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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겸재 정선展 - 붓으로 펼친 天地造化

Gijuzzang Dream 2009. 9. 8. 19:27

 

 

 

 

 

 

 

“겸재 정선展 -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 天地造化”

 

 


    ㅇ 전시기간 : 2009. 9.8(화)~11.22(일)


  ㅇ 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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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전시명 : 서거 250주년 기념 <겸재 정선,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天地造化)>
ㅇ전시기간 : 2009. 9. 8(화)-11. 22(일)
ㅇ전시장소 : 상설전시실 2층 미술관 회화실
ㅇ전시유물 : 최초 공개하는《북원수회도첩(北園壽會圖帖)》등 30건 142점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에서는 정선 서거 250주년을 맞아 이를 기리기 위하여

테마전 “겸재 정선(鄭敾),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天地造化)”를 개최한다. 

9월 8일(화)부터 11월 22일(일)까지 미술관 회화실에서 열리는 이번 테마전에는

모두 30건 142점의 정선 작품들이 전시된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은 우리 나라 회화사에 큰 획을 그은 거장으로

서울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84세까지 장수하였다.

하양(河陽, 대구 근처) 현감, 청하(淸河, 포항시 소재) 현감, 양천(강서구 가양동 일대) 현령(陽川縣令)을

지냈으며 81세에는 종 2품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36세부터 82세에 이르는 제작 연대가 있는 작품이 보여주듯 그는 붓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30년 지기인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정선에 대해서

“금강산 및 영남 지방을 두루 여행하고 사생하여 산수의 형세를 얻었으며

사용한 붓을 묻으면 무덤을 이룰 정도”라고 말하였다.

또한 “임금(영조)께서도 정선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그 호로 부르시니,

위로는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가마꾼에 이르기까지 정선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그의 삶을 기록하였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정선의 초기 화풍을 알려 주는 중요한 두 작품이 출품된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는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1711년에 그린 금강산 화첩》이다.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 중 가장 이른 36세 때의 화첩으로

14면의 작품을 모두 전시하여 그의 초기 진경산수화풍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 화첩에는 탐승의 경유지를 따라 장소의 현장성과 감동을 표현하고자 모색한

새로운 가능성이 담겨 있어 정선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작품이다.  

둘째는 《북원수회도첩(北園壽會圖帖)》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 관람객에게 처음 공개된다.

정선 41세 때인 1716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 공조판서 이광적(李光迪, 1628~1717)의 과거급제 60주년(回榜)을 맞이해서

북악산 및 인왕산 기슭에 거주하던 70세 이상의 노인들과 그 자손들이 모여서

장수를 서로 자축했던 모임이다.

이때 숙종 임금이 꽃과 술을 내린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 사대부에게는 최고의 경사였다.   
참석자의 목록인 좌목에 보면 주인공인 이광적을 포함하여

70대 이상의 기로 15인, 이들의 아들과 손자 15인, 여항 시인 장응두(張應斗, 1670~1729) 등이 있다.

정선이 이 모임을 그리게 된 배경에는

이 모임의 발의자 박견성(朴見聖, 1642~1728)이 정선의 외숙부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에는 정선의 평생지기인 이병연(李秉淵, 1671~1751) 부자도 참석하는데

당시 정선이 북악산 기슭에 살았기 때문에 서화첩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선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이었다. 
특히 이 서화첩에는 발의자 박견성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참석자들이 지은 시들이 있으며

제일 마지막에는 정선의 외사촌 되는 박창언(朴昌彦, 1674~?)이

그림 속의 노인들과 노비들, 여종들의 모습까지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정선의 인물화 중 가장 시기가 빠른 것이며 기록화로서 드문 예이다.

또한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창안자일 뿐만 아니라

풍속화 분야의 전개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특별한 자료이다.

또한 당시 문예계를 이끌었던 인왕산과 백악산 기슭에 거주하던 유력 가문들의 교유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러한 두 작품을 통해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분야에서 선도적인 활약을 한

정선의 초기 모습을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선은 흔히 진경산수화의 대가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진경산수화뿐만 아니라

관념산수화, 고사인물화, 문학적 소재를 그린 그림으로 나누어 다각도로 조명해 보았다.

정선의 회화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중국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사생을 통해 이를 새롭게 발전시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독자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예술형식을 창출하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진경산수화를 관찰과 체험에 바탕한 산수화라고 한다면

‘관념산수화’는 간접적인 체험과 학습 및 상상에 의한 정신적, 개념적인 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정선은 일찍부터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들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각종 화보 등을 연구하여 새로운 개념과 기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점(米點), 피마준(披麻皴) 등의 남종화법과

절파계(浙派系) 화풍의 필묵법(筆墨法) 등을 자기식으로 소화, 재해석하여

진경산수화와는 또 다른 격조가 있으면서도 기세가 있는 정선 특유의 관념 산수화풍을 이루었다.

