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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광화문 연가(年歌) - 시계를 되돌리다 展

Gijuzzang Dream 2009. 8. 1. 01:07

 

 

 

 

 

 

 

광화문 年歌 - 시계를 되돌리다

 

2009-07-30 ~ 09-20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광화문 연가(年歌) : 시계를 되돌리다 '

 

 도성대지도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The Great Map of seoul)

18세기 후반, 180×213, 서14165
18세기 서울 모습을 그린 지도이다. 한성부의 5부와 도성삼군문의 분계가 표시되어 있고,

육조를 비롯한 각 관청의 위치가 나타나 있어 행정지도에 군사지도를 겸한 것으로 보인다.

 

 

 

○ 도입부 -  ‘시간역전’

광화문 발굴 지층 이미지를 통해 광화문에 쌓인 600년 세월의 두께를 보여준다.

 

○ 1존 -  '조선의 주작대로' 육조거리를 거닐다

세로 12.0m, 가로 3.5m의 대형 모형을 통한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원형을 보여주고,

한양정도와 육조거리의 형성 및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 2존 - 광화문 사라지고, 조선총독부 우뚝서니

세로 9m, 가로 3.5m의 대형 모형을 통해

일제강점기 훼손되고 왜곡된 광화문 풍경을 보여준다.

또한 각종 박람회나 관광 자료를 통해서

일제식민정부가 그들의 통치를 선전하고 홍보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 3존 - 전쟁과 혁명… ″광화문으로, 광화문으로″

해방과 건국,  6․25 전쟁과 복구과정,  4․19시민혁명까지

광화문을 서로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힘겨루기 장면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역사의 중심무대로서 광화문의 지역적 특성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 4존 - '화려'와 '남루' 사이에서

콘크리트 광화문복원, 이순신장군동상 설치, 세종문화회관 건립 등 경관 변화,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공론의 장으로서 광화문,

그리고 사직골 대머리집(명월옥) 외상장부와 이를 재현한 영상 등에 전시된다.

 

○ 5존 - 광화문의 주인은 누가인가

88올림픽 이후 조선총독부 철거, 지구의 날, 밀레미엄2000, 월드컵응원, 촛불시위 등

국가의 공간에서 점차 시민의 광장으로 전이되고 있는 광화문의 모습을 살펴보며,

새로 조성되는 광장이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드넓은 ‘광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에필로그 - 광화문 정경(情景), 우리 삶의 기억

정해창, 임인식, 성두경, 현일영, 이형록, 한정식, 한영수, 주명덕, 전민조 등

9명의 사진작가가 바로 본 광화문의 정다운 풍경들을 전시한다.

 

 

최근 도심재개발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오래 된 광화문 일대 경관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다.

낮선 이름의 빌딩들이 들어서는 대신,

그 자리에 있던 한때 광화문의 명소로 이름나 있던 뒷골목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아직 남은 청진동의 청일집, 열차집, 대림집도 재개발의 삽질이 발치를 파고들어 곧 사라질 운명이다.

역설적이게도 재개발로 점점 사라져가는 현재의 모습 바로 아래 지층에서는

옛 집터와 상가점포, 완형의 백자항아리, 깨어진 자기편, 기와조각 등 과거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다. 이는 현재가 그냥 현재가 아니라 오랜 시간의 축척임을 말해주고 있다.

 

‘광화문 연가(年歌) : 시계를 되돌리다’전은

광화문에 ‘광장’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지층이 하나 더 쌓이는 것을 계기로

지난 600여년 동안 그 장소에서 펼쳐졌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되짚어봄으로써

우리가 남기고 보존해야할 광화문은 무엇이며,

또 함께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광화문은 어떤 모습인지 고민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1890년대(상) 및 일제강점기 광화문(하) (12.0m×가로 3.5m, 한국전통문화학교 소장)

1890년대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포함한 광화문 일대의 모습을 재현한 세로 12.0m×가로 3.5m의 대형 모형과 일제강점기 광화문 일대의 모습을 재현한 9.0m×가로 3.5m 대형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광화문의 원래 모습과 이것이 일제강점기 어떻게 훼손되고 왜곡되었는지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다.

