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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은평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 - 하나

Gijuzzang Dream 2009. 11. 5. 07:52

 

 

 

 

 

 

  

 

 

 

 

서울 은평구는 북한산 서쪽 자락에 안겨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개경에서 한양으로 들어서는 경계였고(한성부와 경기도 고양 · 양주가 만나는 접경),

도성과 의주를 잇는 서북대로(西北大路)의 출발점이자 길목이었다.


조선시대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채색지도 '동여도(東輿圖)' 에는

지금의 진관동 북쪽 창릉천 부근에 '금암참(黔巖站)'이라 적혀 있다.

중앙과 지방 사이 소식을 전하던 파발(擺撥)이 쉬어가는 곳에 '참(站)'이 있었는데, 

이 '금암참'은 서북대로의 실질적 출발점인 동시에, 개경 등 서북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서는 관문이었다.

능행(陵幸)에 나선 임금도 자주 오갔다.

 

 

 

조선 1대 왕인 태조 3년(1394) 서울을 5부(동, 서, 남, 북, 중) 52방으로 개편했을 때,

북부의 바깥쪽에 위치한 연은방과 상평방 지역이 지금의 은평구다.

일제강점 이후 1913년 12월 총독부령 제111호가 발표되면서,

1914년 4월 전국의 부(府) · 군(郡)이 통폐합되었는데,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연은방과 상평방 지역 이 일대는 경기도 고양군에 포함되면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으로 통합되면서 은평(恩平)이라는 지명이 성립되었다.

'은평(恩平)'이라는 이름은 '연은방(延恩坊)'의  ‘은’과 '상평방(常平坊)'의 ‘평’ 두 지명에서 나왔다.

 

은평면은 해방 뒤인 1973년에 서울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고,

다시 1979년 은평구가 서대문구로부터 분할되면서 은평구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의 지명인 진관동(津寬洞)은 진관사(津寬寺)라는 명칭의 절에서 비롯되었다.

 

서울의 서북단에 위치한 은평구는

북한산(해발 836m)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남장대(715m)를 비롯하여

비봉, 백련산 등 높고 낮은 여러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백련산과 불광천을 경계로 서울시 서대문구와 맞닿아 있으며,

서쪽과 북쪽으로는 창릉천을 경계로 경기도 고양시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창릉천은 한강의 제 1지류로서 연장 22.5㎞, 유역 면적 78.92㎢이다.

고양시 북한동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신도, 원당, 화전, 지도 지역을 지나 한강으로 유입되며

그 주변으로는 퇴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은평뉴타운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던 2002년 뉴타운 지구로 지정된 뒤,

2003년 3월~5월까지 '은평뉴타운 문화재지표조사'를 상명대박물관에서 실시했다.

조사지역은 북한산 자락 창릉천 부근 은평구 진관내동, 진관외동, 구파발동 일원

총 3,593,000㎡(1,086,880평)의 대규모 사업지구로

조사결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총 17개소에 달하는 유물산포지와

석불입상 및 석조여래좌상 등 다수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 조선총독부 대정 5년(1916) 근세한국 1/5만분의 지형도-

  

 

 - 은평뉴타운 발굴 조사지역(아래는 위성사진) -

 

본격 개발에 앞선 지난 2005년부터 2009년 7월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서울지역에서 이뤄진 최대 규모의 발굴조사였다.(한강문화재연구원 ·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담당)

2007년에 대규모 조선시대 공동묘지가 발굴된 데 이어

2008년에도 은평뉴타운 3지구 공사현장에서 잇따라 통일신라말~고려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은평구 진관외동 209번지 일대 3지구 D공구에서도 조선시대 분묘 741기가 확인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무덤 5,000여 기가 확인되었다.  

 

이말산과 은평뉴타운전경(2009년)

             은평뉴타운내 왕족 · 평민의 무덤 200여 기가 남아있는 ‘이말산’ 전경
  

 

은평의 진관내동, 진관외동 

  

진관내, 외동은 서울의 가장자리이다.

서울의 서북 외곽인 은평구 가운데에서도 가장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을 향하여 돌아앉아 있다.

