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76. 백두산의 역사적 수수께끼…

Gijuzzang Dream 2009. 10. 16. 14:08

 

 

 

 

 

 

 

[간도오딧세이] 백두산의 역사적 수수께끼 … 

 

 

 

 

 

 

 

 

1940년대 일본인의 사진집에 나타난 돌무더기(석퇴).


백두산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역사적 숙제 2개가 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백두산 정계비가 과연 어디로 사라졌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정계비를 세웠던 주춧돌만 남아 있다.

정계비는 1931년 7월28일에 없어졌다. 만주사변(1931년 9월)이 발발하기 직전의 일이다.

 

시노다 지사쿠가 쓴 <백두산 정계비>의 서문에 이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시노다의 지인이 이때 백두산에 올랐다가 이튿날 아침 그곳에 정계비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시노다에게 알린 것이다.

이 지인에 따르면 7월28일 그곳에는 일본 국경수비대 100여 명과 일반 등산인 56명이 있었다.

시노다의 글투로 볼 때 일본 국경수비대가 정계비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다.


정계비와 돌무더기는 어디로 갔을까


문제는 이 정계비를 어디에 버렸느냐는 점이다.

일제의 의도대로라면 정계비를 들고 내려가는 것보다 그냥 산 속에 버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백두산 어딘가에 정계비가 숨겨져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언젠가 백두산 정계비가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를 할 만하다.

또 하나의 풀리지 않는 숙제는

정계비에서 토문강까지 이어져 있던 돌무더기가 지금 그대로 존재하고 있나 하는 점이다.

돌무더기는 돌을 모아서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구분하던 역사적 흔적이다.

십수 개의 큰 돌을 모아 돌무더기를 이루고 10여 m 떨어진 곳에 다시 돌무더기를 만들어

멀리서 보면 띠를 만든 형식이었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뒤 물이 흐르지 않는 곳의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돌무더기띠를 만들었다.

<숙종실록>에는 25리(10㎞)에 걸쳐 목책 또는 돌무더기가 있었고,

다시 25리에는 물 흔적이 있었으며, 나머니 40여 리에는 울타리가 있다고 기록했다.

1885년 국경회담에서 이중하가 그곳에 갔을 때 보고에 따르면

흙무더기와 돌무더기가 연달아 쌓여 있는 것이 90여 리 가량이었다.

이 무더기 위에 나무가 자란 것도 있었다고 전했다.

시노다가 1938년에 쓴 책 <백두산 정계비>에는 이 돌무더기 사진이 실려 있다.

 

이보다 더 상세한 사진은 1940년대 일본인의 사진집 <백두산 등행>에 나타나 있다.

일본인 탐험대가 기념사진 형식으로 찍은 이 사진에는 몇 개의 돌무더기가 연결돼 있음을 보여 준다.

 

최근에 조선일보 1936년 기사에서 이 돌무더기 사진이 실린 것을 찾아냈다.

이 사진은 당해 9월15일과 9월19일 두 차례 실렸다.

돌무더기가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은 1948년 북한의 청진교원대학 ‘백두산탐사대’가 그곳을 방문해

돌무더기를 조사한 것이다. 북한의 민속학자인 황철산 교수는 1957년 <문화유산> 잡지에

이때의 탐사 결과를 실었다. 여기에서 황 교수는 “돌각담의 총수는 106개이고,

돌각담이 처음 있는 지점부터 끝나는 곳까지의 거리는 5391m에 달하는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때 이후 벌써 60년이 흘렀다. 깊은 산속에 있는 106개의 돌무더기는 어디로 갔을까.

이후의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한 땅을 밟아 백두산에 오른 이들의 증언에도 이 돌무더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일부러 돌무더기를 없애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다.

이 돌무더기는 과연 어떤 형태로 남아 있을까.

 

'Weekly 경향'은 2005년 위성사진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위성사진을 판독한 결과

1.5㎞에 걸쳐 인공적인 돌무더기띠가 있다고 추정했다.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이라고 할 수 있는 돌무더기띠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가 지금으로서는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 윤호우 기자

- 2009 11/03   위클리경향 8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