 

 

 

 

 

 

 

 

Map of Seoul 이미지 

 

  

  

 

 

 

 

 

 

 

 

 

 

 

광화문 육조(六曹)거리 / 조선 초-중기-구한말 3개 지층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이순신장군 동산 뒤편에 모습을 드러낸 육조거리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 광화문광장 조성 공사 중 

조선시대 주작대로인 육조거리 흔적이 발견돼 본격 발굴 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14세기 조선 건국 당시의 최초 육조거리부터 20세기 초 거리까지

온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서울 중심에서 조선 왕조 600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타임캡슐’이 베일을 벗은 것.

 

그동안 육조거리는 19세기 이후의 문헌과 지도로만 알려졌다.

이 유적의 지층은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 숙정) 발굴단은

거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층이 구분된 것으로 봤다.

유적을 파 들어가자 조선 초∼말기의 도자기 파편이 발견됐다.

도자기와 조개, 뼈 등의 폐기물로 흙길을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단은 흙길을 다질 때 사용한 시대별 도자기 파편을 근거로

육조거리 층을 19∼20세기(구한말∼일제강점기), 16∼18세기(임진왜란 전후),

14∼15세기(조선 건국 시기)로 구분했다.


최초의 육조거리로 보이는 유적은 지하 3m에 있었다.

그 1.5m가량 위에는 16∼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바닥면이 있었다.


           

육조(六曹)거리


 

광화문의 상업지구 이미지 

 

1395년 정도전이 태조의 명을 받고 조성한 거리로,

경복궁 광화문 좌우에 의정부, 한성부, 병조, 형조, 형조 등 관아가 배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관아가 화재 피해를 입었으나

19세기 대원군 때 본격 재건됐다.

 

'육조거리(관아거리)'는 일제강점기 1914년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6년 10월1일 세종대왕의 탄생지(잠저)인 준수방(현재 옥인동)에서 멀지 않다 하여

'광화문통' 일대를 '세종로'라 개칭하였다. 

 

이 길은 총길이 600m, 도로폭 100m로 한국에서 가장 넓은 길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에도 현재와 같이 넓은 길이었으나

1912년 일제의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京城市區改修預定計劃) 및

1936년 조선총독부 고시에 따라 가로폭을 30간(약 53m)으로 축소한 것을

1952년 3월 현재의 노폭으로 변경했다.

1966년 폭 29m, 연장 550m 구간을 35,000천원을 들여 확장하였고

또 세종로지하도(폭 9m, 길이 170m)를 시설하여 보행인은 지하로 횡단이 가능케 했다.

 

1971년 또 하나의 지하보차도(地下步車道)로 前경제기획원 앞 지하도가 시설되었는데

폭 12.5m, 길이 207m이다.

1976년에는 세종문화회관 앞에도 지하도가 시설되어

시청쪽에서 온 차량이 광화문 앞까지 오지 않고 중간에서 유턴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1984년 11월7일 가로명(가로명) 제정할 때

세종로 사거리와 중앙청을 각각 기점과 종점으로 정했다. 

- 2008.1.16  동아

 

 

 

5․ 60년대 사회저명인사들의 외상술 장부(조성현 소장)

6․ 70년대 광화문 명소의 하나였던 ‘사직골 대머리집’의 외상장부로 모두 3권이 전시된다.

이것은 당시 술집의 풍속도와 외상문화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정식 상호는 ‘명월옥(明月屋)’.

'대머리집'은 사장이었던 김영덕 · 이종근씨의 머리숱이 적어 손님들이 붙여 놓은 애칭이다.

 외상장부는 1950년대 말부터 62년까지 ‘외상 고객’들의 소속 기관, 이름, 날짜, 외상값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외상장부 속에는 지금은 저명인사가 되어 이름만들어도 알 수 있는

정관계인사. 교수, 언론인, 문인 등의 이름이 실려 있다.

 

 60ㆍ70년대 광화문 뒷골목 청진동, 당주동, 도렴동, 사직동 일대에는 크고 작은 술집들이 많았다.

이 술집의 연원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배후지역은 술집과, 기방, 도박장 등이 일집한 유흥가였다.

