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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위=수차(水車)가 조선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

Gijuzzang Dream 2009. 11. 11. 04:41

 

 

 

 

 

 

 

 수차(水車)가 조선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

 

세종대왕도 두 손을 든 ‘무자위’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꺼리는구나!”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훈민정음 창제,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

우리나라 고유의 달력인 칠정산내외편,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리지와 농사직설 편찬 등등….

이처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치적을 쌓은 세종대왕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오죽 했으면 다음과 같은 한탄조의 말을 늘어놓기까지 했을까.

“사람들은 모두가 새로 만드는 것을 꺼리는구나!”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이었기에 세종대왕마저 이토록 힘겹게 했던 것일까.

혹시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도저히 근접하기 어려웠던 첨단 제품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주인공이 요즘도 시골 마을의 염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차(水車)’라고 한다면,

아마 의외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물 대기’ 작업

예로부터 전해오는 우리 속담 중에 “논물 욕심에는 사돈도 친구도 없다”거나

“물 도둑질은 세상이 다 아는 도둑질”이라는 말이 있다.

농경국가였던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물 대기’ 작업이었다.

요즘이야 양수기가 흔하고 관개시설이 잘 되어 있어 물 대는 일이 수월한 편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물 대기가 가장 고단한 노동이었으며 농부들의 제일 큰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때문에 “농부들은 하지가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산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물에 목숨을 걸고 살았다.

특히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한 해 농사는 망친 거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재해는 가뭄이었으며,

또한 이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농사 도구가 사용되었다.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릴 때 사용하는 두레박과

박을 반으로 잘라 속을 파내고 말린 물바가지에서부터 물허벅, 물지게 등을 이용해 물을 날랐다.

또 맞두레, 용두레, 무자위 등의 양수 기구가 사용되기도 했다.

용두레를 이용하여 농부가

논에 물을 대고 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새끼줄에 매단 두레박을 이용해 물을 퍼 올리는 도구가 맞두레이다.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의 논밭으로 혼자서도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용두레는 3개의 기둥을 묶어세우고 그 사이에 나무를 파서 만든 기다랗게 생긴 두레박을 새끼줄로 매달아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물을 퍼 올리는 장치이다.

이것들에 비해 과학적 원리가 더해져 좀 더 발달된 도구가 '무자위', 즉 '수차(水車)'였다.

지역에 따라 무자새, 물자애, 답차, 수룡 등으로도 불렸던 무자위는 ‘물을 자아 올린다’는 뜻을 지닌, 수차의 순우리말이다.

 


통신사 박서생이 들여온 왜수차

무자위는 중국 한나라 때인 서기 170년경에 발명되어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수차가 가장 처음 거론된 것은 바로 세종대왕 때였다.
1429년(세종 11년) 12월 3일자의 세종실록에 의하면,

조선 최초의 통신사로서 일본 교토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박서생이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 중

조선에서도 시행할 만한 사항을 아뢴 내용이 쭉 나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수차의 제작이었다.

“일본 농민 중 수차를 설비하여 물을 퍼 올려 전답에 대는 자가 있기에

김신으로 하여금 수차를 만드는 법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 수차가 물을 타고 저절로 회전하면서 물을 퍼 올려 대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전년에 만들었던 수차인 인력(人力)으로 물을 대는 것과는 다른데,

다만 물살이 센 곳에는 설치할 만하오나 물살이 느린 곳에는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록 물살이 느리더라도 사람이 발로 밟아서 물을 올린다면

또한 물을 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간략하게 그 모형을 만들어 바치오니

청컨대 각 고을의 설치할 만한 곳에 이 모형에 따라 제작하여 관개의 편리를 돕도록 하소서.”

염전에서 물을 대는 데

사용되고 있는 무자위 

이에 대해 여러 대신들이 의논한 결과 수차의 제조 설치는 ‘시험해 봄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해인 1430년 9월 27일 드디어 세종대왕은 박서생이 일본에서 보고 온 대로 만든 수차의 조선식 모델을 공개하고는, 각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수차를 설치할 만한 장소를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전국 각처에 설치된 수차의 활용 결과는 그리 썩 좋지 않았다.

이극강은 철원과 수원에 가서 설치된 수차의 상황을 살펴본 후 “사람이 물을 퍼 올리면 즉시 새어 버린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를 받은 세종은 진노하며 다시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수차의 설치는 원래 한재(旱災, 가뭄)를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받들어 행하는 관리가 모두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자갈땅에 설치하여 쓰지 못하게 되니

심히 부당하다. 위로는 중국으로부터 아래로는 왜국에까지 모두 수차의 이익을 받는데,

어찌 우리나라에서만 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여기에 마음을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은 급하게 백성들에게 이익을 보게 하려고 함이 아니다.