문수봉에서 비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내려가다가

서오릉이 안겨 있는 효경봉에서 북으로 한 갈래가 갈라져 나가 창릉천을 맞아 끝난다.

이 줄기가 진관내, 외동의 경계를 이룬다.

비봉에서 나지막한 산줄기 하나가 서북으로 길게 뻗어나가 한복판에 낮은 봉우리를 만들었는데

이곳이 바로 ‘이말산(莉茉山) 이다.

 

구파발 인공폭포 뒤로 오르면 나타나는 이말산은 일명 진관근린공원으로 불리는 지역인데

이 산에 이말(莉茉) 즉 말리(茉莉)라는 식물이 많아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말리는 말리화차(茉莉花茶), 자스민차 또는 향편(香片)으로도 불리며

말리꽃의 향기가 높아 정원에 관상용으로 심고 향료로 쓰며 잎은 식용으로 하는데

인도와 이란 지방이 원산지이다.

 

수봉에서 창릉천쪽으로 이어지는 북한산의 서쪽 연봉에서 등성이들이 갈라져 나가고,

등성이와 등성이 사이는 풍치 좋은 계곡이 되었다.

북쪽 창릉천 쪽의 낮은 지대가 진관내동이고,

남쪽의 비봉에서 박석고개로 이어지는 큰 산자락쪽이 진관외동이다.

 

 

이곳은 서울의 막내다.

1973년까지 고양군 신도면의 구파발리와 진관내리, 진관외리로 있다가

가장 뒤늦게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이곳에 왜 이렇게 많은 무덤이 있었을까.

성저십리(城底十里) 금장(禁葬)과 은평

 

은평뉴타운 발굴조사 지역에서는 5,000여 기에 달하는 무덤이 조사되었다.

마치 공동묘지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많은 수이다. 이렇게 이 지역에 무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개발과정에서 많이 없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실제 서울에서는 그렇게 많은 수의 무덤이 남아있지 않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서울에는 무덤을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도성과 그 사방 10리(城底十里)에 무덤을 쓰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당시 성저십리의 범위는 동쪽으로 양주 송계원(지금의 중랑천변) 및 대현,

서쪽으로는 양화나루와 고양 덕수원(지금의 창릉천변), 남쪽으로는 한강 및 노량나루였다.

 

조선 후기에 금장(禁葬) 구역을 표시한 <사산금표도(四山禁表圖)>와 <속대전(1746년, 영조 22)>에는

동쪽으로는 우이천과 중랑천, 남쪽으로는 중랑천에서 한강,

북쪽으로는 북한산 보현봉에서 시작해서 불광동-대조동-역촌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역촌동-연신내-북가좌동-성산동을 잇는 구역 안에는 무덤을 쓸 수 없었다.

이렇게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한 이유는

도성인 한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요즘 그린벨트와 같은 역할을 했다.

 

도성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진관내, 외동은

이 금장지역의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어 거리상 가장 가깝고

또한 무악재와 박석고개(薄石峴) 등에 의해 격리되어 있어

조선 전기부터 집단매장지로 주목받았던 것이다.

 

 

 

박상빈 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은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무덤 5000여 기 무덤 중에

묻힌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경우는 5~6기에 불과하다. 주로 하위관직, 무관, 역관 등 중인계층”이라며

“청화백자 지석이 나온 조후빈 묘는 조선전기 성행하다가 16세기 이후 사라진 외손봉사 풍습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다.”고 했으며,

또 “이말산에는 왕족으로부터 내시, 보모상궁 등 왕실과 관련된 무덤과 수많은 성씨의 무덤이 있다.

그중 파주기씨처럼 절손되어 남아있지 않은 성씨도 발견된다.”고 말했다
 

은평뉴타운 중간에 있는 해발고도 132.7m의 '이말산'은

구파발역 인공 폭포에서 입곡교 앞 북한산국립공원까지 걸쳐있다. 