이 유흥가 주고객은 육조, 한성부, 포도청 등에서 실무를 맡고 있는 서리(胥吏)나, 군관, 시전상인들이었다.

이 술집들은 일제강점기, 해방이후는 물론이고

80년대 도심재개발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광화문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었다.

광화문 술집들의 주메뉴는 막걸리나 소주에 생선찌개와 구이, 묵무침, 두부구이 등을 안주로 한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광화문의 명소로 자리 잡게 한 영업 비결은

저렴한 술값과 주인자의 넉넉한 인심, 그리고 주인과 손님의 무언의, 무한한 신뢰에 바탕한 외상거래 등을

통한 많은 단골의 확보였다.

이 술집들의 단골손님은 공무원, 기자, 문인, 방송인, 은행원, 교수, 교사,

부근 사무실에 근무하는 샐러리맨 등 이었으며, 이곳은 곧 이들의 사랑방이요, 정보교환소였다,

당시 꽤소문난 술집으로는 청진동에 청일집, 열차집, 대림집 등이 있었으며,

당주동, 사직동에는 고항집, 대머리집 등이 있었다.

 

대머리집 외상장부의 외상내역을 기록한 장부를 살펴보면
● 작성시기는 1950년대 말부터 1962년 사이이다.
● 장부는 펜이나 연필로 깨알 같은 글씨로 매우 꼼꼼하게 적었다.
● 작성방법은 가는 펜으로 먼저 기관명을 쓴 다음, 사람 이름을 쓰고,

그 아래로 사람별로 외상금액을 쓰고 외상을 갚은 경우 ‘×’표시를 하였다.

즉 장부를 기관이나 인명으로 먼저 분류하고 인명 아래 날짜별로 외상 내역을 정리하였다는 것은

단골손님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수록된 기관은 총 71개 기관으로
- 경제기획원, 문교부, 서울시청 등 공공기관 25개소
-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양방송, 문화방송 등 언론기관 22개소
-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학교 16개소
- 조흥은행 등 금융기관과 기타 4개소이다.
● 장부에 수록된 사람은 약 300명, 연인원으로 약 700~800명 정도 된다.
● 이중 이름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정계, 학계, 문인, 기자, 방송인 등 사회저명인사들도 많은데,

대부분은 당시에 신문이나 방송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 집을 드나들었다.

이는 당시 광화문에 신문ㆍ방송사가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대머리집이 언론계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했음을 보여준다.
● 술값은 대부분 1천환에서 3천환이며 1천환 이하도 많다.

1만환이 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혼자 먹었다기보다는 회식을 하였거나 여러 사람이 함께 먹고,

한 사람 이름으로 외상을 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1961년에 10환을 1원으로 액면(額面)절하(切下) 하였으므로 1000환은 곧 100원이 된다.

1963년 물가는 쌀 80kg 한 가마니 3000원, 자장면 15원이었다.

(《기록으로 보는 생활사》, 2007, 국가기록원)

● 기타 재미있는 내용으로는
- 외상값을 할부로 갚게 한 점(총액 밑에 부분변제금액을 날짜와 함께 기재)
- 미수금이 있거나 뚜렷한 직장이 없어도 외상을 줬다는 점
- 이름 대신 ‘필운동 건달’, ‘대합조개 좋아하는 人’ 과 같이 이름 대신 손님의 인상착의나 습관을
기재하기도 하였다는 점이며,
- 외상장부 내역을 추적하면 개인이 직장을 옮긴 경로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예) 공석하 : 국도신문 → 민족일보 → 경향신문
● 주인이 넉넉한 인심으로 외상을 준 만큼 술을 마신 손님도 착실히 술값을 갚았던 것으로 보인다.

간혹 미수금도 있으나 이것은 장부의 전후 내용으로 볼 때 의도적으로 갚지 않았다기보다는

손님이 갑자기 먼 곳으로 직장을 옮겼거나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직골 대머리집의 옥호(屋號)는 ‘명월옥(明月屋)’이나 ‘대머리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대머리집이 영업을 시작한 것은 1910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먼저 김영덕(金永德)씨가 5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고,

그의 사위되는 이종근(李宗根, 당시 56세)씨가 대를 이어 받아 약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였다.