나는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 것이니

꼭 이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각도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

 


“어찌 우리만 행하지 못하는가”

수차는 동력원에 따라 사람의 손으로 돌리는 '손무자위'(수전수차 ; 手轉水車),

발로 밟아 돌리는 '발무자위'(답차 ; 踏車),

그리고 물의 힘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는 '제무자위'(자전수차 ; 自轉水車) 등로 나누어진다.

박서생이 일본에서 본 수차는 사람의 힘으로 돌리는 수차가 아니라

물의 힘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는 제무자위였다.

때문에 제무자위를 돌리기 위해서는 느리게 흐르는 물을 급류로 만들어야 하며,

바퀴와 물을 푸는 단자의 치수 등을 세밀하게 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따랐다.

1960년대 농촌에서 무자위를 이용해

물을 대던 모습 

즉, 농민들이 스스로 제작해 사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수차의 보급을 강력히 시행해 나갔다. 박서생이 일본에서 들여온 수차를 왜수차라 하고 중국에서 들여온 기존의 수차를 당수차라 불렀는데, 세종은 왜수차와 당수차를 만드는 장인을 뽑아 지방으로 보내고 관리들로 하여금 수차 설치를 독려했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썼으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1433년 4월 8일자의 세종실록에는 그 대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좌승지 김종서에게 의견을 구한 결과, “신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을 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종서는 “본국은 토질이 나쁘고 샘물이 낮아서 백 배나 공력을 들여도

하루에 물 대는 것은 소량에 불과하고, 작동을 그치면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고 말했다.

이에 세종은 “사람들은 모두가 새로 만드는 것을 꺼리는구나”라며 탄식한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신하 중 한 명인 김종서조차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의 표현이었을 게다.

수차 설치에 찬성하는 도승지 안숭선을 김종서와 함께 보내 수차를 시험하게 해봤는데,

역시 물 대는 양이 적고 그 물 또한 모두 새는 등 결과가 좋지 않았다.

따라서 세종은 사람의 힘으로 돌리는 수차는 모두 없애고 스스로 도는 제무자위는 그냥 두도록 했다.

그 후에도 세종은 ‘자격수차(自激水車)’라는 제무자위를 여러 번 시험해 보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것도 그리 효과를 보지는 못한 것 같다.

그 후 수차가 조선의 역사에서 다시 부각된 것은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성종 때였다.

 

1488년(성종 19년) 6월 24일자의 성종실록을 보면

성종은 전라도 관찰사 이집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듣건대 최부가 중국에 이르러 수차의 제도를 보고 왔다 하니,

정교한 목공으로 하여금 최부의 지휘를 들어 수차를 만들어 올려 보내도록 하라.”

전라도 나주 출신의 최부는 스승인 김종직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의 교정을 완료한 후

1487년 9월 육지에서 숨어든 범죄자들을 추적 체포하는 추쇄경차관이 되어 제주도로 파견되었다.

그러다 다음해 초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최부는 급히 배를 타고 귀향하려 했다.
하지만 최부를 태운 배는 폭풍을 만나 보름 동안 표류한 끝에 중국 저장성에 그를 내려다 놓았다.

왜구로 오인한 중국인들에 의해 감옥에 갇힌 최부 일행은 사정을 잘 설명해 베이징으로 호송된 후

명나라 황제에게 오히려 상을 받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최부가 중국에 표류해서 겪은 여정을 기록한

'표해록' 

1488년 6월 4일 최부 일행은 표착한 지 50여 일 만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인 의주성으로 돌아왔다.

 

열흘 후 최부가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성종은 표류일기를 작성해 제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몸소 중국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온 최부를 통해 명나라의 실상을 정확히 알고 싶었던 것.

부친상을 당하고도 아직 복상을 하지 못한 최부는 귀향을 미룬 채 성종을 명을 받들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파란만장한 여행담을 9일 만에 써서 제출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5만4천여 자에 이르는 불세출의 기행서 ‘표해록’이다.

'표해록'은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의 한 역사학자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및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표해록을 3대 기행서에 포함시키고 그 중에서도 표해록을 으뜸으로 꼽을 만큼 당시 중국의 면모를 구체적이고도 포괄적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다.

'표해록' 집필을 마친 최부가 서울을 떠난 지 이틀 후 성종실록의 기록대로

성종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최부의 지도 하에 수차를 만들어 보내라는 긴급 명령을 내리고 있다.

