 수운이 육운보다 100배나 효율성이 높다고 강조했다지 않은가.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시대를 연 영조는 분원을 이곳에 정착시킴으로써

도자기라는 문화산업분야에서도 확실한 업적을 남겼다.

 

지금 분원리 앞에 펼쳐진 팔당 호수는 건너편 검단산 초입까지 그야말로 광활하게 펼쳐져있지만,

이것은 1972년 팔당댐이 세워진 이후의 풍경이다.

댐이 한강을 가로막기 이전 분원리 앞에는 우천(牛川 · 소내)이 흘렀다.

요즘은 경안천으로 불리는 우천은 용인에서 발원한다.

분원리의 어르신들은 옛날 청량리 경동시장에서 팔린 김장배추의 칠할은

지금은 물에 잠긴 이곳 우천벌에서 키운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우천벌이 수몰되면서 우천리 마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기록에 남은 분원의 역사

 

우천은 그림애호가에게 조금은 익숙한 이름일 수도 있겠다.

겸재 정선이 같은 이름의 그림을 남겼기 때문이다. 지금의 분원리 일대를 그린 것이다.

 

겸재는 영조 15년(1740) 양천현령에 임명되었다. 영조가 겸재를 지금의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인 한강변의 양천에 보낸 것을 두고 강변 경치를 마음껏 그려보라는 뜻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겸재는 부임 첫해와 이듬해에 걸쳐 한강변의 경치를 33폭에 담았는데, 바로 ‘우천’이 담겨있는 간송미술관 소장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그림에 보이는 산중턱의 큰 기와집이 분원인지는 확실치 않다. 금사리 분원이 이곳으로 이전한 시기와는 10년이 조금 넘는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사리 시절에도 원료조달과 제품수송에 분원리에서 가까운 소내나루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만큼 이 기와집이 분원과 관련이 있는 시설일 가능성이 크다. 그림에도 화물운송에 쓰였을 커다란 돛단배 한척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분원이 우천변에 자리 잡은 뒤 새로운 땔감 조달방안은 세금징수였다.

뗏목 형태로 강원도와 충청도 지역 상류에서 흘러들어오는 목재 값어치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를

일종의 통행세로 받아 필요한 땔감의 상당 부분을 사서 쓰도록 한 것이다.

 

분원리에는 수세징수소도 설치됐다. 자연히 강원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도성주변으로 재목을 실어 나르던

뱃사공과 목재 상인들의 반발도 거셌다.

1891년 뱃사공의 조직인 선도중(船都中)이 수세 혁파를 요구하는 방을 우천에 내걸고

수백 명이 분원 공방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여 세 사람이 옥에 갇혔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백자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의 하나인 백토의 공급도 원활해졌다.

광주지역의 백토는 철분이 들어있어 색깔이 좋은 백자를 만들기 어려웠다.

따라서 분원은 초기부터 다른 지역에서 흙을 실어 와야 했다.

17세기에는 강원도 원주백토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무겁디무거운 흙을 마소를 이용하여 먼 거리를 운반한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백토는 강원도의 원주와 양구, 경상도의 경주 · 진주 · 곤양 · 하동, 평안도의 선천,

경기도의 가평과 이천, 충청도의 서산 · 충주 · 음성, 황해도 봉산 것이 다양하게 쓰였다.

뱃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분원, 변화를 꾀하다  

 

400년 이상 국가기관으로 운영되던 분원은 1883년 운영권이 자본을 출자한 12명의 공인貢人들에게 넘겨져 분원공소로 전환됐다.

개항 이후 돈 들어가는 데는 많고 세수는 적어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고종이 일종의 정부 구조조정 태스크포스라고 할 수 있는 감성청(減省廳)을 만들었고, 이 기관이 요즘 말로 하면 국영도자기공장의 민영화를 추진한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을 왕실에 진상하고, 빼돌려진 일부가 시중에 나돌 뿐이었던 분원백자는 시장에 합법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분원공소는 국가의 지원을 계속 받았고, 세금징수와 같은 특권도 유지되었다.

특히 궁궐과 조정에 납품하는 대가로 도성과 경기지역 시장에서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그릇과 분원 이외 다른 가마에서 만든 그릇의 판매를 단속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그럼에도 1894년에 이르면 채산성이 악화되어 부채가 백만 냥에 이르러 분원공소는 점차 사양길을 걷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특권에 안주하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경영을 혁신하는데 소홀하기 마련인가 보다.

 

이 같은 분원의 역사는 좁게는 분원리와 광주시, 경기도,

넓게는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다.

4대강 개발과 관련된 논란이 한창이지만, 한국 수운의 역사에서 분원은 중요한 구심점이 될 수 있다.

 

근대적 상거래로 발전해가는 19세기의 상업사를 설명하는 데도 분원과 분원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지금 분원리를 찾을 사람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은

미술사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조촐한 자료관뿐이다.

 

지금은 작은 마을이 되어버린 분원에서 벌어졌던 흥미로운 역사를 하나 둘씩 알아 갈수록,

분원을 찾는 사람들이 이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이든, 가마를 포함한 과거의 흔적을 되살린 체험민속마을이든, 무엇이든 좋을 것이다.

결정권을 가진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분원을 부탁합니다.”   




- 서동철 서울신문 편집국 부국장

- 월간문화재사랑, 2009-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