 (〈선데이 서울〉, 제11권 39호, 통권515호, 1978. 10. 1 발행).

이 대머리집은 이종근씨 이후 더 이상 대를 이를 사람이 없어

1978년 10월 15일 70년 여 년의 역사의 막을 내렸다.


광화문 사직골 대머리집의 외상장부는 당시 이 집 단골의 한 사람이었던 극작가 조성현(趙成賢)씨가

대머리집 주인 이종근씨로부터 전해 받아 지금까지 보관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사직골 대머리집의 외상장부는 당시 광화문 뒷골목의 풍속도와 함께 신용문화의 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법제화된 제도나 규범 없이도 주인과 손님의 보이지 않는 신뢰와 외상장부 하나로

신용사회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오늘날 단 하루 만 연체되어도 이자가 붙고, 전화공세에 시달려야하는

각박한 신용카드 사회와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사직골 대머리집에서 볼 수 있듯이 TV, 인터넷이 없던 시절 5ㆍ60년대 광화문 뒷골목 술집들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문화의 사랑방이었다. 문화인, 언론인, 학자, 관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장소였다. 몽마르뜨의 카페에서 피카소와 같은 입체파가 탄생하고,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사르트르, 보브와르와 같은 실존주의가 생겨났으며,

실리콘 밸리의 맥주집에서 첨단기술연구단지가 출발되었듯이…….

 

 

1960~70년대 푸짐하면서도 저렴한 메뉴로 사랑을 받았던 서울 광화문의 ‘대머리집’ 외상 장부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공개됐다.

 

모두 3권으로 된 이 장부 중 한권은 손님들의 외상내역을 기록한 장부이며,

다른 두 권은 수금을 위해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작성된 것.

수금을 맡은 이 사장과 그보다 열 살쯤 많은 처당숙이 월급날에 맞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방향을 하나씩 맡아 외상값을 걷으러 다녔다고 한다.

가는 펜으로 기관명을 적은 다음, 사람이름을 쓰고,

그 아래엔 사람별로 외상금액을 쓰고 외상값을 갚을 경우 ‘☓’ 표시를 해 놓았다.
단골손님이 그 만큼 많았다는 것인데,

실제 외장장부에 이름이 오른 사람만 해도 3백명, 연인원으로 700-800명에 이른다.
장부에 수록된 기관도 당시 경제기획원과 문교부, 서울시청 등 공공기관을 필두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대학 16곳, 그리고 은행과 언론 등 모두 71개 기관에 이른다.
당연히 이곳은 광화문 일대 공무원, 문인, 기자, 방송인, 교수 등의 사랑방이자 정보교환소 역할을 했다.

 

시인 조지훈이 낭만을 얘기하고, 진념 전 부총리가 조국을 얘기하던 곳.

최불암 등 연기자들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론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다 외상을 달고 나가던

‘사직골 대머리집’이다. 정식 상호는 ‘명월옥(明月屋)’.

주인의 숱 없는 머리를 ‘공산명월(空山明月)’에 빗대 단골들은 ‘대머리집’으로 불렀다.

가게가 문 닫을 당시 대머리집 사장 이종근씨는 물론이고

그에게 가게를 물려준 장인(고 김영덕)도 모두 이마가 훤했다고 한다.
 

이날 공개된 외상장부는 총 3권으로 서울시청, 경제기획원 등 공공기관, 서울신문 · 동양방송 등 언론사,

서울대 · 연세대 등 학교, 금융기관에 일하던 사람들이 외상을 ‘긋고’ 갔다.

장부에는 서울신문의 남재희 전 국회의원, 박성용 시인, 조선일보의 손세일 전 국회의원,

고 이규태 · 고 정영일씨, 동아일보의 최일남 작가 등 300명 정도의 이름이 적혀 있다.

'대합조개 좋아하는 人'  ’필운동 건달’ 등의 별칭으로 적힌 경우도 더러 있다.

   

장부에는 반가운 이름도 다수 눈에 띈다.