이말산 유적을 보면 왕족부터 내시 · 상궁 · 역관까지 다양한 계층의 분묘 300여 기가 

이곳에 묘자리를 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 영조의 외조부 최효원(崔孝元), 숙종이 이모처럼 여겼다는 임상궁(林尙宮),

명종대의 상선(尙膳 · 종2품 내시) 노윤천(盧允千)도 죽어서는 이말산에 묻혔다.

 

 

은언군의 신도비 / 금암기적비 옆에 있었던 하마비
은언군의 신도비는 처음 있었던 곳과는 달리 탑골마을 옆 흥창사에 있다.
비석의 앞에 흥창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으나

뒷면에는 은언군, 덕흥대원군 등의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진관내ㆍ외동은 2002년 뉴타운으로 지정된 후 이말산 일대 석물들과 상궁묘비가 확인되면서

이 일대 문화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보존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2005년 당시 쓰러져 있던 임상궁 묘비

 

2008년초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이말산은 산 전체가 조선시대 묘역이 집중 분포된 지역으로

시대별 묘제의 변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고 밝히고

진관근린공원 내 분묘군 중 개별적으로 문화재 지정 가치가 있는 묘역 및 석물들에 대해서

문화재위원 조사를 통해 시 지정문화재로 지정 검토할 예정이며,

"산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강한 규제를 통해 보존하기보다는 사적공원의 성격을 갖는 공원으로서

보존, 관리(공원 명칭에 '이말산'포함하여 변경하는 방안 포함)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은평뉴타운 개발지역에 이렇게 무덤이 많은 이유는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도성에서 10리(성저십리, 城底十里)에는 무덤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금장(禁葬) · 금송(禁松)’ 규정이 있었다. 

성저십리 안에는 멋대로 무덤을 쓰거나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성저십리는 서울성곽에서 십리까지, 즉 한성부의 행정력이 미치는 도성 지역을 뜻한다.

이 규정은 오늘날의 '개발제한구역' 같은 것으로 그 범위는 다소 변화되었지만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영조 때 편찬된 법전 <속대전(續大典)>과 이 금장구역을 표시한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를 보면,

성저십리는 동쪽으로 우이천 · 중랑천까지, 남쪽으로 한강 · 노량진까지, 서쪽으로 양화진 · 창릉천까지,

북쪽으로 북한산 · 연신내까지였던 것.

지금 진관동 자리의 진관내 · 외동은 이 금장지역 바로 바깥쪽이었다. 

도성에서 장례를 치를 때, 금장지역을 피해 묻으려고 할 경우,

도성을 빠져나가자마자 나타나는 지금의 은평뉴타운 일대가 최적의 묘지 장소였던 셈이다.

도성과 이곳 사이에 무악재(현저동~홍제동 사이 고개)와 박석고개(불광동~구파발 사이 고개)가 있어

경계가 분명한 점도 민초들이 마음 편히 묘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전기부터 매장지로 각광받았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강문화재연구원은

진관내동 429번지 일대 3-1지구 A공구를 정밀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보기 드문 신라시대 유적으로, 은평뉴타운 동 · 서 양쪽 끝에 해당하는 3지구에서

통일신라시대 가마터 11곳이 발굴되었다.

 

또, 북한산자락인 응봉(鷹峰, 235.1m) 능선 하단부 구릉지의 진관내동 429 일대 

고려시대 대형건물터에서 '청담사(靑潭寺)'명문 평기와 5점을 발굴했다.

 

 

이 기와들에서는 '삼각산 청담사 삼보초(三角山 靑潭寺 三寶草)'와 같은 문구가 확인되었는데

청담사는 통일신라시대 화엄종의 10대 화엄사찰(華嚴十刹) 중 한 곳으로

한주 부아악(漢州 負兒岳 · 서울 북한산)에 있었다는 청담사를 말하며,

최치원에 의해 거론되었으나 아직까지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던 곳이다.

   

은평 뉴타운 발굴은 조사 당시 법의학자가 직접 발굴에 참여한 최초의 발굴조사로 의미가 있다.

중앙문화재연구원,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대 고병리(古病理)연구실팀이 참여했는데, 

349만5248㎡(105만7300평)의 부지에서 나온 조선시대 묘 터만 5000 여기.

