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75. 1885년 10월19일 백두산에서는...

Gijuzzang Dream 2009. 10. 16. 14:07

  

 

 

 

 

 

[간도오딧세이] 1885년 10월19일 백두산에서는 ...

 

 

 

 

 

 

 

 

1909년 5월 상순에 일본인들이 백두산 정계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1885년 10월 이중하와 김우식이 이곳을 찾은지 불과 23년 후의 모습이다.
1880년대 북간도에는 조선 백성이 대거 정착했다.
대기근으로 고생한 함경도 백성들이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간도에 농경지를 일궜다.
겨우 살 만해졌을 때 청국은 치발역복을 강요했다.
만주족의 옷과 머리 형태를 갖추기를 요구한 것이다.

만주족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애써 일군 땅을 빼앗길 지경에 처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백두산 정계비의 존재를 새롭게 확인했다. 정계비에 나타난 토문강이 두만강과 달리 북쪽으로 흘러 간도 이주민이 살고 있는 땅이 조선 땅이라는 것이었다. 1885년 청국은 조선과 국경회담을 요구했다.

양국의 대표는 9월 말에 만났다. 백두산의 정계비를 확인하기에는 이미 늦은 계절이었다.

북한의 <백두산고전작품선집>에 수록된
김우식의 ‘백두산 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 국역본에는
당시 양국에서 백두산 정계비 확인을 꺼렸음을 알 수 있다.
1712년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것은 5월이다.
당시에는 기온이 올라가고 눈이 녹는 5월부터 8월까지만 백두산에 오를 수 있었다.
 

정계비 답사 “간도는 조선땅” 확인
 
다음 날 관청에 모여 필담으로 국경문제를 론하는데 당시 절기가 추운지라
피차간에 속으로는 비석이 있는 곳까지 가지 않고 락착 지었으면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의견이 제각기 고르롭지 않아 부득불 한 번 가서 정계비석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양국 간 의견 차가 워낙 커서 결국 백두산 정계비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말한 것이다.
이때 백두산 정계비로 올라간 상황은 이중하의 <백두산 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두 기록은 해당 날짜의 일까지 상세하게 서술해 비교할 만하다.
10월15일 백두산에 오르기에 앞서 제사를 지낸 것과
17일 큰눈이 내려 산에 오르지 못한 것이 두 기록에서 일치하고 있다.

당시 양국 일행은 3개 조로 나눠 활동했다.
감계사인 이중하는 백두산 정계비로 직접 올라간 반면에
화원으로 그림을 그리는 임무를 맡은 김우식은 홍단수로 갔다.
그러나 김우식은 백두산 정계비로 간 다른 수행원의 입을 빌려 당시 정계비에 이른 상황을 기록했다.
양측 일행이 정계비에 다다른 것은 10월19일 아침이었다.
눈보라로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해가 나타나 정계비에 이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두 기록에서 나타난다.

잠간 사이에 비문 2장을 새기고 량측에서 하나씩 가진 후에 저쪽 사람들에게
“이만하면 됐으니 또 조사할 것이 있는가요?”라고 물었다.
가원이 말하기를 “정계비석은 여기에 있고 조선백성들의 경작개간지는 도문강 북쪽 언덕이니
혹 이상하지 않는가. 심하도다. 옛 사람들이 지형을 잘못 살펴보고 여기에 정했다”라고 하였다.
김우식의 <백두산 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

비석 동쪽가의 계곡을 따라 둔덕을 쌓았는데
돌로 쌓기도 하고 흙으로 쌓기도 하여 삼포까지 90리에 끊이지 않았으니,
생각건대 옛 사람이 힘쓴 것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비석의 표면은 얼음이 얼어 붙어 있어 깎아도 떨어지지 않아 불을 때서 녹여
세 장을 인출하여 한 장은 진영에게 주고 두 장은 품 안에 넣었다.
이중하의 <백두산 일기>

두 기록에서는 탁본한 뒤 날씨가 다시 나빠져 고생한 장면까지 서술돼 있다.
이 기록은 국경회담에서 양측의 날카로운 신경전을 생생하게 그렸다.
수백 명의 양측 인원이 죽을 고생을 했지만 성과는 조선 측에만 있었다.
정계비대로라면 간도는 조선 땅이라는 것을 1885년 10월19일의 정계비 답사가 확인시켜 줬기 때문이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2009 10/27  위클리경향 8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