중국의 산수화를 학습하는 단계를 기초로 하여 주변의 산천과 명승지를 수없이 유람하며 터득한 관찰과

경험의 안목을 조화시켰을때 그는 기존의 상투적인 산수화의 단계를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밖에 중국 唐 말의 시인 사공도(司空圖, 837~908)의 시론(試論)을 스물 두 장의 그림으로 제작한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은 74세 때의 작품으로

미학적 이론을 회화로 형상화한 신선한 상상력과 세련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하게 전개된 이러한 그의 예술세계는 동시대 및 후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정선파”라는 시대양식을 형성하여 한국 회화사의 흐름을 바꿔 놓게 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1925년 독일인 신부 베버(Norbert Weber, 1870-1956)에 의해 독일에 건너가

성 오틸리엔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다가 2006년에 반환된 왜관수도원 소장 《겸재 정선 화첩》

10월 13일부터 전시된다.

그동안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 이 화첩을 실견하고자 하는 요구가 높았는데

소장 기관인 왜관수도원에서 이번 전시를 일반 관람객에게 처음 공개하는 자리로 삼았다.     

이 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를 맞아

간송미술관 소장 <청풍계도>와 <금강내산총람도>이 전시되고 개인 소장 <비로봉도>가 최초 공개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그의 예술 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 그림의 독창성을 재인식하는 기회를 갖게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은 화가이기 이전에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의 학통을 이은 성리학자로서

특히 성리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주역(周易)에 정통해서 당대 제일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주역의 근본원리인 음양조화(陰陽調和)와 음양대비(陰陽對比)의 원리를 이끌어

화면 구성 원리로 삼았고 이에 중국의 남, 북방화법인 묵법(墨法)과 필묘(筆描)를 취해

마침내 동국진경(東國眞景) 산수화법(山水畵法)을 이루어 내었고

이것이 이상적인 우리 고유의 새 화법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회화역사에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겸재의 30년 지기지우(知己之友)였던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그를 기리는 장문의 애사에서 다음과 같이 겸재의 일생을 총평했다.

“공의 성품은 본래 부드럽고 안존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과 사귐에 일체 겉으로 꾸밈이 없었다.(...중략)

주역을 좋아해서 손수 뽑아 베끼기를 파리머리 같이 하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중략)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가마꾼에 이르기까지 공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며,

작은 그림 한 폭을 얻어도 큰 옥을 얻은 듯 집안에 전해 줄 보배로 삼으려 하였다.

맑은 관직을 두루 거쳐서 한 시대에 벼슬살이 잘하는 것으로 알려졌었지만

고요하기가 소나무 아래에 있는 사람(세상을 피하여 은둔한 사람) 같았으니 어떠했겠나.“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연구 실장은

‘겸재는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조선 고유색을 현양하는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주도해간 장본인으로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고유화법으로 표현해 내게 하였고

그렇게 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 고유의 그림이 있음을 보여주어

후손들에게 영원히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잃지 않게 하였으니

마땅히 화성(畵聖)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이라 말하고 있다.

 

 

작품설명

 

 

1. <단발령망금강산도(斷髮嶺望金剛山圖)>

 

 

 

정선, <단발령망금강산도>,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중 1711년(36세)

 

현재 남아 있는 정선의 기년작(紀年作) 중 가장 이른 시기인 36세 때 그린 《신묘년풍악도첩》중의

한 장면이다. 단발령 고개에서 처음 금강산을 대면하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이곳에 오르는 사람마다 금강산의 풍모를 바라보면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고 싶어진다는 데서

단발령이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정선의 초기 화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2. <북원수회도(北園壽會圖)>

 

 

 

 

정선(1676~1759) <북원수회도(北園壽會圖)> 《北園壽會圖帖》1716년(41세) 개인 소장

 

1716년 가을에 서울 장의동(현재의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기슭에 있던 동네)

전 공조판서 이광적(李光迪, 1628~1717)의 집에서 이광적의 과거급제 60주년(回榜)을 맞이해서

북악산 및 인왕산 기슭에 거주하던 70세 이상의 노인들과 그 자손들이 모여서

장수를 서로 자축했던 모임을 그렸다.

마당 넓은 기와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주빈들은 잔칫상을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어린 손자들도 할아버지들 옆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당에서는 음식을 차리느라 분주한 가운데

손님들을 오셔온 가마꾼들로 잔칫날의 들썩임이 한껏 더하고 있다.