수습된 유골은 41기로, 법의학 연구를 통해 망자(亡者)들이 평소 앓던 질병까지 드러났다.

무덤에서는  출토된 많은 인골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사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인골을 분석한 결과 질병을 앓은 흔적들이 많이 확인되었는데,

박상빈 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은 “무덤에서 출도된 인골을 분석해 보니

뼈의 염증, 척추이분증, 머리뼈 골종양, 골절, 골다공증, 척추후만증(굽은 허리), 퇴행성관절염 등

다양한 사례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조선시대 무덤으로 토광묘 5기와 회곽묘 13기가 확인됐다.

이 중 3-2지구 C-2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 회곽묘 2기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형태의 인골이 매장 당시 모습으로 각각 발견됐다.

2008년 8월 은평뉴타운의 남쪽 중앙부인 2지구에서 남 · 녀 유골이 든 회곽묘가 발견됐다.

 

 

 

 은평뉴타운 지역 3-2지구 C-2지점에서 출토된 인골(人骨)

 

회곽 덮개에 '행동지중추부사 김자근동(行同知中樞府事 金者斤同)'이라 적혀 있어

망자가 '동지중추부사'란 명예직을 얻은 김자근동과 그 아내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자근동이란 특이한 이름은 '작은둥이'란 한글 이름을 한자로 옮기며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멈출 뻔했던 연구는 서울대 고병리연구실팀의 분석 결과가 나오며 진척됐다.

팀을 이끄는 신동훈 교수가 자근동의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 유골의 휜 허리 뼈를 보고 등이 구부러지는

'척추후만증'이란 결론을 내렸다.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 등골뼈의 일부가 맞붙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노령으로 인해 그런 증세가 생겼으리라 추정됐다.

자근동의 아내는 유골 상태로 미뤄 골다공증과 퇴행성관절염을 앓았다고 여겨졌다.

 

은평뉴타운 2지구 2지점 43호 합장묘에서 발굴된 ‘김자근동’의 척추 뼈는
'(노인성) 척추후만증'을 앓았고, 부인은 골다공증과 퇴행성관절염을 앓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병리학자들이 합류해 얻어낸 결과는 또 있다.
은평뉴타운에서 발굴된 41기의 인골 중 상당수에서
뼈의 염증, 골절, 척추이분증(척추 뼈의 기형) 같은 질병을 앓은 흔적이 있었다.
어느 두개골엔 툭 튀어나온 혹 같은 종양이 붙어 있기도 했다.
 
박준범 한강문화재연구원 부원장은 "국내 발굴 현장에서 보기 드물게 법의학 전문가들이 참여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떤 병을 앓았고 몇 살쯤 죽었는지 추정해 보는 게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 중 2호 회곽묘는 애초에 한 사람만을 매장했던 것으로 밝혀졌으나, 
나중에 다른 한 명을 추가로 매장하기 위함인 듯 회곽(灰槨) 내부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다가
시신을 놓아둔 상태로 인골이 발견됐다. 하지만 추가 매장은 이뤄지지 않았다.
 

 

회곽묘(灰廓墓)의 보급과 회(灰) 만드는 법

 

중국 명나라 때 송응성(宋應星)이 쓴 <천공개물(天工開物)>에 따르면

회(灰)는 석회석이나 굴껍질을 불에 구워 가루를 만들어 쓴다고 한다.

이때 석회석을 구운 것을 석회(石灰)라고 하고 굴껍질을 구운 것을 여회(蠣灰)라고 하는데

석회를 만들 수 없는 곳에서는 여회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무덤을 만들 때 ‘석회 1 : 강모래와 황토 2’의 비율로 혼합한 뒤

찹쌀풀과 다래즙을 잘 섞어 사용하면 단단해서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를 '삼화토(三和土)' 혹은 '삼합토(三合土)'라고 하였다.

 

조선은 국초부터 회곽 장려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세종 즉위년에 청송부원군 심온(沈溫)의 장례에 석회를 부의품(賻儀品)으로 하사한 이래로

대신이 죽었을 때 품계에 따라 석회를 하사하는 규정을 두었다.