최부는 표착지인 중국 저장성에서 수차를 처음 본 후 산둥성을 지나치면서

그 수차를 조선에 도입해야겠다는 생각에 호송군관에게 제작법을 물어보았다.

'표해록'에는 이런 상황과 함께 수차가 조선 농부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지

실질적이면서도 일상적인 사항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최부의 수차는 40일 후인 8월 4일 한양에 전달되었다.

그날 성종실록 기록을 보면 ‘손으로 운전한다’는 내용이 있는 걸로 보아

최부가 만든 수차는 손무자위 모델인 것으로 추측된다.

훗날 이 수차는 1496년(연산군 2) 충청도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효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대기근

최부 사건 이후 수차 제작에 관심을 보인 왕은 효종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동안 생활한 탓에

중국의 문물에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하백원이 그린 도면을 기초로 해서 복원한 '자승차' 

효종은 중국 심양을 지나치다 자신이 직접 본 적이 있던 수차를 집권 직후 장인에게 그대로 제작하게 하여 팔도에 나누어 보냈다. 세종과 효종, 그리고 최부 등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차는 조선의 농경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무서운 재앙이 닥쳐오고 있는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무자위라는 유용한 양수 기구를 무심코 흘려보낸 조선에 엄청난 흉년이 들이닥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1670년(현종 11)부터 1671년까지 조선을 휩쓴 대기근이 바로 그것. 봄 가뭄과 냉해, 여름 물난리, 초대형 폭풍, 메뚜기떼 등 2년 동안 계속 이어진 재앙으로

조선 팔도 전국 각처에서 굶어 죽은 사람만 해도 100만명이나 생겨날 정도였다.

특히 제주도의 경우 전체 주민의 20~30%가 사망할 만큼 피해가 컸는데,

현종실록에는 그 처참한 실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도(本島)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무려 2천260여 명이나 되고 남은 자도 이미 귀신 꼴이

되었습니다. 닭과 개를 거의 다 잡아먹었기에 경내에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어서 마소를 잡아 경각에 달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사람끼리 잡아먹는 변이 조석에 닥쳤습니다.”

만약 이때 세종대왕의 바람처럼 수차가 전국 각처에 많이 보급되어 있었더라면

아사자의 수가 훨씬 줄어들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왜 중국과 일본에서는 농사에 유용하게 활용된 수차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것일까.

 


지형과 자연 조건이 맞지 않아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누어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세종 때의 김종서가 지적했듯이 우리나라의 지형과 자연조건이 수차와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강수량이 비교적 풍부한 우리나라는 천수답으로도 충분히 농사가 가능했으며,

가뭄이 심한 때는 아예 수차를 사용할 만한 물조차 말라버린다.

중국과 일본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수차가 조선에서는 뿌리내리지 못했다 

또 우리나라는 삼한시대부터 보나 제언 등의 관개 시설을 발전시켜 이용했기 때문에 수차는 평소에 그리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수차 제작에 쓰이는 목재가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았다는 점도 수차 보급이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에 속한다.

둘째, 수차는 제작해서 설치하고 작동시키기까지 그 효과에 비해 경비와 수고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항상 먹고살기에 급급한 백성들에게 관에서 주도하는 수차의 보급은 오히려 짐이 될 뿐이었다.

셋째, 가뭄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가 수차의 제작 보급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닥치면 일단 기우제부터 먼저 준비하거나 음양 사상에 의존하는 등의 전통적인 자연관이 강했다.

여기에다 기술을 천시하고, 타국의 기술을 들여오는 데 앞장서는 사람에 대한 거부 의식 등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물이 새지 않도록 하는 장치 등 정교한 수차의 기술개발에서

조선의 기술자들이 실패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1670년대 초반의 대기근 이후

조선에서도 수차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경향을 감지할 수 있다.

1679년(숙종 5)에는 이민철이라는 자가 수차를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이민철은 선기옥형이라는 천문시계와 물을 동력으로 하는 수력식 혼천의 등을 만든

당대 최고의 과학자이다.

또 1810년에는 호남의 실학자 하백원이 ‘자승차(自升車)’라는 자동 양수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하백원의 자승차는 강물의 직선 운동을 물레바퀴를 돌리는 회전 운동으로 변환시켜

물을 퍼 올리는 자동 장치로서, 물살이 셀 경우 속도를 줄일 수 있는 ‘감속기어’도 달려 있는 등

아주 정교한 장치이다. 현재 실물은 전해지지 않지만 100여 개에 이르는 부품들의 재료 및 길이, 두께,

구멍 크기 등이 상세히 그려진 도면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이성규기자 [이야기과학실록]

- 2009년 10월 29일/ 11월 05일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