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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문강의 어원이 되는 흙문이 절벽처럼 돼 있다. <박은선 교사 제공> |
토문강은 두만이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흙으로 된 문을 의미하는 토문(土門)에서 나온 것일까.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토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이후로 이 논쟁은 300년 동안 지속됐다.
중국 측은 ‘토문강=도문강=두만강’으로 모든 이름이 비슷하지만 같은 줄기에서 나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반면에 한국 측은 토문강은 두만강과 다른 이름으로, 토문강 물줄기는 흙으로 된 문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한국 측 주장대로라면 토문강의 진위는 정계비 인근에서 연결된 물줄기에 토문이 존재하는가 여부로 알 수 있다.
이 토문은 일제가 1907년 간도 용정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한 이후 토문강을 답사하면서 쓴 답사보고서에 나타난다. 당시 파출소장인 사이토 스에지로(齋藤季治郞)가 10월18일 통감공작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토문강 답사보고서는 1975년 국회도서관에서 발행한 ‘간도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번역돼 실려 있다.
그 (석퇴의) 종말점에 양쪽 높이 약 100m의 단애가 있는데 소위 토문이라 칭하는 것이 이것인 것 같다.
하천의 형상을 따라 울창한 대삼림 속으로 달려 약 4리 더 가니 방향을 북으로 돌린다.
토문에서 약 3리 사이는 큰 돌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조약돌 내이며,
거기서부터는 사천(沙川)이 된다. (중략)
방향을 북으로 돌리고 나서는 약 18리 지나 곧 낭낭고(일명 연일고) 부근에 이르러
다시 방향을 서(西)로 돌려 소사하를 거쳐 드디어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백두산 정계비-석퇴(돌무더기)-토문-송화강으로 이어지는 곳을 직접 답사한 보고서다.
석퇴와 토문 본 사람은 많지 않아
정계비(터)를 본 사람은 많지만 석퇴와 토문을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북한이나 중국에서 이곳에 접근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발행한 <백두산 총서-기상수문편>에는
중국에서 오도백하로 불리는 토문강이 사도백하로 나타나 있다.
사도백하에 대한 설명에서 "대각봉계선의 해발 높이 2100~2120m에는
웃면이 열린 조면암의 자연갱도가 72m 길이로 발달되어 있다"라고 적혀 있다.
흙으로 된 문인 토문을 말하는 것이다.
2005년에 중국 연변의 한국학교에서 초빙교사로 일한 박은선 교사가
중국쪽을 통해 토문강의 토문을 찾아 사진으로 남겼다.
그가 쓴 <어! 발해가 살아 숨쉬고 있네?>(아이필드)에는 이렇게 나타나 있다.
신기한 지형이었다. 이런 지형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예상치 못한 장관에 역사답사를 왔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지오그래픽>의 사진 한 장을 보고 있는 듯 했다.
오른쪽, 왼쪽 순서를 바꾸어 병풍처럼 펼쳐진 검은 흙벽.
더 깊숙이 들어가자 아예 양옆으로 흙벽이 높게 세워져 있었다.
흙벽의 높이는 무려 우리 키의 네 배를 넘었다.
박 교사는 "북한쪽이나 중국쪽 모두 이런 벽이 있었고, 절벽처럼 보이지만 흙벽이었다"고 말했다.
박 교사가 토문을 발견한 곳은 북한과 중국의 9호와 10호 국경비 사이다.
토문강이라는 이름의 유래인 토문은 수천 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역사적 사실은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지만
지리적 사실은 왜곡할 수 없음을 잘 알 수 있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