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조정래
“20년간 글감옥에서 오직 먹고 자고 쓰기만 했죠” | |||||
| |||||
그래서 ‘황홀한 글감옥’이라 한 겁니다. 출판사 내부에서 인기투표를 해 제목을 정하더군요.”
▲책에서 공개한 내용은 대부분 처음 밝히는 것들 아닌가요. “그렇죠. 소설 외 궁금증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가 전부터 있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제가 작가생활을 한 지 40년이 됩니다.
문학도 그렇고 제 인생도 그렇고,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문학 지망생의 영원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 하는 점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다독(多讀) · 다작(多作) · 다상량(多商量)의 명언을 들면서
다작과 다상량의 순서를 바꾸라고 충고했는데요, 왜 그렇습니까.
“문학을 하겠다는 사람은 대부분 조급한 마음에 쓰기부터 합니다. 그러나 좋은 글은 내면에서 우러나옵니다. 영혼속에 감춰졌다가 곰삭아서 나오거든요.
그럴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다독 4, 다상량 4, 다작 2 정도로 배분하는 게 좋아요.”
▲젊은이에 대한 충고 말씀하니 떠오르는데요, 책에 보니 “인생의 선택을 앞둔 젊은이들이여, 부모의 지나친 개입을 단호히 거부하라”는 대목이 있더군요.
“우리나라 부모의 자식사랑은 자녀의 개성을 말살시킬 정도로 지나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자녀를 소유물처럼 생각해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를 통해 이루려 합니다.
하지만 자녀는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자신있는 분야에서 기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도둑질이 아닌 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고3 때 “승려가 되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이게 무슨 말인가. 조씨의 아버지 조종현씨는 등단한 시조시인이면서 ‘철운’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 일본은 승려들을 일본식으로 결혼시켜 대처승으로 만들었다.
철운스님은 4남4녀를 두었고, 그 둘째아들이 전남 승주 선암사에서 태어난 조씨다.
인생이 바뀔 뻔했던 결정적 순간을 오늘날 조씨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느날 아버지가 느닷없이 ‘너 부처님 앞으로 가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죠. 조계사 승적 168호라는 번호가 적힌 승적(僧籍)이었습니다.
그 서너 달 전에 아버지가 남자는 장성하면 호를 갖는 법이라며 저에게 ‘하늘을 벗해 살라’는 뜻으로
인천(隣天)이라는 호를 지어 주기도 했죠. 아버지의 배신에 저는 거의 기절할 뻔 했습니다.”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있는 힘껏 저항했다고 한다. “저는, 저는 문학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만해 선생을 봐라. 그분께서는 종교도 문학도 다 크게 이루셨다”고 했고, 아들은 “만해 선생은 백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분”이라고 되받았다.
그렇게 해서 아들은 승려가 되지 않고 동국대 국문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묻어나는데요, 그후 부자 사이는 어땠습니까. “돌아가시기 6개월 전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자식들이 짝을 지어 면회를 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저는 빼라고 했다고 해요. 소설을 써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제 아내만 갔어요.
나중에 어머니께 들으니 <태백산맥>을 읽으시고 ‘자식 키운 보람 있네’라고 하셨다고 해요.”
▲<태백산맥>이 올해 출간 20년이 됐고, 200쇄 돌파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역작인데 어떻게 쓰게 됐습니까.
“소설을 구상하던 때가 서른 일고여덟 정도였는데요, 우리 민족의 삶이 너무 처절하고 비참하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태백산맥> 하나만 구상한 게 아니고 <아리랑>과 <한강>을 함께 생각했어요.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세 소설의 제목까지 다 정해 둔 상태였습니다.”
▲방대한 소설을 하나도 아니고 세 편씩이나 어떻게 한꺼번에 준비할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를 읽고 안으로 삭이면서 생각을 집중하면 됩니다. 저는 세 편을 동시에 구상했기 때문에 등장인물도 겹치지 않도록 신경써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태백산맥>에 쓰고 싶지만 <아리랑>에 더 낫겠다 싶어 아껴둔 사람도 있는데,
<아리랑>에서 판소리하는 사람으로 나오는 옥비가 그런 경우입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한 소설에만 나오는 인물이 400명이 넘어 읽는 사람도 메모해 두지 않으면 헷갈리기 십상인데
세 편의 소설속 인물을 겹치지 않게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는 이걸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예술가의 기본은 새로움입니다. 새롭지 않으면 감동을 줄 수 없어요. 그런데 대하소설은 뒤로 갈수록 지루해진다는 게 정설입니다.
글 쓰는 이가 육체적으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쓰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8시간 노동이 아니라 그 2배인 13~16시간을 일했습니다.
모자라는 잠은 토막잠으로 해결했죠. 그렇게 20년 동안 오직 먹고 자고 쓰는 일만 되풀이했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 거죠.”
▲그렇게 글 감옥에 갇혀 지낼 때 고통이 컸을 것 같은데 일탈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많죠. 수도 없이 많습니다. 글이 막혀 나아가지 않을 때 보통은 술 또는 여행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저는 이 유혹에 한 번 응하다 보면 끝없이 물러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자기 통제가 안되고 소설에 긴장이 떨어지거든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루에 원고지 30장씩을 써서 10권짜리 소설을 4, 5년 걸려 완성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어요.