연기자 박근형 · 백일섭 · 이순재 · 최불암 · 변희봉 · 오지명이 ‘풋기 연기’를 할 때 이 곳에서

인생을 배워갔고 성우 배한성과 MC 황인용이 삶을 배워가며 외상 장부에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 이경식 · 진념(전 부총리), 조지훈 · 최일남(문인), 이구열(미술평론가), 장일남(작곡가),

김대벽(사진작가)씨가 서글서글한 눈빛을 돈 대신 건네며 외상술을 마셨다.

 

 

 

 

 

술값은 대부분 천환-3천환(백원-300원) 정도.
가끔 1만환이 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혼자 먹었다기 보다는 회식을 했거나 여러사람이 함께 먹고,

한 사람 이름으로 외상을 단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초반 자장면 한 그릇이 15원, 80㎏ 쌀 한 가마니가 3000원 수준이었다.

이외에도 외상값을 할부로 갚는 것도 가능했고, 미수금이 있거나 뚜렷한 직장이 없어도 외상을 주는 등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이가 대부분이기에 손님들의 부탁 한 번이면 인심좋은 주인은

이름과 금액을 외상 장부에 적어놓기만 했다. 끝까지 돈을 갚지 않아 돈을 떼이는 경우도 다반사였지만

그래도 주인장은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외상 인심’을 베풀었다.

 

"광화문 일대에서 일하던 언론인들이 교유(交遊)했던 문화 사랑방으로

심지어 특종기사까지 나눠 가졌을 만큼 정감 어린 곳이었다"고 조성현씨는 회고했다.

백일섭(탤런트)씨는 "그곳 손님들이 주로 나이 지긋하고 공부 많이 하신 진정한 애주가들이어서

당시 어린 축이었던 나로선 괜스레 주눅 들고 엄숙해져 목소리도 크게 못 냈다"며

"훌륭한 작품들이 태동한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6․70년대 광화문 뒷골목 청진동, 당주동, 도렴동, 사직동 일대에는 크고 작은 술집들이 많았다.

이곳 술집들의 연원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곧장 송교(松橋, 현재 광화문네거리 서북쪽)로 가면 협소(俠少)들이 많으니

창가(娼家)는 아마 육조(六曹) 앞에 있으렸다”와 같은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배후지역은 술집과 기방, 도박장 등이 밀집한 유흥가였다.

당시 꽤 소문난 술집으로는 청진동 청일집, 열차집, 대림집 등이 있었으며

당주동과 사직동에는 고향집, 대머리집 등이 있었다.
이 술집들의 주 메뉴는 막걸리나 소주에 생선찌개와 구이, 묵무침, 두부구이 등을 안주로 한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술집들이 광화문의 명소로 자리잡게 한 비결은

저렴한 술값과 주인의 넉넉한 인심,

그리고 주인과 손님의 무언의, 무한한 신뢰에 바탕한 외상거래 등을 통한 많은 단골 확보였다.


주고객은 육조, 한성부, 포도청 등에서 실무를 맡고 있는 서리(胥吏), 군관, 시전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벼슬은 높지 않으나 만만찮은 권세와 부를 누리면서 뒷골목 술집 등을 휩쓸고 다녔다.

이 술집들은 일제강점기, 해방이후는 물론이고 80년대 도심재개발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광화문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었다.

'명월옥(明月屋)' 상호를 가졌지만 대머리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대머리집은 

현재 사직공원 맞은편인 ‘풍림스페이스본’ 아파트 자리에 있던 술집으로

방 2개와 마당에 술상을 볼 수 있어 손님 50명이 빼곡히 찰 수 있는 한옥 구조였다가

이후 콘크리트로 개조됐다고 한다.

대머리집은 후한 외상 인심으로 장안에서 유명했다.

손님이 가게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으면

가로 60㎝, 세로 40㎝의 흑판에 하얀 분필로 쓴 메뉴판을 주인이 들이밀었다.

메뉴는 조개탕 · 파전 · 동그랑땡 · 빈대떡 · 꽁치구이 · 은행 · 호박부침 등이었다.