 

 

 

3. <삼승조망도(三勝眺望圖)>

 

 

정선(鄭敾), <삼승조망도(三勝眺望圖)>, 1740년, 개인 소장

 

정선이 활동한 인왕산과 북악산 지역에는 경관이 빼어난 한양의 명소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친숙한 삶의 터전이자 교유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정선은 이처럼 눈에 익은 경치를 특유한 구도와 화법으로 그려내어

한양 진경산수화의 전형을 이루었다.

이 작품은 정선의 나이 65세 되던 해,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대저택의 주인인 이춘제(李春躋, 1692~1761)가 후원의 정자인

삼승정(三勝亭)에 앉아 멀리 한양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을 그린 것이다.

화면의 주요 경물 옆에는 지명을 써 넣었다.

오른쪽에 ‘사직(社稷)’과 ‘인경(仁慶)’을, 왼쪽의 북악산 기슭에 ‘삼청(三淸)’과 ‘회맹단(會盟壇)’을,

그 앞으로는 석주만 남은 ‘경복(景福)’을, 멀리 원경에는 ‘관악(冠岳)’, ‘종남(終南)’, ‘남한(南漢)’을

차례로 써서 도성을 둘러싼 산세를 밝혔다.

 

 

 

4.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정선(鄭敾),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여산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북쪽에 위치한 명산이다.

중국의 이백(李白), 맹호연(孟浩然), 백거이(白居易) 등이 여산을 소재로 시를 지었으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여산 폭포의 장관을 노래하였다.

울퉁불퉁한 암벽의 질감을 정선 특유의 수직준(垂直皴)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전체적으로 필치의 방향이 수직적이어서 폭포의 물살이 세차게 떨어지는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5. <사공도시품첩>

정선이 중국 당 말의 시인인 사공도(司空圖, 837~908)의 시의 품격을 24가지로 논한 “시품(詩品)”을

그린 것이다. 그림 옆에는 당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시품의 내용을 적었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정선의 또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정선 그림, 이광사 글씨, <비개(悲愾)>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중, 1752년

 

 

 

 

정선 그림, 이광사 글씨, <호방(豪放)>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중, 1752년

 

 

 

6. <왜관수도원 소장 겸재 정선 화첩>

 

 

정선, <함흥본궁 소나무>《왜관수도원 소장 겸재 정선 화첩》중

 

함흥본궁에 있던 소나무를 그린 것이다. 

 

 

 

 

 

 

 

 

 

 

謙齋 鄭敾(1676-1759)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고유의 화법으로 그려낸 진경산수화를 창안하여

한국회화사에 새로운 전통을 세운 대가다.

조선왕조의 문예부흥기인 조선후기에는

조선 고유의 소재와 화풍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활발하게 그려지는데, 그 시작이 바로 겸재 정선이다

 

정선은 독창적인 화법과 시각으로 자연과 인간을 화폭에 담아낸 새로운 경지의 회화들을 창작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창작이 가능했던 배경,

즉 한양 인왕산 일대 명문가들의 문화창조와 향유, 정선의 교유관계의 조명을 통하여

정선의 예술세계를 살펴본다.

 

전시는 한양, 금강산, 영남지역의 진경산수화와 관념산수화, 고사인물화, 문학적 소재를 그린 그림

등으로 나누어진다.

 

정선이 나고 자라고 교유를 나눈 한양 이곳저곳,

금강산여행 후 담아낸 금강산의 명승지들을 정선의 진경산수화로 만나본다.

주요작품으로는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36세 작),

손창근 소장 <비로봉(毘盧峰)>과 인왕산 기슭에 세거하던 명문가들의 문화적 교류상을 보여주는

《북원수회도첩(北園壽會圖帖)》(41세작),

간송미술관 소장 <청풍계(淸風溪)>(64세 작),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사직송(社稷松)> 등이 전시된다.

이 중에서 《신묘년풍악도첩》은 14점이 모두 전시되며

《북원수회도첩》과 <비로봉>은 일반에 최초 공개되는 등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선보인다.

 

정선 회화의 또 다른 경지는

중국 唐말의 시인 사공도(司空圖, 837-908)의 시론(詩論) 22가지를 그림으로 구현한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74세 작)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 서화첩은 시의 품격(品格)을 논한 시론을 소재로 한 것으로

당시의 회화제작과 감상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아울러 1925년 독일인 신부 베버(Norbert Weber, 1870-1956)에 의해 건너가

독일 성 오틸리엔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다가 2006년에 반환된

왜관수도원 소장 《겸재 정선 화첩》은 10월13일부터 공개된다.

- 이혜경(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 박물관신문, 2009년 9월호(vol.457), 국립중앙박물관

 

 

 

 

 

 겸재 정선 1, 2, 3

 
외길 선비의 조선왕조 회화사 결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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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 현암사, 2009년

저자는 겸재의 화풍이
우리 땅, 우리 산하를 그려내는 조
선 고유화법의 창안이라고 자리매김했다.