그런데 술을 한 번 먹으면 사흘은 글을 못씁니다.
술 한 번에 원고지 90장이 날아가는 거죠. 그걸 열 번하면 900장이 날아가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했습니까. “술 먹는다고 안 써지는 글이 써집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저는 안 써질수록 더 책상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계속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게 고통이 환희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글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강산이 두 번 바뀌었습니다. 20년 뒤 ‘출옥(出獄)’하고 보니 세상이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던가요.
“별로 생경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TV 뉴스와 신문을 꾸준히 보면서 필요한 대목은 스크랩도 했거든요.
현실감각은 늘 살아 있었습니다. 사람만 만나지 않은 거죠.”
▲그 기간에 글 쓰는 주된 방식이 원고지에서 컴퓨터로 바뀌었는데요. “그렇죠. 그래도 저는 손으로 원고지에 씁니다. 컴퓨터로 쓴 글을 보면 기계 속도에 맞추느라 글이 터무니없이 길어지고 부실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글에 긴장과 탄력이 없어요. 문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손으로 써야 합니다.”
▲원고지에 쓰다 보면 파지를 내게 되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경우엔 얼마나 냅니까. “저는 문장을 세 번 생각해 씁니다. 그래서 파지가 많지 않은 편이에요. 100장을 쓴다면 20장 정도의 파지를 냅니다.”
▲글자 획수 하나만 틀려도 다시 쓴다면서요. “글을 쓰려면 영혼이 맑아야 합니다. 그런데 글자가 틀리면 영혼이 혼탁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조금만 틀려도 깔끔하게 고쳐 씁니다.
아마 문인들 가운데 제 원고가 누구보다 깨끗할 겁니다.”
▲그래야 문학적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가요. “문학은 찌들려 있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일입니다. 그래야 감동이 있거든요. 영감은 생각을 축적해 나가다 보면 어느날 어느 순간 터집니다. 사고의 집중이 영감을 부르는 거죠.”
▲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했는데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문고리 같은 쇠붙이에 전기가 통해 만질 수 없다거나 아내 손을 잡았다가 아내가 질겁하는 경험 같은 것입니다.
한번은 전화를 받으려고 수화기를 드는 순간 전화통에 불이 붙으면서 전화가 끊겼습니다.
그 뒤 전화기가 불통이 돼 애프터서비스(AS)를 맡겼는데 기술자들이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남들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무당이 접신하는 것과 같은, 과학으로 설명이 안되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조씨 부인은 ‘사랑굿’의 시인 김초혜씨다. 김씨는 남편보다 5년 먼저 등단해 결혼식 주례를 선 서정주 시인이 새해 인사를 가면
“여기는 장래가 촉망되는 여류시인, 여기는 남편인 문청 조정래군”으로 남들에게 소개했다.
조씨가 ‘누구의 남편’에서 벗어난 것은 <태백산맥>을 쓰고 나서였지만
이후에도 부인은 남편이 쓰는 소설을 처음으로 읽고 격려와 지지, 감독과 충고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극우 세력이 <태백산맥>을 ‘빨갱이 소설’이라고 몰아 검찰에 고발했을 때
작가를 위로한 것도 부인 김씨였다.
“그때 아내가 그래요. 당신, 겸손해야 한다고요. 독자들에게 그만큼 사랑을 받았으면 이런 고통쯤은 견뎌야 한다는 거예요.”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서 벗어난 것은 11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였다. 그동안 작가가 받았을 고통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익단체의 살해 위협이 계속되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서를 쓴 것도 두 번이다.
▲<태백산맥>에 대한 고발과 수사는 문학을 법으로 옭아매려 한 비민주적 행태로, 역사의 비판을 받을 텐데요.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민주주의의 퇴행 기미가 있죠. 하지만 이 또한 국민의 선택이라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완성품도 아니고요.
일보후퇴했다가 이보전진하기도 하는 겁니다.
용산참사를 예로 들면 정부가 책임져야죠. 내버려 두면 정부의 업보가 될 것입니다.
4대강 사업, 국민 60%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했다가 실패하면 엄청난 역사의 비판을 받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정부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도 선거에서 500만표 차이나게 당선시켜 준 국민이
만들어 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은 그 피해 속에서 자각하게 될 것인데, 지식인은 이를 경고하는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럼 1980년대 분단에 이어 지금 시대를 말하는 소설도 써야 하지 않나요. “<태백산맥> 이후 30년의 세월도 대하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사이 우리는 군부독재를 종식시켰고 노동세력을 조직화했지만
탈북자, 외국인노동자, 용산참사와 같은 또 다른 사회갈등 요소를 안게 되었거든요.
작가라면 이런 문제에 천착해야 하는데 저는 더 이상 그런 긴 글을 쓸 여력이 없습니다.
제 취재수첩에 20개 정도의 소재가 있는데
- 사진 · 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 2009 10/27 위클리경향 847호
|
'나아가는(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혼천시계 (0) | 2009.11.12 |
---|---|
소형관측기구 '소간의' 복원 (0) | 2009.11.12 |
문화재 보존과학 - 문화유산을 과학의 손길로 보존, 복원한다 (0) | 2009.11.11 |
무자위=수차(水車)가 조선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 (0) | 2009.11.11 |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 중요민속자료 지정 (0) | 2009.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