장례에 사용할 회(灰)는 구입하기도 하고 묘역의 주변에서 직접 만들기도 했다.

정경세의 <우복선생문집>에는 숙부를 장사지낼 때

여산에서 석회성를 캐 산 아래에서 석회를 구워 부순 다음 묘역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회를 구웠던 가마는 은평뉴타운에서 가까운 파주 당하리에서 발굴되기도 하였다.

 

 

한 무덤에선 망자를 하늘로 이끄는 굿에 쓰이던 대신칼과 방울이 나왔다.

바리공주가 썼던 무구(巫具)라는 대신칼은 무덤 주인공이 무당임을 암시한다.

또 다른 무덤에선 달걀이 담긴 분청사기 항아리가 나왔다. 달걀은 신라 천마총에서도 발굴됐었다.

 

은평뉴타운 발굴에서는 분청사기어문매병, 백자명기세트, 동전(朝鮮通寶), 동거울(銅鏡), 유리제구슬,

귀걸이 등 8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위 왼편) 청담사터 명문기와            (위 오른편) 동경 

(아래 왼편) 달걀이 담겼던 분청사기  (아래 오른편) 조개가 담겼던 조개 항아리 ©은평시민신문

 

 

 

명기

청담사 명기(明器)와 백자류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은평구 진관외동 일원의 은평뉴타운 예정지에서 3천기에 이르는 조선시대 분묘가

확인됐다. 이 중 1천800여 기에 이르는 분묘가 조사완료됐으며 백자류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분청사기 

  

 

- 이상, 조선일보, 경향, 한국일보 외 일간지 및 기타자료에서 Gijuzzang 종합정리

- 서울특별시 문화유적지표조사종합보고서 제3권, 서울역사박물관

 

 

 

 

 

 

 

 

 

탑골마을은 통일신라 화엄사찰 청담사 터!

 

'건물초석 있다' 주민 증언 발굴과정에서 확인, 깊은 연구 필요

 

소나무 아래 전각에 석불입상이 있다. 은평뉴타운 철거가 되기 전 사진.

2005.08.27 © 홍기원


2007.03.10 ©홍기원
탑골의 철거가 집 몇채를 남기고 거의 진행될 무렵의 사진이다.

탑골에서 슈퍼를 하던 할아버지는

"예전에 여기 집을 지을   지을 때 커다란 건물 초석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고 했다.

 

2007.03.10 © 홍기원
석불입상이 있는 전각 앞에는 이빨이 맞지 않는 석탑이 서 있었다.

이 석탑 때문에 이 동네는 대대로 탑골이라고 불려져 내려왔다. 


자씨각 안의 석조미륵불상, 2008.04.29 © 홍기원

인근에는 ‘자씨각(慈氏閣)’이라는 현판을 내건 보호각이 있고, 그 안에 석조미륵불상이 안치돼 있다.

자씨(慈氏)란 미륵보살을 말한다. 

이 석불입상의 연대를 2003년 상명대 지표조사 보고서에서 통일신라 말기까지 바라보았다. 

 

 2008.04.29 탑골마을의 발굴과정.  ©홍기원
이날 낮까지 박준범 한강문화재연구소 실장은 이 터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용도가 불확실한 창고 터'라는 소견을 말했다.

일반 사찰구조와 다르고, 온돌 흔적이 없기 때문에 역참지로 보기도 힘들다고 했다.
 

 2008.04.29 ©홍기원
건물 초석들이 보인다.

건물이 철거되기 전 탑골마을 슈퍼를 하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사실임이 발굴 결과 증명되었다. 
 
한강문화재연구원 박성희 팀장은

"탑골 발굴 면적이 80평정도 되는데 거기에서 약 1톤가량의 와편이 나왔다"고 밝혔다.
박팀장은 "발굴을 급히 하느라 본래는 발굴을 하면서 글씨를 확인해야 하는데

한켠에 쌓아두고 씻으면서 글씨를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5월 2일 연합뉴스를 보고 필자는 박준범 실장에게 전화를 했다.