간송미술관의 가을 전시회가 시작됐다.
시민의 축제다.
한 해 두 번 전시회로 자연의 순환을 실감하곤 한다.
이번은 ‘도석화(道釋畵) 특별전’.
 
가헌 최완수 선생은 1966년 스물넷의 나이에
간송미술관으로 ‘출가’한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찍이 겸재 정선의 가치를 알아보고
국립중앙박물관보다 더 많은 161점의 작품을
수집했다. 연구는 마음 맑고 눈 밝은 후학의 몫.
1971년 가을, 간송미술관은
첫 번째 전시로 ‘겸재전’을 열었다. 40년이 걸렸다.
200자 원고지로 3673장, 겸재도판 206장,
국배판 변형으로 1370면, 책으로도 세 권이다.
평생 외길을 걸어온 고고한 선비의,
치열한 수도승의 ‘진신사리’이자
조선왕조 회화사의 결정판이 바로 <겸재 정선>이다.

저자인 최완수 선생은
“문화를 식물에 비유할 때 이념이 뿌리라면
예술은 꽃”이라 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조선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만이
우리 전통 문화의 맥락을
제대로 이어 놓는 것이라는 생각”은
조선시대 전반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고,
미술사로 귀결됐다.
 
저자는 표암 강세황이 <겸재화첩> 발문에서
“겸재가 동국진경(東國眞景)을 가장 잘 그렸으니”라고 한 용어를 대중화, 학문화하여
조선 후기는 ‘진경시대’, 조선 후기의 문화는 ‘진경문화’,
그 시절의 산하를 사생해 낸 그림은 ‘진경산수화’로 각각 호명했다.
뿌리는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이 곧 중화(中華)라는 조선중화주의가 있었다’고 보았다.
근거로서의 ‘조선중화주의’를 둘러싼 학계의 논의는 여전하다.
저자는 “겸재가 노론을 배경으로 하는 선비화가이고
그의 그림은 조선 성리학의 정통론을 고수하던 노론의 후원을 받으면서 형성된 것으로
조선중화주의의 영향”이라는 입장이다.
 
반론은 “저자의 설이 율곡 이래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를 작위적으로 강조한
연역적 이론이며, 예술 외적 요인을 배제한 견해”라는 입장이다.
넓게는 한국사관, 좁게는 조선시대 미술사의 큰 흐름을 저자가 되돌려 놓은 데서 비롯되는
필연적 논쟁일 것이다. 저자는 시대에 대한 조명과 함께 겸재의 그림을 체계화하고 재해석했다.

“중국 북방화법의 특징적 기법인 선묘(線描)와 남방화법의 특징적 기법인 묵묘(墨描)를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방법이었다. 화강암봉으로 이뤄진 골산인 경우 북방화법인 선묘로 표현하고,
수목이 우거진 토산인 경우 남방화법인 묵묘로 표현하면서
한 화면에 이 두 가지 산의 모습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을 화면 구성의 기본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저자는 겸재의 화풍이 골산은 양이고 토산은 음으로,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주역>의 음양조화 원리에 맞춘 화면 구성법이라고 했다.
이는 중국인들도 미처 해결하지 못한 남북방화법의 이상적 조화라고 했다.
우리 땅, 우리 산하를 그려내는 조선 고유 화법의 창안이라고 자리매김했다.
이로써 조선 후기는 새롭게 되살아났다. 조선왕조판 르네상스였다.
비로소 겸재는 저자의 연찬에 의해 화성(畵聖)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참된 깨달음은 깊은 산속 법당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세간에 있다고 했다.
저자는 간송미술관으로 들어간 이래 한평생 여일하게 풀 먹인 한복을 입고
그곳에서 먹고 자며, 연구하고, 가르친다. 겸재에게는 진경산수화풍의 영향을 받은 겸재파가 있었다.
혈연조차 없는 저자에게 문파가 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저자가 책의 서문에 문하생들의 이름을 꼬박꼬박 적었다.
얼마 전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여전히 홍안인 저자가 감사의 인사를 했다.
특별히 문하생들에 대해 고맙고 자랑스럽다는 인사를 했다. 그래서 역사는 계속된다. 

겸재뿐 아니라 조선왕조 문화사는 저자에게 큰 빚을 졌다.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누군가에 의해 저자의 학문적 성취가 환하게 조명될 날이 올 것이다. 확신한다.
- 최재천<변호사> cjc4u@naver.com
- 2009 10/27   위클리경향 8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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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아름답다 - (3) 회화 : http://blog.daum.net/gijuzzang/3784288

 

●<겸재화첩>과 선지훈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