영업을 시작한 것은 1910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먼저 김영덕씨가 50년 동안 운영하고, 사위 이종근씨가 대를 이어받아 약 20년동안 운영했다.

대머리집은 70년 넘게 대를 이어오며 광화문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오다

이종근씨 이후 더 이상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 1978년 10월 5일 문을 닫았다.


이 외상 장부는 당시 단골이던 극작가 조성현씨가 식당 주인에게 전해받아 보관하던 것인데,

조성현씨는 "희귀 민간 상업사(史)로서 가치가 있다고 여겨 '이 형, 끔찍하게 보관해 주시오'라고

무례하게 주문하곤 했는데 이종근씨가 이민을 가면서 고맙게도 내게 분양해줬다"고 말했다.

당시 조덕송 · 이원홍(언론인)씨도 장부에 탐을 내면서 경쟁에 불붙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서울역사박물관측은 명월옥 사장 후손들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 일간신문 등에서 정리

 

 

 

 

 

외상장부 속 철학
 

1960년 전후 광화문 뒷골목 술집의 외상장부가 어제부터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공개되고 있다.

'사직골 대머리집'의 장부는 총 3권인데, 그 중 검은색 하드커버에 옆면이 붉은 색으로 칠해진

속칭 '떼놈장부'가 특히 눈길을 끈다. 200~300장에 달하는 이 장부를 깨알 같은 글씨로 다 메웠으니

그 집의 명성을 알 만하다. 일반 주점의 장부는 대부분 어른 손바닥 만한 크기에 20~30장짜리로,

한 쪽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몽당연필과 함께 출입구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덜 취했을 경우 손님 스스로 금액을 써넣기도 하고, 만취했을 땐 주인이 알아서 기록했다.

1970년대 대학가 술집의 외상장부가 공개됐던 적이 있었다.

10여 년 전 서울대 근처 '일미집' 얘기였는데, 이 경우는 장부가 아니라 '학생증 묶음'이었다.

동숭동 시절부터 관악산 시절까지, 종이학생증에서 비닐학생증까지 100여 장이 공개됐다.

뒷면에 연필이나 색연필로 술자리 기록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렇게 학생증이 술집에 보관돼 있다는 것은 결국 술값을 떼어먹었다는 얘기인데,

유명인사도 많았으나 누구도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서울대 근처 일미집과 쌍벽을 이뤘던 녹두집,

고려대 앞 고모집 총각집, 연세대 인근 보은집 개성집 등도 마찬가지였다.

술집 외상장부의 묘미는 떼어먹는 데 있다.

처음 가서 외상을 트고, 다음에 가면 이전 것을 계산하고 다시 외상을 달아 놓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다.

단골이 되어 거래가 이어지면 결국 한번의 술값은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묘미는 남이 대신 갚아주는 데 있다.

한국일보의 예를 들면, 신문사 근처 여기저기에 기자들의 외상장부가 매달려 있었을 시절

사주나 회사 간부가 이들을 몽땅 회수하여 대리결제를 해주곤 했었다.

퇴근 후 술자리까지 감시 당하는 듯한 부작용(?)이야 있었겠지만 외상장부가 갖는 미풍양속의 하나였다.

이런 묘미는 신용카드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마이너스통장과도 연결된 신용카드는 업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관리하는 현대판 외상장부다.

대머리집의 장부나 일미집의 학생증은 매달 통보되는 사용내역서로 변했다.

떼어먹으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사회생활이 차단되고, 대리결제는 법인카드로 통제된다.

외상장부는 지출과 동시에 기록되지만 신용카드는 사후에 통지가 오니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 먹는다'는 속담에 더 가깝다.

'외상 대란'이라는 말은 금시초문이나 '카드 대란'으로 경제가 휘청거린 적은 있었다.

외상장부에는 지혜와 철학이 담겨 있었다.

- 정병진 논설위원 [지평선]

- ⓒ 인터넷한국일보,  2009/07/31

 

 

외상장부

1960 · 70년대 동네 가게마다 허름한 공책이 늘상 걸려 있곤 했다.

시골의 점방도, 도시의 점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름아닌 외상 장부이다.

물건을 집어들곤 ‘달아 놓으라.’는 한 마디만 남기면 됐다.