"며칠 전 제가 갔을 때 그런 말이 없었지 않았느냐?"하니까

"바로 그날 오후에 명문을 발견했습니다. 홍선생님이 다녀간 덕분인 것 같습니다." 라고 답했다.

 

                          2008.05.02 © 홍기원


위 사진의 앞 쪽 와편은 아직 씻지 않은 것이고 뒷편은 씻은 와편이다.

명문 와편이 발굴현장에 어떻게 놓여있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인데

그런 여유를 가지고 발굴할 만큼 시간적 여유가 우리나라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진관내동 탑골마을 신라시대 화엄종 10대 사찰 중 하나인 청담사 터로 밝혀져
 
청담사는 신라시대 화엄종에 속한 10대 사찰 중 한 곳이지만 그동안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은평뉴타운 진관내동 탑골마을 발굴지에서 명문이 발견된 것이다. 

 

 

"해동의 화엄의 큰 학문 장소로는 10군데가 있으니 한주(漢州)의 부아악(負兒山) 청담사(靑潭寺)도

그 중 하나다(海東華嚴大學之所有十山…漢州負兒山靑潭寺也)" 라고 적었다.

여기서 부아악이 바로 북한산이다.
 
박성희 한강문화재연구원 팀장의 말에 의하면

"청담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사찰이다.

이번에 명문이 발견된 와편은 고려 초에 중건될 때 올려진 와편일 것이다.

발굴지의 건물 형태를 보면 일반 사찰건물과 다른데 벽제관터에서 조금 더 가면 있는

고려시대 역원 혜음원지와 연관지어서 보면 여기기 역원 터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때 사찰은 단순한 사찰의 기능뿐만 아니라 역원의 기능, 국방의 기능 등을 겸하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여기 청담사도 그렇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지금 발굴지가 청담사 터가 아니라 하더라도 반경 몇 백미터 내에 청담사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은평뉴타운 발굴을 맡은 한강문화재연구소와 중앙문화재연구소는

진관근린공원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발굴된 조선시대 분묘  유물에 대해서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 2008/05/06 ⓒ 은평시민신문 - 홍기원

 

 

 

 

 

은평뉴타운 「청담사 유적」보존 결정

문화재위, 인근 '자씨각' 석조미륵불상과 함께

 

 

 

서울 은평뉴타운 예정지에서 발굴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인 청담사 추정유적에 대해 보존 결정이 내려졌다.

문화재위원회 매장 분과는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429 일대에서 발견된 청담사 추정 건물 터와

인근 석조미륵불상(통일신라 말~고려 초 추정)을 원래 자리에 보존하도록 결정했다”고 밝혔다. 

 


신라시대 화엄종 10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청담사는 그동안 문헌에만 언급되고

그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최치원이 효공왕 8년(904)에 저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해동의 화엄의 큰 학문 장소로는 10군데가 있으니 한주(漢州)의 부아악(負兒山) 청담사(靑潭寺)도

그 중 하나다”라고 적었는데 여기서 부아악이 바로 북한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해 12월부터 한강문화재연구원이 은평뉴타운 예정지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북한산 자락인 응봉 능선 하단부 구릉지에 청담사가 있었음을 밝혀주는 명문기와가 발굴되었다.

이로써 그간 문헌에만 남아있던 청담사의 위치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 절터가 발견된 곳 인근에는 ‘자씨각(慈氏閣)’이라는 현판을 내건 보호각이 있고,

그 안에 석조미륵불상 1개가 안치돼 있다. 이 석조미륵불상 역시 보존 결정이 내려진 상태이다.

박경식 단국대 교수(역사학)는

"이 불상은 뉴타운 건설을 위한 2003년 지표조사가 실시되기 이전에는

학계에 전혀 보고가 되지 않은 것으로, 옷주름 등을 포함한 양식적 특성으로 볼 때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작품으로 생각하며, 아무리 늦잡아도 (제작시기는) 고려 중기를 넘어서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며, 인근의 청담사 유적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 2008/05/30 ⓒ 은평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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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평뉴타운 3지구 문화유적지 발굴조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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