장부에 적었다가 대개 한달 단위로 몰아 결산하는 외상. 가게주인도 손님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던 그 거래는 지금 생각해도 흥미롭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주머니가 조금씩 두둑해지면서 사라져 간 우리의 추억속 외상 장부.

지금이야 신용카드 영수증쯤이 대신한다고 할까. 신용카드도 따져 보면 외상은 외상이니.

‘달아 놓으라.’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가게주인이나 손님이 함께 무탈하게 웃었던 거래.

40대를 넘긴 중·노년층이라면 그 외상 장부를 가끔씩 떠올리지나 않을까.

 

1980년대 중반쯤만 해도 서울 도심의 광화문, 무교동에는 외상이 통하는 허름한 술집들이

몇몇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달아 놓고 먹는’ 술집들이었다고 했다.

술집이라야 맥주 막걸리에 파전 북어포 따위를 파는 집.

주인이 없어도 먹은 내역과 이름만 어딘가에 적어 놓고 가면 그만이었다.

일종의 외상 장부인 셈이다. 그런 집들에 주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밤을 꼬박 새우는 올빼미족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거의 잊혀진 채 몇몇 사람만 기억할 추억의 외상 술집 하나가 화제다.

1910년 이전부터 1978년까지 사직동에 있었던 명월옥이란 집.

외상 먹은 사람 300여 명과 외상 내역을 촘촘히 적은 장부 3권을 서울역사박물관이 찾아냈다.

주인장의 머리숱이 적어 대머리집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는데.

신문기자며 문인, 공무원, 탤런트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인사들이 장부에 수두룩하단다.

지금이나 그때나 단골 외상은 여전한가 보다.

외상 장부에 1950년대 말부터 12년동안의 외상 내역이 깨알같이 적혔는데, 같은 이름이 숱하다고 하니 따져 보면 외상손님 버선 발로 뛰어나가 반길 술집 주인이 어디 있을까.

인정 어린 외상 거래의 바탕은 분명 믿음이다.

40년 전쯤 우리 동네에 흔했던 외상 장부가 그랬듯이 오늘 어디서 외상 장부를 하나 만들어 볼까.

-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2009-07-30, 서울신문[씨줄날줄]

 

 

 

 

김지하의 〈구리 이순신〉 가리방 대본(김석만 소장)

〈구리 이순신〉은 1971년 4월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졸업생이었던 김지하가 쓰고 연출한

희곡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장군을 세종로에 세워 둔 것을 비판한 것으로

교련반대, 부정선거 규탄, 언론자유수호 시위 중에 준비하였던 공연이었으나

휴업령으로 인해 무대에 올리지는 못하였다.

이 작품은 김지하가 오스카 와일드의〈행복한 왕자〉에서 희생의 모티브를 따 와서 쓴 것으로

대본은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2학년으로 문리대 연극회(회장 임진택, 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 총무였던 김석만(현 서울시립극단장)의 주도로 만들었다.

겉표지는 김석만이 만들고,

속지는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독문과에 재학 중이었던 한광조가 만들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방한 준비

1952,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을 준비하는 중앙청의 풍경으로

군인이 옥상 위에서 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다.

군일들이 2겹으로 경비를 하고 광화문 해태가 중앙청 안으로 들어와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경기도청이다.

 

 

 

 

옛 광화문 모습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광화문 모습이다. 앞에 월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40년전 광화문 복원기공식(정부기록사진집)

 

 

 

 

세종로에 이런 일이(정부기록사진집 수록)

세종로 중앙분리대에 설치된 조각작품을 시민들이 관람하고 있다.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광화문 뒷골목 명소들(교보문고 뒤) (서울역사박물관 촬영)

 

 

 

 

30년 전 광화문 신문로 일대(1977.8)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멀리 안산이 보이고 그 다음은 경희궁, 구세군회관, 대한교육회관 등이 보인다.

 

 

 

 

30년 전 세종문화회관 뒤 당주동 일대(1977.8)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오른쪽 아래 짓고있는 건물이 세종문화회관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광화문 연가(年歌)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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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상징거리 주작대로(육